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장석훈 옮김 / 판미동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도 화를 냈을까?
포르피리오스의 <철학자들의 이야기>에서 소크라테스는 분노의 격정에 사로잡히면 그의 추함이 못 봐줄 정도며, 그가 말과 행동을 가리는 법이 없었다고 고발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서 "종종 뭔가를 파고들어 갈 때면 그는 핏대를 세워가며 논쟁을 하거나, 주먹 으름장을 놓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고 했다.

예수는 한술 더 떴다.

예수는 자신을 배척했다는 이유로 가버나움 마을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저주했다. 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을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내쫓고 환전꾼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매대를 엎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가 알고 있던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인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붓다는 어땠을까?

불교 문헌에 따르면 붓다는 "자신을 완벽히 다스릴 줄 알며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공명정대한 사람이며 어떤 욕망, 갈망, 혐오, 애착도 여타 다른 감정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붓다는 스스로 진흙 속에 피어난 붉은 연꽃으로 비유했다.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지은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에 소개된 그들의 성품 중 일부이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화를 낼 때는 사람들이 앎을 거부하거나 왜곡할 때였고, 예수는 사제들이 위선과 전횡을 일삼고 율법주의에 빠지거나 종교를 통해 장사를 할 때 화를 냈다. 그것은 그들이 분노를 통해 자신의 소명을 향한 열정을 드러낸 것이다. 책은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면서 현대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라는 제목만 놓고 보면 지레 겁먹고 책장을 펼치지 못할, 혹은 술자리에서는 정치와 종교를 화제로 삼으면 안된다는 불문율 중의 하나로 보이는, 혹은 어려운 종교, 철학의 용어들이 듬뿍 담겨져 무거워 보이는 책으로 오인될 법하다. 저자는 그들의 철학과 종교 같은 딱딱하고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며 그들이 우리 시대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서로 뚜렷하고 강한 개성의 세 스승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것은 진리이며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통해 자유로워지는 존재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가 추구한 진리는 각각 '정의', '사랑', '자비'이다. 이 세 키워드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왔고 앞으로도 유효한 키워드라 할 것이다.

자식에 기대지도 말고 네 인생에 기대지도 마라. 그 무엇도 정의 위에 두지 마라. 그래야 저승에 갔을 때 그곳을 다스리는 이들 앞에서 너 자신을 변론할 수 있을 것이다.
- 소크라테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한다. 내 사랑 안에 머물도록 하여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깃들고 너희 기쁨이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예수

모든 존재는 다 행복하라. 약하든 강하든 잘났든 중간치든 혹은 못났든 작든 크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태어난 것이든 태어날 것이든 모두 다 남김없이 행복하라.
- 붓다

두번의 세계 대전을 치루고, 사회주의는 실패하고, 자본주의마저 길을 잃은 지금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고대에서 현대까지 세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이 바뀌었을까. 종교와 철학은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과학이 모든 해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커다란 오판이었는지도 모른다. 프레데릭 르누아르라는 프랑스의 지성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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