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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내게 소설을 묻는다면 - 대학교수, 작가, 예술인 50인이 선정한 최고의 소설
장성수.문순태.김춘섭.송하춘.함한희.이남호.정도상 외 43명 지음 / 소라주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학창 시절 책을 좋아는 하지만 즐겨있는 편은 아니었다. 이야기라는 형식은 그나마 책 속으로 들어가기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소설을 주로 읽었던 것 같다. 그나마도 학업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의 맛보기 이상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햇지만.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책과는 점점 멀어졌었다. 그뒤로는 왠지 울적하면 에세이 같은 감성적인 책을 읽거나, 앞으로 내달리기 위한 자기계발서 정도가 독서의 전부였다.
정말 아득하게 멀리....소설은 나의 일상에서 사라져갔다. 딱히 왜 내가 소설을 멀리하게 되었는 지는 모르겠다. 소설을 이해하는 것이 힘이 들어서였는지 아니면 소설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어려워서였는지.
어쩌면 그 속의 이야기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였을 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인물과 사건, 갈등... 그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을 헤쳐나가는 것도 버거운데, 그 수많은 인물들의 그것도 가상의 이야기가 도대체 나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있는 일도 해결하기 바쁜데, 작가의 머릿 속에서 나온 픽션의 상황까지 고민하고 아파할 여유가 없었는 지도 모르겠다. 근사하게 포장을 한다면. 책 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던 나에는 몇 시간을 꼬박 바쳐야 하는 시간 낭비로도 생각되었던 것 같다. 책을 별로 읽지 않았으니 고르는 안목도 없었을 것이고, 많은 부분 실패를 했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도 소설을 선호하지 않는 습관이 남아 있고, 이제 그 습관은 굳어져 버린 것 같다. 책을 선택할 때 소설이 거의 위시리스트에 담겨지지 않는 것을 보면.
글을 쓰다 보니 이유가 어렴풋하게 윤곽이 잡힌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사람의 아들』,『레테의 연가』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답답함.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텍스트만 쫓아내려가던 암담함.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끝나도 도대체 이 이야기가 왜 필요한 지 답답했던 그 기억이...그냥 나는 소설을 이해할 정도의 그릇은 아닌가 보다라는 결론을 스스로에게 내렸던 것 같다. 갑작스레 그때의 기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그런데 책에 대한 관심도, 책을 읽는 시간도 많아진 요즘 소설을 읽고 싶다는, 아니 읽어야겠다는 갈망이 조금씩 시작되었다. 피하고 외면하고 살았던 부분에 대한 미련도 있겠지만, 세상을 어느 정도 살다 보니 이제사 소설이 주는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소설 속에서 인간을, 삶을 발견할 수 있는 경험과 연륜이 쌓이지 않았을까. 지금 읽는다해도 문학적인 기호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소설을 통해서 나를, 사람을, 세상을, 삶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된 세상이 아닌 은유의 언어로 공감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다. 그것이 내가 지금 소설을 읽고 싶은 이유다.
[만약 당신이 내게 소설을 묻는다면]은 그래서 선택한 책이다. 나에게 소설은 정의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이었는데, 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소설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읽는 것이 제대로 읽는 것일까? 어떤 소설을 읽어야 할까? 소설에 대한 나의 갑갑증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55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두께의 책이지만 50명의 시선으로 보는 50개 아니 중복된 소설을 빼면 48개의 소설을 접하다 보니 시간 가는 것을 잊는다. 개인적인 의미이든, 사회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든 간에 1인이 단 한 편의 소설을 꼽는 형식으도 되어 있다 보니 언급된 소설들 대부분이 묵직하고 무게감있는 소설들이다. 여기에 실린 소설들만 읽어도 소설이란 무엇인지, 그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를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책은 나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사실 더 많은 도움이 된 것은 바로, '소설'을 읽는데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소설'을 교과서처럼 학문처럼 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타인에게 의미있는 소설이지만,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나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주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수많은 소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을. 그런 소설을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 지는 아무도, 심지어 나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냥 읽으면 된다.
"내 앞에 닥칠 시간들과 그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삶의 경관이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나는 나대로 궁금증이 향하는 곳을 바라볼 것이고, 다른 이들은 각자 자신이 선 자리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흘러가는 시간과 사람을 바라볼 것이다. 작가들이란 그 궁금증이 어떻게 출발하여 마침내 어디에 당도하였는지를, 정돈된 언어로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내게 소설을 읽는다는 일은 다양한 형태의 발견에 지속적으로 동참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p.7 <책을 펴내며> 中
재미있는 것은 처음 책을 펼쳐 들고, 본문을 읽어 내려가기도 전에 소설을 대하는 법, 읽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용택 시인의 '덧붙이는 글'을 읽으며 내용으로서의 소설 뿐만 아니라 글로서의 소설의 역할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독서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통한 독서의 방법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은 시인에게 그렇게 우연히 찾아와 그렇게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런 우연을 만난 시인이 부러웠고, 그런 결정적인 시기를 공허하게 놓쳐버린 내 젊은 시절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꼭 무언가 되어서가 아니라, 그토록 미치게 빠져볼 수 있었던 그 경험이 부럽다. 그것이 소설이어서 더욱.
소설을 읽는데 정한 법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책의 구성은 1부 '소설에서 작가를 발견하다', 2부 '소설에서 나를 발견하다'와 같이 소설에서 작가를 보기도 하고, 나를 발견하기도 하는 등 형식보다는 '인간'에 맞춘 관점으로 소설을 보는가 하면, , 3부 '이 소설을 말한다', 4부 '나는 이렇게 읽었다'처럼 소설의 구성과 문체, 사회적인 의미 등과 같은 분석적인 방법으로 읽기도 한다. <구운몽>과 같은 고전소설은 물론 <태백산맥> <임꺽정>과 같은 대하소설 뿐 아니라 5부 '소설은 늘 우리 곁에 있다'에서는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 정유정의 <7년의 밤>과 같은 현대로 이어지는 소설도 만나볼 수 있다.
소설이라는 이름의 대하 서사시를 보는 것만 같은 축복의 시간이었다. 비록 내가 읽은 책은 극소수지만 아니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그래서 이 책에서 필자들이 전달하고 싶은 말을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을 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소설을 마주 대하고, 그속으로 빨려들어갈 준비를 마친 것 같다. 이제 제대로 된 길을 뚜벅뚜벅 걸어서 가려한다. 아무리 힘들고 지리한 여행이 될 지라도 가는 길을 즐길 것이고, 우연히 어느 곳에 당도한다면 그 기쁨 그대로를 누릴 것이다. 나는 지금 '소설'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