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평전
찰스 펜 지음, 김기태 옮김 / 자인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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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찰스펜 #현대사상 #베트남 #책스타그램

호치민을 다룬 두 권의 서로 다른 책에 대한 소감, 한권은 베트남전쟁의 막바지 통일 베트남의 출현 직전이자 호치민 사후 4년만인 73년에 씌여진 그의 평전, 또 한권은 약 사십년을 뛰어넘어 2017년 현대사상연구소가 대체로 맑시즘적 시각에서 정리한 호치민과 베트남에 대한 논문집이다. 호치민과 베트남, 잘 알지도 못했거니와 대체로 미국의 시각 혹은 '자유 진영'의 시각에 잡힌 단편들 뿐이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학사논문을 쓸 때도 미국 반전여론의 추이만 살폈을 뿐 베트남인들에게 이 전쟁의 역사적 맥락과 의미가 무엇인지는 관심밖이었더랬다.

그런데 이 호아저씨, 엄청나다. 소박하고 사심없는 정치지도자이자 수십년의 무력항쟁을 앞장서 이끈 전사, 게다가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을 조화시키려는 혁명가로 한평생을 살았다. 체게바라를 찜쪄먹을 수준의 공력이자 삶이다. 게다가 수개 국어를 구사하며 아시아와 유럽, 소련과 미주를 넘나들며 베트남 해방과 세계혁명을 위해 코민테른을 움직이다니, 이정도 급의 인물이 마오 빼고 아시아에 몇이나 될까.

그의 삶이 곧 베트남 현대사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배를 극복한 인도차이나전쟁의 승리를 만끽하기도 잠시, 바야흐로 시작된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미국은 베트남을 강제 분할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호치민은 그리고, 세계 최강 미국에 맞서 유일한 승리를 얻어낸다. 직접적인 군사력과 전술 이외에도 인류 보편의 가치와 정서에 호소하는 이데올로기전에서의 승리가 주효했다면, 그건 고스란히 그의 인격과 철학이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그를 맑시스트로 해석할지, 혹은 민족주의자로 해석할지는 이론적 정합성이나 철저함의 측면에서 흥미로운 화두다. 그리고 오늘날 하노이에 미이라로 우상화된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더욱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개혁개방 이후 베트남이 추구하는 시장경제와 부수하는 가치들이 호치민이 그렸던 베트남의 미래와 이어져 있을까. 민족해방후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하려했던 혁명가 호치민과 그의 베트남은, 어디쯤에서 세계혁명의 깃발을 꺾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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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정영환 지음, 임경화 옮김, 박노자 해제 / 푸른역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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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한 건 바람직한 일이다. 대개 그런 주장들은 양립가능하며, 하나의 관점으로는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하는 사건들과 의미를 퍼올려내어 입체적이고 세밀한 이해가 가능해지는 거다. 미소 냉전이나 한국전쟁의 원인과 경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경합하면서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해는 더욱 풍성해진다. 일제 식민지 시절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해석도, 경제사적인 해석도 그럴 수 있다.

여기엔 전제가 있다. 근거가 되는 사료나 1차 자료들에 대한 성실한 발굴과 합리적인 해석,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 성과들에 대한 이해와 비판적 계승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엄밀한 주장을 쌓아올리기 위해 개념들을 적확하게 정의내리고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주장의 근거를 왜곡하거나 편의적으로 발췌하는 식으로 독자를 우롱해서는 안 될 일이다. 더구나 그 책을 읽는 일반 대중이 그런 팩트체크를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그건 악의적인 지적사기에 가깝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학문적 엄밀함과 성실성을 결여하고 대중을 호도하고 있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굉장히 방대한 1차 사료와 근거를 제시하며 객관적이려 애쓰면서도, 행간에 흐르는 뜨거운 분노가 읽힌다. 과연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이었던가. 과연 당시 일본정부는 위안부 모집과 관리에 책임이 없었던가. 과연 현재까지 일본은 충분한 사과를 했는가. 아니다. 아니다. 모두 아니다. 결국 저자는 한일 양국으로부터의 빼곡한 증거와 최근 연구 성과를 업데이트함으로써, 기존에 선언적인 수준으로 엉성하게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 '일제가 위안부를 끌고 갔다'를 탄탄하게 지지한다. (박유하에 논쟁을 청했으나 거부당했단 것도 킬링포인트)

박유하의 주장과 관점을 저자의 목소리로 요약하면 그렇다. 애초 한국병합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으니 일본과 한국이 자연스레 한몸인 것처럼 해석되고, 그래선 조선인이자 일본인인 위안부가 돈을 벌기 위한 자발적 매춘부에 지나지 않게 된다. 피식민지역에 대한 강제적이거나 구조적인 압박은 보이지 않는 거다. 대신 책임은 모호하게도 '제국'으로 한정된다. 일본과 한국과 대만으로 이루어진 대일본제국의 책임, 그건 사실상 우리모두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와중에 위안부 중에서도 일부 강경파와 정대협이 일본에 끊임없이 사과를 떼쓰고 있다는 게 박유하의 시각이다.

이영훈이나 박유하로 대표되는 이들의 역사인식은 사실 이 지점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 싶다.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것에 대해 정당하고 합법적인 절차였다고 인식한다. 이영훈은 그래서 식민지배는 한국에 도움이 되었다고 가지를 쳐나가고,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배의 폭력성과 불법성이 아니라 '모든 국가권력이란 나쁜 거야'라거나 '군인의 성욕은 본능이니 인간을 탓해'류의 원죄설로 치환시킨다. 스스로 반성할 부분도 있다. 리버럴함이라는 거, 그저 얘도 옳을 수 있고 쟤도 옳을 수 있어, 같은 다원주의랑은 다른 건데. 날카롭게 대척하는, 양립할 수 없는 주장 사이에서 원만하고 온건한 종합으로 받아들였던 건 아닌지 반성한다. 그러다가 박유하에 손을 잠시나마 들어주고 말았다. 일제의 한국 병탄과 식민지배,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선명한 입장이 필요하다.

#누구를위한화해인가 #정영환 #푸른역사 #박유하 #이영훈 #제국의위안부 #책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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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놀이공원이다 - 두근두근, 다시 인터뷰를 위하여
지승호 지음 / 싱긋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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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에서 실을 뽑아올리듯 인터뷰어 지승호는 인터뷰이를 조심스레 밀고 당긴다. 의도가 다분한 질문들이지만 억지스럽거나 꿰어맞추려는 게 아니다.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면 전후좌우 맥락까지 함께 설명하며 제대로 해보는 게 어떠한가, 아직 속으로만 품고 정리되지 않은 감흥이나 생각이 있다면 이김에 한번 말로 정리해보면 어떠한가, 하는 솔깃한 제안이다.

말하자면 간첩조작 사건으로 복역한 강용주에게 영화 '1987'에서 미화된 교도관의 가혹행위를 지적할 자리를 주는 거다. 민주인사에겐 관대했다지만 간첩 혐의를 받는 이에겐 개백정과 같았는데, 이건 옳은 일인가 하고. 그런가 하면 페미니스트 진영 중 워마드 같은 일부의 극단적인 남혐 발언에 대해,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말할 기회를 주는 거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는 게 어떤 것이어야 할지 같이 생각해 보자며.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청산규리'라는 단어만으로 담기지 않을, 배우 김규리의 지난 십년의 공백기가 어떠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미투의 서지현 검사는 이제 어떤 삶을 살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할까도 궁금하다. 인터뷰어는 편안한 산골길을 걷듯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해갈해주고, 그 과정은 아마도 김규리와 서지현에게도 무언가 치유가 되었을 듯 하다.

책제목처럼 타인이 놀이공원이라면 어떤 놀이기구에 비길 수 있을지, 청룡열차나 회전목마 같은 것들을 떠올려보다가 문득 그것들은 다소 일방향적이고 수동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놀이터란 표현이 맞지 않을까. 서로의 합과 죽이 맞아야 더욱 즐거워지는 그네라거나 시소, 그런 놀이기구에 인터뷰이와 독자가 함께 타볼 것을 제안하는 놀이터 마스터, 지승호라고 해도 좋겠다.

#타인은놀이공원이다 #타인은 #지승호 #책스타그램 #싱긋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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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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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고양이의비밀 #무라카미하루키 #캣스타그램 #책스타그램 #하루키에세이클럽
책읽는 것도 좋고 고양이도 좋다. 고양이에 대한 책을 읽는 건 더 좋다. 게다가 하루키. 그가 빚어내는 픽션이 유리오르골같은 섬세함과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가 전면에 나선 에세이는 방망이깎는 장인의 거친 손을 더듬어 잡는 듯한 생생함과 고집스러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약간의 애정만 있다면 다소 '빈티지'스러운 말장난이나 특유의 위트는 역시 하루키스러운 부분이라며 너그러워진다.

이번에도 그의 에세이는 가볍고 재미있다. 그리고 계속 읽힌다. 소설보다 에세이가 낫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의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나 경이로운 사실이다. 전라로 집안일하는 주부라느니 모텔이름 고찰이라느니 고객불만 편지를 쓰는 법이라느니 살짝 외설적이거나 시답잖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데다가, 왠지 자신없는 말투지만 근성있게 웅얼웅얼, 누구도 캐묻지 않은 것에 대한 소심한 변명이나 설명을 덧붙이는 궁시렁쟁이가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 비밀은 아마도 드물게 그가 정색하며 쓰는 문장, 혹은 역시 쓰려다 말고 눙치되 감정을 흘려둔 문장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남녀관계나 나이먹음에 대해 말하다 말고 문득, 역시 일반론은 그만두어야겠다고 슬쩍 넘어갈 때. 백화점의 장애인 안내문구를 놓고 그 이면의 비정함과 둔감함에 (그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분노를 표할 때. 전집 간행문제로 자신과 불화한 당사자가 마음고생으로 자살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면서도 역시나 자신은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 명토박을 때. 그가 굳이 말하지 않고 에세이에 숨겨둔 것들은 그런 것들이다.

그의 문장을 조금 고쳐 말하자면, 아무리 작가라 해도 모두가 웃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불가능하고, 그 책임은 본인이 오롯이 짊어지고 살 일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겠다, 식으로 늘 조심스럽게 열어두는 방식의 태도를 견지하는 그가 이럴 때 보여주는 진지함과 날카로움은 서늘할 정도다. 그럼에도 말하자면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때의 완전한 느낌, 그처럼 아름답고 성실한 묘사로 한순간이나마 그에 공감할 수 있게 해준 건 역시나 하루키여서 가능한 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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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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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걸친 사회적 발언과 집필활동을 이어온 늙은 작가, 어렸을 적부터 머릿속을 떠난 적 없던 기이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책을 결국 마지막 작업감으로 삼았다. 태평양전쟁에서 패퇴하기 전 천황을 살해하겠다는 농담같은 음모, 그 음모가 실행되기 직전 아버지의 익사.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만류와 자신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직면하려는 그것은 일본 현대사를 어떻게 해석할 건지, 그런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문제다.

이 복잡한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 작가는 몇 개의 복잡한 프레임을 교묘하게 엮어두었다. 우선 굉장히 자전적인 내용이라, 사실상 소설 속 화자인 주인공은 거의 작가인 겐자부로와 동일한 편력과 역사를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화자가 기어이 쓰기로 맘먹은 그 소설을 시작한 이후의 과정을 따라가는가 하면 이는 유사한 주제의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과도 겹친다. 게다가 인터뷰 형식, 연극 형식, 영화 제작 그리고 손편지의 형식까지 다채롭게 빌린 구성까지, 다양한 관점과 입장을 끌어온다.

이야기는 그렇게 다양한 주제로 번져나가 풍요로워질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역시 작가의 삶의 연장선에서 보았을 때는 제국주의와 역사를 바라보는 자세에 대한 부분이 큰 줄기지 싶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허위를 고발하는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계속 불화하는 현재의 일본인들, 고위 관직자와 정치인들과 우익세력들이 소환되는 장면이 반복되는 걸 봐도 역시나,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단어를 경계하는 그의 입장이 선명하다.

이 정도면 가히 사이드가 말한 '만년의 작업' 중 모범적이지 않을까. 과거의 스타일이나 메시지를 성숙시키거나 조화롭게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들보다 더 밀고 나가는 것. 더 실험적이고 치열하게 불화하는 것.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돌이켜보고, 가족과 인생을 작품에 녹여넣으며, 끝내는 '이런 글 조각 하나로 나는 나의 붕괴를 지탱해왔다' 고백한다. 그 붕괴는 마침내 오고야 말 것이나, 이 소설로 그 붕괴에 이르는 하나의 길은 환하게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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