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괴벨의(무지카 안티쿠아 쾰른)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3번.  

괴벨의 연주 스타일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무방비 상태로 듣고 있다가 흠칫, 놀랐다.  

내 청각 기관이 느긋하고 안정감 있는 브란덴부르크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던 거지.

냉철하고 지적인 절제감, 공격적이다 싶을 정도의 빠른 속도감.  

괴벨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예리하기로 소문난 잘 드는 독일칼을 떠올리게 했다. 

인정머리 없이 야멸차게 연주하는군, 하는 생각과 독일적인 정격 바흐 듣기란  것이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의 충돌.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5분7초, 2악장 알레그로 3분51초, 

오죽했으면 듣고 있다가  빠르기를 다시 한 번 확인했을까. 

바흐가 정한 알레그로와 괴벨이 해석하는 알레그로의 기준.  

여러 지휘자들의 속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과연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지.   

해석의 준거가 되는 명료한 기준이 있으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등등의 생각을 함.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3번을 계속 듣고 있으려니, 슝슝슝 하는 소리를 마구 내지르며  

텅 빈 광장을 가로질러 질주하고 싶은 충동이 드는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병원에 갈 일이 있었다. 

병원에 걸려 있는 그림들의 공통점.

빛을 지향한다는 것.

영업을 위한 전략적인 마케팅. 이른바 고도로 계산된 예술 마케팅. 물론 병원측에서는 아픈 환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라고 미화해서 포장하겠지. 이 정도의 위선은 권장사항이다.

음울하고 어두운 색채를 가진 그림들이 있다면 추상화 정도.

삶의 진부함과 상투성을 벗기는 빛의 힘.

추악함을 발가벗기며 진실을 드러내는 빛의 파괴력.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는 절대자로서의 빛.

이 미친듯이 경쟁하는 우울한 세상에서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이, 이 지상에 존재한다면, 그 마을의 정경은 어떠한 모습일까. 

영화 밀양의 마지막에 빛이 나올 때에, 그 장면에서의 빛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이창동 감독의 확고한 의지를 짐작할 수 있는 상징처럼 보였었다. 상처받은 자에게 쏟아지던 햇빛. 땅으로 땅으로 내려오던 빛의 장엄한 행렬.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잔인한 전언.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빛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권위 있고 엄숙한 가치에 짓눌려 지배당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 때마다, 내 머릿 속에서 원색의 커다란 팽이가 돌아가고 있다는 환각이 들 때마다, 경박한 것들에 이끌린다. 감각에 호소하는 것들, 홀연히 사라지고 말 가벼운 것들에 감각을 내맡긴 채, 의미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의 연속. 가끔은 운이 좋아 그 하찮은 시간들 사이로 적요가 찾아온다.  옅은 자족감을 거느리고. 그 누구하고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너무나 생생하고 주관적인 감정. 설명하거나 떠벌리고 싶지 않은 청정한 상태.

조로하는 젊음은 더 이상 젊음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

진지한 몽상가,

이카루스의 후예.

그는 덤볐다.

끝까지 한 번 해보겠다는 결의로 아름다움에 헌신했다. 아름다움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더 나은 현실을 창조하고 싶었던, 그의 욕망을, 그의 꿈을, 사회와 동떨어진 것이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얼마나 안이한 인식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햇빛을 쬐야 하니 비켜 달라.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에게 필요한 것을 주겠다고 했을 때. 디오게네스가 한 말.

권력자에게 굴욕을 안기는 당당함, 세속적인 가치에 구차하게 연연해하지 않는 초연한 태도. 디오게네스는 신분은 미천했으나 자신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아는 인간이었다.

최근에 읽은 자존심을 주제로 한 책에서도 자기에의 배려라는 차원에서 디오게네스의 존재 미학이 인용되었었지. 

그런데 왜 체홉이  생각났을까.

단편의 배경은 정신병동. 정신병동 안에서는 구타와 모욕, 폭력, 온갖 야비한 일들이 벌어진다. 가난의 곤궁함과 이유없이 가해지는 폭력에 희생된 적도 없이 무난하게 살아온 한 의사가 광인에게 디오게네스에 대해 언급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좋거나 나쁘거나 한 원인을 자기 밖에서 구한다고, 서재가 어떻고 차가 어떻고 따진다며,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은 모든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구한다고.  광인은 디오게네스야  기후가 따뜻한 곳에 살고 있었으니 집걱정 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러시아에 오면 추위 때문에 괴로울 거라고 받아친다.

스토아 학설은 학설을 탐닉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범한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못한다며, 대부분 사람들은 부와 쾌적한 생활과, 고통과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굶주림, 모욕, 죽음, 상실, 추위에 대해 공포를 갖는다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킬 수 없는 비참한 상황. 인간성을 말살하고 유린하는 비열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판치는 공간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해 좌절하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삶. 보상도 없고 구원도 없는 고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의 주인공 '하리 할러'의 분열된 자아를 위안할 수 있었던 것. 

예술. 구체적으로는 모차르트 음악.

음악의 숭고함과 유머의 가치에 대해 세련되게 말하는 부분에서 풍겨져나오는 지적인 균형과 교양.

  주인공 '하리 할러'의 자아성찰의 과정은 너무나 집요하고  섬세해서 병적일 정도. 

   갈 데 까지 가는 정신의 한 극단, 어디가나 막장 인생의 끝은 죽음일 터,  

   그러나 헤세는 죽음의 아름다움을 찬미하지 않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기가 너무나도 두려운 자아라는 저 거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야의 이리는 언젠가는 자기 자신과 마주 보고 서서, 

영혼의 혼돈을 깊이 들여다 보고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완전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살면서 타자와의 관계형성은 불가피한 것이 현실.

그 타자가 반드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을테지만.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마저 무능한, 

'발육부진 자아'.

결핍된 자아가 투영하는 대상들에 생각해보는 요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