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상실 - 해결되지 않는 슬픔이 우리를 덮칠 때
폴린 보스 지음, 임재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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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시간을 내어 가만히 돌이켜보자. 우리의 인생에 새겨진 수많은 이별과 상실들 말이다. 선명해보이는 상실들만이 존재하면 좋겠지만 인생은 그다지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다. 경계가 모호한 상실들이 비일비재하다. 분명히 실체가 보이고 느낄 수 있지만 곁에 없는 것 같거나, 부재하지만 여전히 곁에 함께 있는 것 같은 수수께기 같은 상실의 지점들을 두고, 이 책의 저자인 폴린 보스 박사는 “모호한 상실”이라 칭한다. 때로는 내가 처한 이 상실이 막연하고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한 뼘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안개처럼 흐릿한 시간들에 조금이나마 안도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실체를 알면, 모호함은 상대적으로 희미해지기 때문 아닐까.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이 상실들은 모호하다는 표현 외에는 그럴듯한 단어를 찾기 힘들다. 질병, 죽음, 이민, 전쟁, 이혼, 재혼, 입양, 심지어는 독립하는 자녀와의 지지부진한 거리두기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실은 우리 인생의 길목에 늘 송곳처럼 솟아있고, 상실의 증상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이 날카롭고 또 희뿌연 상실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극복, 치유, 성장의 출발이다.


그리스어로 ‘위기’는 ‘터닝 포인트’를 의미한다는 말이 가슴에 콕 박힌다. 이보다 확실한 위안이 더 있을까. 사실 우리네 인생은 확실한 것들보다는 불확실한 것들이 더 많다. 상실 앞에서 완벽을, 확실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다소 어리석은 판단일 지도 모르겠다. 안정적인 것, 완벽한 것, 확실한 것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면 오히려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책은 모호한 상실의 임상 사례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확인되지 않은 실종 상태, 이민자들이 겪는 문화와 언어의 차이, 입양아가 느끼는 단절과 고립, 알츠하이머/기억상실/정신질환으로 인한 공감과 유대감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 등을 소개한다. 그러나 그 뿐이랴. 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 상실감 대부분은 모호한 면들이 있고, 이처럼 모호한 상실은 매우 가까이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을 읽거나 혹은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 깨닫기에 너무 늦었다고 자책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모호한 성실을 인정하면 된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인정하는 그 순간, 아마도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의 이면이 드러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모호한 상실로 괴로웠던 지난 우울의 시간들과 이별하고,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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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잘 지내고 있나요? - 나를 위한 삶의 질문들
최진주 지음, 인재현.인신영 그림 / arte(아르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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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려운 것들이 많다. 따지고 들자면 살면서 쉬운 게 어디 있겠냐만,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건 바로 ’나‘인 듯 하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때로는 가장 먼 존재,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신체가 보내는 신호에 무딘 것은 둘째 치고, 마음이 보내는 신호는 무디기는 커녕 아예 실시간 변하는 마음의 상태를 인식조차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적어도 감기에 걸리고, 이가 썩으면 이비인후과와 치과에 가서 적극적으로 치료라도 받는다. 마음은? 우리는 정말 우리 마음의 현 상태를 잘 알고 있나? 매 순간 느끼는 감정들의 주소지를 잘 파악하고 있나? 그 때마다 필요한 도움들을, 치료들을 적절히 제공하고 있나?

살아가면서 그 누구보다 잘 지내야 하고, 잘 지내고 싶은 대상.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대상. ’나‘. 선뜻 마음을 고쳐먹고 오늘부터 나를 사랑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더라도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 지 난감하기 일쑤였을 터. 이 책은 연결, 정체성, 미래, 감정이라는 네 개의 큰 카테고리로 나누어 나를 위한 삶의 질문들을 제시한다. 책 서두에 소개하고 있듯 ’질문 테라피‘가 가득 담긴 책이다. 거창한 준비도 필요 없다. 그저 차분하게 책이 이끄는 대로 나를 더 사랑하기 위한 편안한 여정을 시작하면 그만이다.

개인적으로는 나와 친해지는 기회를 제공하는 질문들만큼이나 또 매력적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매 질문들에 앞서 하나씩 제공하는 문장들(명언에서부터 시의 한 구절, 문학 속 문장들)과 멋진 그림들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질문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그 페이지에 멈춰 한참동안 머물렀다. 그것만으로도 그 날의 치유가 이미 절반은 진행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림테라피랄까, 문장테라피랄까. 적당한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다. 퍽 아름다운 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은 내게 치유이자 휴식이고 또 위로였다. 하루에 질문 하나씩, 나를 보듬어 안는 그 모든 순간의 나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됐다. 일부러 질문의 답은 따로 기록했다. 1년 뒤, 5년 뒤 같은 질문들에 대한 나의 답은 어떻게 달라져 있으려나. 나로 가득 채워가는 책, 오직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책이 드디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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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8-2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나 자신을 100퍼센트 알고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같네요.ㅠㅠ
 
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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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교차로만을 그리는 화가 달드리와 민감한 후각 능력을 살려 하나뿐인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 앨리스. 많은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이미 두 사람은 그 자체로 매력이 흘러 넘친다. 처음부터 둘이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처음부터 이어지는 둘의 티키타카가 퍽 사랑스러워 간질거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분명 한글로 잘 번안된 소설을 읽고 있는데, 달드리와 앨리스가 서로의 이름을 쏘아붙이듯 부를 때마다 이상하게 매력적인 뉘앙스의 영국 발음이 가득 들리는 것만 같아 혼자 몇 번이나 웃음을 흘렸다.

그저 심심풀이로 들어간 점술가의 공간, 그 누구라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앨리스. 사는 동안 삶의 틈새에 아예 스며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나라 이스탄불로 떠나야만 무엇이든 확인할 수 있겠지만, 점쟁이의 말 만을 믿고 훌쩍 떠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앨리스의 곁에는 다정한 츤데레 이웃, 달드리가 있다. 그녀가 사는 집의 통유리창을 탐내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지만 실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앨리스를 오래 전부터 지켜보아왔을 달드리. 두 사람은 이스탄불로 향하는 이상한 여행길에 함께 오른다.

사실 책 전반의 내용은 앨리스가 그간 알지 못한, 상상조차 못 해 본 자신의 진짜 과거와 뿌리에 근접해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며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앨리스의 이야기니, [앨리스의 이상한 여행]이어야 하지 않을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덮을 쯤엔 이내 왜 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이었는지를 납득했다. 오직 앨리스를 위해 유산으로 받은 거액을 흔쾌히 지원하며 함께 떠나는 것도, 또 갑작스레 런던으로 먼저 떠나오는 것도, 아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녀와 브라이튼으로 떠나는 것까지. 진정 달드리씨에게는 이 모든 여정이 ’이상한‘ 여행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끝은 달콤하지만!

소설이긴 하지만, 실제 역사적 사실들이 곳곳에 묻어 있다. 몹시 세련된 문체와 스토리 전개 탓에 자꾸만 소설 속 현재라는 이름의 배경이 1950년대, 그리고 그보다 더 과거의 이야기를 계속 들춰내고 있음을 잊곤 했다. 역사적 배경과 사건을 찾아보고 알아가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우리에게 여러모로 다양한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책 임이 분명하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 여행, 과거로의 여행, 자기의 뿌리를 찾는 여행, 직업적 방향을 찾는 여행, 삶의 방향을 찾는 여행 … 그 어떤 것이든 만족스러운 여행일 것이므로. 그대들 역시 조금 선선해진 밤 바람을 친구 삼아 책과 함께 여행길에 오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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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이아 - 매들린 밀러 짧은 소설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새의노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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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버리면, 결국 그 결과에 있어서 그 상황이 실제가 된다는 것. 그러니 기왕이면 긍정적 말이 씨앗이 되는 데 마음을 써 보자는 것으로 정리하며 소개하곤 했다. 이것도 곧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덧붙이면 학생들의 이해는 더욱 쉬워진다. 조각가였던 피그말리온은 어느 날,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하고 여인상에 갈라테이아(Galatea)라는 이름을 붙인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그의 마음에 감동한 아프로디테가 그의 갈라테이아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었다는,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기 때문.





정말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 나는 늘 의문스러웠다. 전래동화 속, 선녀의 날개옷을 훔쳤던 나무꾼에게서 나는 아름다운 사랑보다는 서늘한 끔찍함을 느꼈던 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최고의 이상형을 ‘조각’한 그 남자가, 진짜, 사랑을 안다고? 갈라테이아의 무엇을 사랑한다는 말인가? 이 책 [갈라테이아]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누구보다 완벽했던 조각상 갈라테이아의 목소리를 빌려, 어쩌면 당신이 찝찝하게 느꼈거나 혹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신화의 이면을 들려준다. 장담컨대 이 책을 읽는 모두, (남녀노소 관계없이) 피그말리온의 실체에 뜨악함을 면치 못할 것이고, 또 내 삶에 숨어있는 수많은 피그말리온들을 연달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문고본 사이즈의 책, 단숨에 완독을 할 수 있는 것은 책의 두께가 얇기 때문이 아니다. 내용에 흠뻑 빠져서, 책 한 장 한 장의 질감에 매혹되어(갈라테이아의 손을 맞잡은 이 느낌을 모두가 만끽하면 좋겠다) 끝을,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짧은 순간 독서가 끝나도,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온 갈라테이아는 끝없이 우리에게 중요한 메세지를 던지며 영원히 살아 숨쉰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대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그 깊은 곳에 영원히 함께일 그들의 모습이 퍽 멋진 엔딩이었다. 피그말리온에게 비아냥거리듯 되묻고 싶다. 당신, 정말 행복하지 않냐고. 이제 정말 평생 그녀와 꼭 붙어 한 몸으로 살게 되었지 않냐고. 그토록 원하는 바 아니냐고. 물론, 갈라테이아의 마음은 처음부터 당신에게 없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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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현병 삼촌 - 어느 정신질환 당사자와 가족의 오랜 거짓말과 부끄러움에 관하여
이하늬 지음 / 아몬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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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라는 납작한 말로 정리되어 버리곤 한다는 사람들. 그 많은 납작해진 사람들 중, 조현병 환자들이 있다. 각자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로, 누군가의 삼촌으로, 가족 구성원으로. ‘조현병‘이라는 이름표 하나를 떼어내도 그들은 각자의 고유함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오랜 기간 조현병을 앓아온 삼촌에 대해 책을 썼다. 단순히 저자의 삼촌에 대해서만, 조현병 그 자체에 대해서만 쓴 책이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책이, 조현병 당사자와 주변인 모두에 대한 폭넓은 인터뷰집이자 돌봄과 보살핌의 현실적 안내서라 칭하고 싶다.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는 사랑이 단단하게 깔려있다. 조건없는, 무지막지한 사랑이 흘러넘친다.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일평생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 그간 조현병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희망적인 것은, 달과 달리 조현병의 뒷면은 우리가 언제든 마주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우리가 제대로 된 관심만 갖는다면 말이다. 조현병의 실질적 뒷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조현병 환자의 그늘에 덮여 그 존재조차 쉽게 떠올리지 못했던 그들의 가족 및 주변인들이라는 이름의 뒷면을 만나볼 수 있어 감사했다.

미친 사람이라는 납작한 말에서 벗어난 그들의 세상을 기대해본다. “내가 나로, 삼촌이 삼촌으로, 당신이 당신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말이 뜨겁게 차오른다. 꼭 한 번쯤, 정독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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