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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평점 :
곰곰히 되짚어 본다. 스페인어권 작가들의 책을 읽었던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적어도 최근에는 읽어보지 못했다. [토끼들의 섬]은 책에 실려있는 11편의 단편들 중 첫 번째 이야기의 제목이다. 사실 다른 10편의 단편들도 몹시 인상적인 소재와 기괴한 뒤틀림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펼쳐지는 글이라 모든 단편들의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또 다른 (새로운) 제목으로 책 제목을 설정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다.
평범한 일상인 것 같지만 여간해서는 그 일상적 범주에 집어넣을래야 넣을 수 없는 독특한 이질감이 책 전반에 젖어들어 있다. 이것이 특유의 분위기로 뒤엉켜 일종의 불투명하고 탁한 공기를 만들어내는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무언가 매캐하고 답답한, 그러면서도 동시에 생경하고 신선한 느낌을 느낄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궁금증이 일어 찾아본 작가 인터뷰에 "외곽, 변두리, 경계 ... 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는 언급이 시선을 붙잡는다.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 그 미세하고도 결정적인 틈새에서 저자만의 기이하고 불편한 세계가 재창조된다.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고 안정적이지 않은 그 낯선 공간을 통해 젠더, 공간, 계층, 환경, 역사 등에서 투박하게 조각난 이분법적 관념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남성과 여성, 도시와 주변(변두리), 자본가와 노동자, 자연 개발과 환경 보호, 기록된 정서와 기록됮 못한 미시 서사 ... 그것들 너머로 밀려나 있는 문제들, 소외되고, 외면 당하고, 무시되었던 대사들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튀어나오면서 저자만의 세계는 어쩐지 조금 더 단단한 우주를 다져내는 것도 같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만나게 될 '개인의 서사'들이 궁금해진다. 촘촘하게 늘어선 열 한 편의 환상 같기도, 악몽 같기도 한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