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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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혼자 읽는 책보다는 함께 읽는 책이 얼마나 빛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해왔다. 이번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바로 ‘교환독서‘다. 짝꿍 서평단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언니(@hyunock2702)를 떠올렸다. 책으로 이어진 우리 둘 아니던가. 절친한 지금도 여전히 책으로 소통할 수 있는 우리만이 나눌 수 있는 책 이야기가 퐁퐁 샘솟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20대의 언니와 함께 했던 일본문학에 대해, 내가 이 책에서 읽어낸 환대의 빛과 언니의 연결고리에 대해 정성스레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저 일회성으로 그치기엔 아까워 공동발간 브런치 매거진도 열었다. 책으로 이어지는 글, <서로>


상당히 매력적인 책이다. 이처럼 선연하게 눈앞에 모든 풍경과 사람들이 그려지는 글을 개인적으로 참 좋아한다.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에서 우편배달 일을 시작한 게이코, 바람결처럼 불현듯 그녀를 집으로 초대한 가즈히코, 그리고 두 사람의 공간에 늘 함께인 프랜시스. 최근 읽었던 그 어떤 연애 소설보다 가장 감각적인 글이 아니었나 싶다. 읽는 내내 풋풋하고 가벼운 설렘보다는 어둡고 무거운 불안을 더 강렬하게 느꼈다. 몽글몽글하고 간지럽기만 한 게 연애라고 착각했던 건 아닐까, 이내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가 삽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다.


이 책을 읽는 기간 동안 언니와 직접 대면하고 일상을 나누는 시간도 분명 있었다. 그런에도 이 책은, 좀 더 아끼고 아껴서 ‘글‘로 나누어 먹었다. 책의 줄거리만 간단히 나눈 것이 아니다. 서로의 생각과 시간을, 삶을 나누었다. 안치나이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가을밤 소중한 편지를 주고 받았다. 어쩌면 우리만의 비밀스런 전통 하나가 새로 생긴 기분인데 그 시작이 이 책이어서 특히 더 좋다는 생각을 한다.


그 어떤 계절이어도 괜찮지만, 가을. 지금 이 계절에 꼭 어울리는 소설로 조심스레 추천해본다. 떠오르는 이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한 통 보내도 좋겠다. 섬세하고도 치밀한 문장들에 한껏 취하는 가을이라니, 좋지 아니한가.


(비채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두 사람이 함께 읽고 나눈 솔직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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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지옥일 때 부처가 말했다 - 분노의 늪에서 나를 건지는 법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박수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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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발제로도 다루었다. 각자 마음 속 지옥은 어디냐고. 살다보니 알겠다. 차라리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지옥은 크게 두렵지 않다. 내 마음 속 지옥이 가장 무섭다. 언제든 두 눈 시뻘겋게 뜨고서 나를 잠식할 지옥이 다름 아닌 내 안에서 태어나는 일이 겁난다.


욕망, 분노, 미혹. 인생을 힘들게 하는 세 가지 번뇌에 관한 이야기들. 쉽사리 마음이 들끓지 않는 요즘, 그것들로부터 조금은 놓여났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아직 멀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의 지옥을 다스릴 줄 알았을 뿐, 지옥 아닌 상태로 만들기에 아직은 역부족인 터.


도를 닦지 않은 한낱 중생이 부처의 모든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안다. (바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가까이하고, 주기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되짚는 작업은 필요하다. 나의 마음이 온갖 번뇌로 들끓지 않도록 초연하게 그것들을 마주할 수 있는 기둥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다. 가볍게 접근하기 좋은, 그러나 읽고나면 조금도 가볍지 않은 단단함으로 무장한 책. 마음이 힘든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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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을 거두는 시간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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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 퍼진 그물을 켜켜이 거두어내는 시간을 그려본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아 심해까지 뻗어있는 그물을 직접 거두는 마음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까. 참회와 속죄.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어쩌면 그 시간이 멈추지 않게 하는 마음은 참회나 속죄가 아니라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대필 작가 윤지는 어느 날, 이모의 자서전 작업을 맡게 된다. 녹취를 위해 만난 첫날, 윤지는 깨닫는다. 이모가 남기려는 자서전은 유명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마 모른척할 수 없는, 아무리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아도 지워지지 않는 시간들에 대한 사죄임을. 이모와 만남을 이어가는 동안 윤지에게 민혁이라는 남자로부터 한 통의 연락이 닿는다. 무심코 전해 들은 선재와 수진이라는 이름. 완전히 일그러지고 구겨졌던 과거가 눈앞에 두서없이 펼쳐지고, 윤지는 깊고 깊은 심연에 가둬두었던 시간들을 마주하고 만다. 전혀 닮은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이모와 윤지의 생은 꽤 많이 닮았다.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품었고, 잊고 싶을 만큼 나쁜 마음을 품었고, 누군가를 향한 독을 쏟아부었고, 끝내 그것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통이 되었다. 그럼에도 생은 그들에게 기회의 손길을 내민다. 참회, 속죄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구겨진 종이를 반듯하게 펼쳐 다시 진심을 써 내려갈 수 있도록. 용기를 빌려준다.

작가는 이 소설을 두고 사랑의 양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글쎄, 나는 사랑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라 믿는다. 잘못을 덮지 않고 꼿꼿하게 기억하고 속죄하는 마음, 스치는 눈길만으로도 소스라치는 떨림, 상대를 위해 기꺼이 그림자 같은 사람이 되는 용기, 나와 같지 않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그늘,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드는 희생, 뜨겁게 타오르는 동시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욕망 ... 그 모든 마음들로부터, 그 모든 사랑으로부터 우리 모두 자유로울 수 있었던가. 누구 하나 그런 시절, 그런 기억, 그런 마음 없었던 적 있던가.

단숨에 한 권을 통 째로 읽어 내렸다. 책장을 덮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크게 숨을 푹 내쉬는 것을 느낀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내 숨소리가 낯설게 느껴진다. 다양한 사랑들을 그려본다. 각자의 다양성이기도, 내 안에 담겨있는 무수한 다양성이기도 한 그것들을 마음 가득 안아본다. 용기를 거두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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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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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주인공인 카논, 본인을 닮았다는 설명과 함께 보내온 사진 한 장. 여성의 옆얼굴을 그린 유화. 제로라는 이름의 작가가 그린 작품, <늦여름>. 카논은 생각한다. 내 옆얼굴이 저렇게 생겼나. 알 길이 없다. 어릴 적부터 깊이 품었던 그림에의 열망과 향수가 피어난다. 연이어 무언가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광고 회사에 다니다가 불미스러운 소문에 등 떠밀려 퇴사를 감행한 카논 지인의 소개로 미술잡지 편집부에 수습기자로 들어간다. 정규직 입사를 걸고 특집 기사를 하나 맡게 되는데, 테마가 심상치 않다. 뱅크시처럼 얼굴도 본명도 그 외 무엇도 알려지지 않은 화가 나유타. 인터넷상에서 그(그녀)는 '사신'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데, 그(그녀)의 그림 속 모델은 예외 없이 죽는다는 이유에서다. 그(그녀)가 그린 작품 속 모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카논은 취재를 시작한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만날 길이 없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죽은 이들의 유가족들 하나 둘 만나기 시작하면서 카논은 혼란스럽다. 함정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 엄습한다. 누군가 일부러 자신을 여기까지 등 떠밀고 있었던 것만 같다. 생과 사, 예술적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던 존재, 알 듯 말 듯 자꾸만 손에서 빠져나가는 미스터리한 서사들.

분명 인생에선 누구에게나 한 번은 이런 일이 찾아온다.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한 점에 집결하여, 나는 이걸 위해 태어났던가, 하고 깨닫는 순간이. 유년 시절 나를 살리기 위해 가차 없이 그어졌던 상처의 자국. 그걸 그에게 드러내며 나는 순수하게 실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그려지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래서 이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거라고.

제로의 늦여름, 403p

영화감독으로서의 저자가, 저자의 작품이 뇌리에 강렬해서 최대한 [러브레터]를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책장을 펼쳤었다. (중간중간 러브 레터의 면모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들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전작을 떠올리지 않고도 편안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한 명의 장르 작가를 마주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 흡족했다. 작가의 첫 도전 장르라고는 하지만 장르물이기 이전에 사랑과 청춘, 생과 사 혹은 우연과 필연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시 제로로 돌아온 가세의 손끝에서 피어날 두 번째 늦여름 그림을 막연히 그려보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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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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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손에 붙들 때와는 전혀 다른 색채가 덧입혀지는 것을 느낀다. 띠지에 쓰인 을지로 청년 예술가도, 상실에도 어두워지지 않는 젊음의 빛도 그다지 선명하게 각인되지 않았다.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내게는 한없이 취약하고 여린 이 세상 모두의 크고 작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자 누구보다 가장 솔직한 사랑 이야기로 각인되었다.

특히 좋은 문장들, 인상적인 표현들이 많았다. 전반적인 컨셉이나 소재는 어슴프레 몽환적이기도, 어색하고도 낯설기도, 그런 연유소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중간 멈칫 하게 만드는 어떤 걸림돌들이 무색하리만치 예쁜 말, 솔직한 표현들이 많아서 좋았다. 솔직함으로 무장한 글, 과장같고 억지같은 소재들 사이사이 진짜를 촘촘히 숨겨두고서 뽀빠이 과자 속 별사탕을 탐닉하듯 독자들이 그 빛들을 찾아내길 바라는 소설 같아서 유쾌하고 또 아련했다.

모두가 괴짜같다. 분명 여자아이였지만 엄마가 떠남과 동시에 남자아이가 된 휴일, 어딘가에 진득하게 머무르고 싶지만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어쩐지 힘들어 보이는 엘, 남자를 사랑하고 습관적 유턴이 곧 삶인 휴일의 아빠, 그의 매니저이자 연인이자 안내견이기도 한 황실장,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으나 어느덧 각자의 빛을 찾아 쌩뚱맞은 미래를 맞는 동료와 선배들 ... 이별, 상실, 배신, 죽음 같은 속절없는 슬픔 앞에서 무엇 하나 슬프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 그들이어서, 그들 안에서 가능할 법한 어떤 이야기.

몽롱하고 달뜬 가슴으로 책을 덮는다. 작가는 등단하면서 '한 줄 메시지로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정확히 목표한 바를 이루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한 줄 메시지로 결코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요약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자꾸만 구구절절 구질구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누고 부풀리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그것이 이 작가가 쓰는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겠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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