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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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주인공인 카논, 본인을 닮았다는 설명과 함께 보내온 사진 한 장. 여성의 옆얼굴을 그린 유화. 제로라는 이름의 작가가 그린 작품, <늦여름>. 카논은 생각한다. 내 옆얼굴이 저렇게 생겼나. 알 길이 없다. 어릴 적부터 깊이 품었던 그림에의 열망과 향수가 피어난다. 연이어 무언가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광고 회사에 다니다가 불미스러운 소문에 등 떠밀려 퇴사를 감행한 카논 지인의 소개로 미술잡지 편집부에 수습기자로 들어간다. 정규직 입사를 걸고 특집 기사를 하나 맡게 되는데, 테마가 심상치 않다. 뱅크시처럼 얼굴도 본명도 그 외 무엇도 알려지지 않은 화가 나유타. 인터넷상에서 그(그녀)는 '사신'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데, 그(그녀)의 그림 속 모델은 예외 없이 죽는다는 이유에서다. 그(그녀)가 그린 작품 속 모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카논은 취재를 시작한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만날 길이 없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죽은 이들의 유가족들 하나 둘 만나기 시작하면서 카논은 혼란스럽다. 함정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 엄습한다. 누군가 일부러 자신을 여기까지 등 떠밀고 있었던 것만 같다. 생과 사, 예술적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던 존재, 알 듯 말 듯 자꾸만 손에서 빠져나가는 미스터리한 서사들.

분명 인생에선 누구에게나 한 번은 이런 일이 찾아온다.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한 점에 집결하여, 나는 이걸 위해 태어났던가, 하고 깨닫는 순간이. 유년 시절 나를 살리기 위해 가차 없이 그어졌던 상처의 자국. 그걸 그에게 드러내며 나는 순수하게 실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그려지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래서 이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거라고.

제로의 늦여름, 403p

영화감독으로서의 저자가, 저자의 작품이 뇌리에 강렬해서 최대한 [러브레터]를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책장을 펼쳤었다. (중간중간 러브 레터의 면모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들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전작을 떠올리지 않고도 편안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한 명의 장르 작가를 마주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 흡족했다. 작가의 첫 도전 장르라고는 하지만 장르물이기 이전에 사랑과 청춘, 생과 사 혹은 우연과 필연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시 제로로 돌아온 가세의 손끝에서 피어날 두 번째 늦여름 그림을 막연히 그려보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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