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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평점 :
한 권의 얇다란 책에 실려있는 6편의 단편(TV 피플, 비행기,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 가노 크레타, 좀비, 잠) 중 어느 것 하나 평범한 단편이 없다. 읽는 내내 현실과 환상 그 어드메를 헤매고 있는 착각을 일으켰다.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로 포문을 열었다가 갑자기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예고도 없이 불쑥 끼어든다. 불청객 같은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손끝과 발끝이 저릿해짐을 느낀다. 어지럽다.
문학적 가치 같은 것을 논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럴 깜냥도 없고. 다만 그간 읽었던 몇 안 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감정가로 끄집어내고 보니 그것은 공포이기도, 불안이기도 했다. 문제는 '자, 지금부터 널 괴롭힐 거야!' 작정하고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침 식사했어요?' 일상 질문을 던지는 것 같은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속에 이질적인 장치들이 나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는 것이었다. 머리카락 끝까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낀다. 미리 예측하고 대비할 수도, 피할 수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저자는 개인적으로 <TV 피플>과 <잠>을 자신의 최고 단편으로 꼽았다는데 내게는 <비행기>와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가 보다 인상 깊게 남았다. 마음에 남는 잔상이 짙고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스무 살 남자가 스물일곱 살의 결혼한 여자와 나눈 밀회를 회상하며 그 여자가 남자 자신도 새카맣고 모르고 있던 자신의 혼잣말을 들려주는 이야기 <비행기>, 1960년대 고등학생 시절 순결을 굳게 지키려던 첫사랑 여학생과의 연애가 끝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자유, 과거, 사랑, 고독, 단절 같은 단어들이 시나브로 샘솟는 것을 그저 지켜보며 즐겼다.
책을 덮자마자 누구든 좋으니 당장 이 책을 읽은 다른 누군가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길어올린 단상들에 대해 글을 써 내려가고 싶은 충동도 올라왔다. 어떤 식으로든 나를 열어 환기시켜 준 셈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게 이 책은 충분히 자신의 몫을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