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 - 신화에 가려진 여자
제시 버튼 지음, 올리비아 로메네크 길 그림, 이진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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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돈과의 관계를 질투한 아테나의 저주로 머리에 여러 마리 뱀이 달린 괴물, 메두사. 눈이 마주치면 돌로 변해버리고 만다는 무서운 이야기. 페르세우스의 손에 머리가 잘리고 만 비운의 괴물. 메두사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정말 메두사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을까? 이 이 책을 펼치고 나면 그 너머의 것들을 바라보게 된다. 아니, 바라보아야만 한다.


📍기억은 축복이면서 또한 저주다. 나쁜 기억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후회 없는 삶이란 제대로 살지 않은 삶뿐.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느냐, 그것이 당신을 당신답게 한다. (109p)


메두사라는 이름의 어원은 ‘지배하는 자’라고 한다. 책에서 들려주는 메두사 이야기도 곧 그 어원과 결이 같다.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게 된 한 여성의 이야기가 단숨에 쏟아져 내린다. 흥미로운 신화 이야기의 비하인드 혹은 재미있게 상상해 보는 신화 같은 것들을 기대하지 않기를. 사회 고발에 가까운 무수한 단어, 문장, 서사를 따라가며 자꾸만 세로로 길게 벌어지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틀에 나를 끼워 맞추고 싶었겠지. 그래야 통제할 수 있을 테니까.” (83p)


📍“페르세우스, 어떤 여자가 아름다우면,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이 자기들 소유라고 생각해. 그 여자가 자기들 쾌락을 위해 존재하고, 자기들이 그 아름다움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고. 당연히 그 아름다움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86p)


부당하게 벌 받은 모든 여성들에 부치는 편지. 진한 울림으로 전하는 단단한 응원의 메세지. 낡고 비루한 신화를 벗어나 진짜 삶에 관한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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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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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얇다란 책에 실려있는 6편의 단편(TV 피플, 비행기,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 가노 크레타, 좀비, 잠) 중 어느 것 하나 평범한 단편이 없다. 읽는 내내 현실과 환상 그 어드메를 헤매고 있는 착각을 일으켰다.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로 포문을 열었다가 갑자기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예고도 없이 불쑥 끼어든다. 불청객 같은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손끝과 발끝이 저릿해짐을 느낀다. 어지럽다.

문학적 가치 같은 것을 논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럴 깜냥도 없고. 다만 그간 읽었던 몇 안 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감정가로 끄집어내고 보니 그것은 공포이기도, 불안이기도 했다. 문제는 '자, 지금부터 널 괴롭힐 거야!' 작정하고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침 식사했어요?' 일상 질문을 던지는 것 같은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속에 이질적인 장치들이 나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는 것이었다. 머리카락 끝까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낀다. 미리 예측하고 대비할 수도, 피할 수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저자는 개인적으로 <TV 피플>과 <잠>을 자신의 최고 단편으로 꼽았다는데 내게는 <비행기>와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가 보다 인상 깊게 남았다. 마음에 남는 잔상이 짙고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스무 살 남자가 스물일곱 살의 결혼한 여자와 나눈 밀회를 회상하며 그 여자가 남자 자신도 새카맣고 모르고 있던 자신의 혼잣말을 들려주는 이야기 <비행기>, 1960년대 고등학생 시절 순결을 굳게 지키려던 첫사랑 여학생과의 연애가 끝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자유, 과거, 사랑, 고독, 단절 같은 단어들이 시나브로 샘솟는 것을 그저 지켜보며 즐겼다.

책을 덮자마자 누구든 좋으니 당장 이 책을 읽은 다른 누군가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길어올린 단상들에 대해 글을 써 내려가고 싶은 충동도 올라왔다. 어떤 식으로든 나를 열어 환기시켜 준 셈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게 이 책은 충분히 자신의 몫을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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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은빛 눈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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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내 취향 저격 소설이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화려한 문체도, 완벽한 기승전결을 따르는 구성도, 매력적인 캐릭터도 아니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같은 책에서 자꾸만 감동받고 눈물이 맺히고야 마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더없이 멋진 소설이었다. 실제 저자는 인터뷰에서 “우연히 과학을 접하면서 보이는 세계가 조금 바뀌거나 시야가 조금 넓어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집필 계기를 밝혔다. 과학이라는 주제에 기대어 눈앞의 세계가 차츰 명징해지는 일, 생각지도 못했던 인생의 통찰을 길어올리는 일. 이 소설은 그런 결의 시간들을 내게 선물했다.


오늘 독서모임에서 심리학자가 보는 세상은 좀 다르냐는 질문(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그렇다.)을 들었다. 특별히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려는데 현옥 언니가 절친의 시선으로 대신 답을 했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를 때가 많다, 깊이가 다르다, 그래서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다른 부분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이야기를 읽기 전에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또 그것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구 행성물리학 박사 출신인 저자만이 가진 과학자로서의 자아가 한껏 빛을 발한 케이스다.


📍“반대로 묻고 싶어요. 다들, 왜 자기들이 사는 별의 내부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 안쪽이 어떻게 되어 있나 궁금하지 않은지. 표면만 보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모르는데.” (46p)


📍나도 귀를 기울여보자. 말은 잘 못해도 귀는 기울이고 있자. 그 사람의 깊은 안쪽에서 뭔가가 조용히 내리며 쌓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71p)


자꾸만 벼랑 끝으로 몰리는 것만 같은 헛헛한 일상을 헤매고 있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눈앞에 과학자가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이 툭, 우연처럼 떨어진다. 갇혀 있던 생각의 틀이 넓어지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바라보는 생소한 변화 앞에서 ‘위로’가 빛난다. 지구의 내핵, 은빛 숲에 내린다는 은빛 눈의 소리를 마치 눈앞에서 보고 듣는 것만 같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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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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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물농장]을 읽었다. 역사적 배경은 최대한 배제하고 그저 동물들의 이야기로 접근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가슴 한 켠이 욱씬거린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책 리뷰는 별도로 남기는 걸로)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소설로만, 픽션으로만 읽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됐다. 태아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자고 할 때만 해도 참고 읽었다. 지하 벙커에 모여 진지하게 작전회의를 하는 장면에서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책을 읽다말고 책 첫 장에 적힌 리처드 닉슨의 연설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1971년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나 검색부터 시작했다.


​<개인적 종교적 신념에 의거하여 나는 인구통제의 수단으로서 낙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제한 없는 낙태 정책 또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낙태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나의 개읹거 믿음에 어긋난다. 여기에는 앚기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도 포함된다. 태아 또한 법뿐만 아니라 유엔이 상술한 원칙에 의해서도 인정되는 권리를 분명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리처드 닉슨 / 샌클레멘테, 1971년 4월 3일>


실제 저자는 리처드 닉슨의 이 연설 이래, 약 반년만에 책 한권을 완성했다. 바로 이 책 [우리 패거리]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실린 소설. 당시 얼마나 큰 화제가 되었을 지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당시 닉슨 대통령이 비서실장과 해당 작품에 대해 주고 받는 말이 녹음된 파일이 공개되었는데 ’필립 로스는 끔찍한 도덕적 문둥병자‘라는 언어로 비난을 쏟아내고 있어 책 속 대통령 ’트리키‘ (사기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보다 더 심각한 현실을 반영하기도 했다. 3년 후인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재선을 위해 민주당 본부에 침입, 도청 장치를 설치다가 들킴)으로 리처드 닉슨은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자진 사임하였다고.


물론 이런저런 이야기 모두 무시하고 소설로만 읽어도 좋다. 굳이 리처드 닉슨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 소설에서 많은 인물, 국가나 사회, 사건을 각자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므로. 1971년의 소설이 2024년인 지금에도 전혀 이질감 없이 읽힌다는 것. ’이런 때가 있었다고?‘ 혹은 ’픽션이니까 가능하지!‘가 아니라 ’아이고 현실은 더 할 텐데?‘ 라는 마음으로 읽게 될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특별히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나도 그랬으니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누구든 그 이상의 감정과 생각이 오가지 않을까.


문학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같은 주장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의식을 열어주는 글들을 선호한다. 그간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들여다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들을 열고 그 세계로 직접 발을 딛게 만드는 일. 책 한 권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문고리에 손을 댈 수 있다.


동물농장의 정치 풍자가 마음에 와 닿았다면 이 책은 더욱 더 신선하고 재미있을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직위에 부여된 존엄성, 그 갑옷을 깨부수고 싶다던 저자의 말이 인상깊다. 출간으로부터 50년이 지나 이 책이 지금의 내 손에 있다. 여전히 다양한 갑옷을 입고 있는 무능한 지도자들을 향해 우리가 겨냥할만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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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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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 1권 [검은 얼굴의 여우]를 얼마 전 읽었다. 2권인 [하얀 마물의 탑]은 아직. 3권인 [붉은 옷의 어둠]을 먼저 읽었다. (특별히 문제는 없다.) 제목 속 색상으로도 교묘하게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다. 검은 색의 1권은 탄광을 배경으로, 하얀 색의 2권은 등대를 배경으로, 붉은 색의 3권은 암시장을 배경으로 한다. 제목의 색감만으로도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예상 가능케 하는 것도 나름 매력적이다.


진행 순으로 따지자니 1권에 바로 이어지는 하야타 이야기였다. 탄광에서 일어난 사건을 마무리 지을 쯤(1권) 대학시절 동기 신이치의 연락을 받는다. 붉은 미로라고 불리는 암시장에 출몰하는 괴인에 대한 소문의 진상을 파악해달라는 부탁이 이어진다. 전쟁 동안 초토되었을 거리에 거대한 암시장이 판을 치고 있다.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에 가까웠을 터전에서 벌어지는 밀실 살인사건과 임산부 피습사건을 마주하게 된 하야타는 이번에도 사건을 잘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인지 초반부터 흡입력 있는 전개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엄청난 몰입도에 비해 다소 아쉬운 마무리가 조금 아쉬웠지만 (1권도 그런 경향이. 이 저자의 특징인걸까.)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일본인으로써 저자가 해당 시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엿보는 것도, 광복을 맞이했던 당시 우리나라와 달리 세계대전에서의 패전국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도 전반적인 스토리만큼이나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단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재미에 이끌려 하야타의 다음 행선지는 무슨 색채로 다가올 지 조금은 기대도 해 본다(곧 네 번째가 나온다고 한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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