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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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월 일어난 광주 민주화 운동은 나에게는 먼 역사였다. 그 일을 책에서, 영화에서 접하였던 나에게는 그저 먼 감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은 아버지, 삼촌, 친구의 일이었을텐데 그 기억을 어찌 잊고 살아갈까 싶었을 뿐이었다. 이 소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배경이다. 소설이긴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중학생 동호부터 대학생 선주까지 대부분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이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겪은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데, 어린 그들이 겪었던 일을 지켜보면서 그저 답답하고 먹먹했다.


당시 사건에 대해서 사법부는 전두환에게 반란, 내란수괴죄로 무기징역을, 노태우에게는 반란, 내란 주요 종사죄 등으로 징역 17년을 선고하여, 당시의 사건이 엄중한 범죄였음을 인정하였다(대법원 1997.4.17. 선고 963376 전원합의체 판결). 유족들을 포함하여 그 때의 일을 겪은 사람들이 그 일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인정받기까지 17년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는 199712월 사면되었고 여생을 보내고 있다.

 

책과 자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자료를 봐왔지만, 아직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의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는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 이후로 '국가'를 어찌 믿을수 있었을까. 그 일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은 어찌 제 정신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었을까.

 

다시 태극기 이야기로 돌아와서, 얼마 전 3.1.절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에서 '태극기'를 게양해야할 지 말아야할 지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태극기가 대한민국의 국기가 아닌, 다른 무엇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혀지는 요즈음이기 때문이겠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속 희생자들의 사체를 태극기로 둘러싸고, 관을 태극기로 애써 감싸던 모습이 태극기집회의 모습과 계속해서 겹쳐 보였다. '재밌게 읽은 소설이었다'라고 평하기에 지금의 현실이 그닥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전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첫처럼 너는 혼란스러웠다.

그해 나는 스물세살의 교대 복학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 내가 소회의실의 조원들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그 밤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그만큼 오합지졸이었다는 걸 뜻합니다.
우리 조의 절반 이상이 미성년자였습니다. 장전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정말 총알이 나간다는 게 믿기지 않아, 도청 앞마당에 나가 밤하늘을 향해 한발 쏘아보고 돌아온 야학생도 있었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는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깐.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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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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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물 미드와 같은 경쾌한 분위기

책의 첫 인상은 너무 술술 재밌게 읽힌다는 것이었다. 문판사님의 칼럼을 읽어봤을 때의 인상 역시 '이 분 참 글 잘쓰신다'는 것이었는데, 책도 그랬다. 본인은 집필하느라 고생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달필이 한 필에 글을 휘익 써내려간 느낌이 든다. (잘 읽힌다는 것은 글쟁이에게 가장 큰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여러개의 사건을 사건 별로 진행하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되어 있어 마치 법정물 미드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재판이나 법에 익숙지 않은 독자들도 쉽게 재미를 느끼고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젊은 초임 '여자'판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하철 변태나 얌체 끼어들기 운전자를 혼쭐내주어 SNS의 스타가 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유쾌한 설정이고 일어날 법한 상황이지만, 반대로는 우리 사법부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절대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니다. 이 책이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에 소설 속 상상을 즐기는 재미가 있다. 


약자, 소수자에 대한 관심의 시선

이 책을 읽으며 감탄했던 부분은, 작가 본인의 여성이나 노인과 같은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시선이 남다르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변호사가 되어 법원에 가게 되었을 때 법원 정문 앞에 자극적인 문구가 적혀진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피켓에 적혀진 대상은 본인이 겪었던 사건의 상대방이기도 했고, 상대방 변호사나, 검사나, 판사를 향하고 있기도 했다. 처음 본 나도 그 장면을 보고 놀라서 한참 동안의 피켓의 글씨들을 읽었었는데, 나 역시도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이라 '무슨일일까, 안타깝다.'는 생각보다는 '저 사람들은 왜 저럴까.'하는 생각이 더 많았다. 하물며 매일 아침 출근하며 그 장면을 보는 판사들은 어땠을까. 책에서 작가는 주인공인 박차오름 판사가 법원 앞 피켓시위를 하는 노인과 한참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그렸다. 역시 소설은 소설이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판사가 쓴 소설에 그런 주인공이 등장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소설에는 여성과 남성의 대립관계가 많이 등장한다. 지하철 변태 아저씨와 피해자 젊은 여성, 대학 교수와 그에게 준강간을 당한 여 제자, 부장판사와 젊은 초임 여자 판사. 이런 상황에서 의협심 불타는 박차오름 판사는 매번 감정이입을 하면서 분노한다. 분노하는 박차오름 판사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같은 재판부의 선배 판사인 임바른 판사는 박차오름 만큼이나 같이 분노하고 행동하지는 못하지만,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젠더법연구회에 청일점으로 나간다던지, 다른 결론을 한번 더 고민해본다던지. 

소설 속 임바른 판사는 애초에 여성문제에 관심은 없었으나, 사법부의 묘한 줄세우기 문화, 보수적인 상명하복 문화를 불편하게 여겨왔다. 그런 분위기를 깨는 발언을 하기 시작하고, 박차오름 판사의 모습을 보면서 여성문제에도 조금은 달리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임바른 판사가 문판사 본인을 투영한 캐릭터로 보여졌는데, 왜 문판사의 칼럼들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을까 이해가 되었다. 지금 문판사의 또 다른 책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있는데, 그의 여러가지 생각이 참 공감이 간다. 


사법과 정의에 대한 고민

이 소설은 현직 판사가 쓰고,  현직 판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니만큼 판사들의 모습을 많이그리고 있다. 판사는 선망하는 직업 중 상위권(아직도 그런가 싶다만)에 항상 오르는 많은 이들이 '로망'을 가지는 직업이지만, 소설에도 잘 그리고 있지만 실제 그들의 일상은 3D 그 자체이다. 

육체적으로는 하루종일 기록에 파묻혀 기록을 읽고 정리하고 연구해야 하고, 재판정에는 하루종일 억울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야 한다. 요새 탄핵심판정을 보면, 헌법재판관이 얼마나 3D 직업인지 잘 알 수 있다. 판사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적으로는 흑과 백이 명확하게 나누어지지 않은 사건에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부담이 항상 있다. 70:30으로 결론이 나는 사건은 양호하지만 49.45와 50.55로 나누어지는 사건에서 결론을 내리기는 어느쪽으로 결론을 내던간 항상 그 책임감과 부담감은 버릴 수 없다. 

소설은 후반부로 갈 수록 문판사의 사법시스템과 정의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판사가, 결국은 판사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한 '인간'이 완전 무결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배심원제를 도입한 국민참여재판에서의 결론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다수의 생각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전 국민이 헌법과 사법체계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의미 있는 책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국민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면 늘 옳다고들 생각하는 거야? 진짜로? 유대인은 열등한 인종이니 살처분해야 한다는 것이 독일 국민 다수의 뜻이었고, 흑인은 백인과 같은 버스를 타면 안 된다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라는 나라 국민 다수의 뜻이었지.
...
난 말이야. 소수의 악마들이 선량한 국민들을 총칼로 위협해서 인류의 어리석은 악행들이 벌어졌다는 식의 얘기는 모두 사기라고 생각해. 실은 선량하고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동참했었다고. 권력은 언제나 부패하니까 분리하여 서로 견제해야 한다는 권력분립론은 누구나 얘기하지만, 실은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있어. 국민 역시 견제 받아야 한다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철저한 불신 위에 국민, 의회, 정부, 법원, 언론, 정당 모두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 민주주의라는 제도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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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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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들어 좋아하게 된 장강명 작가의 에세이집 '5년 만에 신혼여행'이다. 공대를 나온 작가는 신문기자로 일하다 그만두고 소설가로 직업을 바꾸었다. 작가는 아내와 의논하여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고 정관수술을 하였다. 명절에는 작가의 본가에는 가지 않기로 하고, 처가에는 같이 가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5년만에 처음으로 신혼여행을 코타키나발루로 떠난다. 

장강명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설 속 창작의 세계의 모습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이다. 논픽션을 선호하는 취향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결고 아름답지 않은 지금, 2010년대의 한국을 그대로 묘사한다. 

바늘구멍 같은 대학 입시의 문을 뚫고 들어간 후 만나게 되는 취업의 벽, 공시(공무원시험) 준비를 위해서 노량진으로 몰려드는 젊은이들,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마주하는 유리천장과 불합리한 관료주의, 한국에서, 서울에서 산다는 것의 고단함, 월급에는 비교도 안되는 수준의 집값, 전세값,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의 힘겨움... (책을 읽기 싫어지는 서평을 적고 있는 것인가ㅎㅎㅎ)




지금도 조짐이 보이지만, 앞으로 더욱 우리 사회는 세대갈등을 겪을 것이라 예상한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기존 세대들이 해오던 대로 똑같이 해서는 살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헬조선', '3포세대, 5포세대'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는 예전처럼 아버지가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 생활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상황에서,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지위, 사회에서의 역할과 지위 등 모든 것이 다 변할 것이고 변해야 된다. 그리고 변하기까지 기존 세대들과의 갈등을 많이 겪을 것이다. 



비관적인 말을 계속 늘어놓게 되는데, 이 에세이가 좋았던 점은.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서, 개인이 자신의 가족과 주변과 나름의 합의점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작가의 스토리가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다소 무거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는데, 이 에세이는 가볍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여행기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169
HJ는 처음 나와 사귈 때 내가 아버지가 되면 안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 일에 나처럼 무심하고 냉정한 사람은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는 거다. 그러다가 나와 함께 살게된 뒤로는 생각이 180도 바뀌어, 내가 만약 아버자가 된다면 훌륭한 아버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정성스럽게 화분과 물고기나 달팽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랐다는 것이다.
170
"그건 사랑이 아냐. 그냥 성실한 거야."
HJ의 칭찬에 당황한 내가 말했다. 나 스스로도 내가 사랑이 많은 인간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나를 포함해 인간 두 명, 화분 몇 개, 동물 한두 마리 정도가 고작 아닐까 싶었다.
"그게 사랑이야."
HJ가 대답했다.
성실한게 사랑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부모의 사랑보다는 부모의 성실함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좋은 아버지의 자질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성실함의 양은 초인적인 수준이고, 그런 초인적인 성실함은 사랑이 없으면 발휘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201-203
"내가 ‘나의 행복 리스트‘를 정리하는 거 알지? 행복을 느낄 때마다 스마트폰 캘린더에 그 날짜랑 이유를 적어놓는 거. 그런데 보라카이에 온 다음에 그 리스트에 올라간 순간이 없어. 그 정도로 행복을 느낀 적이 없어."
...
"심지어 내 행복 리스트에 이런 것도 있어. 올해 6월에 지방선거가 잇었어. 그때 투표하러 가면서 신도림중학교 옆을 걸어가는데 여름이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나무에 파릇파릇하게 잎이 났더라고. 그 길을 걸어가는데 그때 너무 행복했거든. 왜 그날은 내 행복 리스트에 오르는데, 화이트 비치에서 석양을 본 경험은 목록에 오르지 못하지?"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HJ가 가난한 집 딸의 자세를 아직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즐거움을 맛볼 때도 늘 본전을 생각하는 습관이 그녀의 몸속 깊이 배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라카이에서 느끼는 모든 즐거움에는 상당한 요금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우리는 즉물적인 쾌락을 맛볼 때도 실은 무의식중에 비용 대비 편익을 계산한다.

45, 246
앞으로 우리 부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런 에세이를 써놓은 주제에, 내가 술에 취해 바람을 피우게 될지도 모르고, HJ가 운명적인 사랑을 발견해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마 이 책은 결혼과 사랑과 믿음에 대한 지독한 아이러니의 사례가 되겠지. 나는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2014년 11월에 나는 HJ와 3박5일로 보라카이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훼손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이야기 속에서 행복하고, 결말은 ‘너무 좋았다‘이다. 나는 2014년 11월을 그 이야기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 인생에서 틀림없이 좋았던 부분을 틀림없이 좋은 것으로 지켜준다. 그게 이야기의 힘이다. 그 힘을 얻고 싶어 이 에세이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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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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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점가에서 핫한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었다. 사실 나는 '빨강머리 앤'의 시대는 아니다. 어릴적 TV에서 빨강머리 앤이 방영되는 것을 몇 번 본 적은 있었는데(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79년부터 80년까지 방영되었다고 나오는데 내가 본 것은 재방영이었나보다.) 어린아이였던 나의 눈에 빨강머리 앤은 '만화 답지않게 별로 재미없는 만화'였다. 이렇듯 빨강머리 앤에 대한 추억이 빈약하다보니 이 책 역시 마구 끌리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책이 너무 이뻤다.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의 동화적인 장면이 책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 책의 디자인이 손길을 저절로 가게 만들었다. 책 디자인이 훌륭한것도 이 책이 요즘 인기를 누리는데 한 몫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의외로(?) 아니 예상대로(!) 앤은 나이에 비해서 너무나도 성숙하고 현명했다. 그래서 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주는 울림이 컸다. '아, 그래서 내가 빨강머리 앤이 재미없다고 느꼈구나.' 싶었다. 앤은 나에 비해서 조숙한 편이었고, 그래서 앤이 하는 이야기를 어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백영옥 작가의 글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잘 읽혀서 첫 느낌이 좋아서 (칭찬 같지 않지만 좋다는 것이다.)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강머리 앤'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에세이를 쓸 생각을 어찌 했을까 싶다. 빨강머리 앤에 대한 향수와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보고 싶게 만들고, 또 백작가 팬들도 흥미를 느낄만한 내용이니, 작품 기획력이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앤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수 없어서 재미를 더 많이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 시절 추억이 있는 독자라면 상당히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p. 119
매튜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도 앤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다. 매튜의 깊은 사랑으로 결핍 없는 독립체로 자랄 수 있었기 때문에, 매튜의 죽음에도 앤은 그토록 어른스럽게 처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p. 172
망설이는 이유는 그 결정으로 지불해야 하는 몫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우리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몫이다.

p.175
내가 학교에 다니던 1990년대에는 체벌이 일상적이었다. 초등학생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한 선생님을 유독 미워했던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 그땐 내가 어려서 선생님의 속마음을 정말 몰랐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내가 그땐 너무 어려서 내 분노가 정당한 것이었다는 걸 표현하지 못했구나!"란 생각이 먼저 든다. ‘이해할 만하다‘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 한결 더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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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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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를 펼치고 첫 단락을 읽은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앗, 어디서 정말 많이 들은 이야기인데...' 싶어서. 
맞다. 내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 친구들 이야기이도 하다. 그래서 책을 손에 잡자마자 빠져들었다. 



일상에서 고착화된 여성 혐오

소설의 메시지는 뚜렷하다. 한국의 평범한 여성들이 일생동안 얼마나 많은 혐오와 불평등에 노출되었는지, 이런 혐오와 불평등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문제 인식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사시을 80년대생 여자라면 겪었을 그대로를 보여준다. 책을 읽어내려 가면서 내가, 내 친구들이 그대로 겪었던 일들이 서술되어 있어서 (좋았던, 좋지 안았던)추억을 떠올려가면서 재미나게 읽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슬픔이 몰려왔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요구 때문에 딸 둘을 낳은 엄마는 새로 가진 여동생을 혼자서 '지운다'. 결국 남동생이 태어났고 그는 집안의 '왕'으로 대접받고, 자연스레 딸 둘은 왕을 보살핀다. 학교에 들어가면 반장은 으레 남자아이들이 하는 것이었다. 초경이 시작되면 여자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생리를 한다는 사실을 감춰야 한다고 배운다. 가뜩이나 서툴러서 실수가 많은데 숨겨야 한다고 하니 더욱 위축된다. 생리대를 사면 점원은 자연스럽게 검은 비닐봉지에 꽁꽁 싸준다. 남자애들은 '기술' 과목을, 여자애들은 '가정' 과목을 배운다. 남자 선생님들은 학생지도를 이유로 가슴 근처, 등의 브래지어를 어루만진다.

소설은 대학교 이후 회사에서의, 결혼 후 육아와 가사생활을 할 때의 모습들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유년기 부분이 더욱 인상깊었던 것은 그 당시 우리는 문제의식 자체도 가질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저 당연하게 살아왔던 과거들이 지금의 시각에서 바라보니 참 이상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게되어 더욱 충격적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럼에도, 소설에서 이런 여성혐오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폭력과 불평등은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손가락질 하는 것인가.


얌전히 있지마. 막 나대.

"얌전히 있지마. 막 나대."는 김지영의 엄마가 김지영에게 하는 말이다. 소설은 약간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걸 함축한 구절이 저 두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우주비행사와 과학자가 꿈인 딸이, 더 크고, 높고, 많은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그간 얼마나 진취적이고 멋진 여성들이 '독하다, 기세다, 드세다'라는 폄하를 당하며, 남성들에게 견제받아 왔던가. 슬프게도 그런 프레임을 오히려 동료 여성들이 공격하게 되기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30대 중반인, 주니어도 아니고, 시니어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의 나도, 앞으로 내 목소리를 더욱 열심히 내려고 한다. '당신의 말과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고치기는 어려워도 적어도 상대방이 불편하게 생각하고, 당신의 말과 행동이 진리는 아님을 알려줄 필요가 있으니깐, 열심히 막 나대보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딸도 그랬으면 좋겠다. 예쁘다 보다는 멋지다를 꿈꾸는 소녀가 되길!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이제껏 더 심한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김지영 시는 갑자기 견딜 수가 없어졌다.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아 숟가락을 세워 들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딱, 하고 단단한 돌덩이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얼굴이 씨뻘겋게 달아올라 숟가락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당신은 지금 때가 어느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소릴 하고 있어?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김은실 팀장은 여자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회식 자리에 끝까지 남았고, 야근과 출장도 늘 자원했고, 아이를 낳고도 한 달 만에 출근했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웠는데, 여자 동료들과 후배들이 회사를 나갈 때마다 혼란스러웠고, 요즘은 미안하다고 했다. 회식은 사실 대부분 불필요한 자리였고,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 출장은 인원을 보강해야 하는 문제였다. 출산, 육아로 인한 휴가와 휴직도 당연한 것인데 후배들의 권리까지 빼앗은 꼴이 됐다.

김지영 씨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출산 이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벌써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대?"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은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 김지영 씨는 정대현 씨의 말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뒤집힐지 모르는 데에 비하여 남편이 열거한 것들은 너무 사소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왜 어머니는 힘들다고 얘기하지
않았을까. 김지영 씨의 어머니뿐 아니라 이미 아이를 낳아 키워 본 친척들, 선배들, 친구들 중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TV나 영화에는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만 나왔고, 어머니는 아름답고 위대하다고만 했다. 물론 김지영 씨는 책임감을 가지고 최대한 아이를 잘 키울 것이다. 하지만 대견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하는 말은 정말 듣기 싫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힘들어 하는 것 조차 안 될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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