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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평점 :
최근들어 좋아하게 된 장강명 작가의 에세이집 '5년 만에 신혼여행'이다. 공대를 나온 작가는 신문기자로 일하다 그만두고 소설가로 직업을 바꾸었다. 작가는 아내와 의논하여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고 정관수술을 하였다. 명절에는 작가의 본가에는 가지 않기로 하고, 처가에는 같이 가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5년만에 처음으로 신혼여행을 코타키나발루로 떠난다.
장강명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설 속 창작의 세계의 모습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이다. 논픽션을 선호하는 취향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결고 아름답지 않은 지금, 2010년대의 한국을 그대로 묘사한다.
바늘구멍 같은 대학 입시의 문을 뚫고 들어간 후 만나게 되는 취업의 벽, 공시(공무원시험) 준비를 위해서 노량진으로 몰려드는 젊은이들,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마주하는 유리천장과 불합리한 관료주의, 한국에서, 서울에서 산다는 것의 고단함, 월급에는 비교도 안되는 수준의 집값, 전세값,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의 힘겨움... (책을 읽기 싫어지는 서평을 적고 있는 것인가ㅎㅎㅎ)
지금도 조짐이 보이지만, 앞으로 더욱 우리 사회는 세대갈등을 겪을 것이라 예상한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기존 세대들이 해오던 대로 똑같이 해서는 살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헬조선', '3포세대, 5포세대'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는 예전처럼 아버지가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 생활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상황에서,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지위, 사회에서의 역할과 지위 등 모든 것이 다 변할 것이고 변해야 된다. 그리고 변하기까지 기존 세대들과의 갈등을 많이 겪을 것이다.
비관적인 말을 계속 늘어놓게 되는데, 이 에세이가 좋았던 점은.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서, 개인이 자신의 가족과 주변과 나름의 합의점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작가의 스토리가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다소 무거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는데, 이 에세이는 가볍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여행기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169 HJ는 처음 나와 사귈 때 내가 아버지가 되면 안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 일에 나처럼 무심하고 냉정한 사람은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는 거다. 그러다가 나와 함께 살게된 뒤로는 생각이 180도 바뀌어, 내가 만약 아버자가 된다면 훌륭한 아버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정성스럽게 화분과 물고기나 달팽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랐다는 것이다. 170 "그건 사랑이 아냐. 그냥 성실한 거야." HJ의 칭찬에 당황한 내가 말했다. 나 스스로도 내가 사랑이 많은 인간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나를 포함해 인간 두 명, 화분 몇 개, 동물 한두 마리 정도가 고작 아닐까 싶었다. "그게 사랑이야." HJ가 대답했다. 성실한게 사랑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부모의 사랑보다는 부모의 성실함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좋은 아버지의 자질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성실함의 양은 초인적인 수준이고, 그런 초인적인 성실함은 사랑이 없으면 발휘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201-203 "내가 ‘나의 행복 리스트‘를 정리하는 거 알지? 행복을 느낄 때마다 스마트폰 캘린더에 그 날짜랑 이유를 적어놓는 거. 그런데 보라카이에 온 다음에 그 리스트에 올라간 순간이 없어. 그 정도로 행복을 느낀 적이 없어." ... "심지어 내 행복 리스트에 이런 것도 있어. 올해 6월에 지방선거가 잇었어. 그때 투표하러 가면서 신도림중학교 옆을 걸어가는데 여름이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나무에 파릇파릇하게 잎이 났더라고. 그 길을 걸어가는데 그때 너무 행복했거든. 왜 그날은 내 행복 리스트에 오르는데, 화이트 비치에서 석양을 본 경험은 목록에 오르지 못하지?"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HJ가 가난한 집 딸의 자세를 아직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즐거움을 맛볼 때도 늘 본전을 생각하는 습관이 그녀의 몸속 깊이 배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라카이에서 느끼는 모든 즐거움에는 상당한 요금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우리는 즉물적인 쾌락을 맛볼 때도 실은 무의식중에 비용 대비 편익을 계산한다.
45, 246 앞으로 우리 부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런 에세이를 써놓은 주제에, 내가 술에 취해 바람을 피우게 될지도 모르고, HJ가 운명적인 사랑을 발견해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마 이 책은 결혼과 사랑과 믿음에 대한 지독한 아이러니의 사례가 되겠지. 나는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2014년 11월에 나는 HJ와 3박5일로 보라카이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훼손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이야기 속에서 행복하고, 결말은 ‘너무 좋았다‘이다. 나는 2014년 11월을 그 이야기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 인생에서 틀림없이 좋았던 부분을 틀림없이 좋은 것으로 지켜준다. 그게 이야기의 힘이다. 그 힘을 얻고 싶어 이 에세이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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