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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낭자가 웃는 걸 본 적 있느냐? 그리고 정 낭자가 왜 말하기를 싫어하는지 아느냐?
정 낭자에게 이 세상은 너무도 무정하여 웃을 일도, 이야기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십팔랑, 너도 알다시피, 사람들은 그 비석의 글씨가 대단하다고, 천하제이 행서라고 칭송한다. 한데 그 글씨가 왜 그토록 좋은지 아느냐?

말로 이루 표현해낼 수 없는 비통함이, 글씨의 매 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 힘겹게 써 내려간 글씨를, 어떻게 감상을 위한 글씨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가슴이 찢어질 듯한 비통함으로 쓴 글씨 덕에 얻은 명성을, 정 낭자가 자랑스러워하겠느냐?
아마 정 낭자는 쓰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글씨들을 영원히 쓰지 않기를 택했을 것이다.
십팔랑, 그래도 그런 글씨를 써낸 정 낭자가 부러우냐?
십팔랑, 내 말하지 않았느냐. 늘 자비심을 품고, 세상 사람들 눈에 정 낭자의 무엇이 좋아 보이는지, 그 명성을 어찌 얻은 것인지 보란 말이다.
정 낭자는 자신이 쓴 글씨를 누가 가져가든 상관없다고 하지. 그 이유인즉슨, 자신의 글씨가 좋지 않다는 정 낭자의 생각과는 달리, 모든 사람이 정 낭자의 글씨를 좋은 글씨라고 생각하고 낭자가 쓴 글씨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 낭자가 그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하겠느냐? 정 낭자가 감당해야 할 사람이, 자기 자신 말고도 더 있어야 해?
네 말대로라면, 정 낭자는 자신의 비통함을 표하고자 비석에 글씨를 쓰는 것도 안 되고, 한바탕 우는 것도 안 된다는 게야? 정 낭자는 아무리 슬퍼도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냐? 정 낭자가 한 일은, 남들 앞에서 글씨로 눈물을 흘린 것밖에 없다. 세상이 정 낭자의 글씨를 높이 추켜세웠을 뿐이야. 너는 그걸 보고도, 정 낭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를 낚아챘다고 여기느냐?

집 앞에 돗자리를 깔고 글씨를 쓰는 것은, 정 낭자의 마음에 거리낄 게 없어서다. 그 글씨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고, 마침 자신은 항시 같은 시간에 글씨를 쓰니, 못 보여 줄 것도 없겠지. 정 낭자는 떳떳하고 부끄러울 게 없기에 마음 가는 대로 편히 행동했을 뿐이야. 그럼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정 낭자가 살피고 고민해야 한단 말이냐? 자신의 행동으로 누가 기뻐하고, 또 누가 기뻐하지 않는지까지 살피라고? 다른 이가 싫어할까 봐 자신이 하던 일까지 멈추란 말이더냐?
십팔랑, 사람을 업신여겨도 너무 업신여기는구나!
십팔랑, 천도(天道)는 무정하다지만,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법이다. 자비를 베풀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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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교랑의경 16 교랑의경 16
희행 / 만월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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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게 없으니 그자리에서 맞서는 교량이 당당하면서 위태롭게 보인다. 16권에서 뒤늦게 눈이 트인 이들은 조심하고, 시기하고 적대하는 자가 있고, 나이를 먹어도 양심없이 여전한 천둥벌거숭이가 있구나. 효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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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버림받았으면 어떻고, 경성이 살기 힘들면 어떠하랴. 호시탐탐 재산을 노리는 이들이 있으면 또 어떠하랴. 고관대작에게서 먹을 걸 챙기고, 횡포를 부리는 무뢰한은 깔끔하게 죽여 없앴다.
거센 비바람 앞에서도, 험한 가시밭길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보기에 옳은 길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거센 풍랑과 위험천만한 일들도 그녀의 눈에는 맑게 갠 하늘과 다를 바 없었다.
다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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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교랑의경 15 교랑의경 15
희행 / 만월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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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5권에서 짠물이 났다. 술동이 깨는 것도. 길게 이어진 노제와 높게 터지는 폭죽도... 교량의 고요한 분노가 콕콕 찌르는 파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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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노력도 했고 애도 썼는데 왜 그렇게 됐냐고요? 낭자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해 봤습니까? 그들도 똑같이 노력했을 텐데, 낭자만 성공하고, 남은 실패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낭자에게도 사정이 있겠지만, 그건 남들도 똑같습니다. 어째서 낭자한테만 당연할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겁니까?"
정평이 말했다.
뭐라고?
정교랑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평을 쳐다보았다.
"무엇을 위해 그 일을 시작했는지 잘 알고, 그것을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하고 애썼다면, 그게 바로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그 자체로 값진 겁니다. 한고조 유방이 황제가 된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초패왕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한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거예요. 거지가 밥 한 끼를 해결하는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개미들이 강가에 빠져 죽지 않고 둑을 오른 것 또한 원하는 바를 이룬 거죠.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天地不仁以萬物爲?狗 - <노자>)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낭자는, 어디서 나온 자신감으로 원하는 바를 이뤘는지 아닌지를 한 사람의 성패로 따지는 거죠? 무슨 근거로 하늘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었는지 판단하는데요? 그건 다 낭자가 생각하고 원하는 바일 뿐이지, 절대 하늘의 뜻이 아닙니다."

"생각의 창을 넓히게 일깨워 주었을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끝을 맞이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에 의미를 두라고. 본래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그 안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조 집사가 정평의 멱살을 잡은 채로 그를 세차게 흔들었다.
"알아듣게 말해!"
조 집사가 호통쳤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으니,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말이죠."

"이젠 그들이 없는데."
정교랑은 정평의 옷자락을 쥔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읊조렸다.
"낭자가 있잖아요."
정평이 정교랑의 말을 끊고 말했다.
내가? 내가 아직 있다고?
"하지만, 나, 나는, 나는 내가 아닌걸요."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어째서 자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평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영원히 자기 자신인 거예요. 영원히 존재하는 거죠. 낭자가 살아있고, 마지막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끝이 아닌 겁니다. 아직 기회가 있으니, 어서 가요. 어서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요."
내가 아직 살아 있어! 아직 기회가 있어! 모든 게 아직 끝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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