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몸을 잔뜩 숙이고 중심을 잡으며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 두려움은 애써 몰아냈다. 딴생각을 하다가 자칫 균형을 잃으면 앞으로 고꾸라지게 된다. 거센 바람이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물어뜯었다. 맨살이 드러난 다리에는 수많은 얼음송곳이 날아와 꽂혔다.
언덕을 반 이상 내려갔을 즈음, 허리를 펴고 속도를 늦췄다.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고 미끄러져 언덕 아래 호수에 빠지면 끝장이다. 바람은 더욱 성난 듯 날뛰었고, 추위는 더욱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이제는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따끔거렸다. 아니, 따끔거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피부를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겨우 마을 어귀에 다다랐는데 다리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집인데…. - P54

"엄마가 죽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아빠까지 사고를 당했으니 어린 네가 얼마나 힘들겠니."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던 미알리크 촌장이 나를 보았다. 어느새 미소를 머금은, 그림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건 인자한 미소가 아니라 만들어진 미소였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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