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렸을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혹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쓰치미카도 님의 재앙을 기다리며.
아카네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종은 무엇 때문에 자기가 그 자리에 놓여 있는지 알지 못한다. 비상시가 되면 어떤 소리를 내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을 당연히 종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 참된 쓰임새는 다른 데 있었다.
봄이면 산에 꽃들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창공에 뭉게구름이 걸리고 가을이면 단풍이 비에 젖고 겨울이면 봉우리마다 하얀 고깔모자를 쓴다. 새가 날아들고 들개가 짖고 어미 곰이 새끼를 거느리고 숲을 나와 냇물을 건넌다. 종은 그런 풍경과 사건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품은 불온한 비밀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보내 왔을 것이다.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인생을 살아 오면서 기쁨과 슬픔과 때로는 소소한 행복을 겪고, 때로는 사무치는 고독에 눈물을 짓던 아카네와 같지 않은가. - P510
"나는 산에서 죽지 않고 내려왔어. 아무 보탬도 되지 못한 내가 살아남은 것은."
필시 누군가는 이 일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성을. 인간의 업을. 죄는 잊혀도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바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어. 그런 선한 바람 때문에 죄악을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소심한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야 해."
산속 괴물을. 최후에 눈물지었던, 그러나 만족스러워하던 아카네의 그 눈빛을.
"지금은 그것으로 족해. 그거면 됐다고 말해 줘, 야지." - P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