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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바라본다는 건 그 풍경을 가슴에 찍어두기 위해 마음의 조리개를 맞추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의미다. 이러한 바라보는 행위는 감각-선택-지각-기억-학습-이해의 순환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저자는 약 반세기전 낯선 모로코의 마라케시를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마라케시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바라본다.
실존주의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는 타자를 ‘나를 바라보는 자’로 정의한다. 바라본다(시선)의 사전적 정의는 ‘2개의 안구가 하나의 대상을 향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하는 시선은 두 눈을 집중해 대상을 바라보는 단순한 시각 작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처럼 시선 주체의 의식 흐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시선은 그 주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을 객체로 사로잡는 힘을 갖고 있다. 사르트르가 타인의 시선을 메두사의 그것에 비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는 머리칼 하나하나가 모두 뱀으로 돼 있는 흉측한 괴물이다. 메두사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돌로 변한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흘겨보고 훑어보고 째려보고 꿰뚫어본다. 누구나 한번쯤 지하철에서 느꼈을 만한 - 타자의 눈짓은 나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를 비판한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돌처럼 굳어버리는 경험은 드문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내가 보는 사람들을 객체로 응고시킨다. 타자에 대한 나의 관계는 나에 대한 타자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나의 힘을 계량한다. 그러나 타자가 나를 볼 때면 나의 시선은 그 힘을 상실한다.”
카네티에게 있어 그 곳 주민들은 낯선 이방인들뿐이다. 객체로 위치 지어지는... 이러한 바라보는 행위는 심리적 과정을 넘어 ‘사회적 과정’이 된다. 즉 폭력으로 결부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방인은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다. 저자 엘리아스 카네티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분명히 드러낸다. 우선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은 뒷전이고 나아가 구별 지으며 시선 애착증 환자인 듯 그저 관찰하려 한다. 다음으로 도살과정이나 거지들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에서 불편함을 감출 수 없다. 카네티의 시선에서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를 발견하는 것은 무리인가?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인용해 마지막을 장식한다.
“여행이란 떠남과 만남의 낭만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재발견이었습니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만남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과 그 삶의 방식인 문화에 최대한으로 겸손한 자세로 다가갈 뿐입니다. 그것이 비록 가난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곳에서 삶을 꾸려온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혜와 노력의 결정(結晶)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교되거나 평가되기 이전에 먼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쉽게 관여하려는 것은 오만과 무지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일구어온 인류의 귀중한 자산을 훼손하는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시원히 떠날 수 없듯이 그들 역시 떠날 수 없는 그들 자신의 과거를 짐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