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골댁은 조왕신 모신 부뚜막에, 그런 일은 별로 없었지만 기응이 출타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은 끼니 때, 겨울이면 샛노란 놋주발에, 여름이면 흰 사기 밥그릇에 기응의 밥을 꼭 떠 놓았다. 오류골댁이 혼인하여 기응의 아내 된 후, 그네는 단 한번도 밥 때에 대주인 남편의 밥그릇을 비워 둔 일이 없었다. - 269 쪽에서
그러나 벼슬을 한 경우, 그 관직명이 택호로 사용되었으니.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였다면 진사댁, 생원이었으면 생원댁, 혹은 판관댁, 감찰댁, 부사댁, 교리댁, 정승댁이라고 통칭했다.
아니면 어질고 덕망이 높으며 학식이 풍부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현조 달사로 널리 세상에 이름이 난 조상의 시호를 택호로 불러 문정공댁, 충양공댁이라 하였다. - 228 쪽에서
" 아이를 때리고 종을 꾸짖는 소리가 항상 집 밖으로 나가면, 그 집안의 법도가 쇠망하여 무너져 버릴 것을 알 만하다. "
" 무릇 말할 때 ' 죽겠다'고 잘하거나 ' 죽이겠다 '고 서슴없이 하는 사람은 절대로 길하고 상서로운 부인이 아니요, 걸핏하면 흐느끼어 잘 울고 요염하며 공교롭게 웃는 사람은 결코 정숙하거나 안한한 부인이 아니다" - 225 쪽에서
꿈결같이 만발하던 살구 꽃잎들은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날리며 떨어진다. 나무 아래 엎드린 초가지붕에도 연분홍 눈이 내린 듯 꽃잎이 소복하였다. 토담에 떨어지는 꽃잎은 그대로 다무락에 얹히고, 어떤 이파리는 토담을 스치며 고샅에 날아 앉는다. 그래서 길목은 맨발로 걸어가고 싶을 만큼 연연한 꽃잎들이, 비칠 듯 말 듯한 분홍빛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 126 쪽에서
대보름 밤이면 으레 남자들은 동산으로 달맞이를 하러가고, 달불놀이를 하며 한 동아리로 어우러져 달집을 사를 때, 여자들은 마을 가까이 있는 다리로 어울려 가서, 자기 나이 수대로 이 끝에서 저 끝가지 오가며 다리를 밟는 것이었다. 답교는 많이 할수록 좋다 하였다. 그렇게 하면 일년 내내 다리가 아프지 않기 때문이었다. - 236 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