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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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잘 정리된 글과는 달리 논리가 없고 두서가 없으나 그 어떤 글보다 진솔하며 진정성을 가져서 좋다. 소로의 다른 글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의 편지에도 소로의 정신과 사랑과 삶이 같이 녹아져 있다. 읽다 보니 몇몇 편지들이 블레이크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내게 보낸 편지처럼 다가왔다.


산을 인위적인 벽으로 둘러싼 곳보다 더 진정한 신전이라고(p68), 그리고, 교회에 들어설 때 드는 경외감을 산 정상에서 느낀다고 한다(p171). 동의한다. 머리로가 아니라 내가 발로 몸과 마음으로 하는 동의다. 또한 어떤 곳이든 그 장소를 신전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장소에서가 아니라 먼저 자신 안에 신성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동의한다. 소로는 인간이 세운 신전보다 자연이 세운 신전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다.


그의 글과 말은 매우 촘촘한 옷감이다(p105). 그 촘촘한 옷감으로 외투를 짓듯이 진실한 마음과 진정한 태도로 글을 썼다. 옷이 낡아 가듯이 몸과 나이가 낡아 가고 있지만 그의 정신은 갈수록 촘촘하게 다져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다른 글들은 낡아 사라져 간 것과 달리 그의 글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생각에 옷을 입히고 있다.


여행을 사랑하는 자 소로! 인생은 나그네길, 순례자, 여행자, 여행자는 가볍다.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툭툭 털고 나아간다. 소로의 말처럼 얼마나 깨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얼마나 빠르냐, 얼마나 멀리 가느냐보다는  어디론가 향해 있음도 중요하다. 소로는 충분히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p128).


"... 내가 가진 재산은 무한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자꾸만 미소가 지어집니다. 내 은행 잔고는 아무리 거내 서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나의 재산은 소유가 아닌 향유이기 때문입니다(p148)

이 말에 조선시대 문인 송순의 시조가 떠오른다. “십 년을 경영하야 초려삼간 지었나니/ 반칸은 청풍이요 반칸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김화영, <바람을 담은 집> 서문에서) 청풍명월은 너무 커서 집 안에 들여 놓을 수 없다. 그러니 둘러 다니며 볼 수 밖에. 소로의 "소유보다 향유"가 이 시조와 일맥상통한다. 존재는 소유가 아닌 누림과 향유로 더욱 깊어져 간다. 소유 욕망은 인생을 가라앉게 한다. 그러나 존재의 욕망은 여행자요 순례자로 나아가게 한다. 그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인가? 소로의 정신은 가라앉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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