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한 유명한 말로 시작해 보지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동독을 택한 그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입니다. 파시즘이 사라질 때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새기고 가는 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지요. 참으로 무서운 통찰입니다. 저는 이 말이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정곡을 찌른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시절 내내 군사 파시즘과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86세대가 부지불식간에 파시즘을 내면화한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안의 파시즘’, ‘아주 일상적인 파시즘’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꼰대론’은 86세대의 내면에 형성된 이런 역설적 요소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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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세대는 쉽게 말하면 현재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정치 엘리트 그룹을 말합니다. 그들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이들이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는 군사독재 시대로, 전두환이라는 희대의 독재자가 그야말로 야만적인 폭력을 자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들은 그런 폭력 정권에 용감하게 맞섰던 것입니다. 그 용기와 희생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내 한 몸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의식을 젊은 세대가 폭넓게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라는 어마어마한 역사적 업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세대가 오늘의 한국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정말 멋지다고 칭송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만든 주역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정치 민주화는 이루었으나, 사회 민주화, 경제 민주화, 문화 민주화는 사실상 전혀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합니다. 그들의 성취와 한계를 균형 있게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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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헌법 제1조 그것은 "인간 존엄은 불가침하다(Die Würde des Menschen ist unantast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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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박정희라는 인물이 한국 사회에 끼친 해악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영락없이 박정희와 만나게 됩니다. 지역감정도 박정희가 만든 작품입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지역감정이 없었습니다. 윤보선과 박정희가 대선에서 맞붙었을 때 박정희가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곳이 호남 지역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박정희가 ‘농민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호남 갈등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 호남 출신의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를 위협하자 박정희는 선거 전략 차원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목포 출신인데 국회의원을 바로 강원도 인제에서 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출신 지역을 거의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박정희가 1970년대 초부터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시작했고 지역주의는 박정희가 남긴 유산 중에서도 최악의 유산입니다. 그것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마비시키는 심각한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박정희는 베트남전쟁 파병을 통해 한국을 68혁명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예외 국가’로 만든 장본인일 뿐만 아니라,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한국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킨 인물입니다. 그 밖에도 그는 강남 개발을 통해 정치자금을 축적하여 한국을 ‘부동산 공화국’으로 만든 원조 투기꾼이자,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대통령에 오름으로써 한국을 ‘과거청산이 없는 나라’로 만든 친일파이고, 민주주의를 유린한 군사 쿠데타를 통해 30년간 지속된 군사독재 시대의 문을 연 독재자였습니다.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이처럼 막대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돌아볼 때 그가 남긴 최악의 유산은 바로 그가 68혁명을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68혁명이 추구한 사회와 정반대되는 사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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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베트남전에 파병을 했는데, 북한은 어떻게 했을까요? 당시 소위 베트콩이라고 불리던 북베트남 공산당의 지도자 호찌민은 김일성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합니다. ‘남에서 저렇게 파병을 하니 우리가 못 살겠다, 너희도 우리를 지원해 다오.’ 김일성은 이 요청을 거부합니다. 북한의 안보 사정 때문에 그럴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김일성과 호찌민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안보 문제를 들어 파병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호찌민의 지원 요구는 계속되었고, 이에 김일성은 1967년 말에 다른 방식의 답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여력이 없어서 병력을 파병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박정희가 더 이상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막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해, 즉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남한과의 게릴라전을 개시합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넘어온 것이 그 신호탄입니다. 그때부터 이른바 ‘무장 공비들’이 들어와 빈번하게 게릴라전을 벌입니다. 1968년 한 해에만 무려 308회에 걸친 무력 충돌이 남북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후 박정희는 ‘안보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베트남에 파병을 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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