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학계의 가야사 연구
조희승 지음 / 도서출판 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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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의 정체
-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해방 후) 북한은 조선력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학술지 [력사제문제]를 출간했는데,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문은 1949년에 [력사제문제]에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상,하)>라는 논문을 썼다. 홍기문은 이 논문에서 일제 식민사학의 요체를 명쾌하게 정리했는데, 첫째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 가야가 '임나'라는 '임나일본부'설이고, 셋째는 백제가 일본의 부용국, 즉 속국이라는 주장 등이 일제 식민사학의 요체라는 것이었다.
-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해설 : 남북한 가야사 연구의 현격한 차이', 이덕일, 2020.


1945년 해방 후 1948년 남북 단독정권 수립 시까지 3년간은 우리 현대사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활발했던 '해방공간'으로 불린다. 이 시기 역사학은 세 가지 학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을 계승한 '민족주의 역사학', 또 하나는 마르크스 역사유물론에 기초한 '사회경제사학', 나머지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뒤를 이은 이병도 무리의 '식민사학'이었다. 미군정의 비호 아래 수립된 남한 단독정권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했을 때, '민족사학자'들은 짓밟혔고,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차라리 북으로 넘어갔으며, 남한에는 오로지 '식민사학자'들만 남았다.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아들 홍기문 선생은 북한의 역사학계에서 남북을 통틀어 '식민사학'의 '요체'를 위와 같이 정리했다. 
'낙랑=평양'설은 이후 1960년대 초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 연구] 논문에 의해 박살났고, 가야사는 1963년 김석형 선생에 의해 '임나가야'는 일본에 세워졌던 가야소국이라고 밝혀지며 올바르게 정리되었다. 이후 북한 '력사학계'는 '식민사학'을 극복하려는 '주체적 역사관'으로 단순하게 정립된다. 반면,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제자들이 다수인 남한 역사학계는 '낙랑군 평양설'과 '임나 가야설'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설이란다.

'가야사'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는 '식민사학'이 따르고 있는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가야', '가라'라는 국호는 한자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고유 조선말에서 나왔다. '가야'의 국호가 '갓'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서기]... '쯔누가아라시또'... '쯔누가'라는 말은 '뿔이 난 갓', '뿔이 난 고깔'이라는 뜻이다... '아라시또'를 '아라사람', 즉 '가야사람'으로 리해하는 것이 어느모로 보나 자연스럽다. 결론적으로 '뿔 달린 갓을 쓴 가라사람'이다."
-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1장 : 가야(금관)령맹체의 형성과 흥망성쇠', 조희승, 2011.


재일교포로 북한에서 '한일 고대사'를 연구한 학자 조희승은 1960년대 초 역사학자 김석형 선생의 학설을 계승하여 서기 1 ~ 6세기 한반도 남동부 '가야'의 역사를 정리한다. 남한의 역사학계는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전'에서도 그들의 근본과 같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조차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3세기부터 존재했다는 [일본서기]의 기사를 답습하고 있었다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의 역사학은 끊임없이 '임나일본부'를 해체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 '가야'에 관한 유일한 종합적인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다. 서기 42년 '거북아,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겠다'는 <구지가(龜旨歌)>를 부른 후 '알'에서 태어난 김수로(金首露) 왕이 건국한 '금관가야' 이야기의 출처다. 흔히 '가야'는 초기 연맹체 국가에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여 우리 '삼국시대'의 변두리 역사에 머물러 있다. 북한 역사학계는 마르크스주의 역사발전단계설에 따라 청동기 시대의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철기 시대로 이행하며 봉건제 국가체제로 전환된다고 보는데 청동기 시대인 진국(辰國:삼한을 통치했던 청동기 노예제 국가)은 철기가 발전하면서 마한은 이후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변한은 가야로 진화한다고 본다. 진수의 [삼국지] <위서-한전>은 변한이 철이 많이 나는 지역이며 고깔 모양의 '갓'을 쓰는 문화를 가지고 있어 나라 이름이 '가야'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기록 [삼국지]에서도 '땅이 기름지고 오곡이 풍성하며 철기 문화가 발전'하여 번영된 문명을 지녔다던 '가야'는 주변의 고구려-백제-신라와 동등하게 '사국시대'의 주역이 되어야 했음에도 '신라 중심주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해 사장되었다. 그 결과 가야에 관한 문헌학적 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하늘(텡그리)'을 숭배하던 아시아 동북지역 부족 중 요동과 만주 일대 '고조선'의 후예들인 고구려와 한반도 남부 신라의 건국설화는 모두 동일하게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난다. 이는 '하늘'의 상징인 '새'와 관련이 있으며 시신을 새의 먹이로 바치는 '조장(鳥葬)'의 장례 예식과도 관련이 있다. '알'에서 태어난 시조를 지닌 나라는 모두 한 민족 또는 동일 문화인 것인데 가야 연맹체의 첫번째 맹주국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은유는 그 통치집단이 북쪽(하늘)의 고조선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고고학적 증거로는 김수로 금관가야의 무덤양식이 '나무곽무덤'이라는 점이다. 가야와 초기 신라의 한반도 남동부 무덤양식은 '수혈식돌널무덤'이었다. 금관가야를 제외한 다른 가야 소국(아라,고령,성산,대,소가야 등)들은 돌널무덤이었던 반면 금관가야만 나무곽무덤이었고 고구려와 같이 구리가마를 집에 걸어놓는 북방식 선진문화 또한 발견된다. '고조선인' 김수로 '통치배'의 금관가야는 이 선진문화에 힘입어 서기 3~4세기 지금의 대구와 상주까지 아우르는 가장 넓은 영역을 지배했고 금관가야 연맹체는 신라와 동등한 국력을 과시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가 고구려와 연합하였고 가야는 백제와 연합하는 이른바 '사국시대'가 전개되는데, 이 전선에 항상 등장하는 것이 '왜', 즉 '일본'이다. 백제-가야 연합세력은 조선해협을 건너 일본까지 장악했던 '해양성' 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인들은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온 한반도인들을 '뿔이 달린 외국인(가야사람)', 즉 '쯔누가아라시또'라 불렀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는 어디까지나 북규슈의 이또지마 반도 일대에 있던 가야계통 '왜'소국의 군사력이었다... 가야의 철이 '왜'와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광개토대왕)릉비의 '왜'가 기내지방 야마또 정권이 아니였다는 데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 조희승, 같은책, '3장 : 경제와 문화'


가야연맹체는 3~4세기에 가장 전성기였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기 백제를 복속시키기 위해 남하하던 4세기 말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가야-왜 연합의 대전쟁 이후 패배한 금관가야는 신라에 복속되었고 5~6세기 가야 연맹체의 맹주국은 '고령대가야'가 되었다. 고령대가야 시기는 이미 고구려 선진문명과 직접 접했으므로 한반도 남부까지 개마무사 등 철기와 무기류, 전쟁장비 등은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는 이 당시 '왜'를 언급하고 있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 간첩질을 하던 19세기 말 '사또'라는 일제 장교가 광개토대왕릉비를 탁본해 가는데, '임나일본부'가 [일본서기]라는 무덤에서 좀비처럼 일어나는 계기다.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와 신라에 의해 패퇴한 '왜'는 가야가 부산, 김해 등을 통해 바다 건너 일본 북규슈 땅에 건설한 소국(식민지)의 군사력이었으나, 동아시아를 장악하려는 일본 군국주의는 역으로 일본이 '철'을 얻기 위해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동남부에 진출하였고 이곳에 '임나(가야)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왜'는 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거다. 이것이 3세기 가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일본서기]의 허황된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명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7세기(670년)에나 등장했고 '일본'을 연 이 야마또(대화) 정권은 당시 일본땅 조차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일본서기]는 8세기에 '일본' 천왕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화적으로 지어낸 시간 순서의 앞뒤도 안 맞는 그들만의 '정사'에 불과하다. 
'일본'도 없던 시절에 그들이 한반도를 점령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임나일본부가 남부조선에 있었다는 [일본서기]의 기사와 주장은...) 그 시기(5세기)에 벌써 서부 일본이 기내 야마또 정권에 의하여 통일되여 있었다는 판단에 기초한 그릇된 설이다. 5세기의 력사적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7세기 이후의 시점에서 임나에 갔다고 하는 기사를 곧 '조선의 임나(가야)로 갔다'고 속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 있던 '가야(임나)'였던가. 그것은 '다사'가 본거지로 삼은 곳, 즉 기비의 '가야'였다...
그러므로 야마또 정권이 기비 지방의 '임나'에 인연이 있는 '다사'를 '임나국사', 즉 '미마나노구니노 미꼬또모찌'로 파견하였다고 보는 것이 어느모로 보아도 합리적이며 또 옳다."
- 조희승, 같은책, '4장 3절 : '임나일본부'의 정체'.


'임나'는 '가야'를 이르는 [일본서기]의 지명이다. 고대 한국어는 일본어처럼 받침이 없었다는데 '가야'를 뜻하는 다른 말인 '미마나'가 나중에 '임나'가 된 듯 하다. 부산과 김해를 중심으로 한 3세기 금관가야의 '해상력'은 바다를 건너 미지의 북규슈 섬 지역까지 진출하여 가야 '소국'들을 건설했고 5세기 한반도 대전쟁에서는 가야인들이 일본에 세웠던 소국들의 군대까지 총동원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였으며 6세기 고령대가야까지 해체된 후에는 가야 유민들이 일부는 백제로, 또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까야마(기비) 지방에까지 '소국'들인 '임나(가야)'를 대거 건설했다. 고고학적으로는 가야와 동일한 그 지역의 '조선식 산성'이 증거가 되는데 일본의 '가야' 소국들은 산성을 축성할 정도의 '국력'과 동원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7세기 '왜'가 아닌 '일본'이 되려는 야마또 정권은 일본 통일전쟁에서 '가야계' 인사인 기비노가미쯔미찌 다사라는 자를 '임나국사(가야총독)'로 임명하여 일본 기비(오까야마) 지방에 '임나일본부'를 세우는데 그 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야마또 정권의 '행정출장소'가 바로 7세기 '임나일본부'의 정체인 것이다. 
당시 일본 지역은 '구다라(백제)', '시라기(신라)', '미마나(임나/가라/아라/가야)' 등 한반도 중남부 '해양성' 국가들의 '식민지' 건설 각축장이었다. 그렇다고 '유사사학'처럼 우리 고대 국가들의 '제국성'이라든가 '고대 일본은 우리의 식민지였다'는 식의 보복성 주장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고대 문명의 확장은 대륙에서 전해졌을 것이고 아직 미지의 일본 섬 지방은 당연히 문명의 전파가 늦어졌을 것이며 조금이라도 먼저 '문명화'된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이 '미지의 섬'으로 진출하여 선진문명을 '이식'하는 것은 인류 문명의 당연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식민성'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적 시각이 아닌 인류 보편역사의 관점에 보아야 한다.

요약하면, 7세기 전까지 '왜'에는 '일본'은 없었고, '임나일본부'는 7세기 이후 야마또(대화) 정권이 기비 지방에서 발전하던 신라('시라기') 소국들을 견제하고 해당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가야(임나/미마나)'계 사람들을 '총독' 비슷하게 임명하여 간접지배하던 '출장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임나일본부'의 정체다.

그리하여 남한 '식민사학'이 [일본서기]를 근거로 되뇌이는 '가야사'를 바로잡는 일은, '임나일본부'를 해체하고 그 정체를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야의 역사가 형체없이 된 것은 나라의 멸망이라는 비극적 사태가 빚어낸 후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삼국사기]를 엮은 김부식의 과오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김부식은 자기가 경주 김씨의 자손이라는 데로부터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력사를 편찬하였다... 김부식은 신라에 의해 통합된 가야를 [삼국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마땅히 [사국사기]로 되여야 할 책이 [삼국사기]로 되고 말았다... '통일신라'라는 개념... 고구려 땅에 일떠선 발해의 력사를 서술하지 않고 후기신라만을 취급함으로써 '발해사'도 '가야사'처럼 말살되는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틈을 노려 가야 력사를 혹심하게 외곡(왜곡)해 나선 것이 약삭빠른 일본인들이였다. 그들은 빈구석으로 된 가야사의 자리에 일본 력사를 밀어넣었다. 그리하여 가야의 력사는 참혹히 란도질을 당하게 되였다."
- 조희승, 같은책, '4장 3절'.


***

1. [북한학계의 가야사(伽倻史)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2.[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3.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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