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말할 것
장강명.정명섭.정해연 지음 / 빚은책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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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는 힘

정명섭 저, ‘하루’를 읽고
- 수북강녕 단편집, '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말할 것' 중 두 번째 소설

이번에는 수.북.강.녕. 중 ‘강‘이 부여된 작품이다. 순서상으론 ’수‘ 다음으로 ’북’이어야 하지만, ‘북’이 부여되었어야 할 글의 저자 김자영 변호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 자리가 무한히 연기된 탓에 세 번째 한자어, 건강을 소망하는 ‘강‘으로 바로 넘어가게 되었다. 정명섭 작가 역시 이 소설을 김자영 변호사에게 헌사한다. 그래서인지 ‘북’이 부여된 비어있는 한 페이지가 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특히 장수를 소망하는 ‘수’ 다음을 장식한 빈 페이지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정명섭 작가의 작품 ‘하루’에는 ’수‘를 장식했던 장강명 작가의 ’벡사시옹의 밤‘과 달리 환상적인 요소가 없다. 대신 공상과학적인 요소가 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먼저 온 미래’ 혹은 ’곧 도래할 현재’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하루‘라는 앱을 통해 대부분 사람들이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컨설팅받는 시대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주인공이자 잘 나가는 젊은 사업가인 이현 역시 하루 앱을 중학생 때부터 사용해 왔고,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며, 이 앱을 거의 교주처럼 신봉하는 인물이다. 그는 무엇을 먹을지, 어디를 갈지 앱 없이 혼자서 결정해 본 적이 거의 없을뿐더러 여자친구와의 이별조차 앱이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실행해 버린 체제순응형 인물이다. 

소설은 이러한 이현에게 구원을 베푸는 서사를 선보인다. 구원은 이현을 그 체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한 동네책방을 통해서 그것이 실현된다는 점이 바로 이 소설의 메시지다.

소설이 그리는 앱 의존적인 시대에, 청정지역이라 할 수 있는, 전파 차단 지역에 위치한, 시대를 거스르는 보석 같은 건강한 서점이 등장한다. 바로 수북강녕이고 이현에게 드리워진 구원의 장소다. 운 좋게도, 혹은 운명적이게도 이현은 수북강녕 근처, 그러니까 창덕궁 바로 옆에 살고 있다. 어느 날 하루 앱에 오류가 발생한다. 스스로 모든 삶의 주도권을 하루 앱에 넘겨버린 이현은 사실상 일상이 멈춰버리는 재난을 맞이한다. 집에만 갇혀 있을 수는 없어 산책을 나가 무작정 걷던 중, 우연찮게, 혹은 운명적으로, 수북강녕 서점을 만나게 된다. 

이현의 발걸음을 누가 인도했을지 궁금했다. 이현은 단지 개별적인 한 사람이라기보다 이 시대, 그러니까 인공지능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영상이 텍스트를 대체하고 있으며,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소통보다 중간에 하루 앱처럼 의식이 없는 인공지능의 컨설팅을 매개로 소통해야 안전하고 효율적이라 느끼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이기에, 나는 이현을 구원하는 주체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반전 없이 정직하게 흘러가는 전개에 다소 진부함도 느꼈지만, 책이란 것 자체가 진부함의 대명사라고 할 수도 있기에 나는 이 소설의 흐름이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진리가 기발함이 아닌 뻔함 속에 있다고 믿는 나는 이게 좋았다. 

우연찮게 방문한 동네책방 수북강녕에서 이현은 잊고 있었던, 혹은 내면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었던 아날로그 방식의 매력을 느끼고,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하루 앱에 의존적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서점을 한 달 넘게 오가는 동안 그는 다시 자기 삶의 주체로 서서히 거듭나게 된다. 나중에 하루 앱의 오류가 해결되고 나서도 예전의 수동적인 삶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바야흐로 이현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현의 부활을 단순히 책을 통해서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책은 하루 앱도 추천해 주었고 그 책을 읽으며 도움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현을 구원한 건 단순한 책이 아닌, 서점에서 오감으로 만나는 책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만질 수 있고, 보고 듣고 냄새 맡을 수도 있는, 물성을 가진 책 말이다. 그런데 물성을 가진 책만으로도 여전히 부족하다. 아무리 물성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의식이나 의지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건은 주체성의 회복에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앱의 지시 없이 주체적으로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그곳에서 이 책 저 책 훑어보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시간을 보내며, 서점 주인장과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고 차도 한 모금 마시며, 책이 잘 안 읽힐 땐 그저 멍하니 서점에 앉아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바라보며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들 이면에서 나는 비효율이 아닌 사람다움을 보았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며 하나씩 알아가는 주체적인 과정은 비록 가성비가 떨어질지는 모르나, 우리가 여전히 사람이라는 것을, 노예가 아닌 주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는 무언가를 머금고 있는 것이다. 정명섭 작가는 이러한 주체성 회복을 책과 서점을 통해 보여준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 구원의 서사에 정신적이고, 어쩌면 영적일 수도 있는 건강함을 부여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나도 정명섭 작가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한 술 더 뜨고 싶다. 이현을 구원하는 방법은 이 시대에 오직 물성을 가진 책과 그 책들을 오감으로 향유할 수 있는 서점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고 강조를 해 보고 싶다. 오로지 책과 서점을 통해서만 건강한 사람다움을 지킬 수 있다고, 미래(인공지능, 하루 앱)가 아닌 과거(책, 서점)가 현재를 구원할 수 있다고, 그러므로 이 소설에 ‘강’이 부여된 것은 필연적이었다고도 소리 내어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한때 이현이었음은 안 비밀이다. 

자, 스마트폰과 쇼츠에 중독된 이들이여, 신을 신고 집을 나서자. 동네책방을 찾아 구원을 이루자.

#빚은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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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말할 것
장강명.정명섭.정해연 지음 / 빚은책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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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넘어 영원으로


장강명 저, ‘벡사시옹의 밤‘을 읽고

- 수북강녕 단편집, '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말할 것' 중 첫 번째 소설


순천 가는 기차 안에서 단숨에 읽었다.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 옆에서 소설 속으로 미끄러지듯 몰입되는 기분은 느껴본 자만이 아는 묘하고도 소소한 기쁨일 것이다. 


직업 정신이 발휘됐는지 마지막 페이지를 뒤로하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어 에릭 사티와 벡사시옹의 관련성을 검색했다.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벡사시옹은 에릭 사티가 19세기말에 작곡한 건반 연주곡으로써 한 번 연주할 때 걸리는 시간은 약 1분 정도이지만 840번 반복해야 할 것 같은 비명시적인 조건이 붙어있어 쉬지 않고 연주하면 최소 약 14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실제로 후대에 첫 연주자가 그렇게 연주해 버려 840번 연속 연주가 이 곡의 정석 주법으로 자리 잡은 범상치 않은 곡이다. 벡사시옹은 Vexations를 프랑스어로 음역 한 것으로써 짜증, 괴롭힘, 성가심, 번민 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내겐 같은 곡을 쉬지 않고 연달아 840번 반복 연주하는 행위는 연주자에게나 청중에게나 벡사시옹이 되기에, 아니 그것을 넘어서기에 충분해 보였다.


벡사시옹은 아니었지만 에릭 사티의 피아노곡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들을 때마다 환상적이랄까, 몽환적이랄까 하는 기분을 느꼈다. 문득 벡사시옹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진다. 대전으로 돌아가면 찾아 들어볼 생각이다. 그런데 걱정이 앞선다. 840번 반복해서 들어야 완청 하는 것일 텐데, 다 듣기 전에 나는 아마도 영혼이 분리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이런 걸 쉬지 않고 연주한다니, 도무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반복 자체도 힘들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행위로부터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를 것 같고, 시지프 신화도 아니고 그 반복의 굴레 속에 갇혀 아마 미쳐버리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소설 속 수현이라는 여성이 바로 이 곡을 연주한다. 그것도 벡사시옹을 6번 더 연주하라는 지침이 달린 벡사시옹 2번을 말이다 (검색해 보니, 벡사시옹 2번은 실재하지 않고 장강명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에서 수현은 벡사시옹을 840번이 아니라 846번 연속으로 연주하는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다. 840번 연속 연주한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몇 명 있었지만, 846번 연주한 사람은 수현이 세계 최초가 될 것이었다. 수현은 소아백혈병에 걸렸다가 치료를 받았고, 낫는가 싶었는데 다시 불치병인 교모세포종에 걸려있는 상태다.  


벡사시옹 연주가 소설 속의 감각적 배경이라면 공간적 배경은 창덕궁 서쪽 벽에 위치한 '수북강녕'이라는 동네책방이다.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 2번을 세계 최초로 연주하는 장소가 연주홀이 아닌 동네책방이라는 것. 나는 이 점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왜 하필 서점인가? 왜 하필 벡사시옹인가? 왜 하필 수현인가? 왜 수현은 벡사시옹을 연주하는가? 하는 질문들을 빠르게 흘러가는 기차 안에서 반복했다. 마치 벡사시옹을 연주하는 것처럼, 비록 840번까진 아니더라도, 나는 책을 덮고 눈을 감고 이 질문들을 반복했다.


이 작품이 실린 책이 앤솔로지라는 점과 책 앞부분에 적힌 편집자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눈이 떠졌다. 그 이후 생각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편집자는 이 작품에게 수.북.강.녕. 중에서 '수'를 부여했다. 목숨을 뜻하는 한자어, 장수를 기원하는 소망이 담긴 단어, 수壽. 내 생각은 곧장 수현의 남은 생으로 이어졌다. 2026년 현재, 여전히 교모세포종은 진단 후 평균 1년 반의 생존 기간만을 허락하는 불치병으로 남아 있다. 소아백혈병도 치명타였을 텐데, 그리고 그 치명타를 극복했나 싶었는데, 불치병인 교모세포종에 연이어 걸려 버린 한 인생.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그것도 참 보기 드문 비극. 그렇다면 이 비극의 주인공이 벡사시옹 1번도 아니고 2번을 연주한다는 건 인간에게 부여된 한계를 처음으로 초월하는 몸부림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어떤 인간도 넘어본 적 없는 미지의 한계선을 넘어서는 행위로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선은 생과 사를 가늠하는 선일 것이다. 치명타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맞은 이에게는 벡사시옹 1번이 아닌 2번을 완주해야 넘을 수 있는 그런 선. 그리고 어떤 화려한 테크닉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하고 짧은 곡을 846번 쉬지 않고 반복 연주한다는 건 더 이상 기교의 문제가 아닌 의지의 문제로 봐야 하기에, 수현의 벡사시옹 2번 완주는 죽음에 패배하지 않고 침몰하지도 않은 채 삶에의 의지가 마침내 실현되는 결과로 해석할 수 있고, 개인적으론 이것이 유일한 독법이어야 한다고 믿고 싶다. 


이 작품 속 수현은 장강명 작가의 아내 김새섬 그믐 대표의 분신일 것이다. 수현의 소아백혈병이 새섬의 교모세포종 1차 확진으로 대체되었을 뿐 김새섬 대표 역시 수현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치명타 (교모세포종 수술 후 재발)를 겪었다. 지금은 2차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회복 중이다. 수현이 넘어선 그 선을 김새섬 대표도 무난하게 넘어서길 간절히 기원한다.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화자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수현이 키우다 죽은 고양이의 영혼 (여기서 고양이도 영혼이 있나요?라는 질문은 하지 말자)이라는 것, 그리고 수현의 연주를 14시간 동안 감상하는 청중이 셋인데, 모두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해인, 인어, 우샨카를 쓴 신사 유령; 장강명 작가의 상상력이란!). 유일한 사람은 수현과 수현의 14시간 연주를 가능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 수북강녕 대표뿐이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수현,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최면 상태로 빠져들게 만드는 몽환적인 벡사시옹의 연주, 그리고 연주가 해가 질 무렵부터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의 경계의 시간에 행해진다는 것, 이 모두가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경계를 묘연하게 하는 장치로써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수북강녕 서점을 환상적인 곳으로 만드는데, 사람이 아닌 특별한 영적인 존재들도 충분히, 그리고 편안하게, 오갈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수북강녕 서점이라는 점도 저자가 이 작품에 숨겨둔 의도 중 하나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수북강녕은 보통 서점이 아님^^). 또한 김새섬 대표와 수북강녕 대표의 교집합이 책이므로 이 장소는 필연적으로 책방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촉은 아마도 옳을 것이다. 책이여 영원하라! 동네책방이여 영원하라! 수북강녕이여 영원하라! 


* 장강명 읽기

1. 책 한번 써봅시다: https://rtmodel.tistory.com/1256 

2. 먼저 온 미래: https://rtmodel.tistory.com/2023

3. 재수사: https://rtmodel.tistory.com/2220

4. 서성이다: https://rtmodel.tistory.com/2232

5. 벡사시옹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2259


#빚은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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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 ㅣ 미 비포 유 (살림)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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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조조 모예스 저, '미 비포 유'를 읽고


몇 년 전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가족과 함께 매주 서점에서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 책 구경도 하고 한두 권씩 사기도 했다. 갈 때마다 매대에 놓여 있던 책이 있었다. 멋진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와 빨간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숙녀가 서로를 바라보는 사진이 책 표지에 띠지처럼 붙어 있었다. 상업성 짙은 3류 소설 티가 강하게 나서 나는 일부러 멀리 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책이 공교롭게도 '그믐'에서 진행 중인 웰다잉 오디세이 9월 도서로 선정되어 버린 것이다. 책을 중고로 구매해 놓고서도 한참을 읽을까 말까 망설였다. 읽을 책들이 쌓여 있는 마당에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는 데 내 아까운 시간을 써야 하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믐 모임방에서의 여러 글들을 훑어보며 간을 보던 중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혹시 나의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좋은 작품을 코앞에 두고도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래서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적어도 십 분의 일 정도는 읽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스스로를 타이른 뒤 책을 펼쳐 들었다. 


나의 경솔한 판단이었음이 증명되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줄거리는 물론 설정과 결말까지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조조 모예스라는 낯선 작가의 문체와 필력에 감동까지 하면서. 역시 나 혼자만의 선택과 판단만 의지하면 많은 소중한 것들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사건이었다. 함께 읽기의 힘, 독서 모임의 힘은 그것들을 다년간 경험한 나조차도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신비인 것이다. 언제나 귀를 열고 눈을 열고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사랑했던 부유한 엘리트 청년 윌 트레이너는 어느 비 오는 날 길거리에서 오토바이에 치여 치명적인 C4/5 척추 손상을 당한다. 가슴 아래, 그러니까 거의 전신 마비에 가까운 상태로 평생 고통 속에서 숱한 감염증에 시달리며 휠체어에서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겨우 연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의 삶은 오토바이 사고 전후로 나뉘었다. 오토바이 사고 전의 삶은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누리던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이었다. 반면 오토바이 사고 후의 삶은 그렇지가 않았다. 물론 더 살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었다.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사는 게 오히려 고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손목도 그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의지는 충분히 스스로에게도 가족에게도 알린 셈이었다. 총명했던 그는 스스로 조력자살의 방법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는 실행에 옮기기 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부모에게 허락한다. 부모에 대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던 것 같다. 부모는 그 기간 동안 아들이 마음을 되돌리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우리의 주인공 루이자 클라크가 등장하여 활약하는 주무대가 된다.


윌 트레이너에 비하면 평범한 소시민이라고 할 수 있는 루이자 클라크에게 윌의 남은 6개월간 간병인 역할이 맡겨진 건 운명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윌의 어머니 카밀라 역시 루이자에게서 뭔가 다른 인상을 받았던 걸로 보인다. 간병 경험이 전무하고 전혀 전문적이지 않아 보이는 루이자를 선택했던 건 카밀라의 신의 한 수였던 걸로 보인다. 카밀라는 끝까지 루이자에게 따뜻하지 않게 대하는데, 그건 루이자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카밀라가 자라온 환경 탓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과연 카밀라가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했다. 


이야기는 예상했던 대로 흘러간다. 처음에 루이자는 윌이 6개월 뒤 스위스로 가서 죽음을 선택하는 계획을 몰랐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찮게 윌의 가족의 대화를 엿들으며 알게 된다. 그리고 루이자는 즉시 일을 그만두려고 한다. 조력자살을 돕고 싶은 마음도 없었거니와, 자신의 간병 행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어떤 가치가 있는지 용납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갈 만한 이유를 발견하게 하고 윌을 행복하게 해주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결국 윌의 자살로 수렴한다는 사실은 제삼자인 나 같아도 끔찍하게 여겨졌을 것 같다.  


여동생과의 대화를 계기로 루이자는 마음을 오히려 바꿔 먹는다. 자기 때문에 말도 많아지고 좀 더 활발하게 변하고 있는 윌을 보며 여러 가지 경험을 함께하면 윌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처리하는 것처럼 루이자는 윌의 부모와 간병인 네이선을 설득하여 여기저기 여행을 다닌다. 모리셔스 제도에서 며칠을 보내며 루이자는 자신의 계획이 얼추 이루어진 듯한 기분을 느낀다. 루이자는 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윌이 행복해하는 모습도 확인한다. 그러나 윌은 단호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미리 예고했던 6개월이 끝나고, 그러면 곧장 스위스로 가려는 계획을 루이자에게 실토한다. 윌은 루이자가 자신의 스위스행을 모르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루이자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기력함에 화가 났을 것이고, 윌이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루이자는 윌이 계속 살아가길 그 누구보다도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윌은 오히려 루이자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고수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를 바로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남자의 그 좌절감과 절망감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모두 앗아갈 만큼 컸을 것 같다. 반복되는 감염과 쉬지 않고 찾아오는 고통이 부수적으로 느껴질 만큼 말이다. 


루이자의 마음도, 윌의 마음도 모두 이해가 갔다. 삶에의 의지, 죽음에의 의지, 이 정반대의 마음이 교차하면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삶과 죽음의 정반대 되는 마음을 하나로 묶는 사랑. 결국 이 사랑 때문에 루이자는 한 발 늦게 스위스를 향하고 죽음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윌의 곁을 지킨다. 


정해진 레퍼토리가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루이자가 되기도 하고 윌이 되기도 하면서 인간의 다양한 심리와 감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연민과 사랑, 삶과 죽음, 이성과 감정, 이런 대립되는 것들에 대한 사유도 진지하게 할 수 있었다. 


뻔한 이야기를 전혀 뻔하지 않게 전개해 나간 작가 조조 모예스의 필력에 박수를 보낸다. 여성 특유의 문체도 곳곳에서 통통 튀어나와 읽는 재미를 더했다. 지극히 현대적인 소설이지만, 고전 같은 느낌을 선사해 준 참 드문 작품이었다. 


참고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윌이 아닌 루이자다. 꺼져가는 윌의 생명이 루이자에게 전달된 덕분에 루이자가 성장하는 이야기라는 축을 놓치면 안 된다. 아마도 6개월 동안 루이자 덕분에 윌이 행복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자기의 도움으로 루이자가 알을 깨고 나와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 부분이 묵직하게 강조되는데 소설의 마무리로써 완벽한 감동을 주었다.


#살림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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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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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연민이란


슈테판 츠바이크 저, ‘초조한 마음‘을 읽고


"병신 같은 새끼!" 


책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몰입해서 읽은 장편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며칠간 나는 이 소설 속 세계에 한 발을 담근 채 일상을 보냈다. 사유하지 않는 독서는 쇼츠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내게 이 소설은 적시에 내린 단비 같은 작품이었다. 


한국어 제목 ‘초조한 마음’은 독일어 원제 ‘Ungeduld des Herzens (마음의 초조함 혹은 조급함)’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제목만으로는 도무지 어떤 작품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츠바이크가 사용한 ‘초조한 마음’이란 진정한 연민과 대조되는 감정으로써 가식적인 혹은 이기적인 연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 말을 뒤집으면, 가짜 연민은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진정한 연민이 타자를 향한다면, 초조한 마음, 즉 가식적이거나 이기적인 연민은 나를 향한다. 겉으론 비슷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연민의 진정성은 그 감정이 얼마나 이타적인지에 달려 있는 것일까.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감정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연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 걸까. 이 소설은 내게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나름대로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외형은 안톤 호프밀러라는 소위 직급의 장교가 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접경 부근에 위치한 부대와 그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케케스팔바 저택을 배경으로 벌이는 비극적인 로맨스다. 하지만 그렇게만 읽는다면 그건 이 소설의 작가가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츠바이크의 메시지는 언제나 외형에 있지 않다. 그 어떤 작가보다도 인간 내면의 심리를 해부하고 폭로한다. 이 소설 역시 단순히 한 건장한 남자와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한 소녀와의 개별적인 관계가 아닌 그 이면에 놓인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에 주목한다. 나 역시 며칠간 호프밀러 소위가 되어 초조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미쳐버릴 정도로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체감할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병신 같은 새끼!"라고 했겠는가. 


밑줄 긋고 별표까지 친 문장이 있다. 246페이지에 나온다. 이 소설의 본질을 꿰뚫는 동시에 츠바이크의 메시지가 잘 드러난 부분이라 생각한다. 다음과 같다. 


| 나는 이 세상에 나쁜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사악함이나 잔인함이 아닌 나약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


나약함이 악의 뿌리라도 되는 것 같은 뉘앙스다. 소설을 읽지 않고는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나약함에 대한 인간의 선입견은 우유부단이나 어리석음 정도는 모를까, 좀처럼 악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저 문장이 얼마나 깊이 박힌 못처럼 중심을 관통하는 문장인지 알게 될 것이다. 


책 뒤표지에도 소개되어 있고 작품을 시작하기에 앞서 따로 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추출한 문장도 가져와본다. 236페이지에 나온다.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 대한 정의와 나약함의 의미에 대해서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


두 연민, 그러니까 진정한 연민에 대비되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앞에서 내가 말한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연민이다. 작품 속에서 츠바이크는 진정한 연민을 실제 삶으로 보여준 콘도어 박사의 목소리를 빌려 가짜 연민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호프밀러의 귀에 박히도록 또렷이 말하고 있다. 가짜 연민을 수식하는 단어는 나약한, 감상적인, 도피적, 이기적, 가식적, 자기중심적 등인데 이것들이 츠바이크가 말하는 초조한 마음의 실체다.


나약함 (인간의 약한 마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들었던 작품이 떠올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 중 하나인 '약한 마음'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약한 마음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과 비교하면서 인간의 약한 마음이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 어떤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지, 누구를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재미 삼아 따져보면 좋을 것 같아서 아래에 시도해 본다.


먼저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서 말하는 나약함의 본질은 타자의 시선과 책임으로부터 회피하고 도피하려는 감상적이고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연민이다. 걷지 못하는 케케스팔바의 딸 에디트에게서 뜻밖의 사랑 고백을 받은 뒤 호프밀러는 단순히 장애인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을 평판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밖에 없다고 고백한 에디트의 간절한 마음을 의도적으로 뿌리치고 계속해서 도망을 선택한다. 그 결과로, 호프밀러 스스로도 예측했듯이, 에디트는 높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딸 밖에 없던 케케스팔바 노인 역시 에디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죽는다. 반면 호프밀러는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자 마침 터진 전쟁(1차 세계대전)으로 도피하여 위험한 임무도 가리지 않고 수행한다. 신의 뜻인지 호프밀러는 죽지도 않고 전쟁 영웅이 되어 훈장까지 받으며 제대한다. 호프밀러의 나약한 마음은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 처음에 에디트에게 다가갔던 이유는 전적으로 값싼 동정심과 남들로부터의 평판 때문이었다. 그 이후 전개되는 모든 일들에서도 호프밀러는 한결같이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옹호하고 보호하며 사수했다. 비록 그때마다 치열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언제나 최종선택은 에디트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에디트를 죽음으로 이끌었고 케케스팔바 가정의 파멸을 가져왔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약한 마음'에서 말하는 나약함의 본질은 자신에게 쏟아진 행복과 호의에 대한 과도한 중압감과 죄책감이다. 리자와의 약혼에 성공한 가난한 하급 관리 바샤 슘코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행복에 짓눌린 인물로 나온다. 상사의 총애 속에서 단순한 서류를 필사하여 마감하면 될 일을 끝까지 하지 못한 채 결국 미쳐버리고 마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등등의 언뜻 겸손해 보이는 생각들이 점점 망상이 되고 집착이 되어 스스로를 갉아먹는 파괴력까지 갖게 되는 과정을 우린 이 짧은 소설을 통해 관찰할 수 있다. 


츠바이크가 말하는 나약함은 가짜 연민의 실체다. 호프밀러는 장애를 가진 에디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선의를 베풀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의 연민은 타자의 고통을 보고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과 부끄러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나약한 마음으로 무책임하게 에디트와 약혼까지 해버린 호프밀러는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사회적 평판을 견디지 못한 채 결국 약혼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고 도망쳐 버린다. 호프밀러의 연민이 가짜이자 나약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책임감과 희생의 결여일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진심으로 연대할 용기도 없으면서 스스로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위선, 자기는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으면서 뭔가를 크게 기여한 주인공으로 인식되고 싶어 하는 이기적이고 뒤틀린 마음이 결국 타자의 파멸을 불러온다는 것을 츠바이크는 이 작품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나약함은 자학적일 정도로 과도한 양심의 실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지나쳤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주인공 바샤는 너무나 착하고 순수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닥쳐온 갑작스러운 행복 앞에서 얼음이 되어버린다. 최고로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그에겐 치명적인 공포의 순간으로 둔갑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상사의 숙제를 끝내려 하는데, 그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과도한 책임감과 자격지심이 그를 마비 상태로 내몬 것이다. 바샤의 나약함은 비대해진 도덕감과 자기 부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타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망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과 잘못된 죄책감이 그를 불안으로 몰았고 광기 어린 파멸로 이끌었던 것이다. 


츠바이크의 나약함과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의 외형은 비슷해 보인다. 둘 다 선의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츠바이크의 나약함은 타자의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도망치려는 자기중심적 나약함인 반면,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은 타자으로부터 주어진 사랑과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자신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타자중심적 나약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츠바이크의 나약함은 결국 타자의 파멸을 이끌었고,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은 자기 파멸을 가져왔다. 


앞에서 진정한 연민의 방향성은 타자를 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나약함을 살펴본 결과 단순한 방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방향뿐 아니라 세기도 중요한 것 같다. 한 마디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너무 자기중심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타자중심적이어도 안 된다. 양 극단은 인간의 나약함이 자리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건을 하나 달면 어떨까 싶다. 진정한 연민은 자기가 아닌 타자를 향하되 자기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진정한 연민은 정말 애매모호한 경계선 위에 놓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칫하다 연민은 타자를 해칠 수도 있고 나를 해칠 수도 있다. 연민은 양날을 가진 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연민이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연민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짐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축복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다움의 중심에도 연민이 자리할 거라 나는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항상 책임과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 책임과 희생이 부재한 연민은 타자를 파멸로 이끌 뿐 아니라 값싼 동정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임과 희생이야말로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5. 체스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797

6.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https://rtmodel.tistory.com/1923

7. 위로하는 정신: https://rtmodel.tistory.com/2088

8. 초조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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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희망사전 ㅣ 다시 읽는, 복 있는 사람 3
프레드릭 뷰크너 지음, 이문원 옮김 / 복있는사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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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용어에 생기를


프레드릭 비크너 저, '통쾌한 희망사전'을 읽고


박제된 교회 용어들에 신물이 날 때마다 더럭 겁이 났던 이유는 내 신앙이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라 공중에 붕 뜬 채 냄새도 맛도 나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유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안전지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신앙은 변화시켜야 할 세상을 어떻게든 도피할 장소로 여기게 만든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다. 진공 속에서 위로와 치유만 선사해 주는 게으른 마법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단순한 지적 동의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삶의 기준이자 렌즈로써 그것을 실제 몸으로 살아내는 모든 실천을 포괄한다. 반면, 종교적인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삶을 변화시킬 힘이 전혀 없는 신앙은 살아있는 생명력과 실천을 잃어버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신앙, 즉 박제된 신앙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지속하고 있는 이들은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자신의 신앙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박제화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으면 결국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는 신앙으로 전락되고 말지도 모르니까.


익숙하던 모든 것들은 의심할 가치가 있다. 그것이 설사 나를 살려주었던 믿음과 신앙이라도 마찬가지다. 의심은 믿음의 적이 아니다. 의심은 믿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게 한다. 의심의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지 못한 믿음은 확신의 죄에 빠진 채 미풍에도 쉽게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교회 용어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익숙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늘 같은 단어, 같은 문장, 같은 맥락의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똑같은 예배를 하고 똑같은 주일을 보내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가 주신 평안은 단순히 기계적인 익숙함이 아닐 것이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풍지대는 평화가 아닌 죽음의 장소일 뿐이다. 


비크너의 '통쾌한 희망사전'을 두 달에 걸쳐 천천히 읽으며 무미건조하고 무채색이었던 내 신앙의 단면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익숙함에 젖어 그것이 마치 안전한 평화이자 건강한 신앙인 것처럼 나 자신을 별 문제없는 신앙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비크너의 글은 언제나 그렇듯 폐부를 찔러 쪼깨는 힘이 있다. 평범하게만 보이는 그의 문장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어느새 나는 그 안에서 의도된 하나님의 신비를 경이와 함께 보게 된다. 평범 속의 비범, 비크너의 매력 포인트이지 않을까. 


다양한 교회 용어들에 대한 비크너 나름대로의 정의를 사전식으로 부여한 책이다. 그렇다고 주관적이지만은 않다. 객관을 전제로 한 주관이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사전 편찬자인 비크너 개인의 신앙이 더욱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사전적 정의들은 허를 찌르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며,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다가, 깔깔대며 웃게도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반응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다시 점검하고 깨어 있게 한다. 가나다 순으로 이뤄져 있다.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궁금한 단어가 위치한 곳을 찾아 발췌독을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단어들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크너는 그런 작가이다. 그의 매력은 이런 사전식의 책에서도 여전히 통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 프레드릭 비크너 읽기

1. 주목할 만한 일상: https://rtmodel.tistory.com/762

2.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https://rtmodel.tistory.com/1059

3. 진리를 말하다: https://rtmodel.tistory.com/1783

4. 통쾌한 희망사전: https://rtmodel.tistory.com/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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