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을 주는 소녀 2~3 세트 - 전2권 영생을 주는 소녀
김민석 지음, 안정혜 그림 / IVP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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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는 공감


김민석 글, 안정혜 그림, ‘영생을 주는 소녀’를 읽고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책. 텍스트가 미처 전달하지 못하는 여백을 그림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책. 세 권으로 구성된 ‘영생을 주는 소녀’는 만화책이다. 두 시간 만에 세 권을 내리읽었다. 나도 모르게 몰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화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폭력과 기독교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성폭력이다. 에붐의 대표 이도연은 스스로가 성폭력의 피해자다. 가해자는 윤민후 목사, 윤다라의 아버지다. 주인공 윤다라는 아버지가 강단 앞에서는 훌륭한 목사이지만 강단 뒤에서는 어머니를 때리고 여러 여성 교인들을 성추행 및 성폭력 대상자로 삼는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간접 피해자이자, 아버지의 철저한 영향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낸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직접 피해자다. 이도연과 대립 각을 세웠으나 결말에 가서 무너진 윤다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되는 장지오 목사 역시 장환의 딸로서 처음엔 몰랐으나 나중에 아버지가 다양한 방식으로 폭력자에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윤다라와 장지오는 모두 아버지의 그늘 아래 눌려 순응적인 삶을 강요받았던 피해자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많은 여성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윤민후와 장환, 이 두 사람은 모두 1세대 아버지, 목사, 회장 자리에 앉아 부와 권력을 거머쥔 가부장적 폭력자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소설의 구도만 봐도 이 작품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특히 성폭력으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오점을 기록한 한국 교회의 단면을 얼마나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다행히 ‘영생을 주는 소녀’는 이런 타락한 한국 교회의 단면을 고발하는 데에 멈추지 않는다. 또한 가증스러울 정도로 파렴치한 폭력자들을 효과적으로 처벌하는, 말하자면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갚고 다스리는 방식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월터 윙크가 말한, 이른바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에 매몰될 뿐이다. 대신 이 작품 속에서는 직간접적인 폭력의 피해자로 등장한 윤다라, 이도연, 장지오, 이 여성 트리오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데,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을 해결하기 위해 타자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는 기독교에서 황금률로 알려진 예수의 말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의 가시적인 성취로도 보인다. 폭력의 희생자가 가해자를 향해 복수가 아닌 용서를 택하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잠재적 폭력의 가해자가 잠재적 희생자의 마음을 공감하여 잠재적 폭력을 예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공상과학적 장치 '토브'의 메커니즘이 바로 '공감'이기 때문이다. '토브'는 히브리어로 '좋았더라'의 의미를 가지며 성경의 창조기사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도연이 개발한 프로토 타입을 윤다라가 개량하여 작품 속에서 폭력에 저항하고 해결하는 키로 작동한다. 즉, 이 작품의 시작은 폭력이었으나 끝은 공감을 통한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나아간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작품의 시작이 폭력이고 끝이 공감이라면 중간과정은 어떠한가? 세 권으로 구성된 이 장편 만화는 기본적으로 공상과학을 기반으로 하지만 폭력, 살인, 강간, 배신, 복수가 넘실대기 때문에 스릴러 소설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겠다 싶다. 가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스릴러 혹은 범죄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페이지 터너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비단 흥미를 유발하는 목적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윤민후나 장환이라는 개별적인 악에 머무르지 않고 이 책은 인간의 보편적인 어두운 구석을 비추고 드러낸다. 특히 폭력성이 원래 인간에게 내재된 것인가, 아니면 어느 특정한 시기에 후천적으로 얻게 된 것인가, 하는 폭력의 탄생에 대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지탱하는 두 개의 거대한 축은 정의와 공의다. 느헤미야의 김근주 교수는 여호와의 공의를 공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한 손길 혹은 흔적이라고 믿는 나는 바로 이 능력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유전자나 환경 혹은 본능에 충실하게 살 때 비롯되는 ‘인간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인간다운‘ 모습을 추구하고 구현하기 위한 정석이자 좁은 길이라 믿는다. 또한 이 공감이라는 소중한 힘은 이 책에서도 소개되듯,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보상 심리처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선한 행위의 한계를 초월하여 마침내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길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토브'라는 공상과학적인 도구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읽고 해석해 낼 때 나는 그 힘이 충분히 발현되고도 남으리라 믿는다. 


#IVP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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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밑에 헤르만 헤세 선집 2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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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의 그늘 밑에


헤르만 헤세 저, '수레바퀴 밑에'를 다시 읽고


재독의 힘은 초독 때 주변으로 밀려났던 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로 발현된다. 또한 독자의 눈을 넘어 작가의 눈으로 읽는 텍스트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멀리 떨어져 관조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풍경 속으로 성큼 들어가 그것과 동화되어 이전보다 공감각적이고 입체적인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 7년 만에 다시 읽은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는 특히 그랬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작품을 나는 재독이 아닌 삼독을 했다. 중학생 시절에 가장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헤세를 찾았던 것 같다. 자아의 발견, 성찰, 성장, 성숙, 그리고 분열을 거치고 마침내 합일에 이르는 내면의 여정을 중심으로 한 숱한 이야기들이 내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길을 뚜벅뚜벅 걷게 하는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준 게 아닌가 싶다.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헤세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그렇게 나는 헤세를 다시 만난다.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알려진 ‘수레바퀴 밑에’를 가장 먼저 고른 이유는 선집 읽기에 앞서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 주인공인 한스 기벤라트의 운명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또한 재독의 고유한 맛이리라). 이 책을 다시 읽는 내가 이제 곧 쉰을 바라보는 나이라서 그랬을까? 이번엔 억압의 상징인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음을 맞이했던 한스를 이해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한스의 아버지, 마을 목사, 학교 교장, 그리고 마울브론 신학교를 담당하는 교장을 비롯한 여러 선생들이 이루는 수레바퀴의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말하자면 희생자의 입장을 공감하는 차원을 넘어 가해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레바퀴를 돌리고 유지하고 있는지, 그들이 만들어낸 (혹은 답습한) 그들의 무의식적인 삶의 패턴이 후대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과연 그들은 인지라도 하고 있는지, 혹시 그들 역시 더 큰 의미에서 보면 피해자가 아닌지, 그렇다면 가해자는 도대체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었다. 


우선 구두장이 플라이크 아저씨를 제외한 나머지 어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한스를 자살로 몰아갔던 그 무거운 수레바퀴의 본질은 아마도 질서 유지를 위한 규율, 규범, 규칙 등으로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를 생각해 볼 때 나는 그 답으로 권위자, 혹은, 좀 더 넓게는, 생각 없이 순응적으로 사는, 인간답지 못하고 인간스럽기만 한, 기성세대라고 답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고 씁쓸해졌다. 7년 전 읽었을 땐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기성세대인, 한스의 아버지, 마을 목사, 학교 교장 등의 어른들을 비난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들이 단순하게 비난할 대상이기보다 그들 역시 피해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수레바퀴의 중추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들의 주체성을 고려할 때 그들 중 그 누구도 주동자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어떤 능동적이고 악한 의도로 한스를 파멸시키려고 애쓴 사람이 없었다. 또한 한스가 주검으로 변한 이후에도 구두장이 플라이크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한스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주체를 상실한 채 무의식적으로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수레바퀴를 돌리는 자를 넘어 수레바퀴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들로 보일 만큼.


순응. 나는 수레바퀴의 일부가 되어 수레바퀴를 돌리는 장본인들을 표현하는 단어로 '순응'이라는 단어를 고른다. 그들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이기도 하며, 아이들의 전인적인 성장을 위해 애쓰는 선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 타이틀 뒤에 숨어 개성을 거세당한 채 그저 그 타이틀에 걸맞은 일을 해댈 뿐이었다. 마치 큰 기계의 부속품처럼, 마치 그것이 자기가 후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 속에 빠져 있으면서 말이다. 


수레바퀴는 개성이 거세된 획일성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억압의 중추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고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수레바퀴는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의식적인 의도가 아닌 무의식적인 본성이 발휘된 실체,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생성된 유기체인 것이다. 또한 여기서 나는 한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한스는 수레바퀴라는 유기체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사고사도 자살도 아닌 타살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리는 것이다. 한스는 생각 없는 어른들의 순응이라는 수레바퀴가 낳은 범죄에 희생당한 셈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는 순간이다. 


이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다. 한스도 어른들도 아닌 수레바퀴 밑에서 순응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다. 이 아이들은 선택받은 모범생이라고도 불리고 엘리트라고도 불리게 된다. 그들은 그저 수레바퀴에 굴복하고 순응했을 뿐인데 주류라는 견고한 성역에 진입하게 되고 사회적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수레바퀴가 만드는 피의 피라미드 상층부로 올라가 더욱 거대한 수레바퀴를 이루는 주요 부속품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수레바퀴는 대를 거듭하며 점점 더 삶의 중추로 자리 잡게 된다. 수레바퀴가 생존하고 진화하는 기전이다. 생각 없는 어른들과,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자라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을 대체하게 될 생각 없는 아이들이 이루는 완벽한 조화가 빚어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획일성에 저항한다. 질서라는 멋들어진 용어 이면에 숨은 인간의 탐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다양성과 개성이라는 단어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생명의 가장 큰 신비를 다양성이라고 보는 나는 순응에 길들여진 모든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의 옷을 입고 행하는 행동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당신에게 주어진 일과 삶을 아무 생각 없이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고. 그것이 남을 파괴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만 없을 뿐 남을 죽이는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다른 사람을 죽일 의지가 있든 없든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는 것이라고. 죽일 의지 없이 행한 살인은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될뿐더러 의도적인 살인보다 훨씬 쉽기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게 아니었냐고. 당신의 그 생각 없는 순응이 비겁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냐고. 그리고 그것들이 이룬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 수레바퀴가 영혼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그리고 나는 감히 순응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순응으로 말미암아 거세된 자신의 주체를 꼭 찾아 회복시켜 보라고 말이다. 그것도 가능한 이른 나이에. 자칫 교만의 구렁텅이로 빠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이 시도가 꼭 해볼 만한 과업이라고 믿는다. 교만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교만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거니와, 교만을 느껴보지도 않고서 겸손이라는 위대한 가치를 동경하고 지향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응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를테면 개성이라 부를 수 있는 나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애써 보길 권한다. 그래야 생각 없이 순응하지 않고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발적인 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도 모르게 돌리고 있는 수레바퀴의 참혹한 본질을 의심하여 알아채고, 나아가 고발하고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는 영혼이 더 이상 없는 세상, 우리 모두의 세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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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멸종 -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
이정모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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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 변하면 된다


이정모 저, '찬란한 멸종'을 읽고


다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읽어볼 수도 없겠지만) 이 책의 저자 이정모처럼 과학 책을 맛깔나게 쓰는 작가가 한국에 또 있을까. 적어도 내가 알기론 없다. 독보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그의 저서를 여러 권 읽었지만 돈이 아깝거나 도움이 되지 않다거나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그의 글은 첫째, 재밌다. 유쾌하다. 둘째, 유익하다, 공부가 된다. 셋째, 쏙쏙 들어온다. 이러니 남녀노소 누구나 교양 수준의 과학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서 이정모의 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름 생물학 박사학위 소유자인 나조차도 이 세 가지 장점을 누리며 몰입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타깃 독자가 청소년에 국한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한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찬란한 멸종'은 제목부터 호기심이 인다. 그러나 책을 열고 프롤로그를 조금만 읽다 보면 금방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부분을 발췌해 본다. 다음과 같다. 


| 새로운 생명이 등장하려면 누군가 그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멸종이라고 합니다. 흔히 멸종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새로운 생명 탄생의 찬란한 시작이기도 합니다. 책 제목을 '찬란한 멸종'이라고 지은 이유입니다. |


그렇다. 멸종은 그것이 가진 어감만큼 그렇게 무섭거나 대단한 것도 아닌 셈이다. 생명의 탄생은 경이로워하면서 멸종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모순일 수 있다는 말이다. 멸종이 없으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이뤄지지 않을 테니까. 


이 책의 매력은 멸종의 의미를 정확하게 짚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부제에서도 밝히듯 이 책은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이다. 말 그대로 지구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아가면서 점점 더 과거를 기술하며 우리에게 여러 생명의 탄생과 그것이 가능했던 여러 차례의 멸종을 설명해 주는 책이다. 이 책만이 가진 독특한 장점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역사를 거꾸로 훑으며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가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미래 인간이 멸종한 이후 시점부터 시작하는데, 첫 화자는 인공지능이다. 그것으로 시작으로 여러 생명체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당시 역사를 조명한다. 먼 과거에는 사람이라는 종이 탄생하지도 않았을 때인데 어떻게 사람이 화자가 될 수 있냐고 따지는 분은 설마 없겠지? 아무튼 이 부분에서도 이정모는 정말 영리하다. 방금 전 바보 같은 질문조차도 나오지 없도록 그 당시 현존했던 생명체의 입을 빌려 지구의 역사를 들려주도록 이 책을 구성했으니 말이다. 나는 감탄하면서 즐겁게 읽었다.


기후 위기로 인간은 멸종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문제는 지구 역사상 있었던 여러 멸종의 원인도 기후변화였지만, 지금 인간이 맞이하고 있는 기후변화는 천재지변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는 모두 인간 활동의 결과이다. 즉 인간만 변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말이다. 이 책 역시 다른 생명체의 목소리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명징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희망도 놓지 않는다. 적어도 지구 기온의 상승이라도 막을 수는 있다고, 그것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 역시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인간은 다시 대멸종을 초래하는 주범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능력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내게 남은 메시지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인간만 변하면 된다."를 꼽겠다. 그렇다. 인간만 변하면 된다.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조차 알고 있다. 알고도 변하지 않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이라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바란다. 편리함이 아닌 불편함을 재고하고 기꺼이 선택할 수 있기를, 자본주의와 과학시대라는 멈추지 않는 기차의 동력에 브레이크를 인간 스스로 걸 수 있기를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도 언젠간 멸종을 면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자멸은 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자멸만이 아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타 생명체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테니까 살인자라는 타이틀까지 거머 줘야 할 테니까.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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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예배의 순간
정혜덕.하늘샘 지음 / 비아토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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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덕, 하늘샘 저, '하루, 예배의 순간'을 읽고


소소한 일상 가운데 깃든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느끼게 해 주신 고마운 두 분께,


위도 37.4의 대한민국 서울과 위도 42.9에 위치한 미국 미시간 주의 그랜드 래피즈 사이의 거리를 살펴보니 약 만 킬로미터 (육천오백 마일) 남짓 되는 것 같더군요. 비행기로 18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직항은 존재하지도 않네요. 참 먼 거리입니다. 하지만 저의 첫 미국이 미시간 주와 남쪽으로 접하고 있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여서 그런지 그 거리가 낯설지만은 않아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11년 미국 거주 경험이 이 책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미국을 모두 경험한 저에게는 편지에서 배경으로 깔려있는 혜덕 작가님의 한국과 늘샘의 미국이 친숙하게 다가왔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거리감도 거의 느끼지 못했어요. 덕분에 서로 다른 문화와 생활환경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편지의 주제였던 '예배와 일상' 혹은 '일상 속에 깃든 예배'에 좀 더 집중해서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한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미국에서 사제로부터 견진성사까지 받은 성공회 교인인 적도 있었기에 두 분의 신앙 배경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답니다. 


이제 책을 다 읽고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두 분이 만 3년간 주고받으신 편지를 공식적으로 훔쳐본 저 나름대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랄까요. 아니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늘샘이 감사하게도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저에게 한 부를 보내주셔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랄까요. 그것도 아니면 이 책이 제게 남긴 잔잔한 흔적이 저를 이 자리로 불렀기 때문일까요. 몇 자라도 남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저는 이렇게 늦은 밤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노트북 화면 위 깜빡거리는 커서를 노려보고 있답니다. 


두 분의 편지를 읽으며 모처럼 제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는 기분을 느꼈어요. 제 마음이 그만큼 평소에 무뎌지고 딱딱해져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좀 더 부드러운 남자가 되어야 하는데, 두 분 때문에 뜻밖의 반성도 하게 되었네요. 저는 이 책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아들에게 저녁을 챙겨주고 난 뒤 실내자전거를 타면서 읽었답니다. 딱 열흘이 걸렸네요. 한 번 탈 때 30분가량 소요되는 걸 감안하면 300분, 그러니까 5시간 정도 걸려 앵앵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200 페이지 밖에 안 되고, 물리적으로도 손에 잡기 딱 좋은 판형이라 텍스트 수는 분명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였을 텐데, 평소에 책을 조금 빠르게 읽는 편인 제가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나 생각해 보았어요. 쉬운 소설이었다면 아마 3시간 채 걸리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딱히 집중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다른 책보다 더 집중해서 읽느라 하루 목표인 10킬로미터를 달성했는지 모를 때도 있었답니다. 아마 저도 모르게 두 분의 편지를 눈으로만 읽었던 게 아니라 제 일상에서도 예배의 순간이 언제인지 여러 번 진중하게 물으며 마음으로 읽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덕분에 지난 열흘 동안 저의 자전거 타기는 저만의 예배가 되었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를 경험해 버린 셈이랄까요?


일상에 깃든 예배의 순간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에 침투하여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사로잡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그저 상투적인 행위를 했을 뿐인데도 마음과 생각의 주파수가 하나님의 그것과 맞춰지는 순간 우린 예배자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어요. 예배하기 위해 옷단장, 몸단장, 마음단장을 하는,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익숙한 공예배가 아니라 일상의 예배, 삶의 예배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을 뿐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이뤄지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답니다. 


책을 읽으며 반성도 많이 했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견고해진 저의 마음을 느꼈거든요. 어느덧 감사가 사라져 가고 분주한 마음이 가득한 저의 일상에 더 많은 예배의 순간이 깃들길 바라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더 많이 의식적으로 알아채고 다시 얻은 이 두 번째 인생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지금은 한국 시간으로 밤 11시가 막 넘었습니다. 혜덕 작가님은 주무실 시간이네요. 미시간 시간으로는 이제 아침 9시가 지났습니다. 늘샘은 분주한 아침을 지나 일과를 시작하셨겠어요. 저도 이제 잠을 청하려 합니다. 저는 단 한 번뿐인 편지를 이렇게 쓰지만, 참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아마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각자의 일상에 깃든 예배의 순간을 알아차리고, 더 나아가 그 순간들을 감사함으로 즐기고, 또 그 순간들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기쁨까지 누릴 수 있길 바라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대전에서 영웅 드림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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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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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것들, 그리고 고독

보후밀 흐라발 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시끄러운 고독’. 사실, 제목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책이다. 중고서점에 들를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마주쳤던 책. 그러나 나는 이상하리만큼 한 번도 그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책을 볼 때마다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은 ‘아마도 이 책 또한 과대포장된 제목의 책’일 것이라는, 별 근거 없는 나의 상처 입은 신념이었던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펼쳐보다가 적잖은 실망을 했던 적이 어디 한 두번이던가. 이 책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게다가 저자 이름도 생소하고 해서, 난 그냥 제목만을 읽고 표지만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최근, 평소에 내가 참 좋아하는 필체로 글을 쓰시는 지인이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쓴 것을 보았다. 익숙한 제목과 익숙한 표지, 그러나 낯선 내용. 순간, 내가 중고서점에서 그 책을 볼 때마다 했던 생각이 철저히 틀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말에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중고서점에 들려 그 책을 구입했다. 다행히 그 책은 비슷한 자리에 꽂혀 있었다. 마치 계속해서 내 손길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 책은 장편소설로 분류되지만, 상당히 짧은 분량의 작품이다. 그다지 큰 집중을 하지 않아도, 두 어시간에 다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의 제목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과대포장된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 한타는 삼십 오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습하고 퀴퀴하며 어두운 지하실에 위치한 그의 작업장에는 압축기 한 대와 수많은 종이 (책)와 쥐들이 산다. 저만치 위에서는 언제나 화가 난 듯한 소장의 불평과 잔소리가 큰소리로 들려온다. 늘 구부리고 일을 하느라 허리가 구부러지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마치 시끄러운 세상과는 단절된 듯 고독 속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한타.

이야기만이 아닌 글에서 시적 이미지를 떠올려보길 좋아하는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한타와 그의 작업장을 머리 속에 그려봤다. 꽤 흉측하고 기괴한 그림이 그려졌다. 내 그림 속에서 한타는 마치 꼽추와 흡사했다. 저자가 묘사한 것처럼 잘 씻지도 않는 그의 몸에선 곰팡이 냄새와 쥐 냄새가 나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몰골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가 즐겨 마시던 맥주를 파는 곳에서 계산할 때 옷 속에서 쥐가 뛰쳐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읽으니 더욱 내 그림 속의 한타는 처참하고 처절한 인간의 대표가 되어버린 듯했다. 잊혀진 듯한 인물, 그리고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인물.

그러나 한타의 일상은 압축기가 내는 괴물 같은 소리나 쥐들이 은밀하게 내는 조그만 소리, 혹은 소장의 고함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시끄러운 세상만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그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폐지를 압축하는 성실한 사람만도 아니었다. 그는 폐지가 되기 직전의 수많은 책에서 추출한 어마어마한 양의 문자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마치 폐지를 압축하듯 고독하게 머리와 몸에 압축하여 흡수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시대가 원하지 않거나 남아돌거나 잘못 만들어진 책들을 파기하는 작업의 맨 마지막 단계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그가 섭렵하는 지식의 출처도 모두 시대가 어쨌거나 파기하길 원하는 책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좋아한 건 고전적인 책들이었고 , 또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대가 원하는 책들은 그의 냄새 나는 지하실 작업장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테니.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고성능의 압축기가 개발되었다. 한타에게는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폐지를 압축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 압축되어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 가운데 나름대로의 자존감을 찾기도 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계는 그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했던 양의 책들을 단 몇 시간만에 해치웠고, 그가 휴가까지 반납하고 몇 푼 안되는 수당을 받으면서 일을 해야만 마칠 수 있었던 일은 멋드러진 유니폼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희희낙낙거리면서 일을 마치고 어디 놀러갈까 이번 휴가에는 어디 갈까를 지껄이면서 진행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로 변해버렸다.

한타는 말문이 막혔다. 더욱 시끄러워진 기계와 전문성이나 경험 없이도 충분히 자신이 했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단시간에 처리하는 젊은이들의 시끄러운 지껄임 가운데 한타는 더욱 고독했다. 그는 늙었고, 그가 은퇴 후 사려고 마음 먹었던 그 압축기 또한 이젠 시대에 걸맞지 않은 저사양의 그것이 되어버렸다.

그곳에 한타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습하고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 작업장과 그 안을 언제나 가득 채우고 있던,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책들, 그리고 그와 동반자였던 쥐들이 있는 그 작은 세상이 그에겐 그나마 위로요 안식처였는데, 이젠 그마저도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한 것이었다.

세상은 더욱 시끄러워졌고, 한타는 한층 더 고독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작업장을 찾는다. 늘 하던 압축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압축기에 넣은 것은 폐지가 아니었다. 자기자신의 몸이었다. 그렇게 그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고독 속으로 생을 마감한다.

다소 끔찍한 책의 마지막 설정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강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그의 고독에 가슴이 미어졌고, 이해가 충분히 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왠지 모를 동질감까지 느껴졌다. 내 안에도 한타의 모습이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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