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 이야기가 있는 답사 여행
김학천 지음, 황은관 그림 / 선율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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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이유.

김학천 글, 황은관 그림,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를 읽고.

감사하게도 나는 아직도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자못 숙연해진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그 공간. 이따금 들리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마저도 마치 그 안에 깃든 영령을 추모라도 하듯 목소리를 아끼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 간혹 붓으로 그린 듯 하얀 구름이 군데군데 떠있던 그 공간. 비록 그 시대를 살지 못했지만,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났던 부모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래서였을까. 하늘을 찌르듯 우뚝 솟은 탑과 숱한 이름이 적힌 위패와 그들이 조각된 커다란 조형물에 둘러싸인 채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 시절, 여름방학 때 고향 부산에 내려가 버스비만 들고 혼자서 훌쩍 떠난 즉흥적인 일탈에서 나는 부산 중앙공원 (구 대청공원) 안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충혼탑을 찾곤 했다. 충혼탑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나라와 겨레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부산 출신의 국군 장병과 경찰관을 비롯한 애국 용사들의 영령을 기리는 위령탑이다. 

최근 선율 출판사에서 의미가 깊은 책을 하나 냈다. 수작이다. 제목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이어서 부제를 확인했다. ‘이야기가 있는 답사 여행’. 금세 이해가 갔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보를 담은 딱딱한 책이 아니었다. 저자는 16명의 독립운동가를 선택하고 그들의 자취를 따라 직접 길을 나서 답사를 한 뒤, 그로부터 얻은 살아있는 감상을 절제된 글로 담아냈다. 역사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어 길 위로 나서길,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직접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답사에 동참하길 촉구한다. 책은 독립운동가 한 분 당 한 꼭지, 그러니까 총 16 꼭지로 되어 있다. 각 꼭지의 마무리는 저자가 답사 때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그의 답사 여정과 간단한 안내 및 정보를 담고 있다. 또한 각 독립운동가에 대해 그려진 포스터가 압권이다. 잘 그려진 그림은 언제나 글을 배가시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대학생 때 가끔 찾던 충혼탑에서의 그 숙연함이 자연스레 떠오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영혼은 독립운동이나 한국전쟁 혹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넘어 대한민국을 지금까지 있게 한 든든한 바탕이 되어 21세기 현재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 한 편이 묵직해진다. 감히 공감할 수도 없을 만큼 그들은 내가 살아낸 시대와 많게는 백 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이 슬프고도 허망한 말은 현실이 되었고, 그들의 피 위에 서 있는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반면, 독립운동과 정반대 편에서 앞장섰던 친일파들의 부와 권력의 흔적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논리는 나라와 상관없는 사적인 욕망과 합쳐졌고, 어려운 시기에 많은 이들은 그 조류에 순응하거나 편승하여 그른 것을 옳다고 했고 옳은 것을 그르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아 실세를 쥔 사람들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큰 소리를 떵떵 치며 살아가고 있는 반면, 조용히 정의를 위해 사욕을 포기하고 불의에 저항하여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은 가난과 헐벗음을 견뎌내야 했거나 비굴하게 살아가야만 했다. 이 책과 같은 글을 읽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거를 부인하거나 거짓 과거를 발판 삼는 나라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언젠간 와해되거나 붕괴될 것이다. 잘못된 게 있다면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덮어두지 말고 겸허히 인정하고 고쳐나가면 된다. 실수가 있었다면 바로 잡으면 된다. 현실의 무게와 그동안 지속해왔던 거짓 합리화의 압력, 그로 인한 거짓 평화의 힘을 이겨내야만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에 대해 떠올릴 때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지고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드는 이유도 어쩌면 그릇된 역사관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횡포와 그 횡포에 무력하게 무너졌던 독립운동가들의 피, 그리고 피의 흔적들이 여전히 산재해 지금도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언론만 보고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시대다. 거짓 뉴스가 난무하고 아이들의 장래 희망란에는 과학자나 정치인이 아닌 빌딩 소유주가 적히는 시대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독립운동,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 시대를 달리 하며 이어져온 정의에 기반한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우린 현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고 제대로 된 역사의 기술과 전달이 중요한 이유는 물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독립운동’, 혹은 '저항'이 무엇인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한국에 있다면 시간 내어 저자가 친절하게 알려주는 답사 여정을 따라 몇 군데라도 꼭 가보고 싶다. 책상 위보단 길 위에서 그 정신은 살아나 나에게 말을 걸 테니까 말이다. 

#선율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3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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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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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투쟁의 여정: 풍성한 조화로움을 향하여.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영혼의 자서전’을 읽고.


|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


책을 덮고 떨리는 숨결로 큰 심호흡을 했다. 눈을 감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크레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투명할 만큼 푸른 바다, 그리고 눈부신 태양과 빛나는 하얀 섬. 그러나 내겐 낯설기만 한 풍경. 크레타의 흙은 무슨 색을 띨까? 어떤 냄새를 낼까? 문득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부는 봄철에 에게 해를 항해하며 그가 느꼈을 충만한 기쁨을 나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 작품은 일흔이 넘은 카잔차키스가 죽기 직전에 남긴 영혼의 대서사다. 책을 여는 ‘작가노트’에서 그가 밝히듯, 이 작품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다. ‘영혼’의 자서전이다. 책의 큰 흐름은 비록 여느 자서전처럼 시간 순을 따르고 있지만, 그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물리적 시간이 아닌, 그의 영혼이 자유를 찾아 나선 여정 위에서 붉은 발자국을 남긴 장구한 투쟁의 역사다. 그의 여정은 평생 오름길이었다. 밑으로 내려가거나 앞으로 평탄하게 닦인 길이 아닌, 오직 오름길만이 그의 시간을 흐르게 만들었다. 그는 계속 위를 향했고 시간은 끊임없이 아래로만 흘렀기에 그 시간은 축적되어 깊이가 생겼다. 이 작품은 그 깊이로부터 길어 오른 지혜의 산물이다. 


카잔차키스는 오직 오름길만이 신 (여기서의 신은 기독교의 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오름길, 그 희망의 숭고한 정상에 있는 그 무언가다)에게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우리 모두의 길이기도 할 그 오름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여정이 비록 그의 인생을 방랑으로 인도했지만, 그는 주저 없이 그 길을 올랐고, 숨이 다하는 날에도 그 도상에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은 불안과 악몽과 회의뿐이었고, 성숙은 절름발이 해답에 지나지 않았다. 주위는 온통 혼돈뿐이었고, 고뇌하며 걸어간 길의 끝은 심연이었다. 옆으로 난 다른 오름길의 끝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의 모든 길은 그를 심연으로 이끌어갔다. 그의 젊음과 성숙은 허공에서 전율과 희망의 두 말뚝 주위를 맴돌았지만, 나이자 들자 그는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조용히 심연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일종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신을 찾았거나 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서가 아니었다. 마침내 구원으로부터 구원되었다고 스스로도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여행의 끝은 도착이 아닌 또다시 떠나는 출발이었다. 자유롭게, 자유로부터 자유가 되어, 그 너머로. 아직 오르지 못한 오름길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올라간다는 행위 바로 그 자체가 행복이요 구원이요 천국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자신의 싸움이 끝나려고 하는 생의 마지막 기로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그건 그가 더 이상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그래도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서서 버텼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어딘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목적지에 도착하여 안락한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오름길 위의 서있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이었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여정, 즉 자유를 갈망한 투쟁은 곧 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종교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그 여정은 그의 정신과 육체의 고향인 크레타에서 시작하여 크레타에서 끝이 난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이듬해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영혼은 한 번도 크레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카잔차키스도 훨씬 뒤에야 자신의 힘이 아니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강력한 힘이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수없이 포기하려고 했던 순간에도, 그 힘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그 힘은 신이 아닌 크레타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크레타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있어 모든 시작과 끝에는 크레타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잔차키스는 진정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크레타인이었다.


한번 태어난 육체는 성장과 성숙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영혼도 그렇다. 카잔차키스 영혼의 유년기는 크레타에서 이뤄졌다. 당시 크레타는 터키의 점령 하에 있었다. 터키인들은 크레타인과 기독교인을 박해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크레타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며 일생을 바쳤다. 크레타에서, 그리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잔차키스에게 크레타의 모습이 어떻게 각인되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의 가정은 비록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많은 동포들은 터키인들에게 무참히 학살을 당했고, 어린 나이의 카잔차키스는 그 대학살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 때문에 그의 가정은 잠시 낙소스로 도피하기도 했었다. 그 시절을 회고하며 카잔차키스는 삶의 진짜 얼굴은 해골이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니 그가 성장하고 성숙하기 훨씬 전부터 몸속에서 끓어오른 주체할 수 없는 크레타의 피는 자유를 갈망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자연스레 저항과 투쟁의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가기 전 크레타에서 가톨릭 학교에 들어간 카잔차키스는 그의 삶에 있어서 첫 번째 지적인 도약을 경험한다. 오로지 공포, 공포를 정복하려는 투쟁, 자유에 대한 그리움 같은 원시적인 격정들의 지배만을 받아오다가 처음으로 아름다움과 학문에 대한 갈망이라는 새로운 정열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읽고 쓰기를, 머나먼 곳 보기를, 고통과 기쁨을 직접 경험하기를 원했다. 그에게 세상은 더 이상 그리스만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세상의 고통은 크레타인의 고통보다 훨씬 컸으며, 자유에 대한 갈망 또한 크레타인 만의 특질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영원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꿈틀대며 성장해가는 자신의 영혼에 익숙해지기 위해 방황을 시작했다. 창조주가 흙을 빚어 세상을 창조했듯, 그는 어휘를 빚기 시작했다. 


그리스 순례 후, 그는 그리스의 숭고한 업적이 단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닫고, 그리스의 비극적인 운명과 모든 그리스인이 무거운 의무를 지고 있음을 깊이 의식한 뒤 마침내 성숙할 수 있었다. 그를 성인의 세계로 안내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책임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무를 알지 못했다. 그 의무를 위해 몸과 영혼을 다 바쳐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은 깊이 깨달았지만,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 자유를 찾아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 분명한 것은 오직 인내와 명예뿐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투쟁하는 것, 그래서 피의 의무를 다하는 것. 그것만이 그에겐 분명했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카잔차키스의 투쟁은 주로 기독교 신과의 싸움에 국한된다. 이는 이 책의 상하권 중 주로 상권을 이루고 있다. 그는 크레타와 그리스, 이탈리아와 아토스 산, 예루살렘과 시나이 산까지 두루 순례하며 수도원을 중심으로 진행된 그의 영혼의 여정을 기록한다. 거룩한 아토스 산을 친구와 함께 40일 동안 여행하고 돌아온 카잔차키스는 다시 혼자가 되고 나서 스스로에게 과연 자신이 무엇을 추구했으며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되묻는다. 인간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고뇌로 가득했던 거룩한 산에서 그에게 해답이 되었던 건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가 많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방향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그리스도는 방향만 제시했을 뿐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는 못했다고 서술한다. 얼마 동안은 수도자의 삶이 지닌 신성한 목탁의 울림과 새벽기도와 성가 영창과 그림이 자신의 고뇌를 진정시켰고, 수도원 기행에서 그리스도의 투쟁을 직접 경험하며 자신의 투쟁이 용기와 부드러움과 희망을 얻었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매혹은 금세 사라졌고, 자신의 영혼은 다시금 버림을 받았다고 느꼈다. 당시 카잔차키스에게 그리스도는 그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영원한 답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 카잔차키스의 마지막 순례지는 사막이었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던 떨기나무 가운데 임했던 신과 모세가 처음 대면했던 그 거룩한 땅, 수천 년 전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바로 그곳, 시나이 산. 그곳에 위치한 수도원에서 그는 요하임 신부를 만난다. 그로부터 평생 잊지 못할 중요한 말을 듣게 된다. 첫째, 오름길에 나섰다면 꼭대기에 이르려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 것. 인간에겐 독수리처럼 날개가 달린 게 아니라 다리가 달렸음을 기억할 것. 즉, 투쟁자라면 스스로가 인간임을 잊지 말 것. 둘째, 신과의 싸움을 절대로 중단하지 말 것. 하지만 마음속의 검은 뿌리인 본능을 사탄이라 생각한 나머지 제거하려고 하지 말 것. 사탄의 유혹을 정복할 방법은 하나뿐이니 그것을 껴안고 맛보고 경멸할 줄 알게 되는 것. 셋째, 그리스도의 종교는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받아들여 신성화되고, 육체와 영혼은 적이 아니라 동지임을 깨닫게끔 가르쳐야 할 것. 악마는 영혼을 거부하라고 설득하며, 신은 육체를 거부하라고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화해를 이루게 될 것. 넷째, 신은 우리들에게 투쟁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 우리들이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건 신이 따질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님을 기억할 것.


결코 다른 수사들로부터 들을 수 없었던 지혜의 말을 시나이 수도원에서 들은 후 카잔차키스는 크레타로 돌아와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베르그송과 니체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한동안 니체에 푹 빠졌던 카잔차키스는 그의 초인 (위버멘쉬) 사상과 영원 회귀 사상에 큰 영향을 받는다. 니체를 만난 뒤 그에게 있어 불확실성과 확실성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불확실성은 확실성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꿈을 꾸게 된다. 하늘과 바다 사이의 두 어둠 사이로 스스로 빛을 내는 작은 쪽배가 숨 막히는 고요함을 뚫고 빠른 속도로 내리지르는 모습을 꿈속에서 목격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철저한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항해하고, 스스로 빛을 내며,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대담한 쪽배 (니체의 초인을 상징하리라). 카잔차키스에게 그 쪽배는 어려운 순간들에 직면할 때마다 희망이 되어 주었다. 니체를 만난 이후 카잔차키스는 형이상학적인 희망이란 참된 인간들이라면 섣불리 물지 않는 기만의 미끼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원했던 대상은 칭얼거리거나 애원하거나 구걸하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가장 인간다운 대상 (초인)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신을 죽여버린 니체를 위해 만세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영원 회귀가 니체에게는 끝없이 이어지는 순교로 생각되었으며, 두려움에서 위대한 희망을, 미래의 구세주를, 즉 초인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 초인도 결국은 또 하나의 천국, 가엾고 불행한 인간을 기만하고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을 견디게 만드는 또 하나의 신기루일 따름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고는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옷도 벗어버리고 만다.


니체 이후 카잔차키스를 사로잡은 신은 붓다였다.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하고 체류하면서 불교 사상을 탐닉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붓다는 인류를 구원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구원으로부터 구원을 행하는 구세주이자, 나그네 길에서 훌륭한 안내자인 ‘연민’을 몸소 체감하도록 도와준 신이었다. 연민을 통해 인간은 육체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고,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무와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모두 하나이니 고통받는 자를 구원해야만 한다는 사상이 카잔차키스에겐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빈에서 그는 환상인지 실제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병에 걸리게 된다. 이른바 ‘성자의 병’이라는 이름을 가진 희귀한 병이었다. 불교적 세계관에 빠진 영혼은 여자와 자는 걸 대죄라고 믿는 까닭에 그것은 육체가 죄를 범하지 못하게 막는데, 빈에서 만난 여자와 동침을 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망 앞에서 그가 경험한 일이었다. 정신적인 갈증을 많이 해갈시키긴 했어도, 붓다는 가능한 한 여러 나라와 여러 바다를 보려는 그의 갈증을 결코 풀어 주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 붓다는 인간의 육체가 가득한 세상을 불어 사라지게 하는 검은 마술사였다. 그가 어릴 적 경험했던 기독교처럼 (이 부분에서 카잔차키스는 기독교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육체나 세상을 악으로 규정했던 시대도 있었지만, 참된 기독교는 육체와 영혼은 하나이며, 세상은 장망성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시공간이다) 불교 역시 육체를 부인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잔차키스는 붓다를 만난 이후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감사해한다. 바로 만물을 처음 보듯 반가이 맞으며, 만사를 마지막으로 보듯 작별을 고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계속 움직였다. 빈을 거쳐 베를린으로, 베를린에서 러시아로 향한다. 베를린에서 만난 한 여자로부터 받은 초대를 계기로 러시아행을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카잔차키스는 역사적인 러시아 혁명의 현장에 있게 된다. 그리고 레닌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며, 비장한 각오를 다짐하게 된다. 그의 비장한 다짐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너무나 오랫동안 불의를 저질러 왔으며,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대지의 모든 아이들에게는 깨끗한 공기와 장난감과 교육을, 여자들에게는 자유와 따뜻한 정을, 남자들에게는 친절과 예우를, 그리고 꼬리를 치는 쇠약한 말과 같은 인간의 마음에게는 한 알의 밀알을 우리들이 마련해 줘야 한다. 이것이 러시아의 목소리라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으며, 나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맹세,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었고, 나는 내 인생을 포기할 각오를 했었다. 하나의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남들이 던지는 돌에 맞고,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 어떤 기쁨을 느꼈을지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동지애의 의미, ‘모든 사람은 하나다’라는 말의 의미를 내가 그토록 깊이 체험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삶보다도 숭고한 선물이 존재하며, 죽음을 정복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십자가를 지며,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죽을 때까지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자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어깨에 메고 한없이 가기만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부활할지니, 오직 그만이 행복하다. 러시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중이었다. 러시아는 한 알의 밀알처럼, 하나의 위대한 사상처럼, 비슷한 고통을 거치는 중이었다.”


카잔차키스는 레닌과 러시아를 만나기 전까지의 여정은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겼던 듯하다. 러시아 혁명 현장에서 그는 직접 두 눈과 두 귀와 두 콧구멍으로 당시 시대 정황을 보고 듣고 냄새 맡았다. 급기야 환상 중에 그는 붓다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는 에파포스 (촉감의 신, 환상보다는 육체를 더 좋아하며, 영혼까지도 육체로 바꾸고 싶어 하는 신)가 자신의 신이라는 고백까지 한다. 그만큼 영혼이 아닌 육체가 가진 중요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영혼의 오름길은 육체와 분리된 채 영혼에만 치우친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점점 그 이분법으로부터 괴리와 환멸을 느끼다가, 나중엔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묶는 길고 긴 여정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나 싶다. 적어도 카잔차키스에게 있어 영혼의 자서전은 영혼만이 허공을 걸어 다닌  투명한 흔적이 아니라, 육체를 만나 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었을까.


유럽 여행을 마치고 카잔차키스는 다시 크레타로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 후 평생의 스승이 되었던 조르바를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로 호메로스, 붓다, 니체, 베르그송, 그리고 조르바를 꼽는다. 호메로스는 카잔차키스에게 기운을 되찾게 하는 광채로 우주 전체를 비추고, 태양처럼 평화롭고 찬란하게 빛나는 눈이었다. 그리스의 민족 시인이었던 호메로스는 그에게 있어 크레타가 가진 의미와 동급, 아니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반면, 붓다는 세상 사람들이 빠졌다가 구원을 받는 한없이 깊은 새까만 눈, 베르그송은 젊은 시절에 해답을 얻지 못했던 그를 괴롭혔던 철학의 온갖 문제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던 은인, 니체는 새로운 고뇌로 그를 살찌게 했고, 불운과 괴로움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도록 가르친 장본인으로 그는 이 책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 스승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가 직접 쓴 표현은 다음과 같다. 


“조르바는 글 쓰는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갖추었으니,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인 관찰력, 마치 만물을 항상 처음 보듯 대기와 바다와 불과 여인과 빵 따위의 영구한 일상적 요소에 처녀성을 부여하게끔 해주며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지닌 듯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신성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라한 한 조각의 삶을 안전하게 더듬거리며 살아가기 위해 하찮은 겁쟁이 인간이 주변에 세워 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고향 따위의 모든 울타리를 때려 부수며,  마음에서 더 깊고 깊은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수적인 웃음을 지녔다.”


그렇다. 어쩌면 카잔차키스의 모든 여정은 조르바를 만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오름길의 끝에 신이 아닌 인간 조르바가 위치해 있을 줄은 그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와 붓다, 니체와 베르그송을 모두 합쳐 놓은 살아있는 자유의 완성작이었다. 조르바를 만나고 카잔차키스의 모든 방황은 비로소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조르바를 만난 뒤 과거의 모든 발자국들은 그저 그의 잊힌 과거의 기억으로 머물지 않고, 비로소 하나하나 소중한 의미를 띠며 숨을 쉬기 시작했고, 그의 운명의 계획이 그대로 실천되도록 만들어 준 완벽한 조각이 되었다. 


영혼만 신성하지는 않다. 육체도 신이 창조했기에 신성하다. 그의 표현을 빌면, 육체는 영혼에게서 광채를 받고, 영혼은 육체에서 얻은 솜털이 나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룰 때에만 온전하고 진정한 가치를 지니며, 둘로 나뉜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인 것이다. 영혼의 오름길은 자유를 갈망한 긴 여정이었다. 그 끝에 육체를 가진 조르바가 서있었다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이는 어릴 적부터 카잔차키스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던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육신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영혼이 육체에 갇혔기 때문에 제한과 구속을 받는다는 해석은 적어도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앞에선 힘을 잃는다. 영혼과 육체는 하나이며, 그래서 가장 자유하다. 아, 이 얼마나 심오하고 아름다운 역설인가!


이 글의 시작을 일부러 이 작품의 시작처럼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로 시작했었다. 작품 속에서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오로지 우리에게 달려 있다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내 눈엔 이 ‘세 가지 기도’가 다르게 보인다. 세 가지 기도는 단순히 서로 다른 독립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첫째 기도에서 출발하여 셋째 기도로 이어지는 어떤 하나의 여정을 나타내지 않나 싶다. 그것은 마치 영혼의 오름길을 상징하는 듯하다. 


내 해석은 이렇다. 첫째 기도는 시작 단계다. 아직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 가치가 어떤 것인지 모른 채 막연하게, 그래서 대담하게 신께 구하는 기도다. 이는 마치 자신이 영혼만으로 이뤄진 것처럼 여기는 기도로 보인다. 반면, 둘째 기도는 이제 자신이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알게 된 상태에서 신께 구하는 기도다. 영혼과는 달리 육체는 자칫하다간 부러질 수 있다. 신께 의지하여 여전히 구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육체를 더 소중히 여기는 뉘앙스가 풍긴다. 마지막으로 셋째 기도는 첫째와 둘째 기도의 단계를 초월한 기도다. 첫째 기도를 할 때처럼 자신이 영혼만으로 이뤄진 것도, 둘째 기도를 할 때처럼 영혼보단 육체를 더 신경 써야 하는 것도 아닌, 영혼과 육체가 조화로운 하나가 되어 온전히 자유함을 얻은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책의 마지막에서 카잔차키스가 고백하는 문장에서도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된다. 그는 신이나 악마, 누구의 손에서 활이 당겨졌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위대하고 순수한 힘이 계속해서 겨누어 화살을 쏘았다고 느꼈으므로 자신은 기뻐했다고 쓴다. 그리고 그에 이어진 문장은 모든 육체는 활이 될 수 있기에 모든 육체가 거룩하다는 것, 그의 생애 전체는 비정하고 만족을 모르는 손에 들린 활이었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손들이 얼마나 자주 그 활을 부러질 지경으로 당기고, 또 힘껏 당겼느냐고 질문하면서 그는 스스로 소리치며 대답했다. “부러져라!” 그러므로 그는 그의 영혼의 오름길을 끝내면서 셋째 기도를 선택하여 신께 올린 사람이었던 것이다.  


많은 아포리즘, 비유와 상징이 넘실대는 이 작품을 오랜 시간 읽으면서, 그리고 내용을 결코 다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으면서 나는 이 작품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 여긴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공감되는 것들이 있고, 이해할 수 없어도 믿어지는 것들이 있다. 이 작품은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고 적잖은 흔적을 남겼다. 덕분에 육체와 영혼, 삶과 죽음, 매임과 자유함 등에 대해서 곰곰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작품과 함께 했던 지난 반년이란 시간도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5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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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 - 값싼 구원 문화에서 참된 제자도로의 전환을 위한 대범한 시도
매튜 W. 베이츠 지음, 송일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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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충성’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피스티스의 의미 알기.


매튜 W. 베이츠 저,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을 읽고.


스캇 맥나이트는 그의 저서 ‘예수 왕의 복음’에서 오늘날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로 둔갑한 현실을 진단 및 폭로하면서 참 복음이 무엇인지를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복음은 단순히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 받는지에 관한 체계가 아니다. 복음을 개인적, 실존적, 사적인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만 이해한다면, 복음의 일부를 전부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복음은 개인 영혼 구원을 넘어서는 더 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복음은 내가 중심이 되어 어떻게 구원 받는지에 대한 방법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즉 예수가 왕, 주님이시라는 이야기다.


달라스 윌라드 역시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복음이 구원으로 축소되고 구원이 개인적 죄사함으로 축소된 것을 두고 ‘죄 관리의 복음’이라고 표현하면서 오늘날 기독교 문화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저 유명한 ‘바코드 신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면서, 마치 어떤 제품이 내용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상태인지에 전혀 관계 없이 오로지 바코드에 의해서만 기계적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구원도 그저 사영리와 같은 교리에 정신적으로 동의만 하면 얻을 수 있다거나 교회에 등록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된 이 시대의 기이한 풍토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바코드 신앙’의 핵심은 죄 용서받기 위해서는 굳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지적 동의나 일회적 결정만으로 구원으로 가는 천국 열차에 탑승할 티켓을 거머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마치 든든한 보험을 하나 들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이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여 그 의미를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값싼 구원’의 의미로 추락시킨 결과이며, 이 흐름은 자연스레 칭의와 성화의 단절을 야기한다. 달라스 윌라드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구원에 있어서 그저 추가적인 옵션 정도로 추락하고 만 현대 기독교의 실태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 우리들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는 등 역설적이고 전복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모략’의 동참자가 되라고, 다시 말해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제목에서부터 주목을 끌게 만드는 이 책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서 저자 매튜 베이츠는 위에서 언급한 스캇 맥나이트와 달라스 윌라드와 궤를 같이 하면서도 특별히 ‘믿음’이라는 한 가지 개념에 더 주목하고 그 의미를 깊게 파헤치면서 그것이 가진 더욱 온전한 의미를 회복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어쩌면 당돌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저기 저 오른쪽에 치우친 사람들에게는 자칫 불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주장을 하면서 말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시작점에 있었던 마틴 루터가 영감을 얻었던 성경구절이자,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감히 다음처럼 수정한다. “오직 의인은 충성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이렇게 믿음을 충성으로 대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대해서 풍부한 근거를 들면서 조목조목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스캇 맥나이트가 서문을 장식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매튜 베이츠 역시 복음의 정수는 예수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권능 있는 이야기라고 밝힌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 이 복음에 대한 우리의 유일하고 적절한 반응은 오로지 충성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이 충성에 대한 명확한 요구는 많은 경우 ‘믿음’이나 ‘신념’이나 ‘은혜’라는, 이미 우리들에게 어떤 획일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마치 행위와는 단절된 듯한 지적인 동의나 반지성적 사상의 냄새까지 풍기는 단어들로 인해 원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키고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켜, 마치 그것이 바울을 제대로 해석한 것처럼 여기는 현 실태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믿음’이라고 한국어로 해석되는 헬라어 단어 ‘피스티스 (pistis)’가 가진  원래의 풍부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이 책의 많은 부분이 할애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믿음과 행위의 단절로 파급된 부작용은 오늘날 복음주의권에서 너무나도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분명히 바울은 믿음의 순종이나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라는 말을 했고, 야고보 역시 행위에 대한 중요성을 강력하게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많은 교회에서는 행위의 측면을 구원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약간의 낌새만 보이기만 하면, 그것이 곧 이신칭의를 거부하는 행위론자로 오인될까 두려워 모두가 듣기 좋은 두리둥실한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순수한 신앙인이란 결코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팽배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문에서 스캇 맥나이트가 지적하다시피, 예수는 “나를 너희 마음에 받아들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너희는 안전하다” 혹은 “너희의 정통신앙을 덧입으라”라고 말씀하지 않고, “네 자신을 부정하고 네 십자가를 지라”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회개하고 내가 말한 것들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지 않고, “나의 이러한 말을 듣고 이를 행하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알고 보면, 바울만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인 예수조차 행위가 배제된 막연한 믿음만을 강조하신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만약 당신이 단지 믿기만 한다면”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며 “믿는다”라는 말의 의미를 그저 정신적으로 단 한 번만 받아들이면 마치 구원을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그동안 분위기를 조장해왔다. ‘값싼 구원’의 상황은 안타깝게도 사실상 지금도 조용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근본적인 부분에 질문을 던지고 그 해결책으로서 ‘피스티스’의 원래 의미를 우리로 하여금 더욱 풍성하고 정확하게 알길 강하게 권고한다. 피스티스를 믿음이 아닌 충성으로 해석할 때 이전엔 몰랐던 더 의미를 회복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그동안 암묵적으로 눈치를 보며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했던 난제들을 해결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물론 저자는 피스티스를 항상 충성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거시적 용어가 충성이라는 뜻에 가깝다. 충성은 신뢰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며, 믿음 및 신념과도 결부되어 있고,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영어 연상의 의미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용어라고 주장한다. 이와 동시에 충성은 지적 동의, 절대적 충성, 구체적 충성과 같이 구원을 위해 중요한 의미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저자는 특히 1장에서 믿음에 대한 오해를 쉬운 말로 풀어헤치고 있는데, 저저가 시정하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믿음은 흔히들 근본주의자들이나 반지성적인 신앙인들이 오해하듯 증거를 고려한 합리적 판단의 정반대 개념이 아니다. 참된 기독교적 믿음은 신앙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은 무모한 행위가 아니다. 참된 믿음은 비합리적으로 허공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행사하신 주권에 대한 순종의 반응이 될 때 비로소 선한 것이 된다. 셋째, 믿음은 행위의 반대가 아니다. 넷째, 믿음은 모든 게 좋다는 식의 긍정적 사고방식이나 맹목적 낙관주의가 아니다. 다섯째, 믿음은 지적 동의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이 다섯 가지는 기독교에 처음 발을 디딘 새신자들에게도 충분히 알려줄 수 있고, 알려야만 하는 사실이라 믿는다.


저자는 계속해서 복음에는 분명히 지적 동의나 일회적 결정 이상의 무언가가 요구되며, 바로 그것이 충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가 이런 주장을 처음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저명한 신학자인 톰 라이트, 마이클 고먼, 존 바클레이, 리처드 헤이즈 역시 바울의 믿음을 충성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를 대며 자신의 주장에 무게를 가한다.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는 충성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정리한다. 첫째, 복음이 진리라는 정신적 확신. 다시 말하자면, 지적 동의다. 피스티스를 충성이라고 해석한다고 해서 지적 동의를 저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선 참 왕이신 예수께 기꺼이 충성을 바칠 수 있는 만큼만 지적으로 확신하면 된다고 말한다. 둘째, 우주의 주님이신 예수께만 고백되는 충성. 즉, 충성의 고백이다.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공개 선언 (고백)은 구원의 기초가 된다고 말하는데, 공개 선언은 복음에 대한 지적 동의와 하늘과 땅의 통치자이신 예수께 개인적으로 충성하고자 하는 삶의 욕망, 의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셋째, 왕이신 예수께 대한 순종을 통해 실천되는 충성. 즉, 구현된 충성이다. 여기서 저자는 복음의 목적이 피스티스의 순종, 곧 실제적인 충성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충성은 완벽하진 않더라도 진정성 있는 순종을 통해 실현되어야만 한다. 구현되지 않는 피스티스는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구원은 육체적 여정이므로 순종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혹시라도 바울의 이신칭의 개념과 자신의 충성 개념이 상충되지는 않을까 하여 저자는 바울의 복음을 더욱 더 깊이 파헤친다. 바울이 단호히 반대하는 것은 성공적인 규칙을 수행하는 것에 의존하는 구원 체계로서의 행위이지, 왕이신 예수께 대해 구현된 피스티스, 즉 충성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알다시피 바울은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그대로 돌려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장본인이다. 순종은 행위로 이뤄질 수밖에 없으며, 바울이 반대한 행위는 그러한 자발적 순종 혹은 충성의 행위가 아니라 규칙 지향적인 구원 체계의 일부로서 주장되는 행위일 뿐이다. 결국 바울에게 구원이란 왕이신 예수께 대한 충성된 복종 가운데서 구체적인 행위의 실행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바울이 말하는 ‘참된 믿음’ 대 ‘행위’의 대립은 ‘왕이신 예수께 대한 충성으로서 실행된 행위’ 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와 별개로 수행된 행위’의 대립으로 더 정확히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충성이라는 단어를 강조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이미 깊게 고려한 듯하다. 충성으로 구원을 받는 거라면 얼마나 충성을 해야 구원을 받기에 합당할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가 준비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오직 충성으로만 구원을 받지만, 완벽한 충성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의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 아니며, 전통적으로 이해되었던 완벽한 믿음 만큼이나 실제로 행해질 수 없다. 완벽한 충성이라는 것은 요구되지도 않고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불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충성에 의해 왕이신 예수와 연합될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또한, 저자는 충분한 충성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엄밀한 규칙을 정량화하거나 개발하려는 것은 복음에 반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충성은 정량화되거나 일일이 나열될 수 없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충성이 필요한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충성이 필요한지 묻는 편이 낫다. 다시 말해,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진정성 있는 충성이면 된다는 말이다.


충성이라는 단어는 곧 제자도와 직결된다. 저자는 현대 기독교 문화가 개인적 구원과 제자도를 분리하는 경향이 있음을 파악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이 책을 통해 충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충성은 개인적 구원과 제자도가 만나는 지점이며, 둘은 그저 만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포용한다. 그러면서 제자가 되는 것과 구원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범주라고 주장한다. 복음은 총체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피스티스에 왕이신 예수께 대한 적극적 충성이 포함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복음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몰아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전도 프로그램이 정확하고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단순한 용서로의 초청이 아닌 완전한 제자도로의 초청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확하고 설득력이 있는 제자 양성 프로그램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제자도가 구원에 대한 실천적 충성의 필수 요소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라는 초청은 제자도로의 초청과 같기 때문이며, 제자로 사는 것만이 최종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복음에 대한 축약적 제시라면서 교회에서도 사도신경을 잘 활용하여 충성의 맹세로 간주하게 하면 좋을 거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기독교에 몸은 담은 지 30년이 넘었다. 이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나의 정체성으로 부끄러움 없이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보수적인 한국 교회의 풍토에 푹 젖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 역시 어른이 되고 나서도 이신칭의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행위를 믿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기며 악마화시켰던 적도 있으며,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반지성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그 당시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 줄 알았다. 그러한 풍토는 지금도 어딘가에선 주도적인 입지를 유지하며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와 사상과 마음을 장악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너진다. 그리고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거나 거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이 간단한 감상문을 통해 우리가 흔히 아는 믿음의 협소한 의미에서 벗어나, 저자가 제안하는 피스티스의 온전한 의미를 충성이라는 해석을 통해 더욱 알게 되길 소원한다.


#새물결플러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54?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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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
A. J. 크로닌 지음, 황관순 옮김 / 상서각(책동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천국의 열쇠’는 누구에게 주어질까?


A. J. 크로닌 저, ‘천국의 열쇠’를 읽고.

제목 ‘천국의 열쇠’는 ‘무엇’이 아닌 ‘누구에게’라고 읽어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지, ‘천국의 열쇠’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만약 그런 열쇠가 있다면 과연 누구에게 주어질지 독자 스스로가 진지하게 질문하도록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신학이나 철학 책이 아닌 소설이기에, 스토리 이면에 감춰진 저자의 목소리는 문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유의 다면체 모습을 통해, 저자와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의 삶까지 닿아 공명을 일으키며 마침내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도록 만든다. 

 

유념할 것은, 이 작품에 사용된 ‘천국’이란 단어가 단순히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말하는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아닌 타 종교나 철학, 이를테면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이나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현세를 등지는 듯한 장소를 떠올린다면 더 큰 왜곡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저자 크로닌이 말하고자 했던 천국은 종교적, 철학적 의미를 훌쩍 넘는다. 그것은 보다 넓고 풍성한 의미로써 개인의 종교관, 철학관을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질문하고 사유할법한 ‘인간다움’이나 ‘바른 삶’과 같은 보편적인 의미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C. S. 루이스가 말했던 ‘도덕률’이나 존 바턴이 말했던 ‘자연법’ 등이 조화롭게 지켜지고, 구약 성서에서 강조되는 정의와 공의가 순조롭게 행해지는 세상, 사람답게 살만한 세상, 살고 싶은 세상을 떠올리는 편이 이 작품 속 ‘천국’의 이미지에 더 가까울 것이다. 

 

비록 작품 속 주인공이 가톨릭 신부이고, 저자 또한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작품이 종교와 민족과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이라면, 특히 중년을 거쳐 인생의 낮은 점과 높은 점을 두루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멈춰 서서 진지하게 자신과 삶을 돌아보고, 타자와 세상을 향한 자세를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며, ‘보다 나은 인간’과 ‘보다 나은 세상’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된 신학자와 철학자의 영혼이 마침내 깨어나는 순간을 잠시나마 마주하게 될 것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방법보다는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숨겨진 두 가지 중요한 대립 구도를 하나씩 살펴보며 이 글을 풀어볼까 한다. 궁극적인 질문은 앞서 언급했듯이 “천국의 열쇠는 과연 누구에게 주어지는가?”이며, 내가 해석한 두 가지 포인트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써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고민에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등장시키는 두 인물이 있는데, 이들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해야겠다. 먼저,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인물 안셀모 밀리. 이 둘은 어릴 적부터 친구로서 같이 자랐으며, 같은 가톨릭 신학교에 다녔고, 같이 사제가 되었다. 작품의 마지막, 그러니까 그들이 너무나 상반된 삶을 살아낸 후 나이가 일흔이 넘을 무렵까지, 저자는 그들의 전 인생을 통해 두 사람을 끊임없이 (그러나 조용히) 대비시킨다. 어쩌면, 비약이 있겠지만, 내가 파악한 이 작품의 주요 질문은 이 두 사람을 향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천국의 열쇠는 과연 프랜치스 치셤에게 주어질까, 아니면 안셀모 밀리에게 주어질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두 가지 대립 구도 중 첫 번째는 이 두 사람의 대비와 같은 맥락에 있다.

1. 위엄, 품위, 권위 vs. 겸손, 소박함, 진정성

안셀모 밀리와 프랜치스 치셤은 모두 가톨릭 신부로서 평생을 살았다. 같은 고향, 같은 신학교, 그리고 같이 신부가 된 이후 같은 성당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던 그들에겐 표면상 성직자로서의 동일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두 사람의 삶은 마치 출발점은 같으나 각도가 달라 갈수록 벌어지는 두 수직선처럼, 생애 마지막까지 둘의 차이는 점점 커져만 갔다. 안셀모 밀리는 제1보좌신부, 교구 해외 선교단 비서, 주교좌 성당의 참사위원, 그리고 가톨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직분 중 하나인 주교 자리까지 단 한 번의 뒷걸음질도 없이 승승장구하며 오른, 위엄과 품위를 갖춘 성공한 신부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반면, 프랜치스 치셤은 신학생 시절부터 엉뚱한(?) 문제를 일으켜 여러 위기에 처하는 등 남들과 사뭇 다른 가치관으로 인해, 전통적인 (그러나 판에 박힌) 신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순응하는 여느 신학생들이나 신부들의 아니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딘가 처음부터 빗나간 화살처럼 보였던 것이다. 

사실 그는 안셀모 밀리와는 달리 신부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어릴 적 심하게 비 내리던 어느 날 사랑하는 부모님을 한꺼번에 사고로 여읜 사건과, 마음속으로 사랑했던 노라의 비극적인 자살은 그로 하여금 고뇌 그 자체인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하늘의 성약을 받아들이기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무슨 일이 있어도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신앙심이 두터운 유복한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나고 자랐으며, 어릴 적부터 신학교에 가기로 결정되어, 가족과 스승 할 것 없이 주위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복을 한 몸에 받으며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성직의 길을 탄탄대로로 달려온 안셀모와는 시작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프랜치스는 외모 또한 작고 바짝 말라 볼품없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한심스럽게 쳐다보거나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는 프랜치스가 괴짜 내지는 무가치한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를 알아보는 눈은 언제나 소수이지만 존재하는 법. 프랜치스와 안셀모가 다녔던 신학교의 교장이자 나중엔 주교의 자리까지 지낸 맥납 신부는 프랜치스의 진가를 일찍부터 알아보았다. 산 모랄레스 신학교에서 4일간 꼬박 자취를 감춰 퇴학당할 위기에 처했던 프랜치스를 구해주고 보호해준 사람도 맥납 신부였다. 그는 프랜치스를 어린애 같은 단순성과 논리적인 솔직함과 진지함이 묘하게 혼합된 보기 드문 사람으로 평가했다. 또한, 전통적이지만 참된 의미를 상실하여 껍데기만 남은 신앙 규칙의 상투성에 환멸을 느낀 프랜치스를 제대로 손봐줘야겠다고 맘먹은 타란트 신부와는 달리, 맥납 신부는 같은 상황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그가 프랜치스를 중국 선교사로 파송하기 직전 여러 오해와 좌절에 빠져있던 프랜치스에게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우린 여기서 정통이라는 허울 안에 갇혀 말라가는 내실을 가진 성직 체계 내에도 비록 소수이지만 여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존경받아 마땅한 겸손한 성직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자네는 뻔한 규칙을 보물처럼 지키는 자네의 동료들과 잘해 나가지 못하더라도 역시 교회 안에 속한 인물이야. 자네는 실패하기는커녕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어. 자네는 흔히 있는 교회의 잡화상은 아니야. 그 무엇이든 모두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편리하게 간단한 봉투에 넣어 버리거나, 가볍게 정리해 버리는 그런 따위가 아냐. 게다가 자네의 가장 좋은 점은 말이야. 프랜치스, 신앙이라기보다는 교리에서 생기는 거만스러운 면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일세.”

이후 프랜치스는 평생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인 맥납 신부를 마음속에서 잊지 못한다. 아마도 그가 가장 존경했고 따르고 싶었던 진정한 스승이자 성직자의 모습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맥납 신부라는 존재가 프랜치스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지 못했다면, 아마도 프랜치스는 여러 환난을 만났을 때 혼자 힘으로는 버거워 무너져 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중심을 알아봐 주고 진심이 통하는 사람을 가졌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 중 축복일 것이다.

이에 반해, 안셀모 밀리는 언변과 수완이 훌륭하고 겉으로 비친 성품 또한 나무랄 데 없어서,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았으며, 예민한 눈으로 위로 올라갈 기회가 포착되면 절대 놓치지 않는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저자 크로닌은 안셀모의 숨겨진 인간성을 한 번도 책에서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저자의 의도에서 현실 경험에서 우러난 삶의 지혜를 엿본다. 잘 포장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몰락한다거나 보기 좋게 당하는 일 따윈 현실세계에서는 좀처럼 일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저자는 안셀모라는 가상인물을 통해 넌지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악인은 일반적으로 끝까지 승승장구하고, 의인은 끝까지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권성징악의 기적적인 플롯은 어지간해선 동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며, 평균 수명 80세인 인간의 한 세대에서 일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닌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도 안셀모의 승리와 프랜치스의 실패는 (물론 표면적이지만) 깊숙한 중심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눈에는 보란 듯 현저한 차이를 낸다. 이는 우리가 천국의 열쇠가 누구에게 주어질지, 과연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안셀모와 프랜치스의 평생을 관찰하고 나서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묘사 대신 저자는 안셀모의 말과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가 어떤 중심을 가진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마침 페스트로 홍역을 치르고 기적적으로 챠 씨의 도움을 받아 지었던 성당이 홍수로 인해 무너져버려서 프랜치스가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있을 무렵, 안셀모가 중국 파이탄으로 프랜치스를 방문한다. 그는 해외 선교단 비서로서 해외 순방을 하던 차에 업무상 중국을 찾은 것이었다. 그는 보고할 사항들을 일주일 간 관찰하고 떠나기 전 프랜치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랜치스는 성당 재건을 위해 심각한 고민과 좌절에 빠져있던 찰나였다. 

“자네가 상류계급의 호상들과 조금만 더 친밀해지도록 노력했다면 아무 걱정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네. 자네 친구인 챠 씨만이라도 신자로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 곳 본당 현황에 난 몹시 실망했네. 예를 들어, 이 곳의 개종률은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현저히 떨어지지 않나. 본부에는 각 지역의 전교율이 모두 그래프에 정확히 나타나 있는데, 자네 본당의 성적이 제일 나쁘다네. … 전교회장을 두게나. 다른 본당에서는 으레 다 두고 있지 않나? 한 달에 40냥씩 주고 세 사람만 두어 보게. 천 명을 영세시키는 데 중국 돈으로 단돈 1천5백 달러밖에 안 든다는 계산이 나오네. … 자네 생활도 지나치게 가난하네.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어느 정도 위엄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네. 가마나 하인도 두게. 겉치레도 좀 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그는 언제나처럼 “자네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겠네. 자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이라며 마지막 말만 남기고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가마를 타고 떠나버렸다. 안셀모가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그는 언제나 프랜치스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지만, 과연 그가 무엇을 기도했는지 나로선 도저히 모르겠다. 안셀모로부터 나는 허영과 가식, 거짓과 위선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안셀모는 자신이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각인시켰으며, 그의 풍채에서 묻어나는 품위와 위엄은 그가 가진 권위가 마치 좋은 신앙의 열매라거나 하느님의 축복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프랜치스는 그게 늘 불편했다. 그러나 언제나 눈 앞에 벌어진 자신의 처참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안셀모로 대변되는 신앙의 모습이 차마 거짓이라거나 잘못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프랜치스야말로 늘 실패의 연속을 달리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모든 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자신만의 신앙 때문인지, 그래서 처참한 상황을 계속 맞이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으로 파견되어 프랜치스와 처음 만날 때부터 갈등을 빚어왔던 베로니카 원장 수녀는 페스트 한가운데 어려움에 처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했던 프랜치스가 안셀모로부터 굴욕적인 말을 듣는 모습을 보고는 결단을 하고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이 고백을 읽고 속에서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는듯한 기분이었다.

“제가 신부님께 너무 나빴어요. 처음 뵈었을 때부터 빗나가 버렸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오만이라는 악마 때문이에요. 어렸을 때도 화가 나면 유모의 얼굴에 물건을 내던지는 심한 짓을 하곤 했지요. 그때부터 오만은 제게서 떠나지를 못했어요.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신부님께 이런 사죄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오만과 고집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어요. 요즈음 더욱 괴로웠어요. 신부님의 구두끈도 풀 자격이 없는 천하고 속된 인간으로부터 신부님이 받은 경멸과 굴욕감은 저 자신도 참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제 자신이 더욱 미워질 뿐이에요. 저를 용서하세요. 저는 지금까지 누구를 존경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결한 영혼을 가지신 분입니다. 신부님을 힘껏 도와드리겠어요. 우선 오빠에게 편지를 하겠어요. 오빠에게 이 곳에 성당을 세워 달라고 부탁하겠어요. 오빠는 굉장한 부자예요. 성당을 세우는 것쯤 아무것도 아녜요. 오히려 기뻐할 거예요. 신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오만을 겸손으로 바꿔 놓으신 것을 알면…”

진정성이 깃든 소박하고 거짓 없고 겸손한 행동은 느리지만 언제나 소수의 누군가에겐 귀감이 되는 법이고, 철벽같이 막혔던 마음의 담을 강한 바람이 아닌 따뜻한 햇빛의 힘으로 허물고, 오만을 겸손으로 바꿔놓고야 마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자, 어떤가. 만약 천국의 열쇠가 있다면, 품위와 위엄과 권위를 가진 안셀모와 겸손과 소박함과 진정성을 갖춘 프랜치스, 이 둘 중 누구에게 주어질 거라고 생각하는가. 

2. 배타성, 박대 vs. 포용성, 환대

프랜치스의 생애 첫 비극은 부모님의 죽음이다. 이 책의 기본 뼈대는 약 40년 중국 선교를 마치고 일흔이 넘어 노쇠해진 몸으로 고향에 돌아와 노신부가 된 프랜치스의 회고다. 그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릴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큰 사건도 부모님의 죽음이다. 이는 프랜치스로 하여금 신부가 되길 마음먹게 하는 첫 번째 강한 동기가 되어주기도 했지만, 부모님의 죽음 이면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잦았던 기독교 장로교파와 가톨릭 사이의 분쟁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봄날, 가난했지만 모처럼 음악회에 참석하고 싶어 하는 어머니와 어린 프랜치스는 아버지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고, 와야 할 시간에 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으러 프랜치스의 어머니는 불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프랜치스와 함께 집을 나선다. 이윽고 근처 오두막 안에서 술주정꾼 샘 멀리스의 형편없는 간호를 받으며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샘의 말을 들어보니, 아버지가 일을 보러 갔던 ‘에탈’이라는 곳에서 장로교파들의 가차 없는 탄압에 상처를 크게 입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놀란 가슴을 애써 달래며 아버지를 어서 따뜻한 집으로 데려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게 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프랜치스를 먼저 돌려보내며 의사를 부르라고 명령한 뒤 아버지를 부축하고 빗속으로 나간다. 둘러 가는 길이 안전하긴 했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에 무리를 해서 지름길을 택한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트위드 강을 건너야 했는데, 이미 물이 많이 불어나 있었고 물살이 강했던 것이다. 성하지 못한 몸으로 버티던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미끄러졌고, 아버지를 구하려 반사적으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꽉 붙잡는 순간, 그만 난간의 로프를 놓쳐 버리고 만다. 그날 밤 프랜치스는 밤새도록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다렸지만, 끝내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프랜치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믿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일까? 똑같은 하나님을 제각기 다른 말로 사용하여 예배한다 해서 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프랜치스에게 있어서 그것은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수수께끼였다. 그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종교 간 탄압을 목격했으며, 그 불행한 시대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것도 다른 신을 믿는 종교끼리의 분쟁이 아닌, 같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라는 큰 우산 아래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 장로교파 사이의 분쟁이었다는 점은 아마도 프랜치스에겐 평생 마음속에 응어리로 맺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프랜치스에게 남다른 신앙관을 가져다준 중요한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된다.  

또 한 가지 그의 신앙관을 형성하게 만든 사건은 합리적인 불신자 가정의 친구 윌리 탈록의 집을 방문했을 때 벌어진다. 덜컥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프랜치스를 맡아서 키운 집 (이 집도 형식적으로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그려진다)에서 차별과 학대를 받다가 처음으로 느껴본 가족의 평화를 교회나 믿는 가정이 아닌 철저한 불신자의 가정에서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윌리 탈록의 집에는 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 집 사람들이 왜 이렇게 상냥하고 행복하며, 만족스럽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시하는 것 같은, 아무런 신앙마저도 갖지 않은 합리주의자에게 교육된 이 집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 하고, 지옥의 불길이 이미 그 발목을 핥고 있어야 할 터인데…|

저자 크로닌은 종교 간 분쟁을 넘어 무신론자 가정에서도 평화가 깃들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의 방점은 물론 신을 믿든 안 믿든 평화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형식적이고 타성에 젖은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썩어가는 거짓된 거룩함과 위선이 만연한 삶을 꼬집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종교의 옷을 입었으나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신앙 따윈 천국과는 상관 없다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윌리 탈록은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의사가 되었고, 아버지처럼 철저한 무신론자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의사로서 언제나 맘만 먹으면 충분히 취할 수 있었던 돈과 명예를 좇지 않고, 그 어떤 기독교인보다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의 건강을 위해 헌신을 했다. 중국에서 페스트로 허다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직접 중국까지 날아와 프랜치스를 도운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리고 그는 페스트로 중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마지막 순간 프랜치스는 윌리 탈록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다음과 같다. 끝까지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윌리의 말에 답변하는 장면이다.

“하나님 쪽에서 자네를 알고 있네. 인간의 괴로움은 모두 회개의 행위라네.”

그리고 이 장면을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던 베로니카 원장 수녀가 그렇잖아도 맘에 들지 않던 프랜치스와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베로니카: “그분은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은 분이 아니었습니까?”
프랜치스: “당신이 말하는 그리스도교도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7일 중에 하루만 교회에 나가고 나머지 6일은 거짓말도 하고, 중상모략으로 남을 속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겁니까? 탈록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을 돕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베로니카: “그분은 자유사상가였어요.”
프랜치스: “베로니카 수녀님, 그리스도께서는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자유사상가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하셨던 겁니다.”
베로니카: “감히 그런 비교를 하다니. 불경이 지나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

프랜치스: “확고한 신앙만 지니고 있다면 누구든지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불교도이든, 회교도이든, 도교의 신봉자이든, 아니 선교사를 죽여 그 고기를 먹어 버렸다는 무지한 식인종까지도. 스스로가 돌아보아 가책이 없는 성실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을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 때에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사람을 보시더라도 절대로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진 않을 겁니다. 이런 말씀 정도는 하시겠죠. 보아라 나는 여기 있다. 네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나와 천국이 여기 있다. 자 들어오너라.”

이 사건이 있은 이후,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베로니카 수녀는 프랜치스에게 마음을 바꿔 먹게 되고 존경하게 된다. 프랜치스는 그녀가 평생 성직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목격한, 예수를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도무지 이상적으로만 존재할 그런 사람을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것도 볼품없는 외모에 품위, 위엄, 권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평신부에게서 그녀는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았던 것이다. 말과 결단으로만 머물던 신앙이 아닌 몸으로 체화한 신앙을 보고서 그 진정성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랜치스의 말에서 기독론이나 구원론을 들먹이거나 정통주의인지 자유주의인지를 판단하려고 시도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나는 프랜치스의 태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환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프랜치스가 일하는 성당과 지척에 위치한 곳에 미국 감리교단의 개신교회가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며 생기게 되는데, 프랜치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어릴 적 부모를 잃었던 그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담임인 피스크 목사와 절친이 되고 서로의 신학을 존중하게 된다. 책의 마지막에서 피스크 목사는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프랜치스와 함께 죽음 앞에서 그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극심한 고문과 죽음이 눈 앞에 와 있는 상황에서 가톨릭인지 개신교인지가 과연 무슨 문제일까 생각하면 종교 간 분쟁은 한낱 우스개 거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프랜치스는 부모가 넘지 못했던 개신교도와의 분쟁을 넘어섰고, 그것을 품었다. 그들을 배타적으로 배제하고 박대하지 않고 포용하며 환대로 맞이했던 것이다. 

프랜치스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를 ‘환대’라고 생각할 때, 이것은 현재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나에게도 강한 울림을 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타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혹시 나는 기독교의 그릇된 배타성을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으로 착각한 채 그들을 차별, 배제, 혐오하진 않았을까. 거짓 신이나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빌미로 삼아 그들의 삶까지도 모두 부정해오고 있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믿는 교단을 제외한 모든 교단과 모든 종교는 전부 사탄의 노리개이거나 지옥에 떨어질 존재들일까. 과연 그 배타적인 믿음이 예수의 복음을 반영하는 것일까. 이방인을 위해 일부러 곡식도 남기곤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타자를 박대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의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그 순수한 신앙이라는 것이 겨우 남을 제거해야지만 지켜낼 수 있는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인가. 프랜치스의 삶은 이러한 수많은 질문들에 한 가지 빛을 비춰주는 것 같다. 환대라는 단어로써 말이다.

이제까지 두 가지 대립 구도를 통해 이 책을 해석해 보았다. 이 글을 읽기 전과 읽은 후 처음에 내가 던졌던 질문은 조금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 가졌던 생각이 더욱 힘을 얻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처음과는 전혀 다른 답으로 생각이 옮겨갔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신학 책이 아닌 소설이 가진 힘이다. 열린 결말, 열린 답.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깊은 깨달음과 치유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 어떻게 생각하는가. 천국의 열쇠는 과연 어떤 사람에게 주어질 거라고 생각하는가.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5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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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귀향 - 기독교, 이성, 낭만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적 옹호서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후퇴가 전진이 되다.

 

C. S. 루이스 저, ‘순례자의 귀향’을 읽고.

 

이 책의 원제는 Pilgrim’s Regress. 저 유명한, 존 번연의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천로역정이 17세기 작품이라면, ‘순례자의 귀향’은 20세기 천로역정인 셈이다. 그것도 루이스의 향기가 짙게 배인 천로역정이다. 재미있게도 두 작품의 플롯은 흡사하지만 (당연하다. 루이스가 천로역정 플롯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제목에 사용된 두 단어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Progress가 ‘전진’을 뜻하는 반면, Regress는 ‘후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천국으로 가는 길이 직선 코스라고 가정한다면 (물론 천국은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천로역정은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알다시피 소설이다),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여러 차례 곁길로 들어서서 뜻하지 않았던 위기를 만나게 된다. 가장 짧은 거리인 직선 코스가 존재함에도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불필요한 우회로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항상 외부에서 주어진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 위기를 벗어나 크리스천은 다시 제 길로 들어서며, 마침내 천국 문에 이른다.

 

이 작품의 주인공 존은 한술 더 뜬다. 서쪽의 섬 (갈망의 대상이자 천로역정의 천국과 같은 상징적 의미)을 향하여 길을 나선 존은 여러 환란을 겪다가 마침내 다다른 협곡 너머에서 어렴풋하게 보인 그 섬이 출발지 퓨리타니아에서 보았던 지주 (하나님을 상징한다)의 성이라 불렸던 동쪽 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 속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아니다. 여전히 둥글지만 훨씬 작은 세상이다. 존이 그 산을 마주하게 된 것은 그가 둥근 세상을 한 바퀴 돌았기 때문이었다. 종착지라고 생각했던 그 점이 출발지의 뒷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존은 뒷면으로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여태껏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만 했다. 말하자면, 후퇴다. Regress는 존의 모든 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Regress는 Progress가 된 셈이다. 이 점이 루이스의 천로역정 (바로 이 책, 순례자의 귀향)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아주 중요한 차이를 내는 부분일 것이다.

 

전진하지만 둘러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속성이 천로역정에서 상징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면, 전진한다고 믿었으나 결국 그것이 뒤로 가는 것이었고, 그 끝에서 제대로 된 사실을 깨달으며 회심을 경험한 뒤 새로운 눈을 뜨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면서 목적지에 다다르는 인간의 모습은 ‘순례자의 귀향’에서 도드라진다고 볼 수 있다. 한 방향성을 그린 천로역정의 Progress보다 완전히 반대되는 두 방향성을 담은 ‘순례자의 귀향’의 Regress가 가지는 의미는 독자들에게 의외로 깊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다. 이 부분이 표현된 곳을 아래에 발췌해본다. (참고로 처음 존이 서쪽으로 향할 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길동무의 이름은 ‘미덕’이었고, 가이드 없이 혼자 걸어갈 때가 많았지만, 협곡을 건너고 (회심을 한 뒤) 다시 동쪽으로 길을 되돌아갈 때는 ‘슬리키스타인사우가’라는 가이드가 계속 함께 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성령의 인도를 상징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되돌아가야 해요. 그게 앞으로 가는 길이에요. 유일한 경로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개울을 건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Regress는 Progress가 되었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이 점을 유념해서 읽게 된다면, 아마 내가 느꼈던 심오함과 뜻밖의 감동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 인간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지 않을까 한다. 되돌아가는 길이 앞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 그게 올바른 길을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은 루이스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도 여러 사람들과 장소의 이름이 상징적인 개념을 나타내어 (이를테면, 믿음, 우유부단, 고집, 질투, 자선, 굴욕의 계곡, 허영의 시장 등) 알레고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자칫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유독 루이스의 이 작품에서는 그 상징적인 이름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기스문트 계몽’이라는 등장인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뜻하고, ‘마더 커크’는 교회를 상징하며, ‘차이트가이스트하임’은 시대정신을 의미하고, ‘놋스토’는 ‘쓸모없는 곳’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천로역정과 비슷한 플롯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알레고리의 수준이 나 같은 일반인들이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품 뒤에 붙은 ‘저자의 말’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나는 이 작품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난해함은 이 작품이 루이스의 회심 후 단 2주 만에 일필휘지로 써진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많은 부분 용서가 되는 듯하다. 이 책의 번역자인 홍종락이 말한 대로, 루이스의 다른 모든 작품들은 어찌 보면 이 작품의 해제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홍종락이 추천한 것처럼, 루이스가 노년에 그의 회심기를 잘 담아놓은 작품 ‘예기치 못한 기쁨’을 함께 읽는다면, 이 작품의 배경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 아니면 절대 채울 수 없는 갈망과 그 갈망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루이스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098756400169131

2. 고통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26994814011956

3. 헤아려 본 슬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38735802837857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71812539530180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59914580719975

6. 순전한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47418798636218

7. 시편 사색: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816749868369777

8. 순례자의 귀향: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47954605249294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64?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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