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자서전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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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투쟁의 여정: 풍성한 조화로움을 향하여.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영혼의 자서전’을 읽고.


|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


책을 덮고 떨리는 숨결로 큰 심호흡을 했다. 눈을 감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크레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투명할 만큼 푸른 바다, 그리고 눈부신 태양과 빛나는 하얀 섬. 그러나 내겐 낯설기만 한 풍경. 크레타의 흙은 무슨 색을 띨까? 어떤 냄새를 낼까? 문득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부는 봄철에 에게 해를 항해하며 그가 느꼈을 충만한 기쁨을 나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 작품은 일흔이 넘은 카잔차키스가 죽기 직전에 남긴 영혼의 대서사다. 책을 여는 ‘작가노트’에서 그가 밝히듯, 이 작품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다. ‘영혼’의 자서전이다. 책의 큰 흐름은 비록 여느 자서전처럼 시간 순을 따르고 있지만, 그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물리적 시간이 아닌, 그의 영혼이 자유를 찾아 나선 여정 위에서 붉은 발자국을 남긴 장구한 투쟁의 역사다. 그의 여정은 평생 오름길이었다. 밑으로 내려가거나 앞으로 평탄하게 닦인 길이 아닌, 오직 오름길만이 그의 시간을 흐르게 만들었다. 그는 계속 위를 향했고 시간은 끊임없이 아래로만 흘렀기에 그 시간은 축적되어 깊이가 생겼다. 이 작품은 그 깊이로부터 길어 오른 지혜의 산물이다. 


카잔차키스는 오직 오름길만이 신 (여기서의 신은 기독교의 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오름길, 그 희망의 숭고한 정상에 있는 그 무언가다)에게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우리 모두의 길이기도 할 그 오름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여정이 비록 그의 인생을 방랑으로 인도했지만, 그는 주저 없이 그 길을 올랐고, 숨이 다하는 날에도 그 도상에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은 불안과 악몽과 회의뿐이었고, 성숙은 절름발이 해답에 지나지 않았다. 주위는 온통 혼돈뿐이었고, 고뇌하며 걸어간 길의 끝은 심연이었다. 옆으로 난 다른 오름길의 끝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의 모든 길은 그를 심연으로 이끌어갔다. 그의 젊음과 성숙은 허공에서 전율과 희망의 두 말뚝 주위를 맴돌았지만, 나이자 들자 그는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조용히 심연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일종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신을 찾았거나 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서가 아니었다. 마침내 구원으로부터 구원되었다고 스스로도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여행의 끝은 도착이 아닌 또다시 떠나는 출발이었다. 자유롭게, 자유로부터 자유가 되어, 그 너머로. 아직 오르지 못한 오름길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올라간다는 행위 바로 그 자체가 행복이요 구원이요 천국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자신의 싸움이 끝나려고 하는 생의 마지막 기로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그건 그가 더 이상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그래도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서서 버텼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어딘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목적지에 도착하여 안락한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오름길 위의 서있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이었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여정, 즉 자유를 갈망한 투쟁은 곧 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종교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그 여정은 그의 정신과 육체의 고향인 크레타에서 시작하여 크레타에서 끝이 난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이듬해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영혼은 한 번도 크레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카잔차키스도 훨씬 뒤에야 자신의 힘이 아니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강력한 힘이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수없이 포기하려고 했던 순간에도, 그 힘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그 힘은 신이 아닌 크레타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크레타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있어 모든 시작과 끝에는 크레타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잔차키스는 진정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크레타인이었다.


한번 태어난 육체는 성장과 성숙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영혼도 그렇다. 카잔차키스 영혼의 유년기는 크레타에서 이뤄졌다. 당시 크레타는 터키의 점령 하에 있었다. 터키인들은 크레타인과 기독교인을 박해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크레타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며 일생을 바쳤다. 크레타에서, 그리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잔차키스에게 크레타의 모습이 어떻게 각인되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의 가정은 비록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많은 동포들은 터키인들에게 무참히 학살을 당했고, 어린 나이의 카잔차키스는 그 대학살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 때문에 그의 가정은 잠시 낙소스로 도피하기도 했었다. 그 시절을 회고하며 카잔차키스는 삶의 진짜 얼굴은 해골이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니 그가 성장하고 성숙하기 훨씬 전부터 몸속에서 끓어오른 주체할 수 없는 크레타의 피는 자유를 갈망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자연스레 저항과 투쟁의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가기 전 크레타에서 가톨릭 학교에 들어간 카잔차키스는 그의 삶에 있어서 첫 번째 지적인 도약을 경험한다. 오로지 공포, 공포를 정복하려는 투쟁, 자유에 대한 그리움 같은 원시적인 격정들의 지배만을 받아오다가 처음으로 아름다움과 학문에 대한 갈망이라는 새로운 정열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읽고 쓰기를, 머나먼 곳 보기를, 고통과 기쁨을 직접 경험하기를 원했다. 그에게 세상은 더 이상 그리스만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세상의 고통은 크레타인의 고통보다 훨씬 컸으며, 자유에 대한 갈망 또한 크레타인 만의 특질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영원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꿈틀대며 성장해가는 자신의 영혼에 익숙해지기 위해 방황을 시작했다. 창조주가 흙을 빚어 세상을 창조했듯, 그는 어휘를 빚기 시작했다. 


그리스 순례 후, 그는 그리스의 숭고한 업적이 단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닫고, 그리스의 비극적인 운명과 모든 그리스인이 무거운 의무를 지고 있음을 깊이 의식한 뒤 마침내 성숙할 수 있었다. 그를 성인의 세계로 안내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책임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무를 알지 못했다. 그 의무를 위해 몸과 영혼을 다 바쳐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은 깊이 깨달았지만,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 자유를 찾아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 분명한 것은 오직 인내와 명예뿐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투쟁하는 것, 그래서 피의 의무를 다하는 것. 그것만이 그에겐 분명했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카잔차키스의 투쟁은 주로 기독교 신과의 싸움에 국한된다. 이는 이 책의 상하권 중 주로 상권을 이루고 있다. 그는 크레타와 그리스, 이탈리아와 아토스 산, 예루살렘과 시나이 산까지 두루 순례하며 수도원을 중심으로 진행된 그의 영혼의 여정을 기록한다. 거룩한 아토스 산을 친구와 함께 40일 동안 여행하고 돌아온 카잔차키스는 다시 혼자가 되고 나서 스스로에게 과연 자신이 무엇을 추구했으며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되묻는다. 인간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고뇌로 가득했던 거룩한 산에서 그에게 해답이 되었던 건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가 많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방향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그리스도는 방향만 제시했을 뿐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는 못했다고 서술한다. 얼마 동안은 수도자의 삶이 지닌 신성한 목탁의 울림과 새벽기도와 성가 영창과 그림이 자신의 고뇌를 진정시켰고, 수도원 기행에서 그리스도의 투쟁을 직접 경험하며 자신의 투쟁이 용기와 부드러움과 희망을 얻었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매혹은 금세 사라졌고, 자신의 영혼은 다시금 버림을 받았다고 느꼈다. 당시 카잔차키스에게 그리스도는 그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영원한 답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 카잔차키스의 마지막 순례지는 사막이었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던 떨기나무 가운데 임했던 신과 모세가 처음 대면했던 그 거룩한 땅, 수천 년 전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바로 그곳, 시나이 산. 그곳에 위치한 수도원에서 그는 요하임 신부를 만난다. 그로부터 평생 잊지 못할 중요한 말을 듣게 된다. 첫째, 오름길에 나섰다면 꼭대기에 이르려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 것. 인간에겐 독수리처럼 날개가 달린 게 아니라 다리가 달렸음을 기억할 것. 즉, 투쟁자라면 스스로가 인간임을 잊지 말 것. 둘째, 신과의 싸움을 절대로 중단하지 말 것. 하지만 마음속의 검은 뿌리인 본능을 사탄이라 생각한 나머지 제거하려고 하지 말 것. 사탄의 유혹을 정복할 방법은 하나뿐이니 그것을 껴안고 맛보고 경멸할 줄 알게 되는 것. 셋째, 그리스도의 종교는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받아들여 신성화되고, 육체와 영혼은 적이 아니라 동지임을 깨닫게끔 가르쳐야 할 것. 악마는 영혼을 거부하라고 설득하며, 신은 육체를 거부하라고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화해를 이루게 될 것. 넷째, 신은 우리들에게 투쟁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 우리들이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건 신이 따질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님을 기억할 것.


결코 다른 수사들로부터 들을 수 없었던 지혜의 말을 시나이 수도원에서 들은 후 카잔차키스는 크레타로 돌아와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베르그송과 니체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한동안 니체에 푹 빠졌던 카잔차키스는 그의 초인 (위버멘쉬) 사상과 영원 회귀 사상에 큰 영향을 받는다. 니체를 만난 뒤 그에게 있어 불확실성과 확실성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불확실성은 확실성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꿈을 꾸게 된다. 하늘과 바다 사이의 두 어둠 사이로 스스로 빛을 내는 작은 쪽배가 숨 막히는 고요함을 뚫고 빠른 속도로 내리지르는 모습을 꿈속에서 목격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철저한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항해하고, 스스로 빛을 내며,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대담한 쪽배 (니체의 초인을 상징하리라). 카잔차키스에게 그 쪽배는 어려운 순간들에 직면할 때마다 희망이 되어 주었다. 니체를 만난 이후 카잔차키스는 형이상학적인 희망이란 참된 인간들이라면 섣불리 물지 않는 기만의 미끼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원했던 대상은 칭얼거리거나 애원하거나 구걸하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가장 인간다운 대상 (초인)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신을 죽여버린 니체를 위해 만세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영원 회귀가 니체에게는 끝없이 이어지는 순교로 생각되었으며, 두려움에서 위대한 희망을, 미래의 구세주를, 즉 초인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 초인도 결국은 또 하나의 천국, 가엾고 불행한 인간을 기만하고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을 견디게 만드는 또 하나의 신기루일 따름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고는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옷도 벗어버리고 만다.


니체 이후 카잔차키스를 사로잡은 신은 붓다였다.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하고 체류하면서 불교 사상을 탐닉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붓다는 인류를 구원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구원으로부터 구원을 행하는 구세주이자, 나그네 길에서 훌륭한 안내자인 ‘연민’을 몸소 체감하도록 도와준 신이었다. 연민을 통해 인간은 육체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고,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무와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모두 하나이니 고통받는 자를 구원해야만 한다는 사상이 카잔차키스에겐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빈에서 그는 환상인지 실제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병에 걸리게 된다. 이른바 ‘성자의 병’이라는 이름을 가진 희귀한 병이었다. 불교적 세계관에 빠진 영혼은 여자와 자는 걸 대죄라고 믿는 까닭에 그것은 육체가 죄를 범하지 못하게 막는데, 빈에서 만난 여자와 동침을 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망 앞에서 그가 경험한 일이었다. 정신적인 갈증을 많이 해갈시키긴 했어도, 붓다는 가능한 한 여러 나라와 여러 바다를 보려는 그의 갈증을 결코 풀어 주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 붓다는 인간의 육체가 가득한 세상을 불어 사라지게 하는 검은 마술사였다. 그가 어릴 적 경험했던 기독교처럼 (이 부분에서 카잔차키스는 기독교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육체나 세상을 악으로 규정했던 시대도 있었지만, 참된 기독교는 육체와 영혼은 하나이며, 세상은 장망성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시공간이다) 불교 역시 육체를 부인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잔차키스는 붓다를 만난 이후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감사해한다. 바로 만물을 처음 보듯 반가이 맞으며, 만사를 마지막으로 보듯 작별을 고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계속 움직였다. 빈을 거쳐 베를린으로, 베를린에서 러시아로 향한다. 베를린에서 만난 한 여자로부터 받은 초대를 계기로 러시아행을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카잔차키스는 역사적인 러시아 혁명의 현장에 있게 된다. 그리고 레닌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며, 비장한 각오를 다짐하게 된다. 그의 비장한 다짐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너무나 오랫동안 불의를 저질러 왔으며,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대지의 모든 아이들에게는 깨끗한 공기와 장난감과 교육을, 여자들에게는 자유와 따뜻한 정을, 남자들에게는 친절과 예우를, 그리고 꼬리를 치는 쇠약한 말과 같은 인간의 마음에게는 한 알의 밀알을 우리들이 마련해 줘야 한다. 이것이 러시아의 목소리라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으며, 나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맹세,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었고, 나는 내 인생을 포기할 각오를 했었다. 하나의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남들이 던지는 돌에 맞고,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 어떤 기쁨을 느꼈을지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동지애의 의미, ‘모든 사람은 하나다’라는 말의 의미를 내가 그토록 깊이 체험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삶보다도 숭고한 선물이 존재하며, 죽음을 정복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십자가를 지며,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죽을 때까지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자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어깨에 메고 한없이 가기만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부활할지니, 오직 그만이 행복하다. 러시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중이었다. 러시아는 한 알의 밀알처럼, 하나의 위대한 사상처럼, 비슷한 고통을 거치는 중이었다.”


카잔차키스는 레닌과 러시아를 만나기 전까지의 여정은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겼던 듯하다. 러시아 혁명 현장에서 그는 직접 두 눈과 두 귀와 두 콧구멍으로 당시 시대 정황을 보고 듣고 냄새 맡았다. 급기야 환상 중에 그는 붓다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는 에파포스 (촉감의 신, 환상보다는 육체를 더 좋아하며, 영혼까지도 육체로 바꾸고 싶어 하는 신)가 자신의 신이라는 고백까지 한다. 그만큼 영혼이 아닌 육체가 가진 중요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영혼의 오름길은 육체와 분리된 채 영혼에만 치우친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점점 그 이분법으로부터 괴리와 환멸을 느끼다가, 나중엔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묶는 길고 긴 여정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나 싶다. 적어도 카잔차키스에게 있어 영혼의 자서전은 영혼만이 허공을 걸어 다닌  투명한 흔적이 아니라, 육체를 만나 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었을까.


유럽 여행을 마치고 카잔차키스는 다시 크레타로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 후 평생의 스승이 되었던 조르바를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로 호메로스, 붓다, 니체, 베르그송, 그리고 조르바를 꼽는다. 호메로스는 카잔차키스에게 기운을 되찾게 하는 광채로 우주 전체를 비추고, 태양처럼 평화롭고 찬란하게 빛나는 눈이었다. 그리스의 민족 시인이었던 호메로스는 그에게 있어 크레타가 가진 의미와 동급, 아니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반면, 붓다는 세상 사람들이 빠졌다가 구원을 받는 한없이 깊은 새까만 눈, 베르그송은 젊은 시절에 해답을 얻지 못했던 그를 괴롭혔던 철학의 온갖 문제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던 은인, 니체는 새로운 고뇌로 그를 살찌게 했고, 불운과 괴로움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도록 가르친 장본인으로 그는 이 책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 스승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가 직접 쓴 표현은 다음과 같다. 


“조르바는 글 쓰는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갖추었으니,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인 관찰력, 마치 만물을 항상 처음 보듯 대기와 바다와 불과 여인과 빵 따위의 영구한 일상적 요소에 처녀성을 부여하게끔 해주며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지닌 듯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신성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라한 한 조각의 삶을 안전하게 더듬거리며 살아가기 위해 하찮은 겁쟁이 인간이 주변에 세워 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고향 따위의 모든 울타리를 때려 부수며,  마음에서 더 깊고 깊은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수적인 웃음을 지녔다.”


그렇다. 어쩌면 카잔차키스의 모든 여정은 조르바를 만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오름길의 끝에 신이 아닌 인간 조르바가 위치해 있을 줄은 그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와 붓다, 니체와 베르그송을 모두 합쳐 놓은 살아있는 자유의 완성작이었다. 조르바를 만나고 카잔차키스의 모든 방황은 비로소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조르바를 만난 뒤 과거의 모든 발자국들은 그저 그의 잊힌 과거의 기억으로 머물지 않고, 비로소 하나하나 소중한 의미를 띠며 숨을 쉬기 시작했고, 그의 운명의 계획이 그대로 실천되도록 만들어 준 완벽한 조각이 되었다. 


영혼만 신성하지는 않다. 육체도 신이 창조했기에 신성하다. 그의 표현을 빌면, 육체는 영혼에게서 광채를 받고, 영혼은 육체에서 얻은 솜털이 나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룰 때에만 온전하고 진정한 가치를 지니며, 둘로 나뉜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인 것이다. 영혼의 오름길은 자유를 갈망한 긴 여정이었다. 그 끝에 육체를 가진 조르바가 서있었다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이는 어릴 적부터 카잔차키스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던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육신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영혼이 육체에 갇혔기 때문에 제한과 구속을 받는다는 해석은 적어도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앞에선 힘을 잃는다. 영혼과 육체는 하나이며, 그래서 가장 자유하다. 아, 이 얼마나 심오하고 아름다운 역설인가!


이 글의 시작을 일부러 이 작품의 시작처럼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로 시작했었다. 작품 속에서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오로지 우리에게 달려 있다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내 눈엔 이 ‘세 가지 기도’가 다르게 보인다. 세 가지 기도는 단순히 서로 다른 독립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첫째 기도에서 출발하여 셋째 기도로 이어지는 어떤 하나의 여정을 나타내지 않나 싶다. 그것은 마치 영혼의 오름길을 상징하는 듯하다. 


내 해석은 이렇다. 첫째 기도는 시작 단계다. 아직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 가치가 어떤 것인지 모른 채 막연하게, 그래서 대담하게 신께 구하는 기도다. 이는 마치 자신이 영혼만으로 이뤄진 것처럼 여기는 기도로 보인다. 반면, 둘째 기도는 이제 자신이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알게 된 상태에서 신께 구하는 기도다. 영혼과는 달리 육체는 자칫하다간 부러질 수 있다. 신께 의지하여 여전히 구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육체를 더 소중히 여기는 뉘앙스가 풍긴다. 마지막으로 셋째 기도는 첫째와 둘째 기도의 단계를 초월한 기도다. 첫째 기도를 할 때처럼 자신이 영혼만으로 이뤄진 것도, 둘째 기도를 할 때처럼 영혼보단 육체를 더 신경 써야 하는 것도 아닌, 영혼과 육체가 조화로운 하나가 되어 온전히 자유함을 얻은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책의 마지막에서 카잔차키스가 고백하는 문장에서도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된다. 그는 신이나 악마, 누구의 손에서 활이 당겨졌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위대하고 순수한 힘이 계속해서 겨누어 화살을 쏘았다고 느꼈으므로 자신은 기뻐했다고 쓴다. 그리고 그에 이어진 문장은 모든 육체는 활이 될 수 있기에 모든 육체가 거룩하다는 것, 그의 생애 전체는 비정하고 만족을 모르는 손에 들린 활이었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손들이 얼마나 자주 그 활을 부러질 지경으로 당기고, 또 힘껏 당겼느냐고 질문하면서 그는 스스로 소리치며 대답했다. “부러져라!” 그러므로 그는 그의 영혼의 오름길을 끝내면서 셋째 기도를 선택하여 신께 올린 사람이었던 것이다.  


많은 아포리즘, 비유와 상징이 넘실대는 이 작품을 오랜 시간 읽으면서, 그리고 내용을 결코 다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으면서 나는 이 작품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 여긴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공감되는 것들이 있고, 이해할 수 없어도 믿어지는 것들이 있다. 이 작품은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고 적잖은 흔적을 남겼다. 덕분에 육체와 영혼, 삶과 죽음, 매임과 자유함 등에 대해서 곰곰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작품과 함께 했던 지난 반년이란 시간도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5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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