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인의 키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승주연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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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체호프


안톤 체호프 저, ‘낯선 여인의 키스‘를 읽고


체호프의 단편을 언젠간 꼭 읽어 보리라 다짐했던 건 도스토옙스키를 막 읽기 시작하면서였고 코로나가 발발하기 이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이다. 단편집도 책장에 잘 모셔 두었기에 마음 내킬 때 손에 잡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계획은 다른 많은 계획들과 함께 무산되었고 나는 약 천 권의 책 중 단 오십 권만 남겨 두고 처분한 뒤 한국으로 들어왔다. 체호프 단편집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녹색광선 시리즈를 좋아한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작품을 접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서다. 나는 녹색광선을 통해 푸쉬킨, 발자크, 츠바이크, 페렉을 처음 만났다. 모두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주었고, 그들의 작품을 더 읽고 싶어 지게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원래 알고 있던 카뮈의 '결혼, 여름' 역시 재독의 맛을 한층 높여주었다. 작년엔 마침 체호프의 단편집을 출간한다고 해서 나는 이번엔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며 출간 직후 구매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또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1년이 지나고 얼마 전 책장 정리를 하다가 눈에 띈 이 책을 나는 마지막 순간을 부여잡듯 덥석 손에 잡고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마침내 체호프를 만날 수 있었다.


아래는 책에 실린 여덟 단편에 대한 나의 짧은 감상이다. 


농담

여덟 편 중 가장 짧은 분량의 이 작품은 이 책을 여는 첫 단편이다. 달랑 열 페이지. 읽기 시작했는데 금세 끝나고 마는 작품. 그러나 좋은 단편들이 그렇듯, 강한 여운이 남는 작품. 나쟈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스스로도 불확실한 일인칭 주인공 화자는 나쟈에게 눈썰매를 타자고 제안한 뒤 그녀를 썰매장으로 데려간다. 썰매가 처음인지 아닌지 불확실한 나쟈는 화자의 강권에 못 이겨 결국 썰매를 타게 되는데, 속도가 붙어 가장 바람 소리가 거센 지점에서 화자는 느닷없이 “당신을 사랑해요, 나쟈”라는 말을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나쟈는 그 말을 들었지만 과연 그 말을 화자가 했는지 안 했는지, 바람결에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화자는 그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나쟈가 확인을 바란다는 눈치를 채게 된다. 작전 성공이다. 그런데 나쟈는 화자에게 직접 물을 자신이 없는 듯하다. 아, 이 보이지 않는 밀당이라니. 대신 그녀는 그리도 타기 싫었던 썰매를 다시 타자고 제안한다. 화자는 그 말에 응하며 장난을 반복한다.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여러 날을 그렇게 한다. 페테르부르크를 떠나기 직전 화자는 나쟈의 집 앞에서 창가에 나와 있는 그녀를 몰래 지켜보다가 바람이 부는 찰나를 이용해 썰매 탈 때 했던 그 장난을 다시 친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쟈는 어디선가 들려온 그 문장을 듣고 행복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인다. 과연 나쟈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사람이 화자이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화자가 아니길 바랐던 걸까? 작품은 시간이 지나고 나쟈를 회상하는 화자의 간략한 설명으로 끝난다. 그녀는 결혼하여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면서.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자신이 왜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농담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설마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다. 여러 단편을 읽어 왔지만, 내게 이 작품은 단편 특유의 불친절함이 아닌 미완성, 다시 말해 쓰다 만 듯한 인상을 남긴 소설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인 안나와 그를 사모하게 된 한 남자 구로프. 둘은 얄타라는 휴양지에서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이 사랑엔 문제가 있다. 안나와 구로프는 각각 남편과 아내가 버젓이 살아 있는 유부녀, 유부남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둘은 불륜에 빠진 것이다. 휴가를 끝내고 안나는 S시로, 구로프는 모스크바로 돌아가지만, 둘은 서로를 잊지 못한다. 구로프는 안나를 만나기 위해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담대하게 S시로 향하고, 극장에서 만난 안나 역시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한 뒤, 안나가 모스크바에 들른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두 사람 사이의 불륜이 정상 궤도에 오르는 시작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윤리적인 문제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는 들킬지도 모르고, 들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날 때마다 불안과 두려움에 노출되어야 하는 순간들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에 고심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저자인 체호프는 이 두 사람의 불륜을 응원하는 입장인 듯하다는 점인데, 작품 마지막 문장들이 이를 입증한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묘안이 떠오를 것이고, 그러면 새롭고 멋진 삶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사랑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 먼 길을 가야 하며,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다 읽고 나서도 얼떨떨한 소설. 내가 뭘 놓쳤나 싶어 다시 뒤적거려야만 했던 소설. 그러면서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안나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묘하게 궁금해지는 소설이다.


진창

읽기 전에는 제목의 의미를 절대 모를 소설이다. 책을 다 읽고 문득 제목을 다시 보며 실없는 한숨을 지었다. 할 말이 없었다. 완전 당했다는 기분도 들었다. 아, 이런 게 체호프의 매력일까? 빌려준 돈을 돌려받아야 하는 두 남자가 그 돈을 돌려줘야 하는 한 여자에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광경을 이토록 코믹하고 쾌활하고 완벽하게 보여주다니! 결코 아름답지도 않고 신분이나 배경이 탐탁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요상한 매력을 풍기는 수산나에게 꼼짝없이 붙잡힌 건 그런데 두 남자만이 아니었다. 작품 마지막에서는 더 많은 남자들이 그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네가 여기 왜 있어?'라고 할 것만 같은 이 어이없는 상황. 어느새 나도 마치 그 자리에 멀뚱대며 있는 남자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았고, 그들이 느끼고 있을 모종의 수치심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산나가 대체 어떤 여자길래? 하는 호기심이 작품을 다 읽고도 진한 재스민향처럼 내게 남아 있다. 하지만 체호프는 미리 경고했었다. 제목으로 말이다. 그곳은 진창이라고. 그러니 들어가지 말라고. 아니, 아니다. 어쩌면 내가 잘못 해석한 걸지도 모른다. 진창이라는 의미는 경고가 아니라 운명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곳은 모든 남자들이 빠질 수밖에 없는 곳, 곧 진창이라고 말이다. 아아, 체호프는 이미 남자들의 속마음을 다 꿰뚫어 본 것 같다. '너도 별 거 아니잖아?' 하며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젠장. 된통 당했다. 그것도 완전 무방비 상태로.


귀여운 여인

사랑 없으면 살 수 없는 여인, 올렌카의 이야기다. 여기서 '사랑 없으면'을 '사랑받지 못하면'으로 읽으면 안 된다. '사랑하지 못하면'으로 읽어야 한다. 올렌카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여인이다. 이 단편소설은 올렌카가 네 남자를 순차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여정을 비춘다. 한 남자를 사랑할 때마다 그녀의 생각과 마음은 그 남자의 생각과 마음과 같아진다. 공감이라고 하기엔 약하게 느껴지고, 세뇌라고 하기엔 세게 느껴지며, 수동적이고 순응적이며 자기 주관이 없다고 말하기에도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자세로 올렌카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온전히 하나가 된다. 어떻게 보면, 순수하게 사랑에 빠지면 응당 나타나야 하는 솔직한 모습을 체호프는 올렌카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공교롭게도 첫 번째 남자도 죽고, 이후에 만난 두 번째 남자도 죽고, 그 이후에 만난 세 번째 남자는 일 때문에 떠나게 되고, 마지막으로 올렌카가 사랑에 빠졌던 남자는 세 번째 남자의 아들이었다. 이성애가 아닌 모성애까지 올렌카는 모두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에 세 번째 남자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면서 작품이 끝나는데, 체호프가 귀여운 여인, 올렌카를 끝까지 응원한다는 마음을 표현한 설정이지 싶다. 나도 동감하게 된다. 올렌카가 자기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그러니까 상대방과 하나가 될 때까지, 사랑에 빠지는 삶을 끝까지 살아내면 좋겠다.


검은 수사

환상소설인 듯한 이 작품은 유능한 학자인 코브린 박사의 짧은 삶을 비춘다. 고아가 된 그를 양육해 준 예고르와 그의 딸 타냐가 거하는 집에 오랜만에 방문한 코브린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과거를 회상하며 행복에 잠긴다. 코브린이 그곳을 찾은 건 일 중독으로 의사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일도 계속한다. 그러다가 검은 수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사람이 아닌 환영이었다. 스스로가 만들어냈으며 코브린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존재였다. 검은 수사는 코브린의 광기 어린 천재성을 칭찬하고, 코브린은 그 칭찬과 인정에 기뻐하지만,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타냐나 그의 장인이 된 예고르가 보기에 코브린은 정신병이 심화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데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코브린을 보며 타냐와 예고르는 코브린을 병원으로 데려가게 되고 코브린은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자 검은 수사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좋은 소식이 되지 못했다. 코브린은 생기를 잃어갔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으며, 그만의 고유한 개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모든 색이 빠진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타냐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삶을 시작했으나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의 마지막에 다시 나타난 검은 수사가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다. “만약 당시에 자네가 천재라는 것을 믿었다면 지난 2년 동안 그렇게 슬프고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을거야.”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그는 정신과 약을 먹기 전의 삶을 회상한다. 죽음을 맞이한 코브린의 얼굴에는 천상의 행복감에 사로잡힌 미소가 박제되어 있었다. 광인인 채 살더라도 삶을 충만하게 살 수 있다면, 삶을 기계적으로만 사는 색깔 없는 정상인보다 더 값진 삶을 사는 게 아니겠냐고 체호프가 묻는 듯한 소설이다. 광기에 대해, 광기 어린 사람을 향한 평가에 대해 곱씹어보게 되는 작품이다.


낯선 여인의 키스

포병 여단의 6개 포대가 야영지로 가는 길에 하룻밤 묵을 요량으로 들른 한 작은 마을에서 장교들은 그곳의 지주인 폰 라베크 중장으로부터 차를 마시러 오라는 초대를 받는다. 장교들은 초대에 응했고, 중장의 저택으로 들어가 술도 마시고 저녁식사도 하고 춤도 추고 게임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랴보비치는 가장 사교적이지 못한 장교였다. 그는 춤을 춰본 적도 없었기에 당구를 치는 무리들에 어정쩡하게 섞여 있다가 당구마저도 흥미를 느끼지 못해 혼자서 홀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길을 잃어버린 나머지 엉뚱한 방에 들어가게 된다. 활짝 열린 방 창문 너머로 사시나무, 라일락, 장미꽃 향이 흘러들었다. 멈춰 서서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사각대는 드레스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여자가 숨을 가쁘게 쉬면서 "이제야 오시다니!"라고 속삭이며 볼에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즉시 사람을 잘못 본 것을 깨닫고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고 자리를 뜬다. 그러나 랴보비치에겐 그것이 지울 수 없을 만큼 진한 흔적으로 남는다. 부대는 마을을 떠나 야영지에 도착하고, 다시 야영지를 떠나 낯선 여인의 키스를 받았던 작은 마을로 돌아오게 되지만, 랴보비치는 얼굴도 알 수 없는 그 여인 생각으로 모든 시간을 신비감에 쌓인 채 보내게 된다. 돌아온 마을에서 옛 기억을 쫓아 저택 근처로 혼자서 가보기도 하지만, 자신이 바람을 잡으려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숙소로 돌아오니 동료들 모두가 어떤 장군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 떠나고 없었다. 랴보비치는 그곳에 합류하지 않기로 한다. 아마도 '낯선 여인의 키스'의 기억을 때 묻히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가장 서정적이고 순수한 낭만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그 '낯선 여인'이 누구일지 궁금하다. 


6호실

이 책에 실린 여덟 단편 중 중편이라 해도 될 만큼 가장 긴 작품이다. 제목만 보고도 나는 눈치를 챘다. 6호실이라니.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자연스레 병실을, 그중에서도 정신병동에 속한 병실을 떠올렸다. 내 짐작은 적중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다른 단편들과 달리 남녀 간의 사랑이나 심리가 아니라, 이 작품은 성을 뛰어넘는 인간 본성을 겨냥한다. 잠시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도 했다. 의사인 안드레이 예피미치와 정신병 환자 이반 드미트리치 사이의 대화가 이 작품에선 가장 에센스가 아닐까 싶다. 누가 정신병자이고 누가 정상인인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끝내 정신병동에 갇히게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안드레이 예피미치를 보며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 주위를 둘러싼 지인들의 반응과 행동에서 나는 공포마저 느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느꼈던 감옥의 정의와 목적과 유용성에 대한 답 없는 질문들도 떠올랐다. '감옥'이라는 단어 대신 '정신병동'이라는 단어를 대체하기만 하면 얼추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조금 지루한 면이 없진 않으나 분량이 긴 만큼 단편이 던져주는 잽이 아닌 중장편에서 맛볼 수 있는 묵직한 어퍼컷을 한 방 맞은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 덕분에 체호프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편적인 이야기만을 다루는 작가가 아니라 진지하고 무거운 질문과 통찰을 다루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 길더라도 이 작품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신부

나쟈라는 한 약혼녀가 어릴 적부터 한 집에서 친하게 지내던, 고아였던 오빠 사샤 덕분에 자기 객관화를 이루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나쟈의 어머니는 친할머니의 자산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책만 읽고 모호한 것들을 확신 있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여자다. 나쟈와 곧 결혼하기로 약속한 안드레이라는 약혼남 역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대며 바이올린이나 켜며 결혼을 기다린다.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나쟈가 보기에 그곳에서 안드레이와 결혼까지 하게 되면 대대로 그 삶 안에서 박제된 채 죽음을 기다릴 것만 같았다. 이런 객관적인 사실을 보게 된 건 매년마다 그것을 알려주는 사샤 덕분이었다. 결혼을 한 달 앞에 둔 시점에서야 비로소 나쟈는 마음에 결단을 내리고 사샤와 함께 늪과 같은 그 집을 떠나기로 한다. 당연히 결혼은 취소되었고, 갑자기 떠나버린 나쟈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나쟈는 집을 떠나 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다음 해에 오랜만에 집을 방문한 나쟈는 집에 오면서 들른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사샤가 더 이상 영특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병약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나쟈는 옛 기억에 잠시 회상에 잠기기도 하지만, 날벼락처럼 들려온 사샤의 사망 소식을 계기로 다시 한번 예전에 사샤와 함께 집을 떠나기로 결단했던 자신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된다. 한 젊은 여성의 자기 객관화와 개성화를 통한 성장 소설. 마치 헤세의 변주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이었다. 


* 녹색광선 읽기

1. 감정의 혼란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결혼, 여름 (by 알베르 카뮈): https://rtmodel.tistory.com/1646

3. 미지의 걸작 (by 오노레 드 발자크): https://rtmodel.tistory.com/1650

4. 눈보라 (by 알렉산드르 푸시킨): https://rtmodel.tistory.com/1682

5. 보통 이하의 것들 (by 조르주 페렉): https://rtmodel.tistory.com/1735

6. 낯선 여인의 키스 (by 안톤 체호프): https://rtmodel.tistory.com/2034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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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선집 7
헤르만 헤세 지음, 윤순식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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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나르치스


헤르만 헤세 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다시 읽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다시 읽으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나는 이제 이 작품으로 감동을 받을 만큼 순수하지 않다는 것.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줄 긋고 되새김질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했다는 것. 재밌는 건 초독 때 밑줄 그었던 부분 중 팔 할 정도는 이번에 밑줄을 긋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탓인데, 주로 이 작품의 주제 혹은 헤세 작품의 전반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자아 발견 및 실현 혹은 개성화에 관련된 문장들이었다. 하지만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밑줄 그은 곳도 있었다. 주로 수려한 문학적 표현이 담긴 문장들이었다. 초독과 재독 사이의 7년이라는 기간은 그만큼 이 작품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변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독자로만 읽다가 작가로도 읽게 되는 전환이 아마도 가장 큰 차이를 낸 것 같다. 한 가지 더, 이 차이 뒤에 숨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나는 그동안 도스토옙스키 주요 작품들을 두세 번씩 읽으며 인간의 이율배반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켜켜이 누적된 시간들의 무게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인지 헤세가 그려내는 이분법적 자아의 분열 양상과 합일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구도로부터 나는 예전에 느꼈던 무구한 감동보다는 의외의 순진성과 단순성을, 그리고 그 결과로 도출되는 비현실적인 낭만성 혹은 관념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7년 전의 나에겐 나라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알람과도 같았다는 점을 상기할 때, 나는 한 사람의 정신적인 성장과 성숙 혹은 타성에 젖게 하는 세월의 강력한 힘을 통감하게 된다.


이 작품 감상을 나누기 위해 나는 ‘데미안’을 소환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데미안’을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해석할 때,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목적지이자 이상과도 같은 의미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단 한 번도 동등한 적이 없었다. 작품 마지막, 병실에서 사라진 데미안의 빈자리와 싱클레어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데미안은 어른인지 아이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정도의 신비감을 머금은 채 언제나 싱클레어보다 몇 발 앞서 있을 정도로 우월한 존재였다. 물론 데미안의 우월성은 '데미안'을 에고의 껍질을 깨고 셀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한 인간 내면의 여정을 싱클레어와 데미안이라는 두 인물로 형상화하여 그려낸 작품이라고 해석할 때 비로소 철학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도 데미안과 비슷하게 신비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어떤 특정한 사람은 아니다. 골드문트가 정의하는 ‘최고의 예술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의 문장들로 표현된다. “진정으로 숭고한, 마법을 부린 듯한 훌륭한 솜씨뿐만 아니라 영원한 비밀로 가득 차 있는 예술 작품은, 예를 들어 스승의 성모 마리아 상 같은 작품은, 모두가 위험한 이중성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즉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충동적인 것과 순수한 정신적인 것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자신이 어머니 이브 상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작품이야말로 그러한 이중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리라.” 골드문트 역시 싱클레어처럼 양극성이라 할 수 있는 이중성을 모두 겸비한 어떤 이상형을 향해 걸어가는 인물인 것이다. 또한 골드문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도 한다. “꿈과 최고의 예술 작품의 공통점은 바로 신비였다. 내가 사랑하고, 그 흔적을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신비이다.” 뿐만 아니다. “자신은 계속 어머니를 따라가야 했다. 어머니가 자신의 별이자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결단의 순간이 목전에 다가오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에게 있어 그것은 운명이나 목표는 아니었다. 그가 따라야 할 것은 예술이 아니라 어머니의 부름이었다.” 즉, 골드문트가 지향하는 것은 그의 꿈이자 신비였고, 또 어머니(생물학적 어머니를 넘어서는 총체적인 이미지)였다.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그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될 수도 있는 어떤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그 무엇이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나르치스의 존재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르치스와 데미안이 서로 다른 존재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목적지이지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목적지가 아닌 여집합이라는 것. 이는 거꾸로 보아도 진실이다. 나르치스에게도 골드문트의 본성은 자신이 잃어버린 반쪽이었기 때문이다. 즉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운명을 짊어졌을 뿐 동등한 존재였다. 이것이 데미안과 싱클레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이 두 관계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고, 헤세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가 녹아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것은 ‘데미안’에서 미처 그려내지 못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의미도 가진다. 나르치스에 상응하는 인물은 ‘데미안’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르치스가 어둡고 여윈 편이라면, 골드문트는 밝고 화려하게 빛나는 편이다. 나르치스가 사변가이자 분석가라면, 골드문트는 몽상가이며 아이처럼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다. 나르치스의 세상이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골드문트의 세상은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르치스가 냉철할 정도로 정확하고, 이성과 정신성을 대변하는 타고난 학자라면, 골드문트는 본능적일 정도로 야생적이고, 감성과 육체성을 대변하는 타고난 예술가로 그려진다. 이러한 명징한 이분법으로부터 우리는 헤세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헤세는 이 작품 속에서도 사상과 예술로 표현되는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작가로서 헤세의 사명이기도 했다. 


요컨대 ‘데미안’이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자아 발견 및 자아실현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라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골드문트가 나르치스가 아닌, 나르치스를 충분히 포용하면서도 나르치스로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더욱 근원적이며 총체적인 진리를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통해 자아실현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나르치스를 세상에서 인정하는 유력자의 전형적인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해석에 비추어 보면, 골드문트는 비주류에서 탄생하는 천재적인 예술가를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현실에서 나르치스 같은 인물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반면, 골드문트 같은 인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듯해 보인다. 아마도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혹은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발현할 기회를 맞이하지 못한 채 사그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골드문트 같은 인물에게 자본주의 체제의 피라미드 구조는 야생동물을 가둔 조그만 우리처럼 숨 쉬기조차 어려운 공간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나는 나르치스의 존재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헤세도 아마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을 떠난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골드문트가 나르치스와 재회하게 된 순간이 바로 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골드문트는 간통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할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때 구원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나르치스였다. 만약 이 일촉즉발의 순간에 나르치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골드문트는 그저 예술 작품 몇 개 남기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나는 이 극적인 순간으로부터 작가 헤세의 의도를 나름대로 읽을 수 있었다. 골드문트의 길들여지지 않는 예술가적인 방식으로의 자아실현은 나르치스처럼 길들여진 제도권 안에 속한 유력자의 도움 없이는 꽃피우기 힘들다는 것. 아마도 헤세는 이 점을 넌지시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나르치스 덕분에 구사일생을 경험한 골드문트 덕에 나르치스 자신도 더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모습이 작품 마지막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게 무결해 보이는 나르치스가 죽어가는 골드문트 면전에서 자신의 결핍을 깨닫고 인정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내 경우는 다르네. 내 삶에는 사랑이 빈곤했네. 인생에서 최고의 것이 결여된 셈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건 다 자네 덕분이네. 나는 자네는 사랑할 수 있었네." 아마도 이 문장 때문에 이 작품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이 '지와 사랑'으로도 나오지 않았나 싶다. 이성과 믿음, 이 두 가지를 모두 겸비한 나르치스에게 유일한 결핍이 사랑이었다는 건 하나의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골드문트의 모든 삶을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 이유도 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나르치스의 위대함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결핍을 진심으로 깨닫고 인정하는 지고의 겸손을 보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개성을 인지하고 발현하는 것은 자신의 장점과 강점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방식만이 아니라 자신의 단점과 약점을 솔직하게 수용하고 끌어안는 방식도 경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 장면에서 헤세는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결과적으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각자가 스스로 발견하고 발현시킨 개성이 서로에게 정직한 거울이 되어 서로가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다. 서로의 반쪽이 결국 합일을 이루도록 돕는 아름다운 장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의미한 깨달음이 내게 끼치는 영향력은 예전과 달리 강력하지 않음을 느낀다. 이미 나는 헤세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나이가 든 나머지 많은 것들에서 무감각해져 버린 탓일까? 나는 전자이길 바라지만, 후자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6.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1991

7.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2014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2033

9. 싯다르타: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14. 헤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979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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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앉아 있네 - 문지혁 작가의 창작 수업
문지혁 지음 / 해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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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고 성실한 창작 수업


문지혁 저, '소설 쓰고 앉아 있네'를 읽고


자조적인 뉘앙스가 물씬 풍기는 제목이 특이해서 고른 이 책에 제대로 낚였나 싶었는데, 웬걸, 글쓰기를 막 시작하던 때완 달리 작법서의 효용에 대해 이젠 냉랭한 입장에 서 있는 내게도 이 책은 꽤나 유용했다. 시점, 이야기, 서사, 플롯, 묘사, 대사, 대화, 퇴고 등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위한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사항들을 친절하게 소개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작법서들을 단순히 짜깁기한 듯한 고리타분한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작법서들을 굳이 보지 않아도 이 책 한 권이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저자 문지혁 작가의 진정성 있는 개인 서사가 진하게 묻어 있다는 점, 그리고 전혀 교조적이지 않고 다정한 옆집 형(혹은 오빠)의 목소리로 들려진다는 점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다정함이 이긴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저자가 화려하게 어떤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가 아니라는 점, 그래서 작가 지망생으로 십여 년동안 고군분투했다는 점도 이 책에 진정성을 더욱 부여하지 않았나 싶다. 저기 저 위 빛나는 곳에서,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저 앞에서 들려오는 승리자의 소리가 아니라 옆에서 같이 뛰고 있는 안내자의 느낌이 드는 작법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유명 외국 작가들의 작법서들이 즐비하지만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거나 소설 창작의 기본적인 지식들을 습득하고 싶은 한국의 미래 작가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대학에서 다년간 강의한 저자의 이력은 물론 홀로 창작의 길을 외롭고 힘들게 닦아온 성실한 작가로서의 산 지식과 경험이 더욱 입체감 있게 다가올 것이다.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자의 내공이랄까 여유랄까 하는 저력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것들이 글쓰기의 긴 여정에서 함께 한다는 위로와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용기를 선사한다는 것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세 번째 에세이 ‘우동 거리 밖에서’가 인상적이었다.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다정한 선생님의 이미지였는데, 이 글에서만큼은 다정함 속에 숨은 뾰족한 가시가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듯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 문단의 편향성과 획일성과 보수성에 쓴소리를 하는 글인데, 적어도 내겐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전통을 지키는 것과 시대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채 관성만을 좇는 방식으로는 결코 건강한 문단 생태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저자가 가능한 톤을 약하게 하려 애쓴 흔적을 느낄 수 있었는데, 저자가 조금 더 거침없이 글을 썼더라면 좋았겠다 싶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문단의 이슈들이 대중적으로 좀 더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았다. 전국과 세계에 이름 없이 흩어져있는 한국 미래의 작가들이 미리 정보를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책 덕분에 문지혁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작법서만 쓰는 작가가 아니라 실제 소설을 쓰는 작가이기에 그가 보낸 숱한 시간들이 그 소설 속에 오롯이 녹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시작했으나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장편소설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해냄출판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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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안에서 사는 법 -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지금 충실하게 살아가기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비아토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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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성을 끌어안으며 기쁨으로 기다리기


제임스 K. A. 스미스 저, '시간 안에서 사는 법'을 읽고


공상과학영화 'Arrival' 끝부분에서 주인공 루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표출하는 장면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나는 압도되었고 먹먹해지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대사는 다음과 같다. 


"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I embrace it. And I welcome every moment of it."

"모든 여정과 그 끝을 알면서도 나는 모든 걸 끌어안는다. 그 모든 순간을 기쁘게 맞이한다."


루이스는 미래를 볼 수 있다. 그 미래에서 루이스는 결혼하고 딸을 낳는다. 그 딸은 청소년 시기에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다. 루이스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을 감행하고 아이도 가지기로 한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그러지 않기로 한다. 그 미래를 향해 현재를 정면 돌파하기로 한다. 가슴 무너지는 상실을 겪게 될 줄 알면서도 그 상실은 물론 그것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꿋꿋이 끌어안기로 다짐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루이스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 무엇이 루이스로 하여금 그런 다짐을 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은 그 느낌이 깊은 감동과 함께 아직 생생하다. 


미래보다 현재를, 영원성보다 유한한 시간성에 초점을 맞추는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루이스가 떠오른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리라. 내겐 필멸성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나, 현재를 붙잡으라는 '카르페 디엠'과 같은 철학적 문구보다 서사가 깃든 루이스의 저 문장이 더 강력했던 것 같다. 미래와 현재와 과거, 즉 시간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크게 영향을 받을 만큼 말이다. 저 영화를 본 이후 'Embrace(끌어안다)'라는 단어가 내 삶의 모토 중 하나로 성큼 들어왔다. 이 단어는 이 책을 한 단어로 축약하라고 하면 내가 고를 단어이기도 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닫고 습관을 좇아 감상문을 남기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보통은 글을 다 쓰고 제목을 마지막에 정하는 편인데, 이번엔 제목이 먼저 정해졌다. '필멸성을 끌어안으며 기쁨으로 기다리기'로 말이다. 이것은 이 책에 흐르는 저자의 일관된 메시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겐 단호하게 붙잡힌 메시지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는 영원하고 완전한 진짜 세계로 상정된다. 반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는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이데아 세계의 모방일 뿐인 가짜 세계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기독교와 만나게 되면 영육이원론이 된다. 영적인 것은 신성하고 육적인 것은 속되다. 물질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며 영적인 것들만을 신봉하는 영지주의는 한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심취하기도 했던 마니교의 중심 세계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후 영지주의의 이단성을 비판하며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발전시킨 교부로 거듭나게 되지만 말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완전한 신의 세계로 그려지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나 영지주의의 영적인 세계는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영원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영원성은 무시간적인 개념이다. 기독교에서 믿는 유일신인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신 존재로서 처음부터 계시는 분이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홀로 계셨으며 불멸하시는 분이다. 탄생도 소멸도, 시작도 끝도 없는, 시작 이전과 끝 이후까지 모든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영원성은 신적인 개념인 것이다.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어 유한하고, 육신을 입고 있어 제한적인 인간이 신을 동경하며 숭배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고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인간의 육신까지도 부정하는 극단의 영지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인간은 유한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다.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이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우리의 유한성, 곧 신성의 결여는 분노하거나 슬퍼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시간성이라는 조건 이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감옥이 아니라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라고 역설한다. 한계라는 선물 덕분에 우리에게는 행복할 여지, 기쁨을 찾을 여지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유한성은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의 핵심에는 가르침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서사가 있는, 즉 역사 안에서(실제로 일어난 사건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주의하자. 역사성을 따지는 건 다른 문제에 속한다) 일어난 사건 중심으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성경도 거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기억하라). 이것은 기독교가 무시간의 종교가 아님을 뜻한다. 영원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시간성을 지닌 인간의 삶에 침투하신 사건들이 성경에는 잔뜩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이런 순간, 즉 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진리가 태어난다고 말한다. '시간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이는 물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 속으로 하나님과 의미와 가능성으로 충만한 카이로스의 시간이 침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즉 하나님이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인간이 구원받는 사건 등이 모두 이러한 '시간의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소중한 이유도 모든 크로노스의 순간이 카이로스의 순간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한한 시간성을 지닌 모든 순간들이 소중한 이유 역시 언제든 영원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한성은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선물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 사건은 무시간성으로는 설명할 수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모든 인간의 회개와 회심은 모두 역사성을 띤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전의 내 모습이 세탁되는 걸 뜻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듯이 하나님은 이전 내 존재의 초고를 내다 버리신 후에 새 책을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새로운 장을 쓰고 계신다. 또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내 삶에 임하셔서 성화를 이루신다고 해서 이전에 있었던 일이 지워지지 않는다. 사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는지는 이전에 일어났던 일에 달려 있다. 나의 개인적 역사는 후회할 무언가가 아니다. 내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하나님이 활용하실 수 있는 무언가다." 정말이지 허를 찌르는 문장이지 않을 수 없다. 백퍼세트, 이백퍼센트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러므로 다음의 저자의 문장도 옳다. "새로운 피조물은 리셋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는 과거를 지닌 자의 부활이다. 이 몸의 역사를 지닌 이 내가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때만 내가 구원을 받는다. 은혜가 내가 살면서 겪은 모든 것을 지워 버린다면 나는 속량되기보다 상실된다."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 채 죄인으로 살던 나의 옛 모습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역사를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에 따라 부활하는 몸은 과거의 상처를 그대로 지닌 몸이다. 구속되고 용서받고 은혜를 입고 해방되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지닌 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임하셔서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하심을 감사하며 끊임없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나다. 유한한 시간적 존재인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기쁜 순간은 어쩌면 거듭나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우리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이 교차하는 시간의 충만함을 경험한 자들인 것이다. 시간적 존재가 영원성을 입은 존재로 거듭나는 순간을 경험한 자들인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건강한 종말론을 언급한다. 알다시피 종말이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이다. 지금 우리가 속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실천적 종말론을 저자는 우리가 언제에 있는지를 알고, 이로써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화음처럼 묶어 내는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실천적 지혜라고 정의한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 우리의 시선을 머무르게 함으로써 결코 시간보다 앞서 살아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에 예속되어서도, '아직'에 묶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둘 사이의 긴장을 체감하면서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극단적 낙관주의와 절망적 허무주의를 모두 거부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소망을 잃지 않으면서 말이다. 


모든 창조물은 덧없고 일시적이며 우연적인 존재다. 그리고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필멸의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이러한 필멸성을 저주로 받아들이지 말고 기꺼이 끌어안으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방법을, 그 안에서 성령보다 앞서 가지 않으며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방법을 배워나가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모두 끌어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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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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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회복을 위하여


한병철 저, ‘서사의 위기’를 읽고


서사의 위기는 서사의 종말에 대한 경고다. 인터넷, 스마트폰, 동영상, 그리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워크 등으로 공급되는 정보의 과포화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오늘날 우리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다. 텍스트와 영상을 대조하며 영상의 폐해를 논한다거나, AI로 인한 인간성 상실 등의 부작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책에서는 그것들보다 좀 더 근원적이고 좀 덜 기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두 가지 개념 비교를 거듭 강조하면서 말이다. 하나는 정보와 지식의 대조, 다른 하나는 스토리와 서사의 대조이다. 


저자 한병철은 이 시대에 지식이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신 모든 게 정보화되고 있으며 그 정보가 모든 곳을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정보는 새로움을 선보이지만, 새로움은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순간 더 이상 새로운 게 아니게 되므로 자연스레 힘을 잃는다. 그래서 정보는 찰나적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즉 아무런 서사를 남기지 않고,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단편의 더미로써 휘발된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은 또 다른 정보들로 대체된다. 이런 무한반복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여러 미디어들로 인해 무한히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정작 중요한 지식은 점점 밀려나게 되고 결국 소멸하고 있다. 소위 지식의 종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식의 위기, 지식의 소멸, 지식의 부재는 원인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보화되고 있는 이 시대의 열매(결과)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인과응보의 열매를 수동적으로 따먹을 필요가 없다. 저항하고 저항해서 다른 열매가 맺히길 주도해야 한다. 객체로서 정보의 홍수에 빠져 죽지 않고, 주체가 되어 지식의 소중함을 깨닫고, 알리고, 또 지켜야 한다.


또한 저자는 이 대조를 기반으로 해서 이 책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와 서사의 대조를 심화시킨다. 여기서 스토리란 우리가 아는 이야기의 개념이 아니다. 엄마 아빠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누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마음을 담은 은밀한 고백은 여기서 말하는 스토리가 아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혹은 ‘스토리‘가 붙는 여러 소셜네트워크시스템, 이를테면 카카오스토리, 브런치스토리, 티스토리 등을 포함한 여러 블로그들에서 남용되는 스토리를 일컫는다. 맥락도 없고, 성찰도 없으며, 휘발성이 강하고, 소통을 빙자한 보여주기식의 포스팅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런 스토리들은 무방비 상태의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 소리소문 없이 침투한다. 침투하여 장악한다. 장악하여 소비자인 우리들을 조용히 노예로 만든다. 우리 중 누군가는 먹고 자고 싸고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스토리들을 읽고 반응하고 또 게시하는 데 사용한다. 이른바 중독이다. 중독도 문제지만,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중독인데 중독인 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앞에서 소통을 빙자했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소통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진정한 소통은 사람을 알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경험과 생각,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과 재해석, 타자와 세상을 향한 시선과 태도 등(이 모두가 개인의 서사를 이룬다)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즉 진정한 소통은 스토리가 아닌 서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보로는 한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이는 서류 전형으로만 인사를 단행할 수는 없는 근원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로 도배되는 스토리들의 비대로 인해 점점 서사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게 데이터화(정보화)되고, 모든 게 조각난 스토리로 실시간으로 전시된다. 성찰은 온데간데없고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해진다. 보여주는 정보와 스토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리는 목적보다는 진정한 내 모습을 감추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도구가 된다. 내가 아닌 나의 모습, 좋아요를 받기 위한 최적화된 방식의 정보와 스토리로 거짓된 내 모습을 만들어 진정한 나를 은폐한다. 괴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저자 한병철은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이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브이로그처럼 아무런 서사가 없는 그냥 보여주기로는 결코 나를 알 수도 알릴 수도 없다. 나를 알거나 알리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전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되는 일상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서사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이 시대에 글쓰기를 권하고 싶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유일한 방식이 어쩌면 글쓰기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믿게 된다. 사건을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등 소소한 개인의 인생에 서사를 불어넣는 것이다. 저자는 셀카가 텅 빈 자기 복제라고 했다. 글쓰기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는다.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가지 않고, 스토리 전시로 거짓된 모습을 증폭시키고 강화시키는 공허한 작업을 그만둘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대체 방안이라고 믿는다.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고, 솔직하게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성찰할 수 있으며, 마침내 타자와 세상을 향한 통시적인 통찰도 내놓을 수 있는 서사의 회복을 꾀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만약 이 메시지가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면, 만약 현재 자신의 모습에서 탈피하고 싶다면, 자, 오늘부터 글쓰기 1일이다.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고, 상호 간의 서사를 살려내며, 비로소 함께 사는 서사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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