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안에서 사는 법 -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지금 충실하게 살아가기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비아토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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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성을 끌어안으며 기쁨으로 기다리기


제임스 K. A. 스미스 저, '시간 안에서 사는 법'을 읽고


공상과학영화 'Arrival' 끝부분에서 주인공 루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표출하는 장면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나는 압도되었고 먹먹해지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대사는 다음과 같다. 


"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I embrace it. And I welcome every moment of it."

"모든 여정과 그 끝을 알면서도 나는 모든 걸 끌어안는다. 그 모든 순간을 기쁘게 맞이한다."


루이스는 미래를 볼 수 있다. 그 미래에서 루이스는 결혼하고 딸을 낳는다. 그 딸은 청소년 시기에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다. 루이스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을 감행하고 아이도 가지기로 한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그러지 않기로 한다. 그 미래를 향해 현재를 정면 돌파하기로 한다. 가슴 무너지는 상실을 겪게 될 줄 알면서도 그 상실은 물론 그것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꿋꿋이 끌어안기로 다짐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루이스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 무엇이 루이스로 하여금 그런 다짐을 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은 그 느낌이 깊은 감동과 함께 아직 생생하다. 


미래보다 현재를, 영원성보다 유한한 시간성에 초점을 맞추는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루이스가 떠오른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리라. 내겐 필멸성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나, 현재를 붙잡으라는 '카르페 디엠'과 같은 철학적 문구보다 서사가 깃든 루이스의 저 문장이 더 강력했던 것 같다. 미래와 현재와 과거, 즉 시간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크게 영향을 받을 만큼 말이다. 저 영화를 본 이후 'Embrace(끌어안다)'라는 단어가 내 삶의 모토 중 하나로 성큼 들어왔다. 이 단어는 이 책을 한 단어로 축약하라고 하면 내가 고를 단어이기도 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닫고 습관을 좇아 감상문을 남기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보통은 글을 다 쓰고 제목을 마지막에 정하는 편인데, 이번엔 제목이 먼저 정해졌다. '필멸성을 끌어안으며 기쁨으로 기다리기'로 말이다. 이것은 이 책에 흐르는 저자의 일관된 메시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겐 단호하게 붙잡힌 메시지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는 영원하고 완전한 진짜 세계로 상정된다. 반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는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이데아 세계의 모방일 뿐인 가짜 세계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기독교와 만나게 되면 영육이원론이 된다. 영적인 것은 신성하고 육적인 것은 속되다. 물질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며 영적인 것들만을 신봉하는 영지주의는 한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심취하기도 했던 마니교의 중심 세계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후 영지주의의 이단성을 비판하며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발전시킨 교부로 거듭나게 되지만 말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완전한 신의 세계로 그려지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나 영지주의의 영적인 세계는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영원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영원성은 무시간적인 개념이다. 기독교에서 믿는 유일신인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신 존재로서 처음부터 계시는 분이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홀로 계셨으며 불멸하시는 분이다. 탄생도 소멸도, 시작도 끝도 없는, 시작 이전과 끝 이후까지 모든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영원성은 신적인 개념인 것이다.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어 유한하고, 육신을 입고 있어 제한적인 인간이 신을 동경하며 숭배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고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인간의 육신까지도 부정하는 극단의 영지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인간은 유한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다.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이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우리의 유한성, 곧 신성의 결여는 분노하거나 슬퍼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시간성이라는 조건 이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감옥이 아니라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라고 역설한다. 한계라는 선물 덕분에 우리에게는 행복할 여지, 기쁨을 찾을 여지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유한성은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의 핵심에는 가르침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서사가 있는, 즉 역사 안에서(실제로 일어난 사건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주의하자. 역사성을 따지는 건 다른 문제에 속한다) 일어난 사건 중심으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성경도 거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기억하라). 이것은 기독교가 무시간의 종교가 아님을 뜻한다. 영원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시간성을 지닌 인간의 삶에 침투하신 사건들이 성경에는 잔뜩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이런 순간, 즉 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진리가 태어난다고 말한다. '시간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이는 물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 속으로 하나님과 의미와 가능성으로 충만한 카이로스의 시간이 침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즉 하나님이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인간이 구원받는 사건 등이 모두 이러한 '시간의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소중한 이유도 모든 크로노스의 순간이 카이로스의 순간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한한 시간성을 지닌 모든 순간들이 소중한 이유 역시 언제든 영원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한성은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선물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 사건은 무시간성으로는 설명할 수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모든 인간의 회개와 회심은 모두 역사성을 띤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전의 내 모습이 세탁되는 걸 뜻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듯이 하나님은 이전 내 존재의 초고를 내다 버리신 후에 새 책을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새로운 장을 쓰고 계신다. 또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내 삶에 임하셔서 성화를 이루신다고 해서 이전에 있었던 일이 지워지지 않는다. 사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는지는 이전에 일어났던 일에 달려 있다. 나의 개인적 역사는 후회할 무언가가 아니다. 내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하나님이 활용하실 수 있는 무언가다." 정말이지 허를 찌르는 문장이지 않을 수 없다. 백퍼세트, 이백퍼센트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러므로 다음의 저자의 문장도 옳다. "새로운 피조물은 리셋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는 과거를 지닌 자의 부활이다. 이 몸의 역사를 지닌 이 내가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때만 내가 구원을 받는다. 은혜가 내가 살면서 겪은 모든 것을 지워 버린다면 나는 속량되기보다 상실된다."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 채 죄인으로 살던 나의 옛 모습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역사를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에 따라 부활하는 몸은 과거의 상처를 그대로 지닌 몸이다. 구속되고 용서받고 은혜를 입고 해방되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지닌 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임하셔서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하심을 감사하며 끊임없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나다. 유한한 시간적 존재인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기쁜 순간은 어쩌면 거듭나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우리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이 교차하는 시간의 충만함을 경험한 자들인 것이다. 시간적 존재가 영원성을 입은 존재로 거듭나는 순간을 경험한 자들인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건강한 종말론을 언급한다. 알다시피 종말이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이다. 지금 우리가 속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실천적 종말론을 저자는 우리가 언제에 있는지를 알고, 이로써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화음처럼 묶어 내는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실천적 지혜라고 정의한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 우리의 시선을 머무르게 함으로써 결코 시간보다 앞서 살아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에 예속되어서도, '아직'에 묶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둘 사이의 긴장을 체감하면서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극단적 낙관주의와 절망적 허무주의를 모두 거부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소망을 잃지 않으면서 말이다. 


모든 창조물은 덧없고 일시적이며 우연적인 존재다. 그리고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필멸의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이러한 필멸성을 저주로 받아들이지 말고 기꺼이 끌어안으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방법을, 그 안에서 성령보다 앞서 가지 않으며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방법을 배워나가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모두 끌어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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