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플 플랜, 컴플리케이티드 휴먼 네이처


스콧 스미스 저, ‘심플 플랜’을 읽고


결국 심플 플랜은 심플하지 않았다. 플랜이 아무리 심플할지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주체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편소설의 방점은 플랜이 아닌 플래너, 즉 인간에 있다. 플랜이 아무리 심플해도 절대 심플하게 처리할 수 없는 존재, 인간 말이다. '심플'은 '컴플리케이티드'를 가리키고, '플랜'은 플래너인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제목, '심플 플랜'은 '컴플리케이티드 휴먼 네이처'라고 나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한 시골 마을, 한 해의 마지막 날, 행크라는 이름의 화자는 자신의 친형과 형의 친구, 이렇게 셋이서 함께 우연히 추락한 경비행기를 발견하게 된다. 조종사는 이미 죽어 까마귀에게 눈알을 파 먹힌 상태였고, 바닥에 놓인 더플백 안에는 사백만 달러가 넘는 현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 하지만 평상시에는 이성적이기보다는 습관을 쫓아 살아가는 동물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약간의 스크래치를 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인간이 가장 이성적인 상황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된 일을 수습하려고 할 때가 아닐까 싶다. 평소에는 존재하는지조차 의식되지 않던 머리가 활발하게 돌아가는 순간, 우린 자신이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제삼자의 눈으로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 가끔 바보처럼 자신이 똑똑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습관을 쫓아 살아간다는 건 다분히 감정에 이끌리는 생활 패턴을 가리킨다. 늘 해오던 대로, 편리한 대로, 쉬운 길로, 그것이 정의로운지 옳은지 이타적인지 도덕적인지에 대한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자신의 유익을 더하는 방향으로만 살아가는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방식 말이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서게 될 때가 있는데, 그 생활 패턴은 지나친 탐욕으로 드러나게 되고 인간은 실수랄까 범죄랄까 하는 행동을 종종 하게 되는데, 나는 바로 이때가 이성이 최고조로 활동하게 되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은 일을 벌이기 전이 아닌 이미 벌어진 일을 처리하는 데 더 활발하게 사용되곤 하는 것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인 이 작품을 가득가득 메우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유익, 탐욕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 계획을 계속 수정해 나가며 일을 눈덩이처럼 부풀리게 되는 이야기. 그 과정 중에 아홉 명이라는 적지 않은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게 되는 스릴 넘치는 이야기. 놀라운 건 그 살인조차 '어쩔 수 없었다'라는 합리화를 하며 그다지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만의 이기적인 목적을 완벽히 성취하기 위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읽을 때의 주목해야 할 부분은 주인공인 화자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 그 심리 변화로 인한 행동의 변화, 그리고 그 행동의 변화로 인해 빚어지는 돌발적인 상황들을 수습해 나가는 일련의 모습들일 것이다. 


플랜이 아무리 심플해도 절대 심플하게 처리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탐욕 때문일 것이다. 탐욕은 왜곡시키는 힘이 있다. 그것에 의해 객관성은 증발되고, 이성 대신 감정이 더욱 우세하게 되며, 범죄에 대범해지게 되며, 급기야 모든 이성을 총동원하여 합리화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인간 심리의 변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도 우리도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기도 한다. 언제나 섬뜩함의 심연은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본성을 자각할 때이지 않은가. 비록 벽돌책이지만 페이지터너인 이 책을 나는 휴가 때나 휴일에 꼭 손에 들고 읽어보길 강력하게 추천한다.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5-10-14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벽돌책 소설이 마치 심리학이나 자기계발 이슈를 담고 있는 듯 합니다. 인간의 뇌는 원시 인류로부터 물려받은 생존 본능 때문에 익숙함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이를 크리티칼 패스라고 부르는데, 행동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게 종종 오류라는 결과를 불러온다고 하더군요. 즉 이성적인 판단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Youngwoong Kim 2025-10-15 15:50   좋아요 0 | URL
네 인간의 본성을 깊이 파헤치는 소설은 모두 그러한 특징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몸글에도 적었지만 제가 보는 인간은 이성적이기보다는 습관을 쫓아 살아가는 동물인 것 같습니다. 그게 생존 본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이성적인 판단이 자기의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걸 선택하지 않는다는 게 저의 지론이고요. 그걸 해내는 사람만 존재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쪽박과 대박 사이: 작가, 운명, 기적


폴 오스터 저, '빵 굽는 타자기'를 읽고


이 책을 손에 집어든 건 비단 문지혁 작가를 작가로 만든 문장,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를 직접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목 ‘빵 굽는 타자기‘의 원제 ’hand to mouth'가 내 관심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원제는 말 그대로 하루살이를 뜻한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삶 말이다. 


작가는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라는 문장을 잇는 다음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부분이 원제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동시에 폴 오스터의 담백한 심정을 잘 묘사한 것이라 생각한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 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각오도 되어 있었으니까, 불만은 없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운이 좋았다. 물질적으로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었고, 내 앞에 가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겁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한 것은 재능 (나는 이것이 내 안에 있다고 느꼈다)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어지는 문장은 작가의 이중 직업에 대해서다. 글만 쓰고 사는 건 금수저로 태어나거나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이 문장들뿐 아니라 이 책 저변에 깔려 있다. 이 일관된 논리를 작가는 선택되는 것이라는 문장과 연결시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필연적으로 탄생하게 된다. 


“작가는 쪽박 차게 되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다.” 


이 간결한 문장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작가들이 공감할 수 있고, 또 많은 경우 자신의 삶에서 직접 체험한 적이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알기론 저 유명한 도스토옙스키도 생계형 작가였다. 폴 오스터 역시 시대만 다를 뿐 같은 족속에 속하는 작가였던 것 같다. 이 책은 폴 오스터의 자전적 이야기로써, 그의 작가로서의 시작과 초창기 무명시절의 일대기를 에세이로 쓴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두 가지 단어가 남았다. 하나는 자유, 다른 하나는 믿음이다. 두 가지는 모두 폴 오스터의 작가 초창기, 아니 그의 젊은 시절을 모두 아우르는 키워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자유라 함은 선택의 기로에서 그의 태도를 말한다. 이는 두 번째 단어인 믿음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에 인생의 연륜이란 걸 쌓을 순 없으므로 폴 오스터의 자유로워 보이는 선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라기보다는 근거 없는 믿음, 혹은 객기가 기반이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그는 어떤 규칙이나 의무에 묶여 있길 싫어했다. 자기 옷이 아닌 옷을 입는 걸 참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청소년 시기를 갓 벗어난 자가 어떤 옷이 자기 옷인지 아닌지 분별하기란 어려웠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수학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닌 영혼이 끌리는 일을 언제나 선택했다. 가까운 미래에 생계가 어려워지리라는 수학적인 계산 결과가 나와도 그는 입에 풀칠을 하면서도 읽고 쓰는 일을 선택했다. 어찌 보면 폴 오스터는 그의 현재 모습이 아닌 미래 모습에 대한 믿음을 그때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24년에 타개한 폴 오스터는 전 세계적인 대작가 반열에 그의 이름을 당당하게 올렸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실제 살아온 자유분방한, 동시에 현재 모습이 아닌 미래의 자기 모습에 대한 믿음을 기반한 삶을 "작가는 쪽박 차게 되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다"라는 문장과 연결시키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폴 오스터는 작가는 쪽박 차게 되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그 삶을 선택했고 그렇게 살아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대박을 터뜨리는 운명의 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만약 폴 오스터가 무명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였다면 이 책은 출간되지도, 아니 써지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이제야 보인다. 자신의 하루살이 시절을 각색하여 책으로 만들었다는 건 그렇게 해도 충분히 괜찮기 때문이었다는 것. 즉, 무명 시절 하루살이 생활을 솔직하게 꺼내보아도 더 얻었으면 얻었지 잃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 말하자면 성공한 작가 스스로의 입을 빌린 자신의 어려운 시절 이야기는 오히려 작가의 생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인간미를 불어넣어 더욱 멋진 작가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며 폴 오스터의 초창기 시절을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많은 작가들은 위로와 공감을 얻는 동시에 희망과 용기도 얻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전업작가라는 단어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이 세상에 속한 단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요원한 직업인 것이다. 그것을 꿈꾸는 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무명작가 혹은 초보 작가 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작가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폴 오스터처럼 자유와 믿음 (가난과 경험을 필수적으로 전제한다)의 자세로 삶을 살아가면 언젠간 성공한 작가가 되리라는 바람은 허황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운명처럼 폴 오스터에게 찾아온 만남과 기회의 기적이 전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폴 오스터 읽기

1.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 https://rtmodel.tistory.com/1788

2.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https://rtmodel.tistory.com/1791

3.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 https://rtmodel.tistory.com/1794

4. 굽는 타자기: https://rtmodel.tistory.com/20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자로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볼 때


안규철 저,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을 읽고


몇 개월 전 '사물의 뒷모습'이라는 에세이집을 읽고 안규철 작가의 글쓰기에 매력을 느꼈다. 대상을 관찰하는 그의 시선, 그 이후에 따라오는 성찰, 그리고 사유의 마침표를 찍는 그의 통찰이 짧은 글 안에 잘 녹아 있었다. 제목에 나온 뒷모습이라는 단어도 마음에 쏙 들었는데, 나는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많은 말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듬어지지 않고 숨길 수 없는 한 사람의 본연의 모습이 뒷모습에 많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사물의 뒷모습이라니. 그의 시선은 사람에 머물지 않는다. 생명을 가진 것들에 머물지도 않는다. 세상 모든 것들의 뒷모습을 보며 사유하는 작가 안규철의 그다음 책이 나는 몹시 궁금했다.


제목이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다. 이럴 수가! 뒷모습에 이어 내가 늘 마음에 품고 있는 단어 하나가 그림자다. 뒷모습과 그림자는 내게 있어 비슷한 이미지다. 여백이랄까, 무랄까. 말해지지 않는 말, 보이지 않고 보이는 그 무엇. 어떤 통제할 수 없는 사물 혹은 사람 본연의 모습이 뒷모습과 그림자에 담긴다고 나는 믿는다. 저자 역시 '책머리에'에서 정확히 그 점을 짚는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은 '사물의 뒷모습'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고. 사물의 뒷모습을 말하는 것은 사물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회색의 다채로움을 말하는 것이라고. 낯선 이의 글에서 우연히 내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문장을 읽어낼 때의 그 신비한 쾌감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안규철 작가는 미술가다. 이 점이 나는 그의 책을 읽을 때 절대 무시하면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본다면, 작가는 글쓰기(글)를, 음악가는 음악(소리)을, 미술가는 미술(그림이나 조각)로 본인의 마음과 생각을 경유한 그 무언가를 표현한다. 글과 소리와 그림은 예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도 가진다. 그런데 저자는 글과 그림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작가인 것이다. 이렇게 두 세계를 모두 관통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그 세계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저자의 글은 뭔가 다르지 않겠는가. 


독서란 한 작가의 고유한 시선을 함께 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즐거웠다. 부러운 마음도 한가득이었지만, 나는 나대로 고유한 시선과 통찰을 살리면 된다는 용기도 얻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이 책은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림 그림, 그 세 번째 이야기'인데, 첫 번째 이야기가 아직 책장에 꽂혀 있다. 아껴서 읽을 작정이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안규철 읽기

1. 사물의 뒷모습: https://rtmodel.tistory.com/1992

2.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https://rtmodel.tistory.com/20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선집 3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유와 감각, 피안과 차안의 합일: 단일성과 현재성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 저, '싯다르타'를 다시 읽고


비록 ‘싯다르타’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보다 먼저 쓰였지만, 초독 때와 달리 이번엔 의도적으로 나중에 읽은 까닭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이루지 못한 공백을 '싯다르타'가 충실하게 메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르치스가 이성, 머리, 정신, 학문을 대변한다면, 골드문트는 감성, 가슴, 육체, 예술을 대변한다. 이 양극은 작품 마지막에 가서도 좁혀지지 않는다. 양극이 서로 다른 개인으로 발현되어 있다는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합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싯다르타'에서는 이것이 이루어진다. 마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싯다르타 한 개인 안에서 합일을 이룬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를 '사유와 감각의 합일'이라고 해석했다.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헤세를 다시 읽으며 여실하게 느끼는 건 헤세는 인간의 대립된 두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그 두 자아의 합일을 강렬하게 욕망했다는 점이다. '데미안'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이런 모습은 그 이후에 쓰인 모든 작품 속에 충실히 반영된다. 합일을 욕망하기 위해서는 서로 조금도 섞이지 않는 선명한 양극이 전제되어야 한다. 양극이 선명할수록 합일은 요원해지기 마련이고, 선명한 양극은 이분법적으로 나눠지기에 현실적이기보다는 이상적이고 실험적인 모델로 비치기도 하지만, 헤세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이를 해내려고 고군분투한다. 


'데미안'에서는 데미안을 만나기 전과 후의 싱클레어가 서로 대립한다. 대립하는 두 자아가 싱클레어라는 한 개인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린 '데미안'을 싱클레어의 성장기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청소년이 성인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성장소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러니까 특정한 방향성이 없는 성숙화 과정이 아닌, 싱클레어에서 출발하여 데미안으로 향하는, 다시 말해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성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한편, '황야의 늑대'에서는 사회에 길들여진 시민의 자아와 길들여지지 않은 채 자기만의 자유로운 개성을 갈구하는 늑대의 자아가 서로 대립한다. '데미안'과 달리 '황야의 늑대'는 하리 할러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없다. 싱클레어에겐 데미안이라는 목적지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하리 할러에겐 특정한 목적지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깊이 통찰하고 드러낸 '현대인의 내면 보고서'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은 모든 독자는 하리 할러로부터 동질감을 느끼면서 자기 안에 꿈틀대는 늑대를 자각하고, 동시에 그 늑대를 억누르며 사회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시민을 인지하게 된다. 


양극이 한 개인 안에 발현된다는 점에서 '싯다르타'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보다는 '데미안'과 '황야의 늑대'와 닮아 있다. 출간 순서를 따져 볼 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가장 나중에 쓰였다는 점만 보아도 헤세는 한 개인 안에서의 대립된 두 자아를 '데미안',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를 통해 먼저 보여주고, 가장 나중에 두 자아가 두 개인으로 존재할 수도 있음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통해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또한 맨 앞의 두 작품, '데미안'과 '싯다르타'에서는 싱클레어와 싯다르타가 내면에 존재하는 양극의 합일을 추구하고 결국 완성을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에 쓰인 '황야의 늑대'에서는 양극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합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혼재되어 있을 뿐이다. 구하며 끝내 성장을 이뤄내는 반면, ‘황야의 늑대’에서 하리 할러는 합일을 추구하나 이뤄내지 못한 채 한계를 보여준다. 이 하강 현상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정점을 찍는다. 두 자아는 마치 처음부터 합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한쪽으로 치우친다 하더라도 마치 저마다의 개성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서로 다른 인격체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데미안‘과 ’싯다르타‘에서 이뤄진 내면의 성장과 성숙을 통한 합일이 ’황야의 늑대‘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로 진행하면서 점차 희미해진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합일에 대한 헤세의 강렬한 욕망이 결코 약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데미안’과 ‘싯다르타’에서의 합일을 이뤄가는 과정이 다분히 이상적이었기에 현실성과 다양성을 반영하면서 ‘황야의 늑대’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탄생시킨 거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헤세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그의 모든 전작들이 집대성된 대작으로 여겨지는 ’유리알 유희’에서 우리는 합일을 향한 헤세의 염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 ’싯다르타’는 나르치스로 생을 시작했던 싯다르타가 골드문트의 세계를 직접 체험한 뒤 두 세계의 합일을 이뤄내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각각 사유와 감각을 상징하는 두 세계를 싯다르타는 그 어떤 인간 스승도 따르지 않고 스스로 깨닫고(사유) 경험하며(감각) 융합하여 하나의 단일성으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인생 전체라는 긴 여정을 통해 이뤄낸 숙원이었다. 


싯다르타가 이룬 합일에서 고찰할 수 있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스승과 제자가 되어 이뤄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위대한 세존 고타마도 해내지 못했던, 영원하고 통일적인 세계 법칙의 전체 구조를 설명하는 단일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가르치고 배워서 진리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싯다르타는 '데미안‘의 싱클레어보다 한 단계 더 급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싱클레어에게는 데미안이라는 가시적인 목적지가 있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명징한 푯대였고 스승이었다. ’데미안‘을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는 여정’이라고 읽을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에게는 그런 가시적인 푯대 혹은 스승으로 해석될 인격체가 없었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스승과 제자가 되어 그 누구의 도움 없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사문의 행렬을 따르기 전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이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많은 성스러운 제사와 목욕재계, 가르침, 논쟁, 명상, 침잠을 익혔지만 싯다르타는 자아로, 자기 자신에게로, 아트만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많은 현인들, 지혜로운 브라만들은 있었으나, 그들은 심오한 지식을 알고 있었을 뿐, 삶 속에서 체득한 적은 없었다. 그들 역시 구도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그 원천,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그 원천을 찾아내야 하고, 바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탐색의 길이거나 돌아가는 길이거나 또는 방황하는 미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심지어 위대한 스승을 두고 따르는 것조차도. 


싯다르타는 사문이 되어 몰아와 침잠을 더 익히고 고행과 단식과 사색에 몰입해 보았지만, 결국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고야 마는 윤회의 고뇌를 피할 수 없었다. 자아로부터 벗어나 경이의 세계와 접하여 마음의 안식을 얻고 싶었지만 사문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해 냈다. 사문의 방식은 의식을 마비시켜 자아로부터 잠시 도망치는 것일 뿐이었다. 그건 창녀가 있는 거리의 술집에서나, 마부나 노름꾼한테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사문의 끊임없는 단식과 고행은 여인숙에서 잠든 소몰이꾼의 막걸리 몇 잔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눈에 보이는 방식은 현저히 다르나 본질은 말초적인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 무엇을 해도 다시 자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싯다르타는 스스로 깨우쳤다.


‘스승은 없다, 스스로만이 스스로에게 참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깨달음은 싯다르타가 세존 고타마를 대면한 이후 확신으로 바뀐다. 고타마는 세계를 하나의 단일성으로 설명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해탈에 관한 부분에서는 유일하게 균열을 내었다. 결국 해탈은 단일성으로 통일적으로 설명되는 세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해탈을 말할 땐 어쩔 수 없이 차안과 피안의 구분을 초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싯다르타가 보기에 고타마는 해탈에 이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에 이르는 방법은 고타마조차도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작품 마지막 부분에서 싯다르타의 입을 통해 정리되어 말해진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라고 말이다. 말로 표현된 진리는 반쪽일 수밖에 없다고, 반쪽 짜리 진리는 전체성, 완전성, 단일성을 담아낼 수 없다고 말이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정면으로 마주한 뒤에나 깨달을 수 있는 진리였다.


고마타도 설명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었던 진리는 차안이나 피안, 그 어느 한쪽에만 속하는 게 아니었다. 단일성, 완전성, 전체성이 온전히 담기기 위해서는 그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사유나 감각도 분리가 되면 안 되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도 없어야 했다. 싯다르타는 이 일련의 깨달음을 고타마와 고빈다와 헤어진 이후 스스로의 길을 걸으면서 얻게 된다.


고타마와 헤어진 후 새롭게 태어난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매개로 하여 그동안 살아왔던 사유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감각적인 세계를 오랜 기간 경험하면서 사유와 감각의 세계 모두를 인정하게 되었고, 거추장스럽고 거짓으로만 보았던 차안의 세계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피안과 차안의 구분, 사유와 감각의 구분을 초월하여 마침내 합일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싯다르타는 감각의 세계에서 너무 물들어버린 자신이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로부터 뛰쳐나와 강에서 자살까지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 순간 옴의 소리를 들으며 싯다르타는 제2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로부터, 강물로부터 배우며 시간이란 개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고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그곳에 존재한다. 언제 어느 때나 똑같은 모습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을 띤다. 강물은 아래를 향해 나아가고, 가라앉고, 깊이를 추구하며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 강물에는 현재만 있을 뿐인 것이다. 이제 싯다르타에게는 이분법적인 것들의 경계가 사라지고, 시간이라는 마지막 경계마저도 무너지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단일성으로 현재성으로 빛나게 보이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었다.


또한 싯다르타는 카말라로부터 얻은 아들에게서 버림을 받으면서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일종의 번뇌요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란 사실을, 윤회이자 슬픔의 원천이자 시커먼 강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것이며 자신의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 이후 싯다르타는 과거엔 덧없어만 보였던 인간의 일상적 삶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덜 현명하고 덜 오만해지면서, 더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공감하는 마음도 싹트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깃든 사랑을 알게 된다. 그는 그들을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들 각각의 열정과 행위들에서 생명, 생동감, 불멸의 브라만을 보았다. 그는 인간이 그런 맹목적인 성실성과 힘과 강인함을 지녔기에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혜는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단일성을 느끼고 빨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이자 능력, 그럴 수 있는 비밀스러운 기술이었던 것이다. 진리는 단일성과 현재성의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성을 뜻하는 옴의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마지막 꼭지에서 늙은 뱃사공 싯다르타는 여전히 깨달음만을 추구하고 있는 고빈다와 재회한다. 고빈다에게 건네는 조언에서 우린 싯다르타가 깨달은 진액을 맛볼 수 있다. 그중에서 나는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고 완성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싯다르타의 말, 그리고 이 세계는 매 순간 완성의 경지에 있다는 말에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돌멩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무엇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오늘 내게 돌멩이로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돌멩이가 사랑스럽다는 말에도 마찬가지로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단일성과 현재성으로 압축될 수 있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책을 덮은 지금도 자꾸 생각이 난다. 비로소 세상을 깔보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싯다르타의 고백이 지금도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6.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1991

7.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2014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2033

9.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2045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14. 헤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9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잉 홈
문지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확실성,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삶


문지혁 저, ‘고잉 홈‘을 읽고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는 제목의 소설 작법서로 처음 만난 문지혁 작가의 소설이 궁금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초급 한국어‘를 고를까 하다가 작년에 출간된 ’고잉 홈‘을 이번 추석 연휴에 읽을 책으로 골랐다. 이유는 다분히 즉흥적이었다. 책에 실린 첫 단편이 뉴욕발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쓰였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한국발 엘에이행 비행기 안에서 이 책을 읽으며 이렇게 감상을 남기고 있다. 비행기 안이라는 비슷한 상황 덕에 왠지 책에 몰입할 수 있을 거라는 내 즉흥적인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소설에 대한 짧은 감상을 남긴다.


1.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

책을 여는 작품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고잉 홈’이라는 제목의 소설집 표제작으로 아쉬움이 전혀 없었다. 내가 작품 속 화자처럼 비행기 안에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심드렁한 것 같으면서도 미국 이민 1세대이자 화자의 장인어른인 호철의 인생을 가볍지 않게 담아냈다는 점이 훌륭하게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화자뿐 아니라 그의 아내, 그리고 호철의 캐릭터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조율한 흔적이 느껴지는, 다시 말하자면, 대충 쓴 것처럼 보이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한 것 같은 작가의 애씀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2. 고잉 홈

소설집 제목과 같은 제목의 단편소설인데, 다 읽고 나서 내가 뭘 놓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 아니 뭘 읽은 거지? 하는 생각이 남았다. 소설은 인터넷 광고에 뜬 실험에 참여하며 표면적으로는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주인공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가야만 하는 가난한 주인공은 현금으로 오백 달러를 주면서 공짜로 태워준다는, 단 차 안에서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조건의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주인공에게 맡겨진 일은 인공지능이 쓰는 소설에 인간적인 재료를, 그러니까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만 하면 차 안에 설치되어 모든 소리를 듣고 있는 컴퓨터 속의 인공지능 작가가 실시간으로 소설을 써낸다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 자신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의아한 기분으로 뉴욕에 아무 탈 없이 도착하게 되는데, 중간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었을 때 여전히 꿈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광경을 보고 다시 잠이 든 이상한 경험 말고는 딱히 이변이 발생하지 않았다. 뭔가 사건이 벌어질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아 김이 새는 듯하게 설정한 것도 작가의 설계이리라 짐작한다. 아니면 내가 전혀 헛다리를 짚고 있는 걸지도. 인공지능이 쓴 소설은 마지막 문장을 남기며 끝을 맺었고, 차는 홀연히 떠났으며, 뉴욕에 도착한 주인공의 손에는 약속대로 오백 달러 현금이 들려있었다. 그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손에 들린 현금을 보고 꿈이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아니면 이 모든 게 가짜이거나. 마치 잃어버린, 종이로 접은 유니콘처럼.


3. 핑크 팰리스 러브

뒤통수를 맞은 듯한 섬뜩함을 느낄 수 있는 공포 (혹은 심령?) 소설이다. 결혼 1주년을 맞이하여 한파가 내린 뉴저지를 떠나 따뜻한 남쪽 나라 플로리다로 3박 4일 기념 여행을 떠난 젊은 부부는 핑크빛 건물의 돈 세사르 호텔에 묵게 된다. 거기에는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13층에서 묵었던,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그 기억을 담아 그 호텔을 지은 장본인이기도 한 토마스라는 사람이 유령으로 자주 출몰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주인공 부부는 둘 다 서로를 반려자로 받아들이기 전에 사귀던 연인이 있었다. 그들은 이 호텔에서 각자의 옛 연인을 만나게 된다. 작품 속 화자는 공교롭게도 13층에서 3일 동안 연이어 옛 연인을 아내 몰래 독대하게 되고, 화자의 아내 또한 작품에는 묘사되지는 않지만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적 장치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문지혁 작가는 그 한계를 십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감각하지 못하는 것들은 사각지대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남편이 모르는 사이에 옛 연인을 만난다. 마지막 밤에는 평소 술을 즐기지 않던 아내가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를 듣고 화자인 남편은 소스라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옛 연인과의 기괴한 만남 때문에 괴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공포소설은 스포가 쥐약이므로 그 사건이 무엇인지는 작품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4. 크리스마스 캐러셀

상실에 대한 슬픔도 느껴지지만 은근히 가슴 따스해지는 소설이다. 어머니를 난소암으로 잃은 주인공 청년은 아버지의 재혼 직후 여전히 계모를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상태에서 미국으로 여행을 오게 된다. 고모네가 있는 뉴저지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이곳저곳 여행을 하려는 심산이었다. 고모네는 공개입양을 하여 열두 살짜리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에밀리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고모네는 크리스마스에 플로리다 올랜도에 위치한 디즈니월드로 놀러 가기로 한다. 주인공도 덩달아 가게 된다. 에밀리는 아픈 사연이 있었다. 입양하기 전의 부모 사이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였다. 혼자 돌아다니겠다며 고집을 피우던 에밀리를 잃어버리게 된 일행은 에밀리를 찾아 나선다. 구름 같은 인파 속에서 가까스로 찾은 에밀리는 회전목마(캐러셀)를 타고 있었다. 그곳은 이전 부모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곳이었다. 에밀리는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고모네로부터 들은 에밀리에 관한 이야기 덕분에 에밀리의 심정을 알아챈 주인공은 에밀리와 함께 회전목마를 타면서 문득 집에 돌아가면 계모를 아주머니가 아닌 엄마라고 불러볼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뜻밖의 장소, 뜻밖의 사건을 통해 뜻밖의 결론을 얻게 되는 뜻밖의 과정이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작품을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충분히 가치가 있을 테니.


5. 골드 브라스 세탁소

미국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러 유학을 떠난 '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청년의 이야기다. 미국 유학생의 일상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쓸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서, 그리고 나 역시 미국 생활 초창기에 겪었던 경험들과 비슷한 부분들이 많아서 공감이 많이 되었다. 골드 브라스 세탁소는 이민 1세대가 운영하는 곳이다. 주인공 영 역시 유학생들이 대부분 거치는 한인교회의 커뮤니티를 통해 인간관계를 쌓게 되는데, 어느 날 실수로 '수'라는 청년의 바지에 김치찌개를 쏟게 되어 부랴부랴 세탁소를 찾게 되면서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수 차례의 좌절 끝에 세탁수 주인장을 인뎁스 인터뷰 대상으로 삼아 쓴 '스토리'가 훌륭한 평가를 받게 되면서 일상의 조그만 성취와 행복을 느끼는 영의 이야기는 미국 유학생들의 마음 저변에 깔린 불안과 우울을 극복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하는 하나의 견고한 디딤돌이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Gold Brass Cleaners가 God Bless의 의미를 띠게 되는 장면 (이 설정은 처음부터 세탁소 이름을 왜 저렇게 지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깜짝 장치였음을 드러낸다)은 특히 주인공 영만이 아닌 모든 미국 유학생들에게 안겨주고 싶은 저자의 축복 담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또한 이민 1세대가 내린 뿌리가 미국에서 생활하는 유학생들에게 은근한 위로와 힘이 된다는 숨은 메시지도 담겨 있는 것 같다. 세탁소 주인장 같은 어르신들과의 만남이 많은 미국 유학생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게 된다. 


6. 뷰잉

뷰잉은 고인을 마지막으로 대면할 수 있는 장례 절차의 마지막 순서에 해당된다. 미망인이 된 맹 선생님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던 곳도 뷰잉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만남의 시작. 주인공은 한국어 전공을 하게 되는 미국 유학생이다. 대개 한인 교회에서 한글학교를 하게 되는데 (나 또한 인디애나주에 거주할 때 다니던 교회에서 한글학교가 운영되었다. 내 아들도 그곳에서 한글을 배웠다), 주인공은 맹 선생님이 부교장으로 계시는 한글학교에서 맹 선생님의 권유로 교사로 봉사하게 된다. 거기에서 가정 불화와 ADHD로 의심되는 한 아이와의 마찰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후 주인공은 한글학교만이 아니라 교회까지 등지게 되는데, 마침 늘 식사와 라이드를 제공해 주시던 맹 선생님이 쓰러지시기도 해서 그와의 만남도 끊어지게 된다. 미국 유학 초창기 시절의 불안과 혼란이 저변에 깔린 주인공에게 맹 선생님은 하나의 빛으로 작용했었다. 그런데 그런 빛과의 교류가 끊어진 것이었다. 주인공은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강사롤 일하게 되면서 미국 유학 시절을 회상한다. 맹 선생님이 문득 보고 싶어진다. 못다 한 이야기들도 많았고 물어보고 싶은 것들도 많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미 맹 선생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회고록 역시 맹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나서 써 내려간 것이다. 아쉬움이 짙게 깔린 작품이다. 주인공의 급하고 슬프고 어떻게 할 수 없어하는 마음이 잘 느껴졌다.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미국 유학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훨씬 더 공감을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7. 나이트호크스

이 작품을 읽고 이 글을 쓰기 전, 인터넷으로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호크스를 검색했다. 주인공 부부가 응급실 다녀온 후 다이너에서 아주 늦은 저녁식사를 했던 장면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화면에서 보이는 그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밝은 느낌이었다. 작품 속에서 느껴진 뉴저지의 눈 내리는 밤은 내겐 음산함마저 주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가장 어두워 보이는 존재는 이 소설 속에서 손목을 다쳐 응급실에서 꿰맨 아내가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도 여겼던, 뒷모습의 남성이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아내일지도 모른다고. 소설 속 화자는 이야기를 끌고 갈 뿐, 정작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내의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마음은 비단 아내의 것만이 아니라 한인들, 나아가 소외된 소수자들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 마음은 여러 층위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남편인 화자도, 그의 아내도 미국으로 오기 전에 가졌던 핑크빛 꿈들이 정작 미국에 와서는 대부분이 모래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텅 빈 눈으로 한숨을 쉬며 자기와 세상을 탓하기도 하며 인생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저자의 의도가 느껴지는 듯했다. 이 소설의 배경으로 뉴욕, 한 해의 마지막과 또 다른 한 해의 시작이 중첩되는 시점으로 잡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화려한 배경, 시끄러운 축제 분위기를 뒤로 한 채 마치 그것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마치 나이트호크스의 뒷모습의 남자처럼, 소외된 듯한 한인 부부에게 드리워진 애환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리고 마지막 화자의 대사에서 나는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다층적인 애환이 저변에 깔려 있더라도 그들의 삶은 꾸역꾸역 지속되는 것이다. 해피 뉴이어!


8. 뜰 안의 볕

다양성과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작품이다. 늘봄이라는 이름의 청년은 기독교 신학도다. 한국에서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근본주의적 보수 색채가 강한 신학교와 목회 현장을 떠나 미국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에 다니고 있다. 대형교회의 전도사로 일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해 불투명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담임목사님은 스태프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도 하셨지만, 신학이나 목회 현장에 계속 몸을 담아야 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자신의 성정체성조차도 모호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러던 중 자신을 도와주기도 했던 한 집사가 담임목사와 단 둘이 차 안에 있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하고, 마침 그 순간 목사의 사모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기도 한다.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는 공동 공간인 정원에 입주민 중 하나인 유대인이 자신의 명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어떤 구조물을 지어놓았다는 이유로 다른 입주민인 중국인이 항의하는 상황을 겪게 된다. 소설은 입주민 단체 회의에 참석하게 되는 주인공이 어두워져 가는 시간에 반딧불이의 빛을 보며 어떤 계시를 느끼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문득 늘봄은 자신의 이름의 의미가 '올웨이즈 스프링'이 아니라 '이터널 스프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의 계절이 오고 또 가지만, 밤은 모든 계절에 공평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늘봄의 생각도 뼈가 있어 보인다.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하고 많은 것들이 변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언제나 변하지 않고 동일한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제목 뜰 안의 볕의 의미도 이런 것을 함축하는 것 같다.


9. 우리들의 파이널 컷

지적 장애인인 아버지를 상실하고 다시 찾는 딸의 이야기다. 다시 찾았을 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유품으로 미루어 보아 딸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간직했음을 알 수 있는 가슴 짠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품은 화자를 포함한 아마추어 네 명이 영화를 한 편 만들고자 하는 과정을 통해 위에 소개한 딸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작품에서도 미국과 한국 사이의 지리적 괴리와 심리적 괴리가 다뤄진다. 아버지가 지적 장애인이라는 점은 이 괴리를 더욱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화자 역시 아버지를 잃은 사람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가 남긴 유품 아닌 유품이 플레잉 카드였다. 서로 다른 두 아버지가 남긴 서로 다른 카드들. 아버지를 상실한 사람끼리의 공감과 소통의 상징일까. 작품 마지막 장면에서 화자는 딸의 아버지의 유품 중 백 장이 넘는 공중전화카드를 자신이 가진 플레잉 카드들과 섞어서 카드 게임을 하자며 카드를 그 딸에게 건넨다. 그리고 소설은 끝을 맺는다.


나가며

소설가의 소설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치밀한 설계와 그렇게 설계된 서사의 전개, 인물의 설정과 그들의 심리 묘사, 그 와중에서도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돋보였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소설들은 공통점을 가진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 유학 생활을 짧게 경험했던 저자의 세밀한 관찰과 공감능력이 작품 곳곳에서 구체적인 묘사에서 빛을 발한다. 미국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독자들은 아마도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서, 그래서 이 책의 가치를 온전히 알아채지 못할 한국 독자들이 많을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아쉽다는 생각도 했다. 


잠시 가족과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미국에 방문한 내게 이 책은 묘한 공감과 감동을 주었다. 미국 11년 생활을 나도 내가 쓸지도 모를 미래의 소설 속에 잘 녹여보리라는 막연한 계획도 가져보게 된다. 굳이 미국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읽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지만, 특별히 미국 생활 (관광 말고 실제로 거주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꼭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민자들의 애환을 공감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꾸역꾸역 나아가는 삶을 볼 수 있고 희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몇 년 전에 읽은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미국 이민 1세대 작가가 쓴 소설집이 떠오른다. 함께 읽어도 좋겠다. 


* 황숙진 저, 마이너리티 리포트': https://rtmodel.tistory.com/945

* 문지혁 저,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


#문학과지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