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고 앉아 있네 - 문지혁 작가의 창작 수업
문지혁 지음 / 해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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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고 성실한 창작 수업


문지혁 저, '소설 쓰고 앉아 있네'를 읽고


자조적인 뉘앙스가 물씬 풍기는 제목이 특이해서 고른 이 책에 제대로 낚였나 싶었는데, 웬걸, 글쓰기를 막 시작하던 때완 달리 작법서의 효용에 대해 이젠 냉랭한 입장에 서 있는 내게도 이 책은 꽤나 유용했다. 시점, 이야기, 서사, 플롯, 묘사, 대사, 대화, 퇴고 등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위한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사항들을 친절하게 소개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작법서들을 단순히 짜깁기한 듯한 고리타분한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작법서들을 굳이 보지 않아도 이 책 한 권이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저자 문지혁 작가의 진정성 있는 개인 서사가 진하게 묻어 있다는 점, 그리고 전혀 교조적이지 않고 다정한 옆집 형(혹은 오빠)의 목소리로 들려진다는 점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다정함이 이긴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저자가 화려하게 어떤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가 아니라는 점, 그래서 작가 지망생으로 십여 년동안 고군분투했다는 점도 이 책에 진정성을 더욱 부여하지 않았나 싶다. 저기 저 위 빛나는 곳에서,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저 앞에서 들려오는 승리자의 소리가 아니라 옆에서 같이 뛰고 있는 안내자의 느낌이 드는 작법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유명 외국 작가들의 작법서들이 즐비하지만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거나 소설 창작의 기본적인 지식들을 습득하고 싶은 한국의 미래 작가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대학에서 다년간 강의한 저자의 이력은 물론 홀로 창작의 길을 외롭고 힘들게 닦아온 성실한 작가로서의 산 지식과 경험이 더욱 입체감 있게 다가올 것이다.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자의 내공이랄까 여유랄까 하는 저력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것들이 글쓰기의 긴 여정에서 함께 한다는 위로와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용기를 선사한다는 것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세 번째 에세이 ‘우동 거리 밖에서’가 인상적이었다.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다정한 선생님의 이미지였는데, 이 글에서만큼은 다정함 속에 숨은 뾰족한 가시가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듯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 문단의 편향성과 획일성과 보수성에 쓴소리를 하는 글인데, 적어도 내겐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전통을 지키는 것과 시대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채 관성만을 좇는 방식으로는 결코 건강한 문단 생태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저자가 가능한 톤을 약하게 하려 애쓴 흔적을 느낄 수 있었는데, 저자가 조금 더 거침없이 글을 썼더라면 좋았겠다 싶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문단의 이슈들이 대중적으로 좀 더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았다. 전국과 세계에 이름 없이 흩어져있는 한국 미래의 작가들이 미리 정보를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책 덕분에 문지혁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작법서만 쓰는 작가가 아니라 실제 소설을 쓰는 작가이기에 그가 보낸 숱한 시간들이 그 소설 속에 오롯이 녹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시작했으나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장편소설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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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안에서 사는 법 -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지금 충실하게 살아가기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비아토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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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성을 끌어안으며 기쁨으로 기다리기


제임스 K. A. 스미스 저, '시간 안에서 사는 법'을 읽고


공상과학영화 'Arrival' 끝부분에서 주인공 루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표출하는 장면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나는 압도되었고 먹먹해지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대사는 다음과 같다. 


"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I embrace it. And I welcome every moment of it."

"모든 여정과 그 끝을 알면서도 나는 모든 걸 끌어안는다. 그 모든 순간을 기쁘게 맞이한다."


루이스는 미래를 볼 수 있다. 그 미래에서 루이스는 결혼하고 딸을 낳는다. 그 딸은 청소년 시기에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다. 루이스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을 감행하고 아이도 가지기로 한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그러지 않기로 한다. 그 미래를 향해 현재를 정면 돌파하기로 한다. 가슴 무너지는 상실을 겪게 될 줄 알면서도 그 상실은 물론 그것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꿋꿋이 끌어안기로 다짐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루이스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 무엇이 루이스로 하여금 그런 다짐을 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은 그 느낌이 깊은 감동과 함께 아직 생생하다. 


미래보다 현재를, 영원성보다 유한한 시간성에 초점을 맞추는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루이스가 떠오른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리라. 내겐 필멸성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나, 현재를 붙잡으라는 '카르페 디엠'과 같은 철학적 문구보다 서사가 깃든 루이스의 저 문장이 더 강력했던 것 같다. 미래와 현재와 과거, 즉 시간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크게 영향을 받을 만큼 말이다. 저 영화를 본 이후 'Embrace(끌어안다)'라는 단어가 내 삶의 모토 중 하나로 성큼 들어왔다. 이 단어는 이 책을 한 단어로 축약하라고 하면 내가 고를 단어이기도 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닫고 습관을 좇아 감상문을 남기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보통은 글을 다 쓰고 제목을 마지막에 정하는 편인데, 이번엔 제목이 먼저 정해졌다. '필멸성을 끌어안으며 기쁨으로 기다리기'로 말이다. 이것은 이 책에 흐르는 저자의 일관된 메시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겐 단호하게 붙잡힌 메시지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는 영원하고 완전한 진짜 세계로 상정된다. 반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는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이데아 세계의 모방일 뿐인 가짜 세계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기독교와 만나게 되면 영육이원론이 된다. 영적인 것은 신성하고 육적인 것은 속되다. 물질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며 영적인 것들만을 신봉하는 영지주의는 한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심취하기도 했던 마니교의 중심 세계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후 영지주의의 이단성을 비판하며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발전시킨 교부로 거듭나게 되지만 말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완전한 신의 세계로 그려지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나 영지주의의 영적인 세계는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영원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영원성은 무시간적인 개념이다. 기독교에서 믿는 유일신인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신 존재로서 처음부터 계시는 분이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홀로 계셨으며 불멸하시는 분이다. 탄생도 소멸도, 시작도 끝도 없는, 시작 이전과 끝 이후까지 모든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영원성은 신적인 개념인 것이다.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어 유한하고, 육신을 입고 있어 제한적인 인간이 신을 동경하며 숭배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고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인간의 육신까지도 부정하는 극단의 영지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인간은 유한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다.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이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우리의 유한성, 곧 신성의 결여는 분노하거나 슬퍼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시간성이라는 조건 이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감옥이 아니라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라고 역설한다. 한계라는 선물 덕분에 우리에게는 행복할 여지, 기쁨을 찾을 여지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유한성은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의 핵심에는 가르침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서사가 있는, 즉 역사 안에서(실제로 일어난 사건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주의하자. 역사성을 따지는 건 다른 문제에 속한다) 일어난 사건 중심으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성경도 거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기억하라). 이것은 기독교가 무시간의 종교가 아님을 뜻한다. 영원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시간성을 지닌 인간의 삶에 침투하신 사건들이 성경에는 잔뜩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이런 순간, 즉 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진리가 태어난다고 말한다. '시간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이는 물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 속으로 하나님과 의미와 가능성으로 충만한 카이로스의 시간이 침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즉 하나님이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인간이 구원받는 사건 등이 모두 이러한 '시간의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소중한 이유도 모든 크로노스의 순간이 카이로스의 순간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한한 시간성을 지닌 모든 순간들이 소중한 이유 역시 언제든 영원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한성은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선물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 사건은 무시간성으로는 설명할 수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모든 인간의 회개와 회심은 모두 역사성을 띤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전의 내 모습이 세탁되는 걸 뜻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듯이 하나님은 이전 내 존재의 초고를 내다 버리신 후에 새 책을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새로운 장을 쓰고 계신다. 또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내 삶에 임하셔서 성화를 이루신다고 해서 이전에 있었던 일이 지워지지 않는다. 사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는지는 이전에 일어났던 일에 달려 있다. 나의 개인적 역사는 후회할 무언가가 아니다. 내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하나님이 활용하실 수 있는 무언가다." 정말이지 허를 찌르는 문장이지 않을 수 없다. 백퍼세트, 이백퍼센트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러므로 다음의 저자의 문장도 옳다. "새로운 피조물은 리셋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는 과거를 지닌 자의 부활이다. 이 몸의 역사를 지닌 이 내가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때만 내가 구원을 받는다. 은혜가 내가 살면서 겪은 모든 것을 지워 버린다면 나는 속량되기보다 상실된다."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 채 죄인으로 살던 나의 옛 모습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역사를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에 따라 부활하는 몸은 과거의 상처를 그대로 지닌 몸이다. 구속되고 용서받고 은혜를 입고 해방되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지닌 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임하셔서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하심을 감사하며 끊임없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나다. 유한한 시간적 존재인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기쁜 순간은 어쩌면 거듭나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우리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이 교차하는 시간의 충만함을 경험한 자들인 것이다. 시간적 존재가 영원성을 입은 존재로 거듭나는 순간을 경험한 자들인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건강한 종말론을 언급한다. 알다시피 종말이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이다. 지금 우리가 속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실천적 종말론을 저자는 우리가 언제에 있는지를 알고, 이로써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화음처럼 묶어 내는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실천적 지혜라고 정의한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 우리의 시선을 머무르게 함으로써 결코 시간보다 앞서 살아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에 예속되어서도, '아직'에 묶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둘 사이의 긴장을 체감하면서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극단적 낙관주의와 절망적 허무주의를 모두 거부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소망을 잃지 않으면서 말이다. 


모든 창조물은 덧없고 일시적이며 우연적인 존재다. 그리고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필멸의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이러한 필멸성을 저주로 받아들이지 말고 기꺼이 끌어안으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방법을, 그 안에서 성령보다 앞서 가지 않으며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방법을 배워나가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모두 끌어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비아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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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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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회복을 위하여


한병철 저, ‘서사의 위기’를 읽고


서사의 위기는 서사의 종말에 대한 경고다. 인터넷, 스마트폰, 동영상, 그리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워크 등으로 공급되는 정보의 과포화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오늘날 우리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다. 텍스트와 영상을 대조하며 영상의 폐해를 논한다거나, AI로 인한 인간성 상실 등의 부작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책에서는 그것들보다 좀 더 근원적이고 좀 덜 기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두 가지 개념 비교를 거듭 강조하면서 말이다. 하나는 정보와 지식의 대조, 다른 하나는 스토리와 서사의 대조이다. 


저자 한병철은 이 시대에 지식이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신 모든 게 정보화되고 있으며 그 정보가 모든 곳을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정보는 새로움을 선보이지만, 새로움은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순간 더 이상 새로운 게 아니게 되므로 자연스레 힘을 잃는다. 그래서 정보는 찰나적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즉 아무런 서사를 남기지 않고,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단편의 더미로써 휘발된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은 또 다른 정보들로 대체된다. 이런 무한반복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여러 미디어들로 인해 무한히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정작 중요한 지식은 점점 밀려나게 되고 결국 소멸하고 있다. 소위 지식의 종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식의 위기, 지식의 소멸, 지식의 부재는 원인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보화되고 있는 이 시대의 열매(결과)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인과응보의 열매를 수동적으로 따먹을 필요가 없다. 저항하고 저항해서 다른 열매가 맺히길 주도해야 한다. 객체로서 정보의 홍수에 빠져 죽지 않고, 주체가 되어 지식의 소중함을 깨닫고, 알리고, 또 지켜야 한다.


또한 저자는 이 대조를 기반으로 해서 이 책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와 서사의 대조를 심화시킨다. 여기서 스토리란 우리가 아는 이야기의 개념이 아니다. 엄마 아빠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누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마음을 담은 은밀한 고백은 여기서 말하는 스토리가 아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혹은 ‘스토리‘가 붙는 여러 소셜네트워크시스템, 이를테면 카카오스토리, 브런치스토리, 티스토리 등을 포함한 여러 블로그들에서 남용되는 스토리를 일컫는다. 맥락도 없고, 성찰도 없으며, 휘발성이 강하고, 소통을 빙자한 보여주기식의 포스팅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런 스토리들은 무방비 상태의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 소리소문 없이 침투한다. 침투하여 장악한다. 장악하여 소비자인 우리들을 조용히 노예로 만든다. 우리 중 누군가는 먹고 자고 싸고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스토리들을 읽고 반응하고 또 게시하는 데 사용한다. 이른바 중독이다. 중독도 문제지만,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중독인데 중독인 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앞에서 소통을 빙자했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소통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진정한 소통은 사람을 알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경험과 생각,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과 재해석, 타자와 세상을 향한 시선과 태도 등(이 모두가 개인의 서사를 이룬다)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즉 진정한 소통은 스토리가 아닌 서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보로는 한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이는 서류 전형으로만 인사를 단행할 수는 없는 근원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로 도배되는 스토리들의 비대로 인해 점점 서사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게 데이터화(정보화)되고, 모든 게 조각난 스토리로 실시간으로 전시된다. 성찰은 온데간데없고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해진다. 보여주는 정보와 스토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리는 목적보다는 진정한 내 모습을 감추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도구가 된다. 내가 아닌 나의 모습, 좋아요를 받기 위한 최적화된 방식의 정보와 스토리로 거짓된 내 모습을 만들어 진정한 나를 은폐한다. 괴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저자 한병철은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이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브이로그처럼 아무런 서사가 없는 그냥 보여주기로는 결코 나를 알 수도 알릴 수도 없다. 나를 알거나 알리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전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되는 일상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서사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이 시대에 글쓰기를 권하고 싶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유일한 방식이 어쩌면 글쓰기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믿게 된다. 사건을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등 소소한 개인의 인생에 서사를 불어넣는 것이다. 저자는 셀카가 텅 빈 자기 복제라고 했다. 글쓰기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는다.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가지 않고, 스토리 전시로 거짓된 모습을 증폭시키고 강화시키는 공허한 작업을 그만둘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대체 방안이라고 믿는다.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고, 솔직하게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성찰할 수 있으며, 마침내 타자와 세상을 향한 통시적인 통찰도 내놓을 수 있는 서사의 회복을 꾀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만약 이 메시지가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면, 만약 현재 자신의 모습에서 탈피하고 싶다면, 자, 오늘부터 글쓰기 1일이다.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고, 상호 간의 서사를 살려내며, 비로소 함께 사는 서사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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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 필사적 SF 읽기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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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라도 괜찮을 수 있는 이유


강양구 저,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을 읽고


강렬한 붉은 바탕의 화려한 표지가 시선을 강탈한다. 하지만 제목만으로는 이 책의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만화책인가 싶은 착각도 잠시, 부제를 보니 비로소 감이 잡힌다. 다음과 같다: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 필사적 SF 읽기'. 그런데 단순히 SF에 대한 독서에세이는 아닌 것 같다.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이라는 표현을 보면 시대상을 반영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SF를 읽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시대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통찰하는 책인가? 싶은 궁금증이 든다. 책장을 넘겨 '들어가며'를 읽고 목차를 보면 완전히 파악이 된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랜 기간 읽어온 수많은 SF 중에서 이 시대를 보며 독자들과 함께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 작품 열여덟 편을 선별하여 그것들이 묻는 질문을 소개하고 시대적인 문제들과의 접점을 다방면에서 분석하고 논하는 방식으로 저자의 통찰을 나누는 책인 것이다. 


제목의 '망가진'에서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 시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다. 수많은 SF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의 일면들이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서 얼추 실현된 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을 때 부정신학의 독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모든 SF 작가들이 진정 바랐던 미래는 적어도 그들이 그린 디스토피아가 아닌 세상이었을 거라고 말이다. 저자 역시 이런 관점을 취한다.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고 파국 같아 보이지만, 저자가 제목에서 '망가진'이라는 표현을 일부러 사용한 이유일 것이다. 파괴된 세계는 고칠 여지가 없지만, 망가진 세계는 고칠 여지가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이 시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표면적인 시선은 부정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희망을 머금은 긍정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우리가 처한 이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SF가 던지는 여러 질문과 메시지를 통해 깊은 성찰을 거쳐 마침내 희망을 노래하는 통찰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어떤 거대한 담론의 답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우루과이의 무히카 전 대통령의 문장들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젠장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더라도, 각자가 선 자리에서 재미있게 꿈꾸고, 싸우면 좋겠습니다. 확신컨대, 그러다 보면 분명히 세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겁니다." 책을 다 읽고 나는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와 동의했다. 무력함도 느껴졌지만 그 가운데 가느다란 불씨처럼 남아 있는 희망을, 그 끈질긴 소망을 나도 붙잡고 싶어졌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싶어졌다. 망가진 세계라도 이런 사람들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책 본문은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져서 그런지 매 꼭지를 읽을 때마다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각 꼭지에서 다루는 SF의 내용도 조금 더 보여주고, 그 SF가 던지는 질문과 메시지를 우리 현실의 망가진 부분과 연결시켜 논하는 부분도 조금 더 깊게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덕분에 SF를 거의 읽지 않는 내가 SF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의외의 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책 뒷부분에 나온 '함께 읽기' 편에서도 여러 SF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으니 독자들은 참고하면 좋겠다. 특히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SF가 아닌 듯해 보이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니 이런 친절한 소개서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나도 한두 편 골라서 도서관에서 빌려볼 생각이다. 


#북트리거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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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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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이자 시작, 죽음과 부활의 장소


이승우 저, ‘캉탕‘을 읽고


지리적으로 캉탕은 웬만한 지도엔 나오지도 않는 대서양의 작은 항구도시다. 캉탕의 의미는 그곳 사람들이 말하는 ‘세상의 끝’이라는 표현 속에 녹아있다. 지구는 둥글기에 세상의 끝은 세상의 시작과 같다. 그러므로 캉탕은 세상의 끝이자 세상의 시작이다. 또한,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끝은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어디든 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어느 곳이나 세상의 끝이 될 수 있고 세상의 시작도 될 수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캉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여기가 바로 세상의 끝이자 시작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저자 이승우 작가의 숨은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끝이 시작이라는 것. 끝은 어디든 될 수 있고, 바로 그 자리가 시작도 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할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그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인가?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 인물은 홀수 장 전지적 작가 시점의 주인공이자 짝수 장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인 한중수, 한중수에게 주어졌던 목적지이자 캉탕에 오래전에 먼저 정착한 핍, 그리고 광신적 종말론을 믿고 어쩌다가 선교사가 되어 캉탕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타나엘, 이렇게 세 남자다. 소설 속 서사는 등장인물의 사연을 반영한다. 서로 다른 세 인물의 서로 다른 세 사연은 모두 기구하다. 물리적 접점은 없지만 셋은 공통점을 가진다. 어쩌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일지도 모른다. 이 공통점이 위에서 질문한 ‘어떤 세상인가?’에 대한 단초다. 


세 기구한 사연의 공통점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세상의 끝 캉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 자발적으로 캉탕을 찾은 건 아니었다. 아니, 찾을 수도 없었다.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운명이라 할 수 있을 어떤 반강제적인 힘에 의해 캉탕으로 유입되었다. 인간은 결코 자발적으로 인생의 끝에 서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어떤 이유와 운명처럼 다가오는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게 우린 끝을 맺고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장과 성숙, 멸망과 구원,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우리네 인생이다.


셋 중 캉탕에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된 핍은 수십 년 전 고래잡이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다가 풍랑을 만나 죽을 뻔했다. 간신히 육지에 닿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육지가 바로 캉탕이었다. 핍이 캉탕으로 유입된 것은 운명일 뿐 그가 결코 원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캉탕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의지였다. 그를 구해준, 세이렌에 비유되는 여인 나야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핍은 나야와 결혼하여 캉탕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된다. 최기남이 아닌 핍으로서의 인생 2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타나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날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어느 날, 종말론을 부르짖는 광신적인 종교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면서 선교사로 훈련받고 타국으로 파송된다. 그곳이 바로 캉탕이었다. 그는 선교사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복음 전파와 개종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선교사가 된 게 아니었다. 다만 세상이 속히 멸망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게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음에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원했고, 그 바람 가운데엔 자신의 파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무렵 타나엘은 선교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귀국을 명령받게 된다. 단지 선교의 열매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과거의 무언가가 현재로 침투하여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타나엘은 자신의 해임 사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 해임 통지서는 멀리에서 왔습니다. 아주 먼 과거로부터 날아왔습니다. …… 과거는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현재를 물어뜯는 맹수와 같습니다." 캉탕에서 시작된 그의 인생 2막이 그렇게 끝을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중수는 중요한 발표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등 지독한 두통을 동반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J가 수 차례의 상담 끝에 한중수에게 일을 당장 그만두고 쪽지에 적힌 주소로 가라고 명한다. 그 주소는 자신의 외삼촌 핍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지만 한중수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다. 언어와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낯선 곳이었다. 그곳이 캉탕이었다. J는 한중수에게 그곳으로 가서 한중수의 건강 회복을 위해 다음과 같이 하라고 주문한다. '걸으면서 보고 쓸 것, 보려고 걷지 말 것, 쓸 것이 없으면 쓰지 말 것, 그저 걸을 것.' 한중수는 그 주문대로 실천에 옮긴다. 인생 2막이 낯선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각자 다른 과거를 가지고 셋은 세상의 끝 캉탕에서 만나게 된다. 캉탕에서 세 명은 모두 뜻하지 않은 사건과 상황에 엮이게 되면서 자신의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게 된다. 그 과정에는 공통적으로 읽어주기와 말하기와 쓰기가 있었다. 이것들을 다루기 전에 세 남자의 과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핍에겐 고래잡이배를 탔던 이유가 있었다. 그가 최기남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가난했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책을 좋아했던 그는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그는 자신의 삶이 지옥 같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탈출하고 싶었다. 문학소년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모비 딕'을 읽고 난 뒤였기 때문일까. 그는 고래잡이배를 타는 것으로 그 목적을 달성했다. 이십여 년간 고래잡이배를 타다가 캉탕으로 흘러들어온 최기남은 나야를 만나고 핍이 된다.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왔을 때 나야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캉탕 사람들의 말로는 핍은 나야가 죽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한중수가 핍과 같은 건물에서 살면서 보았던 핍은 폐인과 같았다. 최기남으로 살던 시절이 인생 1막이었다면, 캉탕에서 나야와 함께 살던 시절을 인생 2막이라 할 수 있고, 나야가 죽은 뒤 폐인의 삶을 인생 3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핍에게 유혹자이자 구원자였던 나야의 죽음은 핍을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나야와 함께 핍도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핍은 나야가 죽었지만, 죽기 전 나야가 있었던 병원으로 자주 찾아가 그곳에서 환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한다. 나야가 그것을 좋아했었고, 핍은 타자에게 같은 행위를 하면서 나야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캉탕은 핍에게 인생 1막을 끝이자 2막과 3막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곳이었다. 책을 읽어주는 행위를 통해 그는 나야와 함께 죽었던 인생 2막으로부터 3막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타나엘은 과거 한 여자와의 헤어짐으로 인해 삶의 이유를 잃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던 날 마침 그 종교집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그녀가 실종된 날이기도 했다. 타나엘이 죽였는지 타자에 의해 살해되었는지는 책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타나엘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타나엘의 인생을 낭떠러지도 떨어뜨린 날로 각인되었다. 타나엘이 몇 년 후 캉탕에서 선교사 자격을 박탈당했던 이유도 그날 실종당했던 타나엘의 옛 애인이 뒤늦게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타나엘은 살인혐의를 쓰게 된 것이었다.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왔을 무렵 타나엘은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그의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기 위해, 진술서를 솔직하게 쓰기 위해 매일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쓸 수 없었다. 써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한중수의 졸도 사건을 계기로 그는 글이 아닌 발화된 글, 즉 말로써 쓰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지극히 낯선 타자인 한중수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중수가 이미 자신의 과거를 타나엘에게 먼저 고백하는 사건 이후에 있었던 일이다. 


한중수는 버러지 같은 아버지의 횡포로 말미암아 젊은 시절을 각박하고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 때문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는 죄책감을 포함하여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며 모든 게 정지되는 듯한 상태로 갑자기 들어가는 병도 얻게 되었다. 사이렌 소리는 어쩌면 한중수에게 있어서는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몸의 자발적인 방어본능으로 한중수를 죽지 않도록 먼저 쓰러뜨리는 방안이었을지도 모른다. 한중수는 그렇게 정신병까지 얻게 되면서 아버지의 망령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망가진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과 상담을 했던 친구 J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겨왔던 그 과거의 이야기들을 한중수는 캉탕에서 졸도를 경험한 이후 병원 침대맡에 있던 타나엘에게 고백하게 된다 (이 덕분에 타나엘도 나중에 한중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로 쓴다). 


핍은 읽어주기를 통해, 타나엘은 말하기를 통해, 한중수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각자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솔직하게 대면한다. 읽어주기와 말하기와 글쓰기는 모두 발설 행위다. 발설을 통해 정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세 남자는 비로소 과거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어두운 과거로부터의 탈출, 죄책감으로 물든 숨겨왔던 과거의 종말, 현재의 삶까지 송두리째 갉아먹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의 해방. 세상의 끝은 곧 과거의 끝이었다. 인생 1막의 종언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셋은 모두 과거의 종말을 캉탕에서 맞이했던 것이다. 이를 기독교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죄인으로서의 삶의 종말이라 할 수 있겠다. 


캉탕이 철저하게 낯선 곳이라는 점, 그리고 세 남자가 서로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 이 두 가지 ‘낯섦’이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정직하게 마주하고 고백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과 접점을 이루는 누군가에게는 비밀을 잘 공유하지 않는다. 누설될 위험과 왜곡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 타자에게는, 그리고 절대적으로 낯선 곳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저 깊숙한 곳의 비밀도 고백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가장 낯선 곳에서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이다. 캉탕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믿든 안 믿든 신이 그들을 캉탕으로 인도했는지 모른다. 자신의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하여 인정할 건 인정하고 뉘우칠 건 뉘우치고 버릴 건 버리며 새롭게 다시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이다. 인생 1막과 다른 2막을 멋지게 시작하라고 말이다. 두 번째 삶이 허락되었다고 말이다. 


책은 세 남자가 새로운 시작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끝을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캉탕이 세상의 끝이라고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끝난 곳에서 세상은 다시 시작된다고 믿고 싶다. 세상의 끝에서 쓰기(읽어주기, 말하기, 글쓰기 포함)를 통해 과거 자신의 내밀하고 은밀한 내면을 정직하게 마주하면 바로 그곳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된다고 믿고 싶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캉탕은 세상의 끝이자 시작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캉탕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만약 내가 내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고백하게 되면, 바로 지금 여기가 옛사람을 끝내고 새 사람을 시작하는 곳일 수 있다. 또한 캉탕은 절대적 낯섦의 공간이다. 절대적 타자는 신이다. 인간은 신 앞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캉탕이다. 정직하게 신 앞에 선 인간은 모두 캉탕에 있는 것이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이승우 읽기

1. 생의 이면: https://rtmodel.tistory.com/1588

2. 사랑이 한 일: https://rtmodel.tistory.com/1628

3. 고요한 읽기: https://rtmodel.tistory.com/1960

4. 캉탕: https://rtmodel.tistory.com/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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