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마지막 밤 믿음의 글들 322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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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논리 정연하고 진솔한 루이스와 그의 글

C. S. 루이스 저, ‘세상의 마지막 밤’을 읽고

이 책은 C. S. 루이스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제목인 ‘세상의 마지막 밤’은 그중 하나이며, 이 책에서는 맨 마지막으로 소개된다. 일곱 편의 에세이는 각각 다른 지면에 독립적으로 실렸던 글이며 독립적인 주제를 다룬다. 그러므로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가장 먼저 써진 에세이가 1952년이고, 가장 나중이 1959년이며, 1898년생인 루이스는 1963년에 작고하므로, 여기 소개된 일곱 편의 에세이는 루이스가 기독교 사상가이자 작가, 비평가, 영문학자로서 탄탄한 입지를 굳힌 이후의 글로써 루이스의 연륜과 통찰이 잘 묻어난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말에 태어난 루이스는 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장본인이며, 청년일 때 스스로 무신론자가 되었다가 1929년에 기독교 (성공회)로 회심하여 작고하기 전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작가의 배경을 굳이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에세이란 글쓴이의 사상 혹은 세계관 (혹은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한계를 보았으며, 예기치 못한 순간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경험을 통해 한때 떠났던 하나님을 다시 믿게 된 사람이었다. 또한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기에 인간과 신에 대한 관점이 유달랐을 거라는 추측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의 여러 작품을 읽어오며 내가 느낀 그의 탁월한 매력은 학자로서의 논리 정연함과 겸손함,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진솔함과 성실함이다. 기독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많은 부분이 의외로 지적인 측면, 즉 솔직한 질문과 합리적인 대답 그리고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해소될 수 있음을 나는 루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모든 답을 지적인 방법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어디까지가 과학적인 접근으로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지를 분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기독교 변증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데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암으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루이스의 개인사를 통해 기독교 신앙에는 논리와 이성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한 역경 가운데서만이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될 수 있음을 나는 루이스를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참 지식인은 지식주의에 빠지지 않고 그것의 한계 혹은 경계를 알고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일 것이다. 나에겐 루이스가 그중 하나다. 

일곱 편의 에세이 중 첫 번째로 소개되는 ‘기도의 효력’이라는 글에서 나에게 잡힌 메시지는 ‘기도는 마법이 아니라 요청’이라는 사실이다. 마법은 효력을 따질 수 있지만, 기도의 경우 효력을 따진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요청의 핵심은 강제성이 없다는 것, 즉 상대가 들어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아뢰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되는 ‘믿음의 고집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에서도 찬찬히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너무나 당연한 것 같으나 다시금 유레카를 외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모호함은 믿음과 충돌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믿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 우리는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정적인 확실성이 있어야 믿겠다는 말은 무의미합니다. 그런 증거가 나오고 나면 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결정적 증거가 주어질 때 남는 것은 그것이 주어지기 전에 믿어서 생겨난 관계, 또는 믿지 않아서 생겨난 관계뿐이겠지요.’ 명문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논리와 이성을 무시하지도 않지만 그것에 갇히지도 않는 그 무엇인 것이다. 

여섯 번째 에세이 ‘종교와 우주 개발’에서 루이스는 외계인의 존재가 가져올 수 있는 신학적인 쟁점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고 쉽게 풀어준다. 루이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저는 다른 행성에 사는 생명체가 설령 발견된다 해도, 그 이후의 결과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루이스가 이 글에서 천착하는 논리는 그들은 지구인이 지금까지 겪어왔던 외부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과 그들의 타락 여부에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간파한 인간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루이스의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일 것이다. 

마지막 에세이 ‘세상의 마지막 밤’은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 교리를 다룬다. 이 글은 예배 때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늘 등장하는 재림에 대한 문구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재림 교리를 강조하기를 주저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희비극으로 끝났던 (지금도 어디선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휴거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사기꾼들의 사례도 언급하면서 루이스는 우리가 강조해야 할 부분은 예수님이 언제 재림할 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반드시 재림하실 테고 그때가 언제인지 하나님 아버지 빼곤 아무도 모르니 항상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요청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요청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떠남과 정착의 무한반복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루이스의 소설을 나는 더 좋아하지만, 오랜만에 루이스의 논리 정연하고 진솔한 글을 읽으니 무언가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다. 오랜 시간 동안 책장에 꽂혀있는 그의 다른 저서, ‘피고석의 하나님’도 다시 시도해 봐야겠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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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한 일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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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재해석이 만들어낸 창조와 깊고 풍성한 이해

이승우 저, ‘사랑이 한 일’을 읽고

‘생의 이면’ 이후 이승우를 두 번째로 읽게 된 작품으로써, 이 책 안에는 이미 지면을 달리하며 소개되고 읽혔던 네 편의 단편과 한 편의 미발표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생의 이면’에서 기독교의 여러 이미지와 플롯을 직간접적으로 활용했다면, ‘사랑이 한 일’에서 이승우는 거침없이 성경 속으로 들어간다. 창세기 중에서도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이삭의 아들 야곱, 이렇게 삼 대에 걸쳐 소개되는 대표적인 내러티브를 선별하고,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학적 해석, 그리고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허구적인, 그러나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연출해 낸다. 성경의 내용을 잘 모르는 독자라면 어느 부분이 성경의 내러티브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어려울 만큼, 이승우의 상상력과 그것을 현실화시킨 그의 필력은 자연스럽고 완성도 높은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 낸다. 

동시에 이 작품은 원래 성경의 내러티브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충실히 해낸다 (어쩌면 이것이 저자의 주목적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이승우의 상상력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번제 사건 이후 아브라함이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이삭은 홀로 남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삭은 집으로 가기 전, 어릴 적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어머니의 몸종 하갈과 함께 집에서 추방당한 이복형 이스마엘을 방문한다. 물론 성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추가적인 내용으로 말미암아 독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 즉 상대적 강자였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이 아닌 상대적 약자였던 하갈과 이스마엘의 입장에 서서 오래전에 있었던 생이별과 그 추방당한 날 이후 그들이 겪었던 일들을 작가와 함께 상상하며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알다시피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로 직접 약속하셨다. 그 증거를 이승우는 이 작품 속에서 이삭을 만나 자신의 과거를 담담하게 고백하는 이스마엘을 통해 살려낸 것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만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왜 야곱이 아닌 에서를 편애했는지에 대한 한 가지 이유를 설명해주기까지 하는데, 나로선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에서에게서 이스마엘을 보는 이삭의 마음이 묘하게 납득이 되어 지금까지 수십 수백 번 읽으며 언제나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던 이삭의 에서 편애가 처음으로 공감이 되었다. 물론 에서를 탐식가로 만들어버린 점에서는 약간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상상력은 건조하리 만큼 불친절한 성경의 텍스트 사이를 메우고 이어 전체 내러티브의 이해를 돕기도 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승우의 이러한 시도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생의 이면’을 읽으며 계속해서 불편했던 이승우 작가의 중언부언 문체는 이 작품에서 더욱 강화되고 증폭되는 것처럼 보인다. 문장과 다음 문장이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고, 정도만 다를 뿐 연거푸 중첩되는 방식, 그리고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한 사람처럼 이 단어 저 단어를 모두 사용하여 여러 문장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써내는 방식이 나는 여전히 불편했다. 내가 지향하는, 안정효과 신형철이 강조했던 ‘정확한 글쓰기’에 반하는 문체여서 더욱 그랬나 보다. 반복되는 그의 문장들은 그래서 내겐 정확도가 떨어지는 듯한 인상을 풍겼고, 사물의 정가운데를 찌르는 듯한 명징함이 거세된 채 영원히 근사치만 나타내는 듯한 기분과 늘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굳이 이런 문체를 구사해야 하는가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리고 이러한 문체가 과연 그의 작품을 더 빛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계속 나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나의 사소한 개인적 문제로 남겨두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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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숲에서 만나는 하나님 - 서평의 샘에서 길어 올린 복음
방영민 지음 / 플랜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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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요구: 참 목회자, 참 설교자

방영민 저, ‘책의 숲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읽고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고 캘리포니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즈음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신앙 서적을 시작으로 영성/신학 서적으로 막 진입을 했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들어 성경과 함께 신학교에서 사용하는 조직신학 책과 성서해석학 책을 조금씩, 나의 미천한 이해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읽어보려고, 비록 진도는 안 나갔지만, 발버둥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간증이나 설교 위주의, 상대적으로 읽기 편하고 감정적 위로/공감/치유 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읽는 책이 아닌, 지적인 부분까지 해소시켜주고,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며, 성경에만 갇히지 않고 시대와 문화를 관찰하고 해석하여 그리스도인의 변하지 않는 정체성과 사명과 삶의 방향성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해줄 수 있는 책을 고르기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갈급했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진정한 구원은 언제나 외부에서 오는 법일까. 그 당시 페이스북에는 기독교 서적에 대한 서평가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여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방영민 목사도 그 중 하나였다. 세월이 지나며 대부분의 서평가들은 시들고 말라 자취를 감추었지만, 방영민 목사는 쇠하지 않고 꾸준히, 그것도 갈수록 깊어져가는 통찰력과 필력으로, 서평을 올리고 있다. 방영민 목사의 서평을 초창기부터 읽어오던 팬으로서, 그리고 책 선정에 있어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수혜자로서, 마침내 그의 서평들이 정갈하게 옷을 입고 종이책이라는 모습으로 내 손에 들려 읽혔다는 사실에 나는 기쁨과 감사를 느낀다.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분야에서 계속해서 읽고 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다면, 방영민 목사의 서평을 초창기부터 차례대로 읽어보면 된다. 단순한 기계적인 요약 수준을 넘어, 방영민 목사가 지양하는 인상비평이 아닌, 오랜 관찰과 깊은 성찰을 통과한 통찰이 서서히 견고해져가는 과정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사람을 나는 존경한다. 방영민 목사도 그 중 하나다.

프롤로그에 소개된 것처럼 이 책은 방영민 목사가 써왔던 250여 편의 글을 여섯 개의 주제로 나누어 네 편씩 선별한 서평 모음집이다. 여섯 개 주제는 교회, 제자도, 설교, 하나님 나라, 시대와 사명, 예수의 십자가이다. 각 부를 여는 서론도 읽을 만하다. 거기에는 저자의 생각과 신앙이 잘 담겨있다. 책을 만들며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여섯 개의 주제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내겐 하나로 읽혔다. 저자의 탄식과 소망, 그리고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전진하는 저자의 성실함과 복음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져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실린 저자의 바람에 더하여 나의 저자에 대한 바람으로 이 감상문을 마치면 어떨까 한다.

저자 스스로가 강조하는 것처럼, 목회자는 기획하고 행정하고 기술에 능통한 기업가와 같은 자가 아니라, 본래 읽고 쓰고 말하고 기도하는 자일 것이다. 이 시대엔 그런 목회자들이 드문 것 같아 평신도인 나는 안타까운 심정을 넘어 불안하기까지 하다. 길 잃은 양이 될까 봐, 하나님 말씀을 읽지 못하는 눈 먼 자가 될까 봐, 하나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 먹은 자가 될까 봐,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모른 채 기계적으로 숨만 쉬며 이벤트화 되어버린 교회 예배에만 참석하게 될까 봐 두렵다. 나 역시 교회의 회복, 기독교의 회복을 갈망한다. 이 부분에서 목회자의 회복이 시급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방영민 목사처럼 꾸준히 작은 등불로 어두운 곳을 비추는 목회자가 많아졌으면 하는 것. 그가 존경하는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김남준, 김영봉 목사처럼 훌륭한 설교자가 되길 바라고, 삶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텍스트가 되어 그의 설교에서, 그의 글에서 넘쳐서 흘러나오는, 훌륭한 인격과 성품을 갖춘 목회자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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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 하나님 자리를 훔치다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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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하나님 자리로

팀 켈러 저, ‘내가 만든 신’을 읽고

이 책의 원제는 ‘Counterfeit gods’이다. 책을 열면 저작권 페이지가 나오기도 전에 영어 단어 counterfeit에 대한 뜻풀이가 등장한다. 다음과 같다.

counterfeit [카운터핏]
1. 위조의, 모조의, 가짜의, 거짓의, 허울뿐인
2. -인 체하는, 가장한

한 장을 더 넘기면 저작권 페이지가 나오고 바로 옆에 제목, 저자, 옮긴이, 출판사가 적힌 페이지가 보인다. 그 페이지 맨 위에 한글로 이렇게 적혀있다. ‘하나님 자리를 훔치다’. 부제인가 싶어 원서 정보를 찾아보니 아닌 듯하다. 한국 번역판에서만 사용되는 문구 같다. 두란노에서 무엇을 강조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요컨대 ‘가짜 신들’이 하나님 자리를 훔치고 있는 실상을 폭로하는 것.

이 책은 우상숭배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알다시피 가짜 신은 우상을 뜻한다. 보통 우상이라고 하면 Idol, 우상숭배라고 하면 Idolatry라고 표현하는데, 이 책의 저자 팀 켈러는 굳이 ‘counterfeit gods’라고 한 걸 보면 팀 켈러의 강조점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우상이라는 말보다 그것이 가짜라는 데에, 가짜 신이라는 데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있다. 한글 번역판 제목이 원제를 직역한 ’가짜 신들‘이 아니라 ’내가 만든 신‘이라는 것. 목차만 봐도 제목을 왜 바꿨는지 알 수 있다. 1장부터 5장까지 제목을 살펴보면 평생 소원, 사랑, 돈, 성취, 권력, 이렇게 다섯 가지를 가짜 신들, 즉 인간이, 우리가, 내가 만든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우상은 가짜 신들이고, 그 가짜 신들은 모두 내가 만든 신이며, 그것들이 하나님 자리를 훔쳤다는 것이다.

우상이란 가시적 형상만을 일컫지 않는다. 가시적 형상 이면에 있는 비가시적 실체, 이를테면 탐욕처럼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들을 아우른다. 십계명도 우상 숭배를 경고하고 금지하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다른 신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들은 신적 속성이 없는 거짓 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들은 피조물인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겐 거짓 신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그 무엇 (something)일지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은 아무것도 (nothing) 아니고, 아니어야만 한다.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팀 켈러는 우상숭배를 ‘단지 많은 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인간 심령의 근본 문제’라고 진단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숭배하도록 지어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한다. 잘못된 대상은 모두 우상인 것이다. 팀 켈러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올바른 예배 대상을 기반할 때, 우상숭배에서 해방받는 유일한 길은 우상을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대체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우상은 가시적 형상이 아닌 그것을 만들어낸 비가시적 실체이기 때문이며, 그것들 자체는 악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돈 자체가 악한 게 아니라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상황을 조장한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악한 것이다. 실제로 좋은 것일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만든 가짜 신들과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모시는 것이다.

팀 켈러의 첫 책이었다. 각 장이 내겐 명료한 설교로 들렸다. 그런데 매 장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된다. 그것도 꼭 뒷부분에 가서 말이다. 팀 켈러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는 부분이지 않나 싶다. 특히, 이런 게 요즈음 회자되는 팀 켈러식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인가 싶어, 솔직히 사복음서가 아닌 성경 본문에서 출발한 설교가 조금 억지스럽게 예수님 이야기와 연결이 되는 부분에서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내가 예전에 한국 여러 교회에서 들었던 억지스러운 설교보다는 이 연결이 자연스럽고 어설프지 않다는 생각이다. 첫 책이라 아직 일반화시키긴 어렵겠지만, 이건 책장에 꽂힌 두 권의 팀 켈러 저서를 읽고 평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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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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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에 찬 눈으로 높은 산과 깊은 광맥을 마주하는 낮은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저, ‘도스토옙스키를 쓰다’를 읽고

얼마나 많이 읽으면, 아니 어떻게 읽으면 이런 평전을 쓸 수 있을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조금 안다고 여겨왔다.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아는 건 흩어진 여러 조각 중 하나일 뿐이었구나, 표층도 뚫지 못한 주제에 거만하게 내부를 아는 척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흥분으로 가득 찬 채 수치와 감동의 경계를 비틀거리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 그가 또 하나의 높은 산이라서 반갑다. 그 산을 감히 내가 오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다. 

누군가의 평전을 읽는다는 건 그 누군가에 대한 어지간한 관심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그 누군가가 작가라면 그 작가의 작품을 많이 섭렵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뒤따른다. 사람은 말이 아닌 삶으로 증명되기 마련이고, 작가에겐 작품이 그 삶이니 작가는 작품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평전들이 존재한다. 내가 읽은 평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나마 전집 읽기라는 높은 산을 오르고 있는 (아직 읽지 못한 여러 작품들이 책장에서 날 기다린다. 남은 작품 대부분이 단편이기에 내가 오르는 도스토옙스키라는 거대한 산에 오르는 여정에서 나는 현재 삼 분의 이 정도에 와 있는 것 같다) 작가 중 나의 최애 작가가 도스토옙스키이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함께 읽고 서로 다른 감상과 해석을 나누는 일은 보람되다. 지금도 나는 이 과업을 사랑하고 적극 장려하는 입장이다. 혼자만 읽는 것보단 함께 읽고 나눌 때 더욱 깊고 풍성한 작품의 세계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의 나눔도 이럴진대, 작품 수가 두 권, 세 권 늘어나면 나눔의 깊이와 풍성함은 그에 따라 배가 된다. 그렇다면 전집 읽기를 함께 한 나눔은 어떨까. 내가 이 평전을 손에 든 이유는 바로 이런 호기심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평전은 누군가가 쓴 평전이기도 하기에, 나는 도스토옙스키만이 아닌 슈테판 츠바이크와도 나눔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높은 산이나 깊은 광맥을 따라 걷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갈래의 길은 서로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교차점을 가지기도 한다. 한 작품이 아닌 여러 작품을 읽고 나누는 길은 확률적으로도 교차점을 많이 가질 것이다. 실로 그랬다. 츠바이크가 예로 드는 작품들의 장면들이나 인물들을 언급하는 이유 혹은 배경에서 나는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부분을 언급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정도로 츠바이크가 쌓은 산은 높았고, 그가 판 광맥은 깊었다. 평전을 읽으며 이렇게 압도되는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다. 원래 평전이란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건 다른 평전들을 차차 읽어나가면 될 일이다.

도스토옙스키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츠바이크 읽기도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두 거대한 산을 내가 알다니, 맛을 보고 있다니, 어디쯤인지 몰라도 그 산을 오르고 있다니, 한 명의 순례자로서 나는 뜨거운 마음을 담아 깊이 감사할 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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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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