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조주관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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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덕분에 더 깊고 풍성해지는 글


조주관 저,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을 읽고

예술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걸까. 어떤 작가가 음악 혹은 미술을 좋아했다거나 거기에 일가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나는 동일한 생각을 하게 된다. 글을 쓰는 것도, 곡을 쓰는 것도, 미술작품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도 모두 창조의 행위에 속하며 그것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고뇌를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글 쓰는 작가의 음악과 미술에 대한 사랑은 텍스트로 그 흔적이 남게 된다. 수많은 소설에서 음악이나 미술에 관계된 재료들 (이를테면 예술작품이나 예술가)이 빈번하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작품 ‘황야의 늑대’, ‘유리알 유희’, ‘게르트루트’에서 음악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로스할데’에서는 미술을 적극 활용하여 내러티브를 살려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녹턴’,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에서 음악을,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미술을 주재료로 삼아 그의 문체를 녹여냈다. 

도스토옙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음악보다는 미술작품을 감상, 비평하는 (그림을 글로 번역해 내는) 일에, 그리고 글을 쓰면서 작중인물을 노트에 직접 스케치하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작품에 등장한 미술품을 언급하며, 그 미술품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해석을 통해 그 작품들을 재방문하여 여태껏 몰랐던 숨은 의미를 알려주고, 가볍게 넘어갔던 부분들을 조금 더 깊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안내자다. 특별히,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으며 거룩함과 아름다움과 어리석음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 ’백치’, 악령과도 같은 이념과 사상의 환상을 보여주며 러시아의 회복을 소망하는 작품 ‘악령’,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정수가 녹아있으며 그의 마지막 작품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소개되는 숱한 미술작품들을 보며 나는 내 안에서 다시 이 모든 작품들이 읽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작품은 동일하나 또 다른 렌즈를 장착한 독자에겐 재독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대학생 때 교양으로 배웠던 세계미술사 시간을 나는 사랑했다. 언젠가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도 감명 깊었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듣던 클래식 음악은 지금도 가장 즐겨듣는 음악 장르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미술관에 들러 조용히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은 내겐 소중한 삼찰의 시간이 된다. 나 역시 미천한 수준이지만 작가로서 음악과 미술작품을 대하면서 그것들로부터 영감을 얻곤 하는 것이다. 헤세도, 이시구로도,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나는 그들의 예술 사랑도 사랑하게 된다.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를 이해하고 그들의 작품을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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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렐란드라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 2
C. S. 루이스 지음, 공경희 옮김 / 홍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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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이 아닌 낙원의 이미지를 금성에서 구현하다

C. S. 루이스 저, ‘페렐란드라’를 읽고

‘우주 3부작’의 1부 ‘침묵의 행성 밖에서’가 1938년에 출간되고, 5년 뒤인 1943년에 2부 ‘페렐란드라’가 출간된다. 그 사이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1942년 출간)’를 출간했고, ‘페렐란드라’와 같은 해에 ‘인간폐지’를 출간한다. 5년간 그는 3권의 책을 쓴 셈이다. 루이스의 첫 저서, ‘순례자의 귀향’이 1933년에, 마지막 저서, ‘폐기된 이미지’가 1964년에 출간되었으니, 30년 남짓 루이스는 3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으며, 평균 1년에 적어도 1권을 출간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주 3부작’의 1부와 2부 사이인 5년간 3권의 출간은 평균 이하라 볼 수 있다.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하고 살짝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마침 그 시기가 제2차세계대전 기간과 대부분 겹친다는 사실을 알고 나의 염려는 이내 감탄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같은 시기에 루이스는 나중에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으로 묶일 라디오 방송까지 했다. 그러므로 5년간 3권밖에 못 낸 게 아니라, 그 와중에도 3권이나 냈구나!,라고 반응해야 적절할 것 같다.


루이스도 밝히고 있지만, 2부 ‘페렐란드라’는 1부 ‘침묵의 행성 밖에서’를 읽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진다. 굳이 순서를 바꿔서 읽겠다거나, 3부작 중 2부만 읽겠다는 고집만 부리지 않는다면, 1부를 읽고 2부를 읽는 게 훨씬 매끄러울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나 보군’으로 대충 넘어갈 것들이 ‘그래서였군’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1부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은 ’말라칸드라’, 즉 화성이었다. 2부의 제목이기도 한 ’페렐란드라‘는 금성이라는 뜻으로써 2부의 공간적 배경이 된다. 주인공은 랜섬, 악역은 웨스턴으로, 비록 다른 악역이었던 드바인이 빠졌지만, 1부와 같다. 즉, 2부에서 랜섬과 웨스턴의 대립구도는 공간만 바뀔 뿐 1부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리고 그 대립구도는 랜섬이 선, 웨스턴이 악으로 뚜렷하게 그려진다. 랜섬은 창조주이자 기독교의 하나님에 해당하는 말렐딜에게 순종하여 쓰임 받는 인물로서 화성에서처럼 금성에서도 타 생명체들을 존중하며, 언어학자답게 예부터 존재했던 태양계 언어로 그들과 소통한다. 한편, 1부에서 똑똑하고 무모한 물리학자이자 냉혈한이었던 웨스턴은 2부에선 악에게 몸을 내주어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매개체, 다시 말해 성경에서 ‘귀신 들린 자’의 모습과 유사하지만, 일개 귀신이 아니라 그들의 우두머리이자 악마라고 불리는 영적 존재를 담아내는 육체로 등장한다. 그 악마가 랜섬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했던 말에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선은 지키려 하고 악은 파괴하려 한다,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이 작품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랜섬은 말라칸드라에서 했던 것처럼 페렐란드라에서도 지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1부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1부에서는 드바인과 웨스턴에 의해 강제로 말라칸드라에 잡혀가서 그 일을 감당했고, 2부에서는 말렐딜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 페렐란드라에 가서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전제가 되는 건 말라칸드라든 페렐란드라든 모든 게 말렐딜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랜섬이 지킨 건 단순히 말라칸드라 혹은 페렐란드라가 아닌 창조세계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랜섬은 강제로 말라칸드라에 끌려가서 타 생명체를 접하고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꼈지만, 자발적으로 페렐란드라에 와서는 경이의 눈으로 타 생명체를 맞이할 수 있었다. 1부에서도 결국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2부에서 랜섬은 전혀 몰랐다. 누구를 만나게 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언제까지 머물러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그저 말렐딜의 뜻에 자기 몸을 맡기고 순종한 것이었다. 이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나게 하는데, 나는 루이스가 의도적으로 랜섬이 어떤 사람인지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 이런 패러디를 이용한 거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랜섬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랜섬은 이 작품 속에서 예수님과 비슷한 역할도 감당하게 된다. 페렐란드라를 악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악마가 들어앉은 웨스턴을 결국엔 물리쳐 악마에게 승리했으며, 웨스턴에게 발목을 붙잡혀 죽음을 상징하는 지하 깊숙한 곳으로 함께 떨어진 지 사흘 만에 가까스로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 마치 부활을 경험한 것처럼 죽었다가 다시 사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웨스턴과 싸우다가 온몸에 상처를 입게 되는데, 가장 치명적인 상처이자 가장 나중에 치유되는 부위가 발꿈치라는 점 또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온 ‘여자의 후손’이 금성 버전에서는 바로 랜섬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루이스의 의도라 생각된다. 참고로, 랜섬을 영어로 쓰면 우리말로 몸값에 해당하는 Ransom이다. 루이스의 치밀한 설계에 나는 또 한 번 감탄한다.

기독교의 상징과 알레고리는 이것만이 아니다. 랜섬이 페렐란드라에서 처음 만난, 이성을 가진 생명체는 초록 여인인데, 창세기 1-2장에 등장하는 에덴동산 속 하와에 해당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웨스턴이 우주선을 타고 날아와 페렐란드라에 착륙하고 악마에게 몸을 내어준 뒤 끊임없이 유혹의 말을 건네는 대상도 바로 초록 여인이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장면과 겹치는 대목이다. 랜섬은 창세기 1-2장의 에덴동산을 지키기 위해 3장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뱀의 유혹으로부터 하와를 보호하려는 역할이 자기의 사명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는 목숨을 걸고 그 사명을 달성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랜섬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엘딜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사명이라 믿고 말렐딜을 처음부터 끝까지, 비록 의심 속에 빠지는 순간이 간간이 있었지만, 신뢰했다는 사실이다. 랜섬이 혼자서 했던 수많은 생각 중에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자기 자신이 실패해도 멜렐딜의 뜻은 결국 성취될 거라고 믿는 것. 이 대목에서 나는 이해하지 못해도, 때론 버려진 것처럼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이 느껴져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이 창세기 1-3장의 배경인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패러디한 사실을 알게 되면 17세기에 써진 밀턴의 ‘실낙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읽지 않은 루이스의 작품 중 ‘실낙원 서문’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된 해가 ‘페렐란드라’가 출간되기 1년 전인 1942년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작품을 쓰기 전 루이스는 이미 실낙원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마친 상태였다. 또한, 루이스가 그의 첫 소설 ‘순례자의 귀향’을 쓸 때 17세기 존 번연의 작품 ‘천로역정’을 패러디했던 것처럼, 이 작품을 쓰면서 밀턴의 ‘실낙원’을 패러디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루이스 버전의 실낙원, 페렐란드라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루이스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 즉 금성에서 실낙원이 아닌 낙원의 이미지를 구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이제 ‘우주 3부작’ 중 가장 긴 3부 ‘그 가공할 힘’이 남았다. 화성도 금성도 아닌 지구를 다룬다고 한다. 돌고 돌아 다시 지구인 셈이다. 1, 2부를 모두 읽어서 그런지 더욱 기대가 된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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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가 메리에게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14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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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하게 다가온 루이스

C. S. 루이스 저, ‘루이스가 메리에게’를 읽고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 이 책은 처음부터 책으로 의도된 게 아니라, 루이스가 51세가 되던 1950년부터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63년까지 그가 메리라는 한 미국 여성 작가에게 쓴 편지들의 모음집이다. 루이스는 평생 투덜거리면서도 꾸준히 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루이스의 명성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의 성실함과 겸손함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루이스는 편지를 많이 받은 것만이 아니라 그 많은 편지들에 대한 답장에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가 쓴 수많은 답장 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루이스의 저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기독교 변증서, 소설, 그리고 전공 관련 학술서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겐 변증서와 소설이 많이 소개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그러한 루이스의 고유한 매력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독자가 어떤 계층이나 집단이 아닌 단 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먼저 쓴 편지가 아니라 답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이스는 스스로도 자기는 편지 쓰기 싫어하는 숱한 남자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답장을 놓치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면서도 일정 시간을 늘 할애하여 그렇게 답장을 했다는 사실로부터 루이스는 이를 일종의 사명 같은 거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읽다 보면, 한두 단락 정도밖에 안 되는 그 짧은 답장에서도 자기가 너무 바쁘다는 둥 써야 할 답장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둥 불평을 하는 루이스의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그가 가장 싫어하는 시즌은 크리스마스 경인데, 이는 편지 양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많아져 답장 쓰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어쨌거나 루이스는 답장을 사명처럼 대부분은 다 써낸 것 같다.

변증서에서 보이는 예리함이나 소설에서 보이는 탁월한 상상력과 비유 등은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루이스의 소소한 일상을 엿볼 수 있으며, 그가 주위 사람들을 어떤 자세로 대했는지를 알게 해 준다. 루이스는 고집이 있으면서도 타자를 존중했으며 친절하고 신사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던 것 같다. 루이스 같은 선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루이스를 닮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군데군데 역시 루이스구나, 하는 통찰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평소에 그가 가진 생각이 그저 흘러나온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몇몇은 노트에 옮겨놓았다. 그는 정말 깊은 사유를 통해 얻은 통찰력을 가진 아주 드문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한번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감사를 느낀다.

이 책이 의미가 있는 점 중 한 가지는 그가 노년에 쓴 편지들의 묶음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수신자인 메리 역시 노년기에 속했는데 서로 노화의 과정을 겪어가며 서로 기도하며 은총과 축복을 비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늘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 루이스의 모습은 그가 말과 글만이 아닌 일상에서도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그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우리가 아는 그의 저서 중 거의 절반이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놀라게 될 것이다.

한동안 루이스를 읽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요즈음 루이스를 자주 읽게 된다. 참고로, 이 책을 읽고 나니 루이스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도 더 빨리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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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행성 밖에서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 1
C. S. 루이스 지음, 공경희 옮김 / 홍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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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알레고리가 가득한 루이스의 SF 소설

C. S. 루이스 저, ‘침묵의 행성 밖에서’를 읽고

읽고 나니 한동안 잊었던 루이스의 매력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소설을 좋아해서인지 나는 루이스의 변증서보다 소설에 더 끌린다. ‘나니아 연대기’의 경우는 잘 만들어진 3부작 영화로 봤지만 (다섯 번은 족히 봤으리라), 나머지 소설들, 그러니까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천국과 지옥의 이혼’, ‘순례자의 귀향’은 모두 책으로 읽었다. 한결같이 내겐 저 유명한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와 같은 변증서보다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논리 정연한 변증은 강하고 빠른 지적 쾌감을 선사하는 반면, 문학소설은 이성과 감정을 넘나들며 공감각적인 향연을 선보인다. 변증은 빠른 직구처럼 타깃에 꽂히고 나면 효과가 금세 사라진다. 소설은 느린 변화구처럼 해석이 까다로운 대신 효과는 오래간다. 변증은 밝은 빛과 같아서 직선으로 날아와 어두운 곳을 드러내고 밝히는 역할을 한다. 소설은 자욱한 안개와 같은 힘이 있어서 어느새 조용히 온몸을 감싸고 흠뻑 적시는 효과를 낸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나 다른 두 스타일의 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각각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작가가 바로 C. S. 루이스라는 사실이다. 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이 작품도 소설이다.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SF. 기독교 변증가가 쓴 SF 소설이라니! 루이스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뜻밖의 궁합이라고, 혹시 동명이인 아니냐고 충분히 의문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나니아 연대기’, ‘천국과 지옥의 이혼’, ‘순례자의 귀향’ 모두 판타지 소설이고,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도 신화를 각색한 소설이니만큼 판타지에 넣어도 무방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루이스가 SF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SF와 판타지의 차이는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지에 따른 기준을 제외하면 구별하기가 모호하니까 말이다. 둘 다 작가의 상상력이 최대치로 발휘되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루이스의 저서를 열 권 정도 읽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루이스를 잘 안다고 여겼다. 오산이었다. 이 작품은 2주 전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무려 ‘우주 3부작’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 말고도 두 작품이 더 있다는 말이다. 각각 화성, 금성,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고 한다. 참고로, 3부작을 다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데, 이 작품이 그중 가장 짧다. 

이 작품을 펼치면 가장 먼저 차례가 나오고, 그다음 페이지에는 ‘태양계 언어’라는 제목으로 이 책에서 사용되는 여러 외계어들의 뜻을 풀이해 놓았다. ‘아르볼’은 태양이다. ’글룬단드라’는 목성이다. ‘말라칸드라’는 화성이다. 이 책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다. ‘페렐란드라’는 금성이다.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툴칸드라’는 지구다. 이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침묵의 행성’도 지구를 의미한다. ‘툴칸드라’라는 단어에서 접두사 ‘툴크’는 침묵을 뜻하고, ‘한드라’는 행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툴크’와 ‘한드라’를 합치면 복합명사 ‘툴칸드라’가 된다.

이 태양계 언어를 사용해서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이 책의 공간적 배경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자면, ’툴칸드라-말라칸드라-툴칸드라‘가 되겠다. 즉, 지구-화성-지구 순으로 공간이 이동한다. 루이스는 우주여행이 가능한 과학 기술을 가진 지구인을 통해 지구 바로 옆에 있는 행성인 화성과 금성으로 공간 이동을 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우주 3부작에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생명체는 지구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루이스의 상상력에 따르면, 지구에 사는 우리 인간은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저 수많은 다양한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가시적 생명체만 해도 세 종류나 된다. ‘소른’, ‘흐로스’, ‘피플트리그’가 그것이다. 비가시적 존재까지 포함하면 다섯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천사로 여겨지는 ’엘딜’과 창조주이자 신인 ‘말렐딜’을 더하면 그렇다. 아마도 곧 읽게 될 ‘페렐란드라’에서도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3부작 모두 지구 사람이자 언어학자인 랜섬이 주인공인 듯한데, 1부인 이 작품에서 랜섬은 혼자 한적한 시골길을 여행하다가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외딴집에 거주하고 있는 오랜 친구 드바인을 만나게 되고, 그가 물리학자 웨스턴의 비밀 연구를 후원하고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연구는, 비록 랜섬은 둘에게 납치된 채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에 강제로 태워지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지만, 다른 행성을 개척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웨스턴과 드바인은 전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타 생명체를 배제하거나 제거하여 자신들의 사적인 유익을 도모하는 ‘악한’ 인간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랜섬은 어쩌다 선한 영웅이 되는 인물로서 웨스턴과 드바인 무리의 계획과 시도를 방해하거나 막아서 타 생명체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언어학자로 설정된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적인 외계 생명체들의 언어를 금세 배우고 익혀 그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다) 공생하는 목적을 이루는 데 쓰임 받는 것 같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랜섬 덕분에 평화로운 마무리로 끝을 맺는다. 

그럼 외계 생명체가 있다는 말이냐, 어떻게 기독교 변증가라는 작자가 지구 아닌 다른 행성에도 생명체가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을 포함한 천지창조 해석은 어떻게 되느냐, 등등의 질문도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의 의도는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인간이 전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과 지구를 타자화시키면서 객관적으로, 또 낯설게, 바라보고 그 의미를 되묻고 고찰하는 데에 있다고 해석하는 게 맞을 듯하다. 말하는 동물들이 주인공이 되고 멀티버스가 하나의 대중화된 개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인간과 지구가 상대화되고 객관화되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동물이 말하면 괜찮고 외계인은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히려 루이스의 매력을 충분히 누리면서 그를 안내자로 삼아 창조주의 섭리와 인간에게 요구되는 윤리,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까지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기독교 알레고리가 가득한 루이스의 SF 소설을 통해서 말이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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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위의 역설


장 그르니에 저, ‘섬’을 읽고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일부러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은 무위가 아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그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이 곧 무위의 삶이다. 요컨대, 거스르는 삶이 아닌 흘러가는 삶, 의도나 목적을 내려놓는 삶, ‘채워있음’보다는 ‘비어있음’이 어울리는 삶이 무위의 삶이다. ‘무위의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르니에의 ‘섬’을 읽으며 나는 활자화된 사유와 삶이 순리에 따라 흘러간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작품을 번역한 김화영의 글은 옳다. 나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아는 어떤 사람들’ 중 하나이며,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중 하나가 ‘섬’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위의 삶’ 안에 있는 ‘무위의 역설’을 믿는다. 무위가 유위가 되는 순간, 침묵이 말이 되는 순간, 비어있음이 채워있음이 되는 순간을 언제나 고대한다. 그르니에의 ‘섬’을 읽는 시간이 내겐 바로 그런 순간이다.

뒤늦게 독서를 막 시작했을 무렵, 그르니에의 ‘섬’을 추천받았다. 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서 책을 덮었다. 그때의 나는 무위의 역설을 모르던 나였기 때문이다. 목적을 이루고자, 문제를 해결하고자 책을 읽던 나였기 때문이다. 그르니에의 글은 의도가 충만한 자의 눈에는 읽히지도 발견되지도 않는 것이다. 한국에 와서 다시 구입한 ‘섬’을 읽고 나는 마치 처음 이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약 7년이란 세월이 내 눈을 뜨게 해 준 모양이다. 앞으로도 이 책은 여러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미처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글들과 행간이 마침내 읽히게 될 그날이 기대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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