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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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짧은 책은 우리를 1세기 로마로 데려간다. 푸블리우스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하여 우리는 브리스가 아굴라의 가정 교회를 방문하게 되고 그들의 삶의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아굴라를 인습에 매이지 않는 유대인으로 소개받은 푸블리우스는 아굴라가 자신이 알고 있던 유대인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이유가 필요했다. 그는 아굴라의 과거 삶의 경험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동행했던 글레멘드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의미 있는 대답을 듣게 된다. 아굴라가 그 동안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인 이유가 더 크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유는 글레멘드와 유오디아가 고린도에서부터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와 함께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새로운 관점은 예수 복음을 의미했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삶의 예배에 마침내 푸블리우스도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기독교 가치관과 세계관, 이것은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넘어 그것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좀 더 실제적이고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방인인 현재의 우리보다 유일신 하나님을 익히 알고, 로마에 속국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 중 하나였던 아굴라가 세계관의 변화를 겪고 이를 삶에서 반영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진정한 전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무릎이 탁 쳐졌다. 그 모습이 바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며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가며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평신도 전도자의 모습이라는 생각까지 진행이 되자 난 한동안 책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푸블리우스 일행이 브리스가 아굴라 집에 도착하여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즐기고 있는데, 아굴라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식사 준비를 하러 식당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푸블리우스는 이 분위기 전환을 예배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글레멘드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번에도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실제로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형식만 남은 가식적인 제사와 예배를 겨냥한 듯했다. 일상적인 삶 속에 스며들어 그것이 예배인지 삶인지 분간이 잘 안될 정도로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된 모습,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야 할, 그리고 보여져야 마땅한 모습일 것이다.


한편, 이해하지 못해 브리스가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그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한 푸블리우스는 식탁에서 보통 최고 귀빈을 위한 자리에 앉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식사와 친교를 나누면서 그는 기존에 그가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을 여러 번 포착한다.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가 신분상 차이가 분명히 나는 사람들을 맞이할 때 차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분상 식탁에서 그의 자리에 앉아야 할 아리스도불로와 그의 종 루시아와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모임의 모든 참석자들이 동일한 발언권을 가지고 열띤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광경에서도 푸블리우스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경험하게 된다.


식사와 교제 가운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던 성 만찬에서 푸블리우스는 예수 복음을 듣게 된다. 몸이 살려면 빵이 필요하듯 참 생명을 경험하려면 신의 독생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굴라는 이어서 그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얘기했고, 그분은 지금 모임에 함께 하신다고 기도했다. 푸블리우스는 아굴라의 기도 중 그 내용도 처음 듣는다는 이유로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모든 일이 바로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또 평범한 목소리로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모든 것이 아주 단순하고 실제적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여태껏 생각하던 신에 대한 방식을 포함한 그 자신의 세계관과의 충돌을 한번 더 경험하게 된다.


아리스도불로의 종 루시아의 신분 해방에 대한 토론이 뾰족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무렵,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이 예전에 보낸 편지 속에 적힌 내용을 기억해낸다. 주인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종들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실제로 자유인임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였다. 덕분에 토론은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대화가 바울의 판단 근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또한 푸블리우스조차 자신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고 고백한다.


이후에 진행되었던 순서에서도 푸블리우스는 자신이 짐작했던 종교적인 내용이라곤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친구 글레멘드 역시 아굴라처럼 자기 신이 마치 같은 방 안에 가까운 친구인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말투를 쓰며 기도하는 모습이나, 그 기도의 내용 중 '세상은 우리에게 온 신의 선물'이라는 말에서 또 한번 충격을 받게 된다. 너무나 당연시했던 것들이 모두 신의 손길에서 온다는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이 책은 푸블리우스의 인생에서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처음 만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단지 첫 만남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하나님나라 세계관과의 첫 만남이며, 그로 인해 아무런 압력 없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변화의 기운이 싹트는 모습을 그리는 책이다. 푸블리우스는 책의 끝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상하게도 그들 (이미 예수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게 되고 삶에서 교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를 포함한 그 일행)에게는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들의 행동에는 틀림없이 실제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초청받은 다음 주 모임에 갈지 안 갈지 결정은 아직 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가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삶에 녹아 든 복음, 일상과 일치된 하나님나라,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현재 우리들의 예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가상의 이야기로 보여주며 이 책의 저자가 현재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난 제 2의 푸블리우스가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 아니 교회인 나 자신으로부터도 같은 메시지를 받길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것은 객체지향적인 전도 방법을 연구하거나,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커다란 교회당을 건축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열심을 내거나, 언제나 새신자 환영 코스프레하듯 가식적인 스마일을 지으려고 노력하거나, 마치 아무런 근심이 없는 척하며 가짜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신앙을 살아내는 것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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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그날처럼 - 어느 치과의사의 일터신앙 이야기
이철규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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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읽는 속도에 비해 3배 정도 느리게 읽었다. 그만큼 책을 꼭꼭 씹어가며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작은 꼭지는 평균 2-3페이지 정도로 짧고 쉽게 쓰여져 있고, 공감이 가는 글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져 페이지를 휙휙 넘기려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책을 가만히 덮고 묵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쉼호흡을 하고 책을 폈다. 저자의 삶에 녹아 있는 하나님나라를 충분히 느끼고 싶었고, 가능한 많은 것을 배우고 내 삶에 적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자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여겼다.

나 역시 직장 현장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하나님백성으로서 늘 신앙과 일치하는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인간으로서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심정이리라 생각한다. 늘 마음 한 켠에 부담처럼 존재하면서도 딱히 정답이 없는 문제처럼, 아마도 나를 포함한 모든 하나님백성들에게 이 문제는 일종의 아킬레스건 같은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맹목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여정에 접어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인간의 존재와 창조의 섭리에 대한 사유의 깊이를 점점 더 깊게 만드는 추진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에 뾰족한 정답이 있다고 말하진 않는다. 삶과 신앙의 일치는 공식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은 그러한 문제가 하나님백성의 삶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치과 의사라는 컨텍스트에서 작성된 하나의 모범 답안 정도가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찾아 오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과 생각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를 따스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책을 관통하는 큰 물줄기가 있다면 그것은 저자의 신학적 배경의 중추를 이루는 요한 계시록에 의거한 종말론적 삶과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 “오늘을 그날처럼”도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미래의 관점으로 현재는 사는 것. “여기서 (Here)” “지금 (오늘, Now)” 자신의 일상적 삶이 “거기서 (There)” “그날 (Then)” 완성될 하나님나라에 속함을 드러내는 것. 바로 하나님백성이 추구해야 할 사명이자 삶과 신앙의 방향일 것이다. 신앙과 일치된 삶은 바로 여기에서 근거한다.

저자의 진료실에 찾아온 하나님의 통치가 저자의 삶 전체에 임하게 되는 과정은 성령의 내주, 인도하심에 의한 점진적인 변화 (연속성)와 순간순간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은 은혜 (불연속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그의 삶에 개입하심을 (결국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하실 수 있도록 그의 삶의 쓴 뿌리들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 고난으로 다가왔으나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일련의 과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연습을 지금도 부단히 해나가며 그의 삶 전체가 변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동의하게 될 것이다. 아, 역시 하나님이시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다. 저자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요, 동시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큰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 저자보다도 그의 안에 있는 예수님이 보인다. 내 안에도 같은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무뎌졌던 내 맘을 다시 감사함으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음을 물론이고, 나아가 나도 내 현장에서 믿음을 살아내는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신앙과 일치하는 삶이란 일회성의 사건이 아닐 뿐더러 그 결과를 우리의 삶에서 오감으로 늘 체감할 수 없기 때문에 자칫 그런 삶을 추구하면서 낙심할 수 있는데, 저자 역시 그런 과정을 겪어가며 하나님나라를 살아가고 있음을 보고 적지않은 위로가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연습이라는 평상시 나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명제가 한번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난 답이 없는 인생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인해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믿음과 생활은 하나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는 문장이 맘에 꽂혔다. 사랑 없는 배려는 통제나 이해 타산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역으로 배려 없는 사랑 역시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는 말도 전적으로 동의가 되었다. 또한 미덕과 성품의 근육을 훈련해 강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당면 과제라는 사실도 아멘으로 화답했다.

공평과 정의를 비롯한 모든 성서적 가치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어 현존하는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왔다. 종말론적 윤리가 제거된 인간의 종교성은 결국은 소비주의와 신분 상승의 도구 외에 다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말에도 깊숙히 찔림을 받았다. 또한 종교와 생활로써의 기독교는 있을지 몰라도,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신앙으로써의 기독교는 찾아볼 수 없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복음의 공공성을 묵상하고 있는 요즈음 이철규 박사님의 “오늘을 그날처럼”은 내게 적시에 온 단비와도 같았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라는 답의 힌트를 크리스토퍼 라이트로부터 배웠고,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김근주 교수님으로부터 배웠다면, 이철규 박사님은 나에게 그 배움이 이론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현장에서 구현되어짐을 보여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나도 과학자라는 컨텍스트에서 하나의 실례가 되고 싶다.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행운으로 말미암는 성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직한 성실과 일상에서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그저 과학자의 삶에도 적용하는 일이 내가 할 몫이다. 그 열매가 어떻든 옳은 과정을 밟기를 다짐한다. 그 과정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과학자. 바로 내가 되길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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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공공성 - 구약으로 읽는 복음의 본질
김근주 지음 / 비아토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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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처음으로 공의 (쩨다카)와 정의 (미슈파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부분은 창세기 18장 1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는 한 사람, 아담의 반역으로 시작되어 죄악에 물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부르시고 보내시며 시작된, 소위 ‘하나님의 선교’에서의 핵심 포인트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보내시고 함께 하심은, 하나님을 믿으면 단지 높아지고 만사형통하게 된다는 표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통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복의 목적지는 만민이지 아브라함이나 그 민족이 아니다. 즉,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그리고 신약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빠른 출세나 성공과 같은 사적인 욕망의 채워짐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증거가 결코 될 수 없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복음은 처음부터 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결코 사적인 소원성취나 문제해결에 그 목적이 있지 않다. 복음은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가 아닐 뿐더러, 부적도 아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과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선택되었다는 점이 자칫 운좋게 선택받은 사람만 복을 받을 수 있고, 그 복을 받은 사람은 구원받게 되고 남은 인생은 어차피 장망성과도 같으므로 대충 고난과 핍박을 받다가 죽을 때 어딘가 있을 천국으로 건져지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한 사람과 한 민족을 선택하심으로 그 사람과 민족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데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했고 만민 가운데 있으면서 만민과는 구별된 하나님백성이 되어야 했다. 그 하나님백성이 주어진 현재를 살아야 할 자세가 바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인 것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이며 그렇게 살아갈 때에 거룩함과 평안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거룩함과 평안함은 만민에게 보여지게 되어 있고 여호와를 높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백성의 선교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 인간과 대화하시고 함께하시며 일상 속에 깃든 우리들의 공의와 정의를 행함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김근주 (Keunjoo Kim) 교수님의 신간, ‘복음의 공공성’을 읽으면서, 창세기 18장을 다시 읽었다. 그러면서 눈여겨 본 부분이 있다. 공의와 정의가 첨 등장한 19절 바로 뒷 절인 20절에 곧바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죄악을 하나님께서 언급하신다는 점이다. 비신학자이고 성경 전체를 꿰뚫는 눈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단정짓긴 어려우나, 문맥상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는 사건에서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공의와 정의를 보길 원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소돔을 향해 중보하는 아브라함의 기도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롯이 나그네로 등장한 두 천사를 대접하는 모습에서도 공의를 발견할 수 있으며,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는 폭력적이고 자기 유익만을 위하는 소돔 사람들을 멸하시는 부분에서도 정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동성애가 죄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삼는 주요 성경본문이라는 점은 모두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렇게 배웠었다. 그러나 오늘 꼼꼼히 창세기 18장과 19장을 여러번 읽어봐도,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동성애가 죄라거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하셨다고 하는 해석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 지가 더 주요한 포인트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소돔과 고모라 전체 사건은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보여주시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만약 수능 언어영역이나 본고사에 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본문으로 던져주고 저자의 의도를 쓰라고 하는 문제가 나왔다면, 난 서슴치 않고 동성애 문제보단 나그네와 공의와 정의에 무게를 두고 답을 쓸 것이다.

동성애가 죄라면서 그들을 인격적으로도 무시하고 차별하고 악한 사람으로, 아니 인간 이하로 멸시하는 행위는,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또 성경을 근거로 해서 죄악시하는 행위에 대해선 난 동의할 수가 없다. 만약 중세시대였다면 지금처럼 동성애자들을 벌레 취급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동성애자들을 화형시키자고 주장하고도 충분히 남았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돔 사람들의 악함을 본다. 그들은 선과 악을 스스로 구분짓고 (이것은 소위 원죄사건이라 부르는 창세기 3장 사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라고 한다), 그 구분지어진 악을 제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판결권과 그 판결을 집행하는 집행권은, 미안하지만 당신들에게 없다.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건 당신들 자유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는 악하다고 난 생각한다. 그것은 의롭지 못한 행동이다. 당신들의 실제 무게중심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악을 제거하는 것에 있지 않고 (제거할 권한도 능력도 없으면서), 당신들의 관점에서 본 악을 제거하여 당신들이 정한 선을 지키려는 행위에 있을 뿐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 중심의 자기애를 의미하는 원죄사건과 똑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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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우종학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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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크따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에서 박 기자와 한 교수라는 두 명의 가상 인물을 설정하고, 그 배후에서 모든 걸 조율했던 우종학 교수 (존칭 생략)가 그의 두번째 책, 과도기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무대 뒤에서 연극을 보여주며 간접적으로 목소리를 내다가, 이번엔 나이를 예측하기 힘든 동안의 (^^) 감독이 무대 앞에 나와서 직접 관중들과 만나며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작품을 설명하는 셈이다. 무크따를 읽는 독자는 한 교수가 박 기자에게 하는 친절한 일대일 과외에 동참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과학과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면, 기독교인들이나 심지어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무크따는 부담없는 입문서로써 적절하다. 반면, 과도기는 저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원하는 강의를 동영상이나 녹취록이 아닌 직접 강사를 코 앞에 두고 라이브 강의를 들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을 고화질의 멋진 천문학 관련 사진들과 함께 (심지어 올 컬러다!)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장감과 더불어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강사로부터만 자연스럽게 전해오는 진심어린 한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기 위해선 아무래도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보다는 이 책의 독자층으로서 적절할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과학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인의 바른 응답을 요구하며 기대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을 밝히고 그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했던 책이 무크따였다면, 과도기는 좀더 진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부터 쌓여온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는 것에 무크따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과도기는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에도 지속될 과학시대가 지속해서 던져줄 도전에 대해서 기독교가 어떻게 응답해야 올바를지 청사진을 넌지시 제시하기 때문이다. 과도기가 미래까지도 내다보며 기독교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이 고무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과학과 신앙에 얽힌 오해와 편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당분간은 미래에도 진행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것이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안타까운 현실을 다시 직시할 수 있었고, 나 역시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으며, 저자의 한을 공감할 수 있었다.

과도기의 목적은 21세기 과학이 기독교에 던지는 세 가지 도전을 검토하고, 이 도전들에 교회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고찰하는 데에 있다. 책의 기본적인 구조 역시 세 가지 도전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짜여 있다.

우종학 교수의 저서나 수많은 강연에서 일관되게 언급되는 중요한 견해 하나는, 성경과 자연이 하나님을 알려주는 두 가지 책이라는 것이다. 두 책의 저자는 동일하게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두 책이 말하는 내용은 결코 상충될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성경이 창조를 ‘누가’ 했는지를 밝히는 책이라면, 자연은 창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같지만, 책의 목적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는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전제가 될뿐 아니라, 과학과 신앙의 올바른 대화를 시작하는 데에 있어 아주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숙고해 둘 필요가 있다.

책이 쓰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저자의 목적과 의도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의 목적과 의도에 부합하게 읽어야 그 책을 잘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부합하지 않게 책을 읽는 것은 독자들이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독자에 불과하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책을 해석한다든가, 자신의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왜곡하거나 숨긴다면, 아마도 그 독자는 둘 중 하나다. 저자를 평가할 만큼의, 아니면 저자보다도 뛰어난 역량을 가진 존재이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는 자기중심의 비겁하고 이기적인 존재일 것이다.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의 우산 아래 모여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상식적인 경계를 무시하고 저자의 목적과 의도에 상관없이 독자인 자신들의 신념과 주장에 모든 것을 맞추어 왜곡해서 두 가지 책인 성경과 자연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오류를 범하는 그들의 의도가 처음부터 그릇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려고 했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신앙을 공격한다고 여긴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한 우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끼리 한 마음으로 되기 위하여 일종의 정신 교육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 수단으로써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든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도 않은 것들을 자신들의 사상에 맞추어 마치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과장해서 해석한다든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데 슬그머니 무시하며 읽는 비겁한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잘못된 방법 때문에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되었고, 심지어 나중엔 자신들도 그 결과가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때문인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나름의 정당성 (아마도 기독교인 중 다수라서?)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잘못된 길을 고수하고 남들까지도 혹하게 만드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로 인해 처음의 의도 자체도 의심받게되는 자가당착의 모습까지도 보이는 것 같다. 분명 그들이나 나나 똑같은 창조주인 하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건 분명히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었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책에서도 우종학 교수는 누차 반복하면서 이 부분, 즉 책의 잘못된 해석방법을 강조한다. 창조과학이라는 우산 아래 모인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기독교인 그룹은 책에 잘 명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창조 방법에 대해선 성경은 별 관심이 없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대신 자연이라는 책은 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인간은 과학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자연이라는 책을 해석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학이 중립적이라는 사실이다. 과학 자체는 자연현상을 관측하고 실험하고 증명하면서 기존에 몰랐던 사실을 밝혀내는 역할을 한다. 과학은 또한 한계를 지닌다. 즉, 과학으로 밝힐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신의 존재 유무다. 과학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유신론/무신론의 오래된 싸움을 끝낼 해결사가 될 수 없다. 과학이 아직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과학이 밝힐 수 있는 영역 밖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립적이며 중립적일 수 밖에 없는 과학을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이 자신들의 공격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정도를 넘어선다.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군중몰이를 하는 것처럼 왜곡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 자체가 심히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중립적인 과학을 신앙과 적대시하며 마치 과학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와 모순되는 것처럼 느끼는 통념이나, 과학을 무신론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과학주의 무신론자뿐 아니다. 교회가 직면한,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도전은 바로 기독교 내부에 있는 근본주의/문자주의적인 방식에 길들여져 있고 이를 신봉하고 있는 무리들이다. 창조과학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마치 기독교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듯하다. 우주와 지구와 생명의 탄생, 그리고 진화를 설명하는 중립적인 과학의 증거들을 뭉뚱그려서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하고 반역하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죄악시하며, 눈과 귀를 닫고 등을 돌려 스스로 만든 그림자에 갇혀 그들끼리 소통하며 그들끼리 하나가 되기 위해 행하는 정신 교육이 내가 보기엔 정말 시대착오적이며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자인 우종학 교수는 책에서도 여러번 말한다.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 대상으로 교회 내부에서만 배회하며 과학에 흠집이나 내지 말고 당당하게 링 위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붙자고 말이다. 과학자는 증거에 기반한 논리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창조과학자들이 지속해서 정정당당한 링 위의 결판을 피하고 여론몰이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내 생각에도 그들은 정말 박근혜 정부처럼 탄핵되어야만 할 것 같다. 진검승부를 피하고 언론이나 여론을 이용해서 일반인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마약과도 같고 종교와도 같은 방법으로 자기 편만들기나 하는 시대는 이미 탄핵되었다는 점을 그들이 바로 알았으면 한다. 나아가, 기독교를 지키려고 했지만, 탈기독교 현상을 그들이 부추기고 있다는 점도 꼭 똑바로 인지하고 그들의 방향에 수정을 가했으면 좋겠다.

과학의 발전 속도는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그 증가하는 속도로 밝혀내는 사실 또한 가히 엄청나게 많다. 앞으로도 이런 흐름은 지속될 것이며 첨단과학이 일상이 될 정도의 과학시대를 살아갈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접하게 될 때 어떻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할 것이며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건강하게 지켜나갈지는 무척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나 역시 생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이 부분에 대해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한국에선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새물결아카데미를 축으로 한 운동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새물결플러스를 축으로 한 기독교 출판업계가 좋은 책을 출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한국에 있는 과학자 기독교인뿐 아니라, 세계에 흩어진 남은 자로서의 과학자 기독교인들까지도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를 내어 과거부터 누적된 과학과 신앙의 해묵은 편견이 깨어지고 서로간의 건전한 대화가 이루어져 보다 넓고 보다 깊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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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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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고도를 기다리며" "데미안"을 넘어 "좁은문"을 지나 "토지"를 밟고나오자 "설국"이었다.
(그 유명한 책의 첫 문장을, 한 달간 내가 읽어온 문학 작품의 순서대로 패러디해봤다. 의미없음.)

얼추 파악했다고 생각한 스토리, 난 그것이 책의 마지막까지 지속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내심 어떤 사건을 기대했고 그러는 와중에 긴장까지 했다. 어떤 복선이 그려지지 않나 싶어 작가가 묘사하는 자연의 풍경이라든지 여자들의 행동과 말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런 사건도,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렇게 밋밋하게 책은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추운 날 겨울, 휑하니 스쳐지나 가버린 기차처럼 마흔이 되어서야 처음 맛본 "설국"은 그렇게 내게 왔다가 가버렸다.

한참 동안 책 앞 표지를 바라보며 "설국"이 남긴 잔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책 제목이 왜 "고마코"나 "요코", 아니면 "게이샤"가 아니라 "설국"인지 알 것 같았다. 내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책의 스토리가 아니었고 눈의 나라, 설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descriptive하기만 한 책도 아니다. 잔잔한 여운이 남기 때문이다. "이상한 사람", "싫어요", "가세요", "어머"를 연발하는 고마코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와 묘하게 반대 이미지를 가지는 듯한 요코의 모습도 하얀 눈 고장에서의 찬 기운과 나도 한번 들어가고픈 여관 온천의 더운 증기와 함께 떠오른다. 책의 끝부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듯한 요코의 모습에서조차 작가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죽음도 그냥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단편들일 뿐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가 다시 도쿄로 돌아가서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고마코와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 지에 대해서도 별 말이 없다. 그저 일상이다. 그렇다. "설국"은 그렇게 일본의 눈 고장에서의 일상을 허무하리만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남은 여운은 글이 아니라 그림에 가까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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