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뮈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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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 저,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기괴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주인공이 쪄들어 냄새가 날 것 같은 부랑자였기 때문이었거나, 하마터면 철학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이나 수준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반복을 거부하지만 또 반복되고야 마는, 그리고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그들의 허무한 삶 때문도 아니었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의 일상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쓴 나물을 먹은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얼른 깨끗하게 샤워라고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문득 그들이 갇혔던 일상이 우리 인간들의 실존적인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기괴하기만 했던 기분은 금새, 겉으론 우스꽝스럽지만 속으론 아주 깊고 묵직하게 내면을 터치당했다는 기분으로 바뀌었다.


책 전체엔 허무함이 줄줄 흐른다. 신물 나고 진절머리가 나지만 탈출할 수도 없는 그들의 일상은 마치 오래 빨지 않고 주구장창 써온 모자나, 벗어서 겨우 바람에 말리는 정도의 관리만 해서 고약한 냄새가 풀풀 풍겨나는 구두 속 땀과 함께 엉겨 붙은 이물질처럼, 이미 그들 자신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죽음을 택하지 않는 이상, 그 상황을 벗어날 길은 없어 보였다. 절망적이다 못해 절망 자체가 그들의 호흡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도를 기다리며 그 시간을 때우는 것 밖엔 없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그래도 이 책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위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허무한 삶에 그나마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도 된다.


기다림에 지쳐 순간순간 그 상황을 벗어나려 할 때조차도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건 이미 허무와 절망과 한 몸이 된 그들에게 있어선 일종의 의식과도 같아 보였다. 그 기다림은 또한 그들을 유일하게 하나로 묶어 주는 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는 마치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와 악으로 물들어버린, 그래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의 마음 중심에서도 여전히 무언가 구원을 바라는 본능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자신의 책에서 신을 찾지 말라는 말까지 남긴 사무엘 베케트였지만, 난 이 책에서 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구원과 해방의 길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매일 기다려도 오지 않고 고작 전령인 소년을 보내어 다음을 기약하는 "고도"라는 존재는 어쩌면 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도에게 전할 말이 없냐고 물어보는 소년은 인간의 기도를 담아가는 천사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년에게 자기들을 만났다고만 고도에게 전하라고 하는 두 주인공의 메시지는 절망 속에서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실존을 전하는 것 같았다.


2차 세계대전 가운데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나치를 피해 숨어 지내는 동안 피난민들과 대화를 나눈 경험에서 창작의 실마리를 얻었다고 하는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의 정체를 포함한 이 책에 대한 해석을 전혀 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전적으로 남겨 두었지만, 아마도 그는 그가 겪은 인생의 부조리를 통해서 궁극적인 인간의 삶의 의미를, 비록 절망적인 현실 속이지만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기다림"에서 찾으려고 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의 모습이나 끊임없이 질적 변증을 통해 주체적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실존주의적인 그의 인간관과도 맞닿아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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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전원 교향곡 - 을유세계문학전집 24 을유세계문학전집 24
앙드레 지드 지음, 이동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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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다시 읽고.


책에 몰입을 해보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만나기 전까진 독서하며 한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엄마의 도움으로 "데미안"을 읽게 되면서 문학세계에 들어왔던 나는 문학고전들을 기회가 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당최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단테의 신곡, 책보단 짧은 연극을 보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던 괴테의 파우스트, 지루하기만 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길고 난해하여 여러 번 시도 끝에 겨우 마칠 수 있었던 도스트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책도, 뭔지 모를 의무감 반 호기심 반으로 읽어냈다. 내가 "좁은문"을 읽었던 시기가 그 어려운 책들을 읽고 난 이후인지 읽기 전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확실히 내 뇌리에 박힌 기억은 내가, 이 싸나이 김영웅이 독서하면서 울어버린 사건이었다. 그렇다. 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나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에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 책의 앞 색지에다가 내가 처음으로 울었던 책이라고 써놨었던 것 같다.


데미안에 이어, 나이 마흔에 시작한 나의 고전 다시 읽기 시리즈의 그 두 번째 주인공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이었다. 베드타임 스토리로 Calendar mystery 시리즈 중 September 편을 아들에게 끝까지 다 읽어주고 나서 느꼈던 깔끔함 때문이었을까. 아들을 재우고 나니, 퇴근 길 기차 안에서 읽다가 만 챕터의 나머지 부분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챕터까지만 다 읽고 자려고 했는데,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내가 눈물을 흘렸던 유일한 책이었던 탓일까. 지속되는 알리사의 편지와 제롬이 묘사하는 그녀의 이미지, 그리고 곧 닥쳐올 둘 사이의 비극이 너무나도 선명해져, 난 결국 알리사의 죽음을 두 번째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고, 또다시 비탄에 잠긴 채 겨우겨우 책을 끝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녀가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문장이다. 25년간 잊혀지지 않았던 문장. 심호흡을 했다. 비록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감정의 폭풍같은 것이 내 전신을 감쌌다. 시계는 벌써 자정을 가리켰지만 당장 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하녀가 등불을 들고 오기 전에 조금만 더 그 책 안에 있고 싶었다. 정리되지는 않지만 불현듯 마음 깊은 곳을 터치당한 것 같은 기분으로 그냥 그렇게 한동안 나 자신을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왈칵 터져나오는 감정의 북받침이 책 곳곳에 나오지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적이기만 하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차례의 감정의 폭풍 또한 고요함 가운데 있다. 고요한 폭풍이랄까. 그리고 책에 지속적으로 흐르는 또 다른 기운은 슬픔이다. 고요함과 슬픔. 아, 좁은문을 통과하는 길은 고요하고도 슬픈 것일까? 그래야만 하는 걸까?


25년 전에, 알리사의 죽음과 살아남은 제롬을 생각하며 눈물을 터뜨렸던 건, 어쩌면 내가 신앙이라는 게 무엇인지 지금보다 많이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해석해 본다. 지금도 그때처럼 책을 다 이해할 순 없다. 인간 사이의 사랑으로 인한 행복이 왜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적이 되어야만 하는지, 난 아직도 명쾌하게 답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라는 것은 분명 15살의 청소년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를 기억하며 아련함과 순수함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그 아련함과 순수함의 출처가 무지일 수도 있겠다는, 참 재수없고도 늙어빠진 생각을 하게 된다.


알리사의 성스러운 길을 가고자 하는 그 고결한 뜻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마흔 살의 나는 한편으로 알리사를 책망한다. 비록 알리사가 병에 걸려 죽게 되어 그 이상 깊게 논쟁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알리사가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난 분명히 망설이지 않고 바보라고 말해주었을 테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을 더 밝히 인도받는 것이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라면, 어찌 그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함께 그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있냐고 난 따질 테다. 그 좁은문은 결코 한 사람만 지나칠 수 있는 "종착역'의 의미보다는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그 길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들어가야만 하는 "시작점"의 의미이지 않겠냐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당장 그 볼품없는 어설픈 연극을 그만 두라고 큰 소리로 권유해볼 테다. 그 성스러운 길을 가는 길이 고행과 고독과 외로움으로만 가득 채워져야만 하는 거냐고, 왜 사랑하는 사람과 두 손 붙잡고 갈 수 없는 거냐고, 정 길이 좁다면 사랑하는 사람 등에 업혀서 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외쳐볼 테다.


하지만, 25년 전에도 그랬듯이 알리사는 혼자 요양원에서 외로이 죽어갔다. 그것은 스스로 준비한 죽음이었다. 의도적으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갔다. 난 너무 속이 상했다.


제롬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알리사가 그렇게 매몰찬 연극을 해가면서까지 제롬으로부터의 사랑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시도들이, 마흔살의 내 눈엔 부질없고 어리석게도 보인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다. 아, 25년간 내가 너무 늙어버렸나. 나도 모르게 내가 어릴 적 그다지도 싫어했던 뭇 아저씨의 버릇없고 영혼없는 논리로 색안경을 끼고 잔소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면서 난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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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이슬람 사회 세창출판사 이슬람 총서 13
김동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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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문 (Dong Moon Kim) 저, "우리가 모르는 이슬람 사회"를 읽고.


선입관이나 고정관념만큼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왜곡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더욱이 소시오패스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요즈음,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이것의 암묵적인 배후세력으로 규정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사람을 공감하지 못해 사람을 해치는, 이 기형적인 존재의 탄생은 어쨌거나 우리 시대가 낳은 괴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전적 요인의 기여도를 차치한다면, 소시오패스의 모습은 자기자신을 서민이라 여기는 평범한 우리들에게도 존재한다. 공감능력상실이 항상 범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옳고 그름을 자신의 유익에 근거해서만 판단하는 모습은 비단 범죄자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든 인간은 아직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 부분적으로는 그리고 간헐적으로는 모두 소시오패스의 기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 했다. 무관심은 선입관, 고정관념과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관심이 없으면 근거 없는 풍문을 의심 없이 그대로 믿게 되고, 그대로 믿다 보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조차 못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의 결과, 인간은 사랑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10년이 넘게 요르단 선교사로 활약했던 김동문 선교사가 2016년 말에 출판한 "우리가 모르는 이슬람 사회"를 읽고, 내가 얼마나 이슬람 사회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는지 놀랐다. 게다가 그 단편적인 지식의 대부분도 근거 없는 루머에 기반을 두고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웠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었던 이슬람이었기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또 기독교인이었기에 대적해야 할 대상으로 당연히 무슬림을 지목했었다고 변명하는 내 모습도 직면할 수 있었다. 숨어있던 나의 잘못된 선입관과 고정관념이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맹목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이슬람 사회를 두려워했고 무슬림을 혐오했었던 나도 결국은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소시오패스였던 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기독교의 우파적인 관점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찾을 수 있다. 동성애가 죄라면서 그들을 인간 이하의 벌레로 취급하는듯한 기독교인의 태도와, 이슬람을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그들을 에돔 족속의 후예라든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대적 정도로만 여기는 기독교인의 태도는 모두 인종 혐오 수준의 문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혐오 문제에 '사랑'을 대표명사로 하는 기독교인들이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잘 모르는 이슬람 사회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고 올바로 알고 오해를 넘어 이해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저자인 김동문 선교사는 이 주제에 대해서 그 동안 많은 글을 써왔고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해 옴으로써 대중들에게 이슬람 사회에 대한 올바른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헌신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강한 여론처럼 버티고 있는 이슬람 사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다시 김동문 선교사로 하여금 펜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공했음이 틀림없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 김동문 선교사는 우리를 아랍 이슬람 사회의 일상으로 초청한다. 관찰자와 관광객의 시선을 넘어 생활인의 자리에서, 아랍인들도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는, 너무나 당연했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을 뿐, 그들도 역시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적인 삶에 참여하고 있노라면, 그들을 매일 종교적인 행위만을 하거나 기독교나 서방 세계 (특히 미국)에 대한 악감정으로 매일 테러나 준비하는 단체인 것처럼 여기는 우리들의 그릇된 편견에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 행위인 의식주에 대한 소개, 그들만의 언어인 아랍어에 대한 소개, 길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김동문 선교사는 관광객들이 아닌 현지 생활인들만 경험할 수 있는 아랍인들의 실제 일상적인 생활 공간까지 우리들을 데리고 간다. 또한 그는 중동 지역에 국경을 두고 있는 여러 아랍 국가들을 소개하는데, 그 뜨거운 땅의 나라 중동 지역에도 폭설이 내린다는 사실에 우린 놀랄 수도 있고, 종교와 민족 문제로 인하여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2부에서는 이슬람 사회를 오해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언론에 대하여 김동문 선교사는 일침을 가한다. 현지에서 사실을 확인하고 공정하게 그 사실만을 중립적으로 보도해야 할 언론이 기존에 만들어진 편견을 깨기보다 굳히기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면서 밝힌다. 덕분에 우린, 한국 언론에 비춰진 중동 이슬람의 모습은 종교 이슈에만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팩트 체크를 하지 않은 채 외신에 무분별하게 의지하여 차별성 없게 보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만이 아닌 세계를 공포에 물들게 했던 IS뿐만 아니다. 한국에서 크게 이슈화되었고 무슬림 혐오증을 더 증폭시킨 할랄단지 반대운동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도 김동문 선교사는 책에서 밝힌다. 정치적인 압력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팩트 체크는 기자들의 기본 사항이라는 명백한 부분을 고려할 때, 성의 없고 편파적인 언론의 역할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이슬람 사회"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책 전체에 저자 김동문 선교사의 한이 진득하게 배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지고 있었던 이슬람 사회에 대한 선입관과 고정관념과 무관심,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이슬람 포비아와 무슬림 혐오증에 대해 김동문 선교사는 한없이 아쉽고 답답하다. 이슬람 지역을 종교 이슬람의 시선에만 고정시키고 있는 우리들의 시선,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안경을 벗지 않는 우리들의 고고함, 그리고 사실이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들의 무관심에 치를 떤다. 10년이 넘도록 요르단 선교사로서 활약한 풍부한 경험에 의거하여 그만큼 팩트를 많이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한은 거칠지도 직설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포기가 아닌 소망이 묻어 있고, 그 뒤엔 사랑이 있다. 이 책은 이슬람 사회에 대한 팩트에 철저히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문장 하나하나에서도 그의 한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우리들은 이슬람 사회에 대한 그 동안의 오해와 착각, 그리고 무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들을 이해하고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약 280 페이지 분량의 책이 김동문 선교사의 한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는 아직도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그가 진정 바라는 것은 더 많은 분량의 책을 출판하는 것이기보단, 더 이상 책을 출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이슬람 사회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전달되는 것일 테다. 그들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그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단 말인가. 무관심의 옷을 입은 잘못된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어떻게 그들 앞에서 소시오패스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을 제대로 아는 것이 먼저다. 그것이 시작이다. 이 한 권의 책이 그러한 시작을 알리는 작은 불쏘시개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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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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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랭던 길키 저,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출판)를 읽고,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존재의 심연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익숙하지만 낯선 자신의 벌거벗은 실체를 대면하는 시기다. 우리가 고난이라고도, 환란이라고도 부르는 순간이다. 소스라쳐 뒤로 물러서거나, 없는 것처럼 무시해버리지 않고, 이를 정면으로 맞설 용기만 있다면, 반드시 그 심연으로부터 우리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을 편리하게 만든 문명의 발달과 사회에 팽만한 구조적 악은 불행히도 우리가 그 순간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가 숨을 수 있는 여유까지도 충만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우린 좀처럼 그런 순간을 기회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이 준비 없이 오는 것처럼, 고난 또한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어찌 보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시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우린 그 씀씀이를 관리할 수 있을 뿐, 정작 그 시간 자체를 조작할 수는 없다.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나는 그 경이로운 순간에도, 육신의 끝을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에도, 시계의 초침은 매정할 만큼 미동도 하지 않고 동일한 속도로 무한을 향하여 째깍째깍 달려간다. 시간 안에서 살고, 시간 안에서 죽는, 결국 우리 인간은 시간의 굴레 안에 묶여 있는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말, 이십 대 중반의 랭던 길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도 타지인 중국 산둥 (위현)에 위치한 수용소에서 일본인의 감시 하에 자칫하다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2년 반을 살아야만 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미국 중산층에서 엘리트로 자란 그에게 있어선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시기일지도 모를 시간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그 곳에서 그는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가 믿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민낯과 미래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 깊이 고찰할 수 있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오래되고 낡아빠진 수용소에는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각계각층의 서구인 남녀노소들이 천 명이 넘게 모이게 되었고, 그들은 제한된 좁은 공간 안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의 종결을 기다리며 자신의 미래와 생명을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불편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용소에 집결한 모든 사람은 각자가 스스로 자신도 인간임을 직시해야만 했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수용소라는 한 배를 탄 구성원은 모두 동일한 계급장을, 아니 계급장을 모두 뗀 체로 맨 몸으로, 맨 인간으로만 존재하며 대우받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사람은 물론이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버튼을 누르거나 레버를 당기거나 돌리기만 하면 물이 쏴하고 나오는 화장실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변을 보고 난 후 배설물을 치워주는 사람도 없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도 없었으며, 권위로 다른 사람들에게 허드렛일을 시킬 수도 없었다. 더 앞서 있거나 더 위에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더 뒤쳐지거나 더 아래에 있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원점에 덩그러니 놓여졌던 것이다.


수용소 생활 전의 재력과 권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원점에 놓여졌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전쟁으로 인한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된 입장 덕분에, 수용소 사람들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더욱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룰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인본주의자들이 주구장창 얘기하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진보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같은 고난을 받는 상황에서 생기는 특별한 공감능력과 인간이 가진 도덕성과 합리성만으로는 문제의 발생을 모면하기엔 부족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넘어서는 보다 강력한 힘이자 인간 존재의 심연에 각인된 ‘이기심’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표현형이기도 하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자기의 유익에 의거해서 판단해 버리는 이기심. 랭던 길키 역시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을 통해 죄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죄’야말로 본질적으로 이 책의 주제라고 말이다. 그는 또 말한다. 수용소 경험을 통해 배운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회에서 통용되던 거짓된 가치관을 버리고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이다. 마침내 서로 이웃을 보면서 그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인간인지와 관련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책은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고찰을 수용소 생활 초기부터 했던 것은 아니다.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중국에 왔었고, 철학이나 종교적인 믿음에 관련된 영적인 삶이라는 것의 우월성을 신뢰하고 있었던 그는 수용소 초창기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이 물질적이고 정치적임을 간파했고,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철학이나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경험과 기술이라는 결론을 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적이고 무한한 문제 해결 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 진짜로 필요한 도움이며, 종교나 철학은 오직 선호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할 뿐,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간 낭비라는 확신도 그는 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기술적인 지식과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결국은 도덕적이거나 영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위기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인격의 실패로 인해 야기되었다. 도덕적인 건강함이 없다면, 물질적인 공급이나 혜택이 결여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 랭던 길키에게는 수용소 생활에서 배운 가장 깊은 깨달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점철된 행동을 과감하게 하게 되며, 이후에 그 행동을 하게 만든 실체인 이기심을 합리화한다. 교육을 많이 받고 존경을 받던 사람이라면, 혹은 선교사나 목사와 같은 사람이라면 다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랭던 길키가 목격한 바로는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더 그럴듯한 말로 자신의 이기심을 합리화했다고 한다. 위선을 행해서라도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까지도 인간은 비밀스럽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와 자기 소유를 사랑하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과 그 이기심을 치장하려는 위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실재를 전제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 아니면 의지을 이용한 스스로의 힘으로 선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인간 내면에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며 선한 모습, 즉 희망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발현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인간의 이기적인 본 모습, 즉 끊임없는 자기 사랑을 사실로 인정하는 대신, 그러한 자기중심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생명과 지위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반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모습일 것이다. 진짜 신앙은 자신이나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됨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랭던 길키의 머리를 어지럽혔던 문제, 인간의 도덕적 삶의 딜레마를 풀어준 가장 심오한 해답이기도 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옷으로 우리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입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옷은 그 무게가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무게를 자각하고 있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옷이 몸과 하나가 되어 분리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정작 인간이란, 외압에 의해 억눌려진 상태가 되어야만 껍질을 벗고 실체를 드러내는 존재인 것일까? 그러나 그래서 그 외압도 결국에는 인생의 필요악임을 깨닫고 또 다시 불분명한 미래로 겁 없이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


책을 덮고도 여전히 많은 생각이 내 마음과 생각에 충만하다. 인간으로서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칼빈이 그의 5대 강령에서 말한 인간의 전적 타락을 거짓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수용소라는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되게 된다면, 아니 수용소가 아닌 나의 일상적 삶에서도 자주 드러나는 나의 이기심과 위선의 모습에서도, 나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말문이 막히고 무릎이 꿇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래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를 더욱 감사함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귀한 경험이기도 했다. 인간의 실존적 자아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해 알고 싶어 액면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난 이 책을 서슴없이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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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대화 - 일상에서 쓰는 평화의 언어, 삶의 언어
마셜 로젠버그 지음, 캐서린 한 옮김 / 한국NVC출판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건 좀 아니란 건 알지만, 여기선 관행이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상관의 명령이기도 하고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냥 그랬어.”

“나도 이러긴 싫지만, 학교 교칙에 따라서 나는 너에게 정학 처분을 내릴 수밖에 없어.”

“성적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일이 너무 싫지만, 교육청 방침에 따라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위의 문장들의 공통점은 책임을 부정하고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마셜 B. 로젠버그는 그의 책 “비폭력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바꿔서 말해보라고 제안한다.


“나는 이것들이 불의하다는 것을 알지만, 내 직업을 유지하는 것이 더 큰 가치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어.”


그러나 우리들은 보통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책임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린 알아야 한다. 우리들이 은연중 저지르는 불의에 대한 무책임한 방관이나 암묵적 동조는 나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전범 재판을 기록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의 아이히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비폭력 대화” 중 제 2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나 역시 깊이 공감한다.


| 나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해왔다. 만약 인류의 파괴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 때문이 아니다. 그 잔혹함이 일으킨 분노, 그리고 그 분노가 가져올 보복 때문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의 온순함과 책임감의 결여, 그리고 모든 부당한 명령에 대한 비굴한 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끔찍한 일들, 또 앞으로 일어날 더욱 전율할 만한 사건의 원인은, 이 세상 여러 곳에서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데 있다. |


일상에서 만나는 의외의 사건 (아내와의 다툼, 김재수 교수와 허현 목사님의 포스팅)으로 내 손에 들어온 책, “비폭력 대화”. 기존에 알고 있던 폭력에 대한 정의가 바뀐다. 정말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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