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그리스도인 - C. S. 루이스를 통해 본 상상력, 이성, 신앙
김진혁 지음 / IVP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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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위한 다리.

 

김진혁 저, ‘순전한 그리스도인’을 읽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어 인간의 불완전성을 단박에 증명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나마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신비한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육체에 갇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인 신을 인지하고 알아가는 과정도 우리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상력은 이미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암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이성과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는 신비한 능력, 상상력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심인물인 루이스를 설명하기에 없어서는 안 될 키워드가 됩니다.

 

상상력 없는 이성, 혹은 상상력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이성은 독단의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성의 목적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들을 관찰, 표현, 비교, 분석하여 어떤 명제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가슴 깊은 곳의 공허함을 인지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채울 수는 없을 것이며, 저 너머를 이루고 있는 비명제적 지식에 대해서 꿈꾸거나 생각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소망이 사라진 삶을 잠시만 생각해 보더라도 그곳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수학으로 이루어져 있고 예측 가능하며 신마저도 수학적으로 사유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끔찍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의식 세계가 무의식 세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비하면 정말 티끌 같이 작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작디작은 이성의 왕국이 인간과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거나 주장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인간에게는 상상력이 주어졌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불완전성이 불평, 불만의 이유가 아니라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첫 인간이 그랬듯, 자기중심적인 교만과 독단에 빠진 채 모든 선과 악을 자신의 유익에 따라 판단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니까요. 상상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성과 상상력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신앙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깨달아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택한 방법은 수만 가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짐 월리스에 따르면, 회심은 회개와 다릅니다. 어디인가로부터 (from) 어디인가로 (to) 돌아서는 커다란 흐름을 회심이라고 정의할 때, 그는 회개는 ‘어디인가로부터’ 돌아서는 (turning from) 첫 과정일 뿐이고, ‘어디인가로’ 돌아서는 (turning to) 과정은 신앙이라고 정의합니다. 진정한 회심이란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것에서 돌아서는 회개를 거친 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회개 후 실제로 발을 내딛는 행위와 그 여정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회심을 했다는 그리스도인 중에 여전히 이전과 같은 삶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회심이 아닌 회개만을 경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회심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어떤 특이적인 사건이 아닌 새로운 방향성이 생긴 삶을 살아내는 운동성을 가진 긴 여정과도 같으니까요. 즉, 진정한 회심은 회개의 순간이 삶으로 녹아들어 신앙을 지속하고 있을 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김진혁은 루이스가 세 번의 회심을 경험했다고 적습니다. 제가 볼 때, ‘세 번의 회심’이라는 표현보다는 ‘세 단계의 회심’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전자는 마치 동일한 회심을 세 번 반복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후자로 표현할 때 비로소 저자가 말하는 바, 즉 상상력의 회심, 이성의 회심, 그리고 신앙의 회심, 이렇게 세 단계를 거친 회심을 통해 루이스가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해 없이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회심기가 축약된 그의 회고록 ‘예기치 못한 기쁨’을 보면,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웬 회심? 하면서 의아해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소년 시절 무신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배교를 행했던 것이죠. 이는 태어날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지게 되는 신앙이 그 사람의 평생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루이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침례교단이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요. 루이스 스스로도 자신이 무신론자가 되었던 계기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어떤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 아니라, 10대 초반 그의 배교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저자가 간파한 대로,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 기숙학교 내 비합리적인 분위기에서의 생활 등이 얽히고설켜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그의 배교를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을 객관적 대상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 혹은 취향이라고 여기게 되면서 그는 무신론으로 이끌려 갔다.” 아주 간결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단순히 세상의 많은 신에 대한 해석 중 하나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모든 것의 중심사상이 되는 것이니까요.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되는데 어찌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자 김진혁이 언급한 ‘세 단계의 회심’에서 중요한 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루이스가 머리가 크면서 신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는 무신론자가 되어버렸고, 그가 다시 역사에 길이 남을 기독교 변증가, 아동 문학 작가, 혹은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작가 등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진정한 회심의 과정이 있었을 테고, 그 과정이 세 단계로 이뤄졌다는 해석에서 저는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으로 선정된 ‘순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회심 과정의 윤곽을 잡아주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저자가 파악한 세 단계가 순서대로 밟아져야 진정한 회심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전도나 선교라는 명목으로 교회 주보를 돌리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행위, 혹은 사영리 같은 영접만을 목적으로 제작된 전도지를 돌리면서 달달 외운 대로 전도대상자 앞에서 떠드는 행위의 방향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회심자를 탄생시키는 데 얼마나 기여를 할지 의문이 들기도 했거든요. 혹시 상상력의 회심, 이성의 회심의 단계 없이 곧장 신앙의 회심만을 강조하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앞의 두 단계를 빼먹은 신앙의 회심만으로는 불신자들 영접시킨 횟수는 증가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회심자, 다시 말해 진정한 그리스도인 혹은 예수의 제자를 찾아내고 돕는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짐 월리스의 정의를 다시 한번 빌리자면, 회개에 그친 ‘무늬만 회심자’를 양산하는 전도가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는 상상력과 이성의 회심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상상력 따위는 이성이 작동하는 데에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상상력이란 저자가 표현한 대로 경험의 지평에 속하는 현실의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보이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전달하는 힘을 가지지요. 우리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찌 감히 인정하고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떠올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연한 질적 차이가 존재하는 한,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흔적을 더듬어 알아가는 과정이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진 사명이자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무수한 사건 중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의 상상력 없이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사건일 것입니다. 루이스는 성육신 사건을 두고 신화 같아 보이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 사건 때문에 역사적 이성과 신화적 상상력 사이에서 굳이 양자택일할 필요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성육신 사건은 신화가 역사가 되어버린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신화라는 단어에 굳이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화의 개념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겪었던 시대, 바르트에 의한 신정통주의의 등장으로 자유주의에 큰 폭탄이 떨어져 하나님의 내재성보다는 초월성을 다시 강조하던 시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등장과 그에게 영향을 받은 불트만에 의한 성경의 비신화화 작업이 행해지던 시대를 함께 살아내며 낭만주의를 옹호하고 알레고리를 사랑하며 비신학자로서 순전한 기독교를 변증하고 내러티브를 이용해 상상력의 회복을 통해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지향한 루이스가 가졌던 신화의 개념과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인트는 신화에 있지 않고 상상력에 있다는 것이죠. 

 

최근에 출간된 이정일의 저서에서 강조되듯 저 역시 문학이 우리의 신앙을 더 깊게 만들어준다고 믿습니다. 이 역시 상상력이라는 기반된 일이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상상력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아니 그 이전에 인간에게 허락된 보석 같은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이성에 천착한 인간에게, 혹은 이성을 신앙의 대척점에 놓고 신앙만을 강조하는 인간에게 상상력은 예기치 못한 멋진 다리가 되어 둘 사이의 아름다운 조화를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루이스의 삶과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 책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전보다 더욱 풍성해지길 소망합니다. 다시 한번 상상력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시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098756400169131

2. 고통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26994814011956

3. 헤아려 본 슬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38735802837857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71812539530180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59914580719975

6. 순전한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47418798636218

7. 시편 사색: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816749868369777

8. 순례자의 귀향: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4795460524929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85915451453208

 

#IVP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7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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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속물적인 돈 이야기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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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통속과 심오의 혼종, 돈의 위력.

 

석영중 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읽고.

 

2년 넘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오면서 나에게 각인이 될 만큼 강한 흔적을 남긴 그의 인상은 무엇보다 인간 본성의 심연을 파헤친 심오한 심리학자의 이미지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성과 속이 함께 하는 인간의 이율배반성은 그의 모든 작품 안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어쩌면 너무나 천박해서 감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인간의 바닥 심성까지 있는 그대로 표현된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 어느새 자신 안에도 동일하게 내재된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인지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톨스토이 역시 인간 본성을 깊이 들여다본 혜안을 가진 거장이었지만, 그가 탁월한 교훈을 던져주는 훌륭한 설교자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실적인 여러 등장인물들의 말, 사상, 삶의 민낯을 조명함으로써 인간 본성의 다채로운 심연을 누구보다도 적나라하게 드러낸 르포트타주 기자이자 그렇게 눈에 보이는 처절한 현상들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연결시킨 심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현실성이 진득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이고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중 몇 편을 직접 번역하기도 한 석영중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서 지금도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러시아 문학을 읽고 그들을 가르친다. 이 책에서도 저자의 오랜 기간에 걸친 깊은 연구와 풍부한 경험이 맛깔나게 잘 어우러져있다. 문어체보다는 구어체 위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읽다 보면 마치 직접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저자의 강의 몇 개를 이미 유튜브를 통해 들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저자의 목소리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유튜브 강의 도중 평소 내가 전혀 사용하지 않는 “좌우지간”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서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 단어가 자주 등장해서 현장감이 더욱 잘 느껴졌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저자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3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지만, 아주 재미있게 이 책을 금방 다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작년 말 한국에 잠시 방문했을 때 대전 시청 근처에 위치한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기쁜 마음으로 구매했었다. 보관함에 늘 저장되어 있던 책이었는데, 실물을 서점에서 영접했고, ‘달러’가 아닌 ‘원’으로 구매한 나의 첫 중고책이 되었다. 알라딘 엘에이 지점과 비교해서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매장 규모는 아직도 내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뛴다. 사정상 두 시간 정도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시간만 있었다면 아마 나는 하루 종일 점심까지 기꺼이 거르면서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국 거주자로서 가장 그리운 한국 생활 중 하나가 나에겐 바로 서점이다.

 

이 책은 ‘가난한 사람들’, ‘미성년’, ‘도박꾼 (노름꾼)’,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렇게 일곱 작품을 다룬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돈’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그의 작품 세계를 해부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행해진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만을 감상하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텍스트 이면에 존재했지만 내가 몰랐던 콘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어서 아주 유익했던 책으로 기억이 될 듯하다. 작품이 아닌 저자를 이해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의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문학을 전공한 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앞서 언급했지만, 내게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본성을 가장 깊고 예리하게 작품 속에 담아낸 작가이다. 너무 심오해서 감히 함부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아우라를 가진 작가인 것이다. 그러나 저자 석영중은 ‘돈’이라는 키워드로 대표적인 일곱 작품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조명하고 해석해낸다. 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그리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돈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고상한 이미지보다는 속물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속물적인 이미지와 내게 각인된 심오한 심리학자의 이미지가 동일인물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표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함은 이토록 통속적인 소재로부터 세기를 뛰어넘는 철학과 사상과 예술을 빚어냈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아니, 그건 돈이라는 소재 자체가 가장 통속적인 동시에 가장 철학적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8페이지에서 발췌)

 

뿐만 아니다. 저자는 ‘백치’를 다루는 6부에서도 해학이 묻어나는 통쾌한 문장을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정말 맞다 싶었다. 통속과 심오의 혼종! 이를 가능케 만든 돈! 탁월한 분석, 해석,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소설은 독특하다. 가장 통속적인 이야기들이 가장 심오한 주제와 어우러져 오늘날까지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다. 통속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특성 덕분에 그의 소설은 시공을 초월한다. 그러니 돈의 부족이야말로 이 놀라운 혼종의 예술품을 탄생시킨 장본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235페이지에서 발췌)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계형 작가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돈에 쫓기며 살았다. 단 한 번도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을 써본 적이 없다. 언제나 작품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선불로 받고 그 선불의 노예가 되어 작품을 써내야 했던 작가였다. 거기에다 두 번째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도박에 중독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단순히 돈과는 인연이 없었던 작가 혹은 불운의 사나이 정도로 조금은 측은한 심정을 가지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원고료와 인세로 받았던 돈의 액수는 요즈음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가 버는 돈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돈에 항상 쪼들렸던 이유는 전적인 그의 소비 습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책임져야 했던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간 비용, 무분별하게 지출되었던 자선 비용, 남들에게 베풀었던 과도한 선물 비용, 게다가 도박 비용까지… 알고 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수입은 충분했지만, 지출에 대한 철학이랄까 규칙이랄까 하는 것들이 체계적으로 잡혀있지 않아 늘 돈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두 번째 아내 안나를 만나고 나서 난잡하던 지출이 정리가 되었고 비로소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얼마 안 되어 생을 마감하고 만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는 거의 평생 돈에 쫓기며 살다 간 작가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마냥 비판, 비난만 하지는 않는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두둔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처해서 형편이 어려운 친지들을 경제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사람들을 절대 지나치지 않았다고 한다. 행여 주머니에 돈이 없을 땐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들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로 돈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은 연민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그들을 도왔던 천사였던 셈이다. 물론 자신의 경제 사정을 좀 잘 살핀 뒤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더 좋았을 법했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 덕분에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인간 대 인간으로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작품이 아닌 작가를 이해하는 시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작품에는 작가의 사상, 정서 등의 흔적이 담기지 않을 수 없지만, 결코 작가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래서 작품을 접하기 이전에 작가의 부정적인 측면을 먼저 알게 된다면, 그것이 선입견이 되어 작품 감상을 방해할 수도 있다. 오류인 줄 알면서도 한 번 착용한 선입견이라는 렌즈는 좀처럼 벗어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뒤늦게 읽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일곱 작품을 직접 다 읽기 전까지 일부러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책의 경우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기 전에 읽어도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일곱 작품을 읽지 않은 채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잘 공감할 수 없거나 깊게 이해하지 못한 채 저자 석영중의 해학과 위트가 묻어나는 현실감 있는 글쓰기를 즐길 기회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적극 추천하고 싶다.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분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17746821603406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17986684912752

10. 노름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7547675916374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94599463918140

#예담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7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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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커버 특별판, 양장)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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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적 문체의 명암.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주말 내내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작품이다. ‘어제’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인상 깊게 읽었던 작가였기 때문에, 언젠가 중고서점에서 작가의 이름만 보고 구입했던 책이었다. 약 600 페이지에 달하는데, 시간을 달리하며 독립적으로 출판된 세 편의 단편소설이 한데 묶여있는 형태다. 등장인물은 물론 작품 속 시공간도 서로 겹치거나 연결되기 때문에, 이 책을 펴낸 까치 출판사가 이렇게 세 편을 각각 1, 2, 3부로 구성하여 전체가 마치 한 편의 장편소설처럼 보이도록 기획했던 의도도, 개인적으로 약간 억지스러움을 느끼긴 했으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참고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 세 편의 단편소설은 따로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어 판매되기도 한다.

 

'어제’를 읽으면서 느꼈던 인상이 이 작품에서도 느껴졌다. 좀 더 확장되고 심화되어 있을 뿐이다. 책 뒤에 딸린 해설에서 작가는 이 작품에는 자신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소설화되어 많이 담겨있다고 쓴다. 그 자서전적인 이야기란 그녀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직접 겪어냈던 2차 세계대전, 헝가리 반체제 운동 등 동유럽 역사가 그대로 관통하는 거대 서사의 조각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분위기는 전쟁 가운데 벌어진 민간인들의 참혹한 일상생활, 전쟁이 서민들에게 남긴 여러 구체적인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둡고 우중충해서 염세적으로도 보이지만, 종종 해학이 적절히 뒤섞여 있어 소설 속 참혹한 삶도 나름대로 감정 소모를 덜하면서 관조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어제’를 읽으며 매력적이라 여겼던 작가의 독특하고도 드라이한 문체의 기원을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제삼자라는 인상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어느 정도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되지만, 작품을 되씹으며 감상문을 써야겠다는 강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작품은 내 안에서 깊은 공감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역시 작가의 문체 때문인 것 같다.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가 자주 사용하는 방식, 즉 작품 속에서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심리학자가 되어 등장인물의 내면을 기술하는 방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의 행동이나 말을 제삼자의 눈으로 기술할 뿐이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뜻밖의 섬뜩한 행동이나 말을 하게 될 땐, 작가가 아무런 부연설명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작품 속 사건의 전후관계만으로 내용의 흐름을 눈치채가며 이해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고스란히 떠맡아야 한다. 600페이지 분량의 글을 모두 그런 식으로 읽어나가다 보니, 3부에 도달해서는 나도 뭐가 뭔지 헷갈려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이 작품은 독자가 해석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유로움이 조금 지나쳐 결국 독자의 방황으로까지 자연스레 유도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1, 2, 3부는 내용이 연결되면서도 모순된다. 아마 다른 독자들도 3부에 와서는 나처럼 방황하거나, 중도에 책을 덮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만의 독특한 관조적 필체가 단편일 땐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장편의 경우 오히려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 물론 작가가 이 점을 당연히 알고도 일부러 그 시대의 모순된 상황과 혼란을 글의 형식과 글쓰기 필체로써 드러내고자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조금 아쉬운 감을 느낀다. 조금은 더 등장인물의 내면까지 들어와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랬다면, 이 작품은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더 읽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 작품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에게도 더 깊은 공감을 끌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아고타 크리스토프 읽기.

1. 어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052606641450764

2.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932687956775957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8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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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혹 - 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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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으로 더 깊은 공감과 풍성한 신앙을.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최후의 유혹’을 읽고.

 

예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가톨릭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 대한 본격적인 감상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집필 의도를 먼저 소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행여 편협하게 기울어진 자신의 렌즈로 이 책과 이 감상문을 읽어 보지도 않고 함부로 판단하게 될까 하는 염려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다.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까닭은 투쟁하는 인간에게 숭고한 귀감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나는 투쟁하는 인간에게 고통이나 유혹이나 죽음이란 정복이 가능하며 그 세 가지는 이미 정복이 되었으니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진실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고통에 시달렸고, 그때부터 고통은 신성하다고 여겨졌으며, 유혹은 그가 길을 잃게 하려고 마지막 한순간까지 애를 썼고, 유혹은 패배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 순간에 죽음은 영원히 정복되었다. 그가 걸어간 길에서는 모든 장애물이 하나의 이정표여서, 더 높은 승리를 위한 계기였다. 이제 우리 앞에는 본보기가 마련되었으니,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불을 밝히고, 우리에게 힘을 준다. 이 책은 전기가 아니라, 투쟁하는 모든 인간의 고백이다. 이 책을 펴냄으로 해서 나는 많은 투쟁을 했으며, 삶의 많은 아픔을 겪었던 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셈이다. 이 책을 읽게 될 모든 자유인은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은 사랑이 마음에 넘쳐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리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한 가지 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는 ‘최후의 유혹’을 쓰던 동안의 밤과 낮처럼 생생하게 그토록 무섭고도 참혹한 골고타에로의 길을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 본 적이 없었고, 그토록 강렬한 감정과 이해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인류의 위대한 희망과 고뇌를 고해하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나는 어찌나 감동했는지 눈에 눈물이 가득히 고이곤 했다. 나는 그토록 짙은 감미로움을, 그토록 깊은 고통을 불러일으키며 내 마음속으로 방울져 떨어지는 그리스도의 피를 일찍이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은 소설이다. 기본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허구라는 말이다. 다만, 소재가 ‘예수의 생애’ 일뿐이다. 물론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1954년 당시 기독교에 몸 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겐 긴장을 조성했음이 틀림없다.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맹비난을 받았으며, 가톨릭으로부터는 공식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의 존재, 신성, 그리스도 되심을 전혀 부인하지 않는다. 복음서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는 이 작품 속에서도 구약의 예언대로 갈릴리가 아닌 베들레헴에서 성령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으며,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고, 우리가 익히 아는 이름의 제자들과 함께 하셨으며,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비폭력과 사랑을 선포하셨으며, 비유를 들어 하나님나라를 설명하셨다. 또한, 자신은 깨끗하다며 손을 씻는 빌라도의 체제 하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며, 나중엔 결국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들은 이 책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대해 신성 모독이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오히려 비난의 화살은 저자가 아니라 정치와 무지의 두 날개를 장착하여 저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세력에게 돌리는 편이 적합해 보인다. 언제든 권위를 가진 다수가 힘을 합쳐 힘없는 소수의 입을 틀어막는 일의 배후에는 냄새나는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참고로,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이 책을 읽어낸 나의 예수를 향한 믿음은, 그들이 우려했던 바와 정반대로, 얕아지거나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이 작품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예수의 인성에 해당하는 예수의 고뇌를 더 깊고 풍성하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카잔차키스에게 그래서 감사한다. 덕분에 2021년 사순절을 즈음하여 예수의 생애를 찬찬히 되짚어볼 수 있었으며,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동시에 가진 예수의 이원론적인 본질이자 불가사의한 신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고, 예수가 인간으로서 겪었을 법한 진정한 고뇌가 무엇이었을지 새롭게 상상해봄으로써 그가 통과한 고난과 죽음의 의미도 재고해 볼 수 있었다. 사순절 책으로 나는 주저함 없이 이 책을 추천한다. 다만, 예수가 인성도 가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도 그동안 다분히 신성에만 치우쳐 예수를 이해해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 복음서와 비슷하게 예수의 생애를 다룬다. 복음서를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야기나 사건들이 불연속적일 뿐 아니라 네 권밖에 안 되는 복음서끼리도 100% 일치하지 않는다. 실제로 복음서마다 사건의 순서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고, 모든 사건이 각 복음서에 다 소개되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복음서가 목격자들의 증언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복음서를 문학작품 정도로만 취급하기도 한다. ‘역사적 예수’, 혹은 ‘예수 세미나’에 대한 얘기까지 갈 필요는 없지만,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텍스트이자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의 생애가 유일하게 적힌 복음서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중구난방인 가장 큰 이유는 원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납득이 될 만한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믿음을 빼고 본다면, 모두가 가설이고, 모두가 해석일 뿐이다. 그저 유명했던 신학자들의 업적일 뿐인 셈이다. 요컨대, 복음서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복음이자 답이 되지만, 그 외의 사람들까지 객관적으로 납득시킬 만한 논리적, 이성적 근거를 가지지는 못한다. 

 

내가 이렇게 복음서에 대한, 알면 좀 불편할지도 모르는 사실을 적는 이유는 복음서 자체도 시공간에 제한되어 그 시대, 문화, 사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의해 기록된 책이라는 사실, 예수가 살아계실 때 실시간으로 누군가가 적은 르포르타주가 아닌 후대에 쓰이고 편집된 책이라는 사실, 게다가 원본이 아닌 사본이라는 사실 (복사기나 사진기가 없던 시대에 사본이라 함은 누군가의 필사를 뜻하고, 여기서 누군가라 함은 명령에 의지하여 움직이는 기계가 아닌 자기 생각과 감정이 있고 의지와 상관없이 실수도 곧잘 하는 인간을 뜻함)을 강조하여 복음서가 역사적 기술이라든지 성령이 불러주는 것을 받아 쓴 책이 아님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다. 즉, 복음서를 읽을 때조차도 독자들은 얼마든지 복음서가 말하지 않는 빈 공간을 상상하면서 읽고 묵상할 수 있는 문이 열려있다는 얘기다.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지 복음서를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순전한’ (혹은 근본적인) 기독교를 이루는 굵직굵직한 사건과 이야기에 기반을 둔 교의나 교리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이를테면, 삼위일체, 성육신, 부활 등 인정하지 않으면 굳이 기독교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사항들), 개인의 풍부한 상상력은 복음서에 대한, 나아가 예수에 대한 보다 풍성하고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이 글에서 다룰 ‘최후의 유혹’ 역시 그런 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으로 이해하면 된다. 

 

복음서가 영화라면, 이 작품은 영화가 배제한 일상까지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카잔차키스는 이 책에서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빈 공간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 작업을 충실하게 진행한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복음서를, 그리고 예수를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책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예수의 신성보다는 인성이다. 저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 책은 신과의 결합을 위한 영혼과 육체의 투쟁에 대한 오름길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의 투쟁은 같은 육체를 가진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하게 만들고 신앙의 깊이까지 확장시키는 효과를 내어 예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이요,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요, 예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임을 좀 더 사실적으로 깨닫도록 도와준다. 결과적으로 우린 이 책을 통해 예수의 사상과 복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투쟁. 이것은 내게 비친 카잔차키스의 삶과 그 삶을 살아낸 그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그는 노년에 접어들어서야 방랑으로 이루어진 그의 모든 삶을 뒤돌아보고 종합하며 자유와 투쟁에 대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듯하다. 그에게 있어 자유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여가’와도 같은 단순히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는 기회나 시간의 증가를 뜻하지 않는다. 그의 자유는 무언가로부터의 해방이다. 여기서 무언가는 육체와 영혼 둘 다를 포함할 뿐 아니라 욕망이나 희망까지도 포함한다. 카잔차키스는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희망하는 마음 역시 어딘가에 매어있음을 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로부터 자유가 되는 것이라고. 어떤 것을 원하지 않아도 자족할 수 있는 상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상태, 즉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가 그가 말하는 자유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겠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런 자유가 육체화되어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조르바였다. 조르바는 베르그송과 니체와 붓다과 레닌을 넘어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를 부분적으로나마 눈 앞에서 보여준, 그가 평생 찾던 답에 근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자유는 곧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그리고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까지 이어지는 ‘지금, 여기’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자세에 담겨 있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적 신앙관’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논란이 될 만한 소재로 ‘예수의 생애’를 선택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그의 집필 의도에서도 보이듯, 역사상 그가 평생 고뇌했던 영혼과 육체의 투쟁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해방과 자유의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아니었다. 그는 신성을 가지지 않은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아낸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죽어 흙으로 돌아갔고 부활하지 않았다. 그는 인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 아닌 철저하게 개인적인 자유를 만끽하며 인생을 살아낸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달랐다. 조르바와는 달리 그리스도는 만인에 대한 보편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삶은 개인적 삶이 아닌 인류의 삶이었고, 그의 투쟁은 한 인간의 투쟁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의 투쟁을 대변했다. 

 

자세한 내용은 그의 마지막 저서 ‘영혼의 자서전’에 풍부하게 담겨있다. ‘영혼의 자서전’을 몇 달 전에 읽은 나로서는 이 책 ‘최후의 유혹’도 그 선상에서 읽힐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71세가 되던 해인 1954년 ‘최후의 유혹’은 가톨릭 금서로 지정되었고, 그다음 해에 그의 고향인 그리스에서 출판이 가능해졌는데, ‘영혼의 자서전’은 그때 막 써지고 있었다. 그리고 1957년, 향년 74세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후반전 중에서도 말미에 이 두 작품이 모두 쓰였던 것이다. 이는 카잔차키스 전 생애에 걸쳐 농축된 그의 철학과 신학에 대한 성숙하고 깊은 조예가 진득하게 반영된 작품이라는 뜻이다. 

 

카잔차키스의 인생은 오름길이었다. 투쟁이었다. 터키의 핍박을 받던 그리스의 시대적 정황에 그대로 노출된 채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평생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방랑의 삶을 살았지만, 크레타에 대한 그의 뿌리만은 잊지 않았다. 크레타는 그의 육체와 영혼의 뿌리였다. 그는 젊은 시절 이후 그의 가장 큰 고뇌와 모든 기쁨과 슬픔의 원천은 영혼과 육체의 무자비하고도 끊임없는 투쟁에서 연유했다고 썼다.  모든 인간은 영혼과 육체에 있어서 신적인 본질의 한 부분을 이룬다고도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비는 단순히 기독교만의 신비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유한한 육체에 갇힌 영혼이 인간을 표현한다면, 영혼과 육체 사이의 모순됨에서 발생하는 투쟁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던 예수도 이것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주력한 예수의 투쟁도 이러한 전제에 바탕을 둔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멜 깁슨이 감독을 맡았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기억할 것이다. 예수의 생애 중에서도 마지막 며칠만을 다룬 영화인데, 제목에서부터 강조되듯 이 영화는 특히 예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춘다. 그 고난이 어른이 봐도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려져 아이들은 혼자서 못 보는 등급으로 상영되기도 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펑펑 흘렸을 테고, 자신의 피 같이 붉은 죄를 떠올리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깊은 생각을 다시금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중간중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영화 얘기를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이 책 ‘최후의 유혹’이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는 이 책만이 가진 고유한 장점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서 눈을 찔끔 감고 눈물도 흘리며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의 수난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끔찍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왜 저렇게 극심한 고난을 받으셔야 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순히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유월절 어린양 이자 대속 제물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설명은 그 질문을 던진 사람 앞에서는 순간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고 그다지 설득력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잔인함과 끔찍함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느낄 수 있지만, 왜 그래야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선 이 영화가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과 역사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이 영화는 그저 컴퓨터 그래픽과 분장,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내는 것 이외엔 달리 전할 메시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죄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만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아무리 강렬하다 하더라도 시각, 청각적인 효과만으로는 예수가 받으셨던 고난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내게도 이 영화는 ‘강한 충격의 가벼움 혹은 허무함’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반면,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시간 순으로 보자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초점을 맞추는 부분 이전이다. 즉, 예수가 유다의 배반으로 잡히시고 고난 받으시고 골고다로 오르시기 이전, 그러니까 예수가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점점 인지해 가면서, 동시에 인간이면 누구나 경험할법한 유혹들에 노출되고 그 유혹들을 극복해내는 과정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이를테면,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마음, 땀 흘리며 성실히 일한 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며 평화롭게 하루 해가 지는 장관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기본적이고 소박한 바람들 말이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또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예수는 반드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다. 이러한 고유한 사명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망은 한낱 사탄의 유혹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쩌면 예수가 공생애 기간 동안 겪어야 했던 가장 큰 고난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부각했던 며칠 간의 수난이 아니라, ‘최후의 유혹’이 강조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들 (다시 말해, 유혹들) 앞에서 투쟁하셨던 수년 혹은 수십 년의 일상 안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인이라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인정한다 (극좌와 극우는 제외하기로 한다. 그들을 굳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 인간으로서 느꼈던 여러 욕망들 (혹은 유혹들) 앞에서 예수가 어떻게 대응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바가 없다. 그저 막연하게 우린 예수는 그런 유혹들 앞에서 당연히 초연하셨을 거라고 생각하고 만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성은 그저 육체를 입고 있다는 사실에만 국한되어 버리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모든 유혹은 유혹으로 작동조차 하지 못했을 거라고 넘겨짚고 마는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라면, 예수는 수난 중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어야 맞다).

 

그러나 예수가 인간, 특별히 남자의 몸을 입으셨다면, 정상적인 인간 남자가 이차성징을 거치는 사춘기 시절 혹은 피가 펄펄 끓어 넘칠 이십 대 시절에 이성에 대한 환상이나 유혹에 단 한 번도 사로잡히지 않으셨을까?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불안의 이유가 죽음이라고 할 때, 과연 예수는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무런 마음, 감정의 동요 없이 그 운명을 그대로 덤덤히 받아들이셨을까? 거부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게 아니라면 미루고 싶지 않으셨을까? 죽음이 두렵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맘에 드는 여자와 연애도 하고 싶고 결혼하여 가정도 갖고 싶어 하지 않으셨을까? 

 

우린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상상 자체를 불경하게 느낀 나머지 스스로 쉬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카잔차키스가 이 작품에서 우릴 대신해서 상상한 대로, 이러한 질문들을 용감하게 던져 보고 스스로 답을 해 본다면, 우린 인간으로서 인간 예수의 비장한 마음을 좀 더 가깝게 느끼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책을 통해 복음서 행간에 녹아있는 일상 속 예수의 투쟁이 존재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면, 예수를 더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예수 닮은 삶’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잔인한 장면들 이면에 숨어있는 예수의 마음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여기에 카잔차키스의 숨은 의도가 녹아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제자들의 캐릭터가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는 데에 있다. 가장 특이한 설정은 단연 유다와 도마의 캐릭터에서 찾을 수 있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일상적 모습이 그들의 직업 정도의 묘사 이외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복음서 전체의 흐름과 중심사상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린 그들의 모습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그린 유다의 이미지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서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를 판 인물 정도로 간단하게 그려지지 않고,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예수를 잘 알고 있는 나이 많은 열혈 당원으로 그려진다. 유다는 유다 한 사람만을 대변한다기보다 당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이나 구약의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기 원하는 열혈 당원을 포함한 민중들의 심리를 대변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음의 대사는 유다의 캐릭터를 단박에 알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말 따위는 상관하지 않아요. 그리고 난 베드로처럼 잔소리가 많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도끼를 들고 있는 한 나는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머물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도끼를 버리면, 나는 당신을 버릴 겁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나는 당신을 따르는 게 아니에요. 나는 도끼를 따릅니다.”

 

또한 유다의 배반은 복음서에서 그려진 것처럼 최후의 만찬 중 일어나 갑자기 어두운 곳을 향해 뛰쳐나가는 시적인 모습 대신, 예수와 충분히 대화를 거친 뒤 배반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다음의 대화에서 쉽게 눈치챌 수 있다. 

 

- 예수: “당신은 인내해요, 유다. 내 형제여.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고 당신이 나를 배반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모자라는 힘은 하느님께서 주셔요. 우리 두 사람은 세상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나를 도와줘요.”

- 유다: “만일 당신이 스승을 배반해야만 하는 입장이라면, 그를 배반하겠습니까?”

- 예수: “아뇨, 내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나를 가엾게 여겨 그보다 쉬운 일을 맡겨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하셨어요.”

 

아마 이 글이나 책을 읽는 누군가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유다의 입장을 고려해 보는 건 내게 의미가 있었다. 유다 역시 사람이었고, 예수의 제자였으며, 배반하기로 작정했을 때 어떤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았겠는가? 복음서에는 전혀 나와있지 않지만, 유다의 배반이 없었다면 예수의 죽음은 없었든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단순히 갑작스러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다가 나중에 정신 차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정도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는 것이다.

 

의심 많은 도마는 다음의 대사로 그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예수가 어떤 기적을 행하거나 무력을 동원하여 로마로부터 해방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위대함을 드러내 보이는 구세주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머지 제자들에게 외치는 소리다. 약삭빠르고 사리를 잘 분별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아마도 여러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저자가 이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왜 살기등등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나요? 자그마한 거래, 우린 그걸 했어요. 내가 하나 주면 당신도 하나 내놓고요. 나는 빗과 실타래와 손거울 따위 내가 파는 물건들을 주고 하늘나라와 바꿨어요. 여러분도 모두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누구는 고기잡이배를 내놓고, 누구는 양 떼를 내놓고, 누구는 마음의 평화를 내놓았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모두 마귀한테만 좋은 일을 한 셈이죠. 우린 파산했고, 재산을 날려 버렸습니다.”

 

상상력으로 제자들의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어 예수와 대화한 장면이나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결연히 영혼과 육체의 투쟁을 극복해나가고 있는 예수의 마음이 어땠을지 좀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스스로도 충분히 감당하기 어려운 투쟁을 하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오합지졸의 제자들과도 함께 하셔야 했다는 사실을 상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최후의 유혹’이라는 제목은 33장으로 (예수의 나이를 의도한 게 아닌가 싶다) 이뤄진 이 책의 마지막 네 장에서 예수의 꿈으로 나타난다. 천사를 가장한 사탄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코 앞에 둔 예수에게 꿈을 보여주는데, 그 꿈속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기 이전에 일상에서 오랜 기간 동안 겪고 극복해온 영혼과 육체의 투쟁의 반대편 결과를 살아간다. 즉, 투쟁에서 실패했고 유혹에 넘어가버린 비겁한 인간으로 전락한 예수의 모습이 꿈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꿈속에서 예수에게는 자신의 죄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인류의 죄를 짊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건 교만한 태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예수는 꿈에서, 야곱이 라헬과 레아를 모두 아내로 삼았던 것처럼 나자로의 동생 마리아와 마르다를 아내로 맞이하고 아이를 많이 낳아 수십 년을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한낱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원래 감당해야 했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아버지의 뜻대로 완수했음을 기뻐하고 감사한다. 

 

만약 꿈과 생시가 뒤바뀌었다면 이 책은 신성모독이라는 판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투쟁에 실패하고 유혹에 넘어간 모습은 꿈이었다. 그래서 ‘최후의 유혹’은 엄밀히 따지면 유혹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십자가에 이미 못이 박혀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 꾼 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예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유다가 원했고 열혈 당원들이 원했으며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했을 이스라엘의 독립을 무력과 기적을 동원하여 감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지 않았고 아버지의 뜻에 죽음으로 순종했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해 보자면, 예수는 마지막 숨이 꺼질 그 순간까지 투쟁을 감행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비록 꿈으로 나타났지만, ‘최후의 유혹’은 정말 최후의 유혹이었던 것이고, 이는 곧 카잔차키스가 예수의 신성을 결코 부인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강조했었다는 증거 중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된 상상력은 카잔차키스 말고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C. S. 루이스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나니아 연대기’만 봐도 예수를 사자에 비유하는데, 만약 카잔차키스가 신성모독을 했다면 루이스는 예수를 짐승 따위에 비유한 셈이므로 신성모독을 훨씬 넘어서는 중죄를 지은 셈이 된다. 즉, 이런 식의 논리와 판단은 본질을 보지 못한 껍데기 신앙을 붙잡는 것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우린 조금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물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이루는 공인된 교의, 교리들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상상력은 우리의 신앙을 훨씬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카잔차키스 읽기

1. 그리스인 조르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07692099275561

2. 영혼의 자서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24480797596676

3. 최후의 유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009839715727447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9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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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일요일 오후 햇살의 아련함처럼.

 

오가와 요코 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읽고 나면 벌써부터 여운을 남기기 시작하는 작품이 있다. 보슬비에 옷이 젖듯 가슴 한편에 조용히 의미 있는 파문을 일으켜 오래 기억될 작품이 보통 그렇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았을 때 이미 난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도 그중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이 작품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걸린 시간만큼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적한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가져다주는 그 특유한 아쉬움 같기도 했고, 어릴 적 아빠와 함께 간 공중목욕탕에서 집에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뜨거운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열어 들어온 차가운 공기를 감지하며 닭살이 돋으면서 느꼈던 기분과도 비슷했다. 두 시간을 넘도록 적당한 표현을 생각했지만, 내가 느낀 감상을 막상 문자로 표현하려니 당황스럽게도 이 두 가지 상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먹먹해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듯했고, ‘따뜻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성에 차진 않지만 한 단어를 골라 본다. 아련함. 그렇다. 내게 이 책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아련함을 남기는 작품이다. 작가가 만든 세상 속으로 시나브로 스며들어간 상태에서 헤어 나오기 싫어 한동안 그대로 남고 싶은 기분이 드는 작품인 것이다. 마치 이제 곧 사그라들 일요일 오후의 햇살처럼, 마치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가야 할 아이가 느끼는 따뜻한 탕의 온기처럼,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책 속에 머물렀다.

 

교통사고 때문에 머리를 다쳐 한창 젊었던 시절 이후의 장기 기억은 모두 사라져 버린 채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남자. 그에게 단기 기억이라곤 고작 80분이 전부다. 정확히 80분 전까지만 그는 기억할 수 있다. 하루도, 한 달도, 일 년도 그에겐 모두 의미가 없다. 그에게 시간은 모두 80분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게 새롭다. 동시에 그 때문에 그에겐 모든 게 낯설다. 매일 마주치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도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리 깊은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쌓아도 다음 날 아침이면 또다시 처음 보는 사람일 뿐이다.

 

그는 수학 박사다. 케임브리지까지 유학을 다녀올 정도였으니 한때 전도유망한 학자였던 것이다. 사고 후 그는 많은 걸 잃었다. 그러나 다행히 사고 이전에 그가 쌓았던 수학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잃지 않았다. 그의 하루 일과는 꽤 규칙적이다. 잠자고 밥 먹는 등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가사도우미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일을 제외하면 그는 하루 종일 수학 문제를 풀고 생각에 잠긴다. 아주 적은 활동을 하며 허름한 집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80분밖에 안 된다면, 나 역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많은 일을 결코 벌이지 못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사고가 그에게서 수학이라는 평생지기 친구까지 빼앗아 가지 않아서 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수학 문제를 풀고 생각하는 행위는 직업도 여가생활도 아니다. 숙명이다. 그리고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까지 들라치면 사뭇 비장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이 소설의 화자는 노 박사를 돕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녀의 회고록이다. 박사가 죽고 나서 쓴 그녀의 기억이다. 24시간을 살며 기억이 온전한 사람이 80분으로 이뤄진 세상에 사는 늙은 수학 박사를 보조하는 상황, 특히 그녀가 느낄 심적인 고뇌를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얼마나 당황스러운 순간이 많을까! 많은 시간을 함께 해도 친분을 쌓을 수 없을뿐더러, 상대방의 기억 속에 전혀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무척 당황스럽고 또 허무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다행히 화자는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배경을 가지고 남을 헤아리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박사 역시 다행스럽게도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기억을 하지 못할 뿐 그는 아이 같이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이고, 따뜻한 가슴과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수학이라는 언어가 있다. 수와 수학이 그들 사이를 서먹하지 않게 만들어줬고, 그것들 덕분에 화자는 박사를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박사가 유일하게 가진 수와 수학은 화자와 연결되는 훌륭한 언어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이런 장면들이 연출되는 일상을 따라가고 있노라면 어느새 입가엔 잔잔한 웃음이 돌면서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 소설을 많아야 열 권 남짓 읽었지만, 이 작품만큼 가슴이 아련해지는 작품은 없었다. 일본 소설 특유의 염세적인 뉘앙스 (이를테면, 자살, 죽음, 사별, 트라우마 등등)에 익숙해져 있는 나로선 이 작품 속에 그런 것들이 없어서 반가웠다. 비록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과 각자의 사연이 얽히고설켜서 하나의 따스한 세상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를 오래도록 붙잡아둘 만큼의 힘으로 말이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만큼 또 슬픈 게 있을까 생각했다. 누군가는 망각이 신이 준 선물이라는 말도 했지만, 이 소설 속 세상에서는 맞지 않는 얘기다. 소설이 끝나가면서 박사의 시간이 80분에서 점점 줄어들며 죽음으로 서서히 걸어가는 과정을 불연속적으로 지켜보면서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또한 박사는 자기가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기 때문에 여러 중요한 사실들을 80분이 지난 후에도 기억하기 위해 간단하게 사건, 사실들을 적은 여러 쪽지들을 옷에 덕지덕지 클립으로 고정해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그 장면에서도 애잔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박사의 삶의 방식을 받아주고 맞춰주는 화자의 배려와 사랑이 너무 고마웠다. 

 

제목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지만, 내게 남은 잔상에는 박사보다는 가사도우미가 더 크다. 물론 저자 오가와 요코의 필력이겠지만, 내겐 박사의 기막힌 사연보다는 가사도우미가 박사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상황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부분들이 더 크게 와 닿았다. 그녀가 행한 일상적 배려와 사랑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감동이 나에게 애잔함과 따스함을 잔상으로 남긴 실체가 아닐까 한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누군가가 살아나는 장면은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다. 그런 장면을 목도할 때마다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공감과 이해와 사랑은 사람을 살린다.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말이다. 문득 나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9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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