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유혹 - 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상력으로 더 깊은 공감과 풍성한 신앙을.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최후의 유혹’을 읽고.

 

예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가톨릭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 대한 본격적인 감상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집필 의도를 먼저 소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행여 편협하게 기울어진 자신의 렌즈로 이 책과 이 감상문을 읽어 보지도 않고 함부로 판단하게 될까 하는 염려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다.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까닭은 투쟁하는 인간에게 숭고한 귀감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나는 투쟁하는 인간에게 고통이나 유혹이나 죽음이란 정복이 가능하며 그 세 가지는 이미 정복이 되었으니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진실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고통에 시달렸고, 그때부터 고통은 신성하다고 여겨졌으며, 유혹은 그가 길을 잃게 하려고 마지막 한순간까지 애를 썼고, 유혹은 패배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 순간에 죽음은 영원히 정복되었다. 그가 걸어간 길에서는 모든 장애물이 하나의 이정표여서, 더 높은 승리를 위한 계기였다. 이제 우리 앞에는 본보기가 마련되었으니,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불을 밝히고, 우리에게 힘을 준다. 이 책은 전기가 아니라, 투쟁하는 모든 인간의 고백이다. 이 책을 펴냄으로 해서 나는 많은 투쟁을 했으며, 삶의 많은 아픔을 겪었던 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셈이다. 이 책을 읽게 될 모든 자유인은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은 사랑이 마음에 넘쳐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리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한 가지 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는 ‘최후의 유혹’을 쓰던 동안의 밤과 낮처럼 생생하게 그토록 무섭고도 참혹한 골고타에로의 길을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 본 적이 없었고, 그토록 강렬한 감정과 이해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인류의 위대한 희망과 고뇌를 고해하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나는 어찌나 감동했는지 눈에 눈물이 가득히 고이곤 했다. 나는 그토록 짙은 감미로움을, 그토록 깊은 고통을 불러일으키며 내 마음속으로 방울져 떨어지는 그리스도의 피를 일찍이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은 소설이다. 기본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허구라는 말이다. 다만, 소재가 ‘예수의 생애’ 일뿐이다. 물론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1954년 당시 기독교에 몸 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겐 긴장을 조성했음이 틀림없다.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맹비난을 받았으며, 가톨릭으로부터는 공식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의 존재, 신성, 그리스도 되심을 전혀 부인하지 않는다. 복음서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는 이 작품 속에서도 구약의 예언대로 갈릴리가 아닌 베들레헴에서 성령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으며,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고, 우리가 익히 아는 이름의 제자들과 함께 하셨으며,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비폭력과 사랑을 선포하셨으며, 비유를 들어 하나님나라를 설명하셨다. 또한, 자신은 깨끗하다며 손을 씻는 빌라도의 체제 하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며, 나중엔 결국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들은 이 책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대해 신성 모독이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오히려 비난의 화살은 저자가 아니라 정치와 무지의 두 날개를 장착하여 저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세력에게 돌리는 편이 적합해 보인다. 언제든 권위를 가진 다수가 힘을 합쳐 힘없는 소수의 입을 틀어막는 일의 배후에는 냄새나는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참고로,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이 책을 읽어낸 나의 예수를 향한 믿음은, 그들이 우려했던 바와 정반대로, 얕아지거나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이 작품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예수의 인성에 해당하는 예수의 고뇌를 더 깊고 풍성하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카잔차키스에게 그래서 감사한다. 덕분에 2021년 사순절을 즈음하여 예수의 생애를 찬찬히 되짚어볼 수 있었으며,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동시에 가진 예수의 이원론적인 본질이자 불가사의한 신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고, 예수가 인간으로서 겪었을 법한 진정한 고뇌가 무엇이었을지 새롭게 상상해봄으로써 그가 통과한 고난과 죽음의 의미도 재고해 볼 수 있었다. 사순절 책으로 나는 주저함 없이 이 책을 추천한다. 다만, 예수가 인성도 가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도 그동안 다분히 신성에만 치우쳐 예수를 이해해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 복음서와 비슷하게 예수의 생애를 다룬다. 복음서를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야기나 사건들이 불연속적일 뿐 아니라 네 권밖에 안 되는 복음서끼리도 100% 일치하지 않는다. 실제로 복음서마다 사건의 순서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고, 모든 사건이 각 복음서에 다 소개되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복음서가 목격자들의 증언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복음서를 문학작품 정도로만 취급하기도 한다. ‘역사적 예수’, 혹은 ‘예수 세미나’에 대한 얘기까지 갈 필요는 없지만,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텍스트이자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의 생애가 유일하게 적힌 복음서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중구난방인 가장 큰 이유는 원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납득이 될 만한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믿음을 빼고 본다면, 모두가 가설이고, 모두가 해석일 뿐이다. 그저 유명했던 신학자들의 업적일 뿐인 셈이다. 요컨대, 복음서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복음이자 답이 되지만, 그 외의 사람들까지 객관적으로 납득시킬 만한 논리적, 이성적 근거를 가지지는 못한다. 

 

내가 이렇게 복음서에 대한, 알면 좀 불편할지도 모르는 사실을 적는 이유는 복음서 자체도 시공간에 제한되어 그 시대, 문화, 사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의해 기록된 책이라는 사실, 예수가 살아계실 때 실시간으로 누군가가 적은 르포르타주가 아닌 후대에 쓰이고 편집된 책이라는 사실, 게다가 원본이 아닌 사본이라는 사실 (복사기나 사진기가 없던 시대에 사본이라 함은 누군가의 필사를 뜻하고, 여기서 누군가라 함은 명령에 의지하여 움직이는 기계가 아닌 자기 생각과 감정이 있고 의지와 상관없이 실수도 곧잘 하는 인간을 뜻함)을 강조하여 복음서가 역사적 기술이라든지 성령이 불러주는 것을 받아 쓴 책이 아님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다. 즉, 복음서를 읽을 때조차도 독자들은 얼마든지 복음서가 말하지 않는 빈 공간을 상상하면서 읽고 묵상할 수 있는 문이 열려있다는 얘기다.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지 복음서를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순전한’ (혹은 근본적인) 기독교를 이루는 굵직굵직한 사건과 이야기에 기반을 둔 교의나 교리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이를테면, 삼위일체, 성육신, 부활 등 인정하지 않으면 굳이 기독교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사항들), 개인의 풍부한 상상력은 복음서에 대한, 나아가 예수에 대한 보다 풍성하고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이 글에서 다룰 ‘최후의 유혹’ 역시 그런 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으로 이해하면 된다. 

 

복음서가 영화라면, 이 작품은 영화가 배제한 일상까지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카잔차키스는 이 책에서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빈 공간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 작업을 충실하게 진행한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복음서를, 그리고 예수를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책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예수의 신성보다는 인성이다. 저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 책은 신과의 결합을 위한 영혼과 육체의 투쟁에 대한 오름길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의 투쟁은 같은 육체를 가진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하게 만들고 신앙의 깊이까지 확장시키는 효과를 내어 예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이요,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요, 예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임을 좀 더 사실적으로 깨닫도록 도와준다. 결과적으로 우린 이 책을 통해 예수의 사상과 복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투쟁. 이것은 내게 비친 카잔차키스의 삶과 그 삶을 살아낸 그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그는 노년에 접어들어서야 방랑으로 이루어진 그의 모든 삶을 뒤돌아보고 종합하며 자유와 투쟁에 대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듯하다. 그에게 있어 자유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여가’와도 같은 단순히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는 기회나 시간의 증가를 뜻하지 않는다. 그의 자유는 무언가로부터의 해방이다. 여기서 무언가는 육체와 영혼 둘 다를 포함할 뿐 아니라 욕망이나 희망까지도 포함한다. 카잔차키스는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희망하는 마음 역시 어딘가에 매어있음을 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로부터 자유가 되는 것이라고. 어떤 것을 원하지 않아도 자족할 수 있는 상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상태, 즉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가 그가 말하는 자유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겠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런 자유가 육체화되어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조르바였다. 조르바는 베르그송과 니체와 붓다과 레닌을 넘어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를 부분적으로나마 눈 앞에서 보여준, 그가 평생 찾던 답에 근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자유는 곧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그리고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까지 이어지는 ‘지금, 여기’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자세에 담겨 있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적 신앙관’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논란이 될 만한 소재로 ‘예수의 생애’를 선택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그의 집필 의도에서도 보이듯, 역사상 그가 평생 고뇌했던 영혼과 육체의 투쟁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해방과 자유의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아니었다. 그는 신성을 가지지 않은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아낸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죽어 흙으로 돌아갔고 부활하지 않았다. 그는 인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 아닌 철저하게 개인적인 자유를 만끽하며 인생을 살아낸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달랐다. 조르바와는 달리 그리스도는 만인에 대한 보편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삶은 개인적 삶이 아닌 인류의 삶이었고, 그의 투쟁은 한 인간의 투쟁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의 투쟁을 대변했다. 

 

자세한 내용은 그의 마지막 저서 ‘영혼의 자서전’에 풍부하게 담겨있다. ‘영혼의 자서전’을 몇 달 전에 읽은 나로서는 이 책 ‘최후의 유혹’도 그 선상에서 읽힐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71세가 되던 해인 1954년 ‘최후의 유혹’은 가톨릭 금서로 지정되었고, 그다음 해에 그의 고향인 그리스에서 출판이 가능해졌는데, ‘영혼의 자서전’은 그때 막 써지고 있었다. 그리고 1957년, 향년 74세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후반전 중에서도 말미에 이 두 작품이 모두 쓰였던 것이다. 이는 카잔차키스 전 생애에 걸쳐 농축된 그의 철학과 신학에 대한 성숙하고 깊은 조예가 진득하게 반영된 작품이라는 뜻이다. 

 

카잔차키스의 인생은 오름길이었다. 투쟁이었다. 터키의 핍박을 받던 그리스의 시대적 정황에 그대로 노출된 채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평생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방랑의 삶을 살았지만, 크레타에 대한 그의 뿌리만은 잊지 않았다. 크레타는 그의 육체와 영혼의 뿌리였다. 그는 젊은 시절 이후 그의 가장 큰 고뇌와 모든 기쁨과 슬픔의 원천은 영혼과 육체의 무자비하고도 끊임없는 투쟁에서 연유했다고 썼다.  모든 인간은 영혼과 육체에 있어서 신적인 본질의 한 부분을 이룬다고도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비는 단순히 기독교만의 신비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유한한 육체에 갇힌 영혼이 인간을 표현한다면, 영혼과 육체 사이의 모순됨에서 발생하는 투쟁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던 예수도 이것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주력한 예수의 투쟁도 이러한 전제에 바탕을 둔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멜 깁슨이 감독을 맡았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기억할 것이다. 예수의 생애 중에서도 마지막 며칠만을 다룬 영화인데, 제목에서부터 강조되듯 이 영화는 특히 예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춘다. 그 고난이 어른이 봐도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려져 아이들은 혼자서 못 보는 등급으로 상영되기도 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펑펑 흘렸을 테고, 자신의 피 같이 붉은 죄를 떠올리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깊은 생각을 다시금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중간중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영화 얘기를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이 책 ‘최후의 유혹’이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는 이 책만이 가진 고유한 장점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서 눈을 찔끔 감고 눈물도 흘리며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의 수난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끔찍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왜 저렇게 극심한 고난을 받으셔야 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순히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유월절 어린양 이자 대속 제물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설명은 그 질문을 던진 사람 앞에서는 순간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고 그다지 설득력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잔인함과 끔찍함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느낄 수 있지만, 왜 그래야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선 이 영화가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과 역사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이 영화는 그저 컴퓨터 그래픽과 분장,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내는 것 이외엔 달리 전할 메시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죄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만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아무리 강렬하다 하더라도 시각, 청각적인 효과만으로는 예수가 받으셨던 고난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내게도 이 영화는 ‘강한 충격의 가벼움 혹은 허무함’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반면,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시간 순으로 보자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초점을 맞추는 부분 이전이다. 즉, 예수가 유다의 배반으로 잡히시고 고난 받으시고 골고다로 오르시기 이전, 그러니까 예수가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점점 인지해 가면서, 동시에 인간이면 누구나 경험할법한 유혹들에 노출되고 그 유혹들을 극복해내는 과정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이를테면,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마음, 땀 흘리며 성실히 일한 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며 평화롭게 하루 해가 지는 장관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기본적이고 소박한 바람들 말이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또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예수는 반드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다. 이러한 고유한 사명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망은 한낱 사탄의 유혹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쩌면 예수가 공생애 기간 동안 겪어야 했던 가장 큰 고난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부각했던 며칠 간의 수난이 아니라, ‘최후의 유혹’이 강조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들 (다시 말해, 유혹들) 앞에서 투쟁하셨던 수년 혹은 수십 년의 일상 안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인이라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인정한다 (극좌와 극우는 제외하기로 한다. 그들을 굳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 인간으로서 느꼈던 여러 욕망들 (혹은 유혹들) 앞에서 예수가 어떻게 대응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바가 없다. 그저 막연하게 우린 예수는 그런 유혹들 앞에서 당연히 초연하셨을 거라고 생각하고 만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성은 그저 육체를 입고 있다는 사실에만 국한되어 버리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모든 유혹은 유혹으로 작동조차 하지 못했을 거라고 넘겨짚고 마는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라면, 예수는 수난 중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어야 맞다).

 

그러나 예수가 인간, 특별히 남자의 몸을 입으셨다면, 정상적인 인간 남자가 이차성징을 거치는 사춘기 시절 혹은 피가 펄펄 끓어 넘칠 이십 대 시절에 이성에 대한 환상이나 유혹에 단 한 번도 사로잡히지 않으셨을까?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불안의 이유가 죽음이라고 할 때, 과연 예수는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무런 마음, 감정의 동요 없이 그 운명을 그대로 덤덤히 받아들이셨을까? 거부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게 아니라면 미루고 싶지 않으셨을까? 죽음이 두렵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맘에 드는 여자와 연애도 하고 싶고 결혼하여 가정도 갖고 싶어 하지 않으셨을까? 

 

우린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상상 자체를 불경하게 느낀 나머지 스스로 쉬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카잔차키스가 이 작품에서 우릴 대신해서 상상한 대로, 이러한 질문들을 용감하게 던져 보고 스스로 답을 해 본다면, 우린 인간으로서 인간 예수의 비장한 마음을 좀 더 가깝게 느끼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책을 통해 복음서 행간에 녹아있는 일상 속 예수의 투쟁이 존재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면, 예수를 더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예수 닮은 삶’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잔인한 장면들 이면에 숨어있는 예수의 마음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여기에 카잔차키스의 숨은 의도가 녹아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제자들의 캐릭터가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는 데에 있다. 가장 특이한 설정은 단연 유다와 도마의 캐릭터에서 찾을 수 있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일상적 모습이 그들의 직업 정도의 묘사 이외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복음서 전체의 흐름과 중심사상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린 그들의 모습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그린 유다의 이미지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서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를 판 인물 정도로 간단하게 그려지지 않고,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예수를 잘 알고 있는 나이 많은 열혈 당원으로 그려진다. 유다는 유다 한 사람만을 대변한다기보다 당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이나 구약의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기 원하는 열혈 당원을 포함한 민중들의 심리를 대변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음의 대사는 유다의 캐릭터를 단박에 알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말 따위는 상관하지 않아요. 그리고 난 베드로처럼 잔소리가 많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도끼를 들고 있는 한 나는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머물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도끼를 버리면, 나는 당신을 버릴 겁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나는 당신을 따르는 게 아니에요. 나는 도끼를 따릅니다.”

 

또한 유다의 배반은 복음서에서 그려진 것처럼 최후의 만찬 중 일어나 갑자기 어두운 곳을 향해 뛰쳐나가는 시적인 모습 대신, 예수와 충분히 대화를 거친 뒤 배반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다음의 대화에서 쉽게 눈치챌 수 있다. 

 

- 예수: “당신은 인내해요, 유다. 내 형제여.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고 당신이 나를 배반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모자라는 힘은 하느님께서 주셔요. 우리 두 사람은 세상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나를 도와줘요.”

- 유다: “만일 당신이 스승을 배반해야만 하는 입장이라면, 그를 배반하겠습니까?”

- 예수: “아뇨, 내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나를 가엾게 여겨 그보다 쉬운 일을 맡겨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하셨어요.”

 

아마 이 글이나 책을 읽는 누군가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유다의 입장을 고려해 보는 건 내게 의미가 있었다. 유다 역시 사람이었고, 예수의 제자였으며, 배반하기로 작정했을 때 어떤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았겠는가? 복음서에는 전혀 나와있지 않지만, 유다의 배반이 없었다면 예수의 죽음은 없었든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단순히 갑작스러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다가 나중에 정신 차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정도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는 것이다.

 

의심 많은 도마는 다음의 대사로 그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예수가 어떤 기적을 행하거나 무력을 동원하여 로마로부터 해방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위대함을 드러내 보이는 구세주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머지 제자들에게 외치는 소리다. 약삭빠르고 사리를 잘 분별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아마도 여러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저자가 이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왜 살기등등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나요? 자그마한 거래, 우린 그걸 했어요. 내가 하나 주면 당신도 하나 내놓고요. 나는 빗과 실타래와 손거울 따위 내가 파는 물건들을 주고 하늘나라와 바꿨어요. 여러분도 모두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누구는 고기잡이배를 내놓고, 누구는 양 떼를 내놓고, 누구는 마음의 평화를 내놓았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모두 마귀한테만 좋은 일을 한 셈이죠. 우린 파산했고, 재산을 날려 버렸습니다.”

 

상상력으로 제자들의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어 예수와 대화한 장면이나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결연히 영혼과 육체의 투쟁을 극복해나가고 있는 예수의 마음이 어땠을지 좀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스스로도 충분히 감당하기 어려운 투쟁을 하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오합지졸의 제자들과도 함께 하셔야 했다는 사실을 상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최후의 유혹’이라는 제목은 33장으로 (예수의 나이를 의도한 게 아닌가 싶다) 이뤄진 이 책의 마지막 네 장에서 예수의 꿈으로 나타난다. 천사를 가장한 사탄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코 앞에 둔 예수에게 꿈을 보여주는데, 그 꿈속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기 이전에 일상에서 오랜 기간 동안 겪고 극복해온 영혼과 육체의 투쟁의 반대편 결과를 살아간다. 즉, 투쟁에서 실패했고 유혹에 넘어가버린 비겁한 인간으로 전락한 예수의 모습이 꿈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꿈속에서 예수에게는 자신의 죄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인류의 죄를 짊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건 교만한 태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예수는 꿈에서, 야곱이 라헬과 레아를 모두 아내로 삼았던 것처럼 나자로의 동생 마리아와 마르다를 아내로 맞이하고 아이를 많이 낳아 수십 년을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한낱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원래 감당해야 했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아버지의 뜻대로 완수했음을 기뻐하고 감사한다. 

 

만약 꿈과 생시가 뒤바뀌었다면 이 책은 신성모독이라는 판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투쟁에 실패하고 유혹에 넘어간 모습은 꿈이었다. 그래서 ‘최후의 유혹’은 엄밀히 따지면 유혹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십자가에 이미 못이 박혀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 꾼 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예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유다가 원했고 열혈 당원들이 원했으며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했을 이스라엘의 독립을 무력과 기적을 동원하여 감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지 않았고 아버지의 뜻에 죽음으로 순종했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해 보자면, 예수는 마지막 숨이 꺼질 그 순간까지 투쟁을 감행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비록 꿈으로 나타났지만, ‘최후의 유혹’은 정말 최후의 유혹이었던 것이고, 이는 곧 카잔차키스가 예수의 신성을 결코 부인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강조했었다는 증거 중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된 상상력은 카잔차키스 말고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C. S. 루이스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나니아 연대기’만 봐도 예수를 사자에 비유하는데, 만약 카잔차키스가 신성모독을 했다면 루이스는 예수를 짐승 따위에 비유한 셈이므로 신성모독을 훨씬 넘어서는 중죄를 지은 셈이 된다. 즉, 이런 식의 논리와 판단은 본질을 보지 못한 껍데기 신앙을 붙잡는 것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우린 조금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물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이루는 공인된 교의, 교리들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상상력은 우리의 신앙을 훨씬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카잔차키스 읽기

1. 그리스인 조르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07692099275561

2. 영혼의 자서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24480797596676

3. 최후의 유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009839715727447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9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