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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 - 성경을 방어하는 대신 성경을 신뢰하며 읽기
피터 엔스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4년 8월
평점 :
있는 그대로의 성경 읽기: 참 자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더 크고 깊은 신뢰
피터 엔즈 저,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를 읽고
비록 십 년 전 출간된 책이지만, 피터 엔즈의 저서가 새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반가운 나머지 아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제목부터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라니! 멋지지 않은가? 원제를 찾아보니 ‘The Bible Tells Me So'이다. 직역하면 ‘성경은 내게 그렇게 말한다’ 정도가 될 텐데, 나 같은 아마추어도 이 문장을 그대로 번역서 제목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영어 관용구가 사용된 원제의 어감이 전혀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말 제목을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라고 바꾼 출판사의 의도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리고 이 간단한 제목 안에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의도한 그대로 성경을 읽고 받아들이라'는 것. 이 책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불건전한) 의도 혹은 (사적인) 기대를 품고 성경을 대하는 자세와 그것이 낳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발려내어 원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부제를 살펴보면 더 감을 잡을 수 있다. 한국어 부제는 '성경을 방어하는 대신 성경을 신뢰하며 읽기'이다. 이는 원서의 부제 'Why Defending Scripture Has Made Unable to Read It'에 약간 수정을 가한 것인데, 그 수정은 독자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영어 부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이 성경을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일견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수도 있는, 그러나 너무나도 적확한, 사실을 알려주는 데에 그치는 반면, 한국어 부제는 그 이유를 뛰어넘어 어떻게 성경을 제대로 읽을 것인지에 대한 앞으로의 방향까지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피터 엔즈의 '확신의 죄'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그의 성경 독법과 연구, 글쓰기, 그리고 그의 굴곡 진 드라마 같은 삶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모아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런 면에서 한국어 부제는 피터 엔즈의 사상과 삶의 핵심을 관통하는 단어로 보이는 '신뢰'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읽기를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을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한다는 말일까? 피터 엔즈 역시 '성경은 우리를 위해 쓰였으나 우리에게 쓰이지 않았다'라는, 성경을 읽을 때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쓰인 성경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세기 현재 우리들이 가진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르는 게 아니라 성경의 원청중, 즉 고대 근동 사람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시대, 문화, 지식의 차이를 무시한 성경 읽기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는 성경이 전해주는 초월적인 메시지를 놓치게 만드는 주범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해를 거친 후 해석이라는 단계를 잘 밟아야 하는 이유다. 성경이 가진 역사성과 초월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 본 사람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이다. 성경은 읽을수록 은혜가 되는 책이기도 하지만 불편한 책이기도 하다는 사실. 많은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성경의 고대성을 무시하고 현대적인 시선으로만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편함의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가나안 정복을 든다.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심지어 여자와 아이마저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하셨을까?
성경을 읽어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마주치는 난제 중 하나인 이 문제를 저자는 관점을 달리하여 풀어낸다. 모두가 난제라고 여기는 이유를 사람들이 성경을 방어하는 자세와 연결시킨다. 사랑의 하나님과 학살자 하나님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들이 모두 실패하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그 해법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고대 근동에서 벌어진 문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읽는 현대의 문제들을 질문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사건과 상황에 백 퍼센트 역사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오류라고 짚으면서 말이다. 과연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과 상황은 실제로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들일까? 성경을 읽으며 난제를 마주치는 근본적인 이유가 혹시 이러한 행위 모두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어야만 하는 암묵적인 강박 때문은 아니었을까? 저자는 간결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시지 않았다고. 사랑과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은 그 학살을 명령하시지 않았다고.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일견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성경의 많은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또 다른 질문에 우린 모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관해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썼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전혀 차원이 다른 질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에서 역사성을 빼는 용기(?)를 낸 이후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도 저자의 제안에 동참한다. 가나안 학살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이 거짓을 행하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게 성경에 그렇게 기록했을까? 그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저자는 용기 내어 경계 밖으로 나와 성경을 해석해 보려고 시도하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안심시킨다.
”고대 저자들이 고대의 관점에서 썼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신실하지 않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물리적 세계에 관해 썼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이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과학적 관점에서는 그들이 틀렸음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 점이 그들의 신앙이나 그것 배후의 하나님을 덜 참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나아가 저자는 성경의 고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탐구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성경의 몇몇 어두운 경로를 탐험하는 도전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어떻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의 특성에 맞지 않는 기대는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이어지며 그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남기는데, 하나는 실제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일치하도록 우리의 기대를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을 우리의 틀 안으로 욱여넣을 모종의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언급하면서 저자는 기꺼이 첫 번째 선택지를 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주저함 없이 저자와 함께 한다. 두 번째 선택지가 낳는 폐해를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역사책으로 읽고, 과학책으로 읽고, 또 행동지침서로 읽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숱한 반지성적인 모습들로부터 누누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을 읽지도 않겠지만, 읽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택하지 않고 중립 아닌 중립을 지킨다며 먼 산 보듯 구경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가장 지혜로운 자세라는 암묵적인 믿음 하에. 그러나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게 아니라 비겁한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자세는 무슨 일이 생기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두길 원하는 약삭빠른 자의 비겁한 행동이 아니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용기 내어 저자와 함께 끝까지 가 보자.
저자는 구약은 물론 신약까지 아우르며 성경의 저자들이 역사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요한계시록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먼 과거의 일들을 다룬다. 저자는 여기서 강하게 말한다. 성경 저자는 그들의 현재 상황이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과거를 형성했다고. 즉 어느 정도 과거를 창조했다고. 그렇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왕정과 유배기라는 성경이 기록될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그리고 그 후에 기록된 역대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기원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앞 장들 (아담 이야기, 노아 이야기 등)과 출애굽의 서사마저도 모두 이스라엘 왕정의 음울한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고 말이다. 요컨대 성경은 시간 순으로 쓰이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의 현재를 반성하거나 설명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저자들이 자신들의 과거에 적당한 수정을 가하여 쓰인 책이라는 말이다. 어떤가? 불경하다고 느껴지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를 간결하게 정리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태곳적 이스라엘의 이야기들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 과거는 현재에 대해 말하기 위해 형성된다. 태곳적 이스라엘의 이야기 역시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형성된다."
그리고 저자가 충분히 받았을 여러 공격의 흔적이 녹아 있는 말까지 남긴다 (저자는 일련의 일들로 인해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는 성경을 끝까지 역사책으로 읽으려는 완고한 고집 가운데 빠진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겨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좀 더 보수적인 기독교 진영에서 역사책으로서의 성경을 열정적으로 방어하는 것은 의도는 좋지만 참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복종시키려는 처사다.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와 비슷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우상숭배라고 부른다."
아,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듯 시원하게 말해주는 피터 엔즈의 글쓰기가 나는 정말 매력적이라 느낀다.
저자는 또 다른 여러 예를 들며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성경을 읽다가 문제에 부닥치게 되면, 그건 성경이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의도하지 않는 기대를 품고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문제일 뿐이라고. 그래서 강력하게 제안한다. 성경을 의도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만들고 나서 그것을 잘못된 기대에 부합하게 만드느라 거친 부분들을 부드럽게 만들기를 중단하자고. 어쩌면 성경은 우리에 의해서 보호될 필요가 없는 책일지 모른다. 한 걸음 나아가 그는 "성경을 우리의 끊임없는 기대들에 정렬시키고 그것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경건한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사실은 통제와 확실성의 상실에 대한 숨겨진 두려움이자 내적 동요의 거울이며, 우리가 실제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경고 신호"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런 성경은 신앙의 확실한 토대가 아니라 참된 신앙의 장애물이다. 우리의 기대에 부합하는 성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영적 여정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 여정을 불구로 만든다. 있는 그대로의 성경은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초대장이다."라고 일갈한다.
또한 기막힌 표현을 동원하는데, 다음과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전하고 얌전한 성경은 이 믿음의 여정을 회피하고 경건의 외양을 제공하는 안전한 길을 제공하며 그러는 과정에서 성경을 경시한다. 우리는 성경을 제시할 만하게 만들기 위해 엉킨 것들을 빗질하기보다는 성경을 있는 모습 그대로 놔두고 그것으로부터 배울 때 성경을 가장 존중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우는 우리 자신의 여정, 곧 평탄하지 않고 때로는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경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밑줄 그을 수밖에 없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 책은 성경에 관해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지기 위한 어느 정도의 공간을 발견하기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관한 책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는 것은 고대의 순례자들과 나란히 걸으면서 그들의 여정의 충돌과 상처, 간극과 틈새, 골짜기와 평원과 씨름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반사되는 것을 보라는 성경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초대를 받아들이기에 관한 책이다."
3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었다. 신학자가 이렇게 글을 잘 써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재미까지 느끼면서 읽었다. 피터 엔즈의 힘일 것이다. 다시금 성경이 어떤 책인지 리마인드해 본다. 성경은 역사책도, 과학책도, 그리스도인의 지침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분의 백성이 수백 년에 걸쳐 변화하는 환경과 상황에서 어떻게 그분에게 연결되었는지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이런 성경은 있는 그대로가 여전히 효과가 있다는 점. 성경을 설명하려거나 방어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 그러나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는 계속 성경을 읽고 성경과 씨름해야 한다는 점.
어떤가? 불편한가? 흔들리고 있는가? 피터 엔즈는 흔들리는 당신을 위로할 것이다. 흔들리고 있는 신앙은 성숙하고 있는 신앙이라고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감이다. 흔들림 이후에는 참 자유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더 크고 깊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나도 그 증인 중 하나다.
* 피터 엔즈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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