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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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소설 쓰기, 그리고 작가와 소설가


김연수 저, '소설가의 일'을 읽고


2년 전에 읽었던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가 자연스레 소환되었다. 글쓰기 대가들은, 특히 소설을 써본 작가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까?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전혀 지루하지 않게, 그것도 과하지 않은 유머를 고수하면서까지,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이 어떠한 것인지 핵심적인 부분들을 쉽게 풀어주는 두 작가는 닮아도 너무 닮아 보였다. 안정효의 소설을 읽어본 적 없이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읽었던 것처럼, 김연수의 소설을 한 권도 읽어본 적 없이 '소설가의 일'을 읽었다. 글쓰기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분들, 읽고 쓰기가 일상이 되어 읽고 쓰지 않으면 허기를 느끼는 사람들 (나는 이들을 감히 '작가'라고 부른다), 특히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에겐 그야말로 명강의가 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주 편안하고 쉬운 문체로 쓰여 있어서 지난 두 주간 거의 매일 실내자전거를 타면서 조금씩 가볍게 읽다가 오늘 이렇게 다 읽고 소감을 남긴다. 


김연수 역시 안정효 (혹은 신형철)처럼 단어 사용의 중요성에 대해 짚는다.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한 안정효와 신형철은 '정확한 글쓰기'를 강조했다. 어떤 문장을 이루는 단어는 이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가정이 바로 정확한 글쓰기의 기본 전제다. 그만큼 정확한 단어의 사용은 글쓰기에 있어서 치명적이라는 말이다. 정확한 단어 사용은 정확한 문장을 만들어 내고, 정확한 문장들은 정확한 글, 달리 표현하자면 좋은 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김연수는 '정확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진 않지만,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단어, 좀 더 감각적인 단어 사용이 필수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소설가를 화가와 비교하면서, 소설가에게 단어란 화가에게는 색채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잠시 책을 덮었다. 뻔하고 진부한 표현을 여전히 나도 모르게 사용하는 내가 보였다. 창피했다.


소설을 쓰는 실제 삶을 설명하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 김연수 작가는 하루에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런 그 세 시간 동안 최대한 느리게, 거의 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느리게 글을 쓰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는 글을 얼마큼 많이 썼느냐가 아니라 소설을 생각하며 세 시간을 보냈느냐 아니냐로 글쓰기를 판단한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식으로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느리게 쓴다는 것은 문장을 공들여 쓰고 플롯을 좀 더 흥미진진하게 구성한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다. 내가 도스토옙스키나 헤세를 통해 느낀 소설의 본질을 그대로 관통하는 문장이라 나는 이 문장을 박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소설이란 인간이 겪는 고통의 의미와 구원의 본질에 대해서 오랫동안 숙고하는 서사예술이라는 인식이 숨어 있다."


이 이상으로 이 책을 요약하거나 평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편의 글을 쓰기도 했으니, 글쓰기에 대한 나의 생각이 궁금한 분들은 찾아보시면 어렵지 않게 읽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은 내가 밑줄 긋고 작가 노트에 옮긴 문장을 아래에 소개하면서 마칠까 한다. 글쓰기에 진심인 사람들, 그중에서도 글쓰기의 여정 중 정체기를 맞이하고 있거나 그랬던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흔한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너무나 특별한 일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간이 감사의 시간으로 느껴진다면, 그래서 그 일들을 문장으로 적기 시작한다면 그게 바로 소설의 미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문장이 된다."


"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흔치 않은 사람이 되자.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 말은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 소설 속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추잡한 문장은 주인공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인생을 뻔한 것으로 묘사할 때 나온다.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진다."


자, 이제 김연수의 소설을 읽어볼 차례다. 책장에 몇 달째 꽂혀 있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나를 노려 본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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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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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해서 반가웠고, 여전해서 아쉬웠던


정유정 저, ‘영원한 천국’을 읽고


3년 전 그때 그 느낌이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 공포가 엄습해 왔고, 내 가슴은 숨 가쁘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미친놈처럼 연신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 몰입해서 책을 읽은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아, 역시 정유정이었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그리고 3년 전 출간 즉시 읽었던 ’완전한 행복‘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만나는 정유정은 여전했다. 그녀 특유의 휘몰아치는 서사는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을 정도의 긴장 가운데 이번에도 나를 급박하게 내몰았다. 523 페이지도 단편으로 느껴질 만큼.


'7년의 밤'과 '완전한 행복'을 나는 1, 2순위로 매긴다. 그리고 이 순위는 이번 작품을 읽고 나서도 변동이 없다. 정유정은 여전히 정유정이었지만, 또 여전히 정유정이기도 했다. 기대를 많이 했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대로 정유정 특유의 장점이 고스란히 살아 있어 기대의 절반은 채워졌지만, 작품성이랄까 발전성이랄까 깊이랄까 하는, 딱히 특정한 한 단어로 잡아내기 힘든 그 무엇이 이번에도 갈증으로 남았다. 정유정이 보여줄 수 있는 정점은 이미 보여준 게 아닌가 싶었다. 내 기대의 절반은 그렇게 채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정유정의 차기작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 갈증은 그녀만이 해소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유정 작가를 한강 작가와 비교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작가를 한 단어 안에 욱여넣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각각 서사와 묘사를 대표하는 작가로 해석했었다. 정유정의 소설은 빠르고, 한강의 소설은 느리다. 정유정의 소설은 동적이어서 어떤 커다란 사건과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다. 반면 한강의 소설은 상대적으로 정적이어서 어떤 사건이나 상황의 전개보다는 그 사건이나 상황이 그림처럼 그려져 어떤 이미지로 남는다. 자연스레 정유정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건과 상황의 전개에 발을 맞춰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이미 급박한 전개에 흥분한 독자들은 그들의 내면에 집중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러나 한강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사건이나 상황보다 언제나 한 걸음 앞서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들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다. 


문체도 다를 수밖에 없다. 정유정의 문체는 무거울 수 없다. 쓰나미나 토네이도를 떠올릴 만큼의, 정유정 특유의 급박한 서사에 모든 게 소비되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문장은 단문 위주로 될 수밖에 없고, 사용되는 단어는 통속적인 문화에 녹아든 단어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라도 정유정의 이러한 매력에 흠뻑 젖게 되는 것이다. 한편, 한강의 문체는 무겁다. 사건이나 상황보다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다분히 관념적이다. 관념적이다 보니 사상이나 철학 개념이 녹아 있어 정유정의 작품을 읽고 혼이 빠진 독자들은 한강의 작품을 읽을 때면 난해하다거나 지루하다는 평을 하기 쉽다. 그러나 개별적인 작품에서 보편적인 인간을 성찰하고 통찰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강 작가의 소설은 인간의 본성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주고,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어떤 특별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준다. 요컨대 한강의 등장인물은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지만, 정유정의 등장인물은 상대적으로 개별적이고 독특한 인간 유형을 보여준다. 그 결과 한강의 작품을 읽고 나면 잔상이 오래 남아 자꾸만 생각나게 되는 효과를 내는 반면, 정유정의 작품을 읽고 나면 잔상이 오래가지 않는다. 물론 정유정의 작품을 읽고 한동안 여운이 남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불안과 공포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작품이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 준다면, 정유정 작품은 공포를 조장한다. 한강은 보편적 인간, 즉 나도 혹시?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인간의 존재론적인 불안을 포함하여 숙명적인 본성에 천착하는 반면, 정유정은 특정 인물을 지정하여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공포를 이용하는 데에서 가히 천재적이다. 일례로 나는 '영원한 천국'을 읽고 여전히 칼잡이가 무섭다. 그러나 이 공포는 금세 사라질 것이다. 칼잡이는 보편적인 인간을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흥미진진한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는 도중엔 너무 흥분도 되고 몰입도 하게 되지만, 끝나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는 경험을 다들 한 번쯤은 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비슷하다. '영원한 천국'을 몰입해서 읽었건만, 내 머릿속에서는 벌써부터 이 작품이 가진 세계관이나 인물들의 캐릭터가 빠른 속도로 잊히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의 이미지는 수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이건 나의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에겐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인간 본성의 심연을 충분히 건드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악한 인간, 욕망에 허우적대며 굴복당하는 인간의 여러 유형을 다각도에서 보여줬다는 점에선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나는 그녀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나를 성찰하고 인간을 돌아보게 하는 그녀의 통찰이 묻어나는 소설을 쓰게 되길 이 작품을 읽고 더 기대하게 된다. 


구차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변명은 가능하다고 본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잘 와닿지 않는 가상세계가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작품에 흐르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작동하는데, 정유정 작가가 스스로도 작품 뒤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에서도 고백하듯 그녀는 이런 첨단과학이랄까 공상과학이랄까 하는 것에는 전문가가 아니다.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전문가로서의 공부와 작가의 상상력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착안점은 공감이 간다. 시대의 변화와 과학의 발달, 그리고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 영원을 향한 소망 등이 잘 버무려져 탄생한 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정유정 작가가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될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정유정의 고유한 매력은 대중성과 강렬한 서사 아닌가. 먼 훗날 가능할 수도 있는 가상세계 (이곳에선 인간의 육체를 제외한 모든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감각이 정보화되어 업로드되는 가상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죽으면 다른 삶을 선택하여 살 수 있다. 인간이 아닌 벌레로도 살 수 있다. 기억에 의존하여 세상이 구성되며 그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삶으로, 그야말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제목 '영원한 천국'은 바로 이러한 공간을 희화화한 것이다)를, 과학자가 직업인 나도 잘 이해하기 힘들뿐더러 손에도 잡히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그런 세계를 소재로 삼아 대중성과 강렬한 서사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정유정 작가는 도스토옙스키처럼 지극히 통속적인 주제, 이를테면 돈, 치정, 살인을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시공간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소설을 써 내려가는 게 그녀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지 않을까 한다. 뻔한 상황, 뻔한 사건 속에서도 뻔하지 않은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까발리는 그녀의 작품을 고대한다. 


* 정유정 읽기

1. 7년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232

2. 28: https://rtmodel.tistory.com/1243

3. 종의 기원: https://rtmodel.tistory.com/1314

4. 완전한 행복: https://rtmodel.tistory.com/1342

5. 영원한 천국: https://rtmodel.tistory.com/1853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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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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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혜자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치‘를 다시 읽고

재독의 맛은 초독 때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으며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뒤늦게 음미하는 데에 있다. 재방문은 첫 방문의 기억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그 기억을 벗 삼아 처음보다 더 깊은 단맛을 느끼게 해 주고, 좀 더 느긋하게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어울림을 맛보게 해 준다. 적어도 줄거리를 따라가는 급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일까.

정말이지 기적 같은 독서모임 덕분에 나는 일생에 한 번도 읽기 힘든 도스토옙스키 주요 작품들을 두 번이나 읽어 나가는 복을 누리고 있다. 독서모임 일주년에 맞춰 읽은 작품 (이른바 '재독 프로젝트'의 아홉 번째 작품)은 ‘백치’였다. 5년 만에 다시 읽었기 때문일까. 앞의 여덟 작품보다 유난히 이 작품에서 나는 재독의 묘미를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내 시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다르게 읽힌다는 건 시차를 두고 일어난 내 안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때문일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곧 나의 내면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초독 감상문에서 나는 작품 속 주인공이자 백치로 등장하는 미쉬낀 공작을 전적으로 변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누가 백치인가?'라고 물으면서 나는 미쉬낀 공작이 아닌, 오히려 그를 백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며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백치일지 모른다고 반박했었다. 이번엔 공작에 대한 나의 스탠스가 조금 달라졌다. 누가 백치인지 묻는 것보다 누가 더 지혜로운지 묻게 된 것이다. 백치로 등장하는 미쉬낀 공작으로부터 나는 초독 때 착안했던 성스러운 유로지비의 모습만이 아니라, 이상적일 정도로 고결하고 선하고 정직하지만, 인간의 모순된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이율배반성을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공포를 느끼며 꼼짝없이 얼어붙고야 마는 공작의 나약함을 주의 깊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선 미쉬낀에 대한 나의 시선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풀어볼까 하는데, 그러기 위해 도스토옙스키의 중기작 중 하나인 '상처받은 사람들'에 등장하는 한 인물, 알료샤를 잠시 소환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두 주인공은 나따샤와 알료샤다. 재독 감상문에서 나는 이미 이 둘을 비교한 적이 있다. 알료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 혹은 순수함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았고, 나따샤는 아이와 반대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어른의 성숙함 혹은 어른스러움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았다. 이 두 주인공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데, 아니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를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었다. 아이의 모습을 상실한 어른은 아이 같은 어른으로부터 순수함에 대한 동경은 할 수 있을지언정 동등한 선상에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으며, 몸은 어른이지만 내면은 여전히 미성숙한 어른은 성숙한 어른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알료샤는 후자에 속했다. 

한편 나는 고결함의 측면에서 알료샤를 또 다른 인물 넬리와 비교하기도 했었다. 알료샤가 인간 수준에서의 고결함이라면, 넬리는 신적인 수준으로 승화된 고결함, 즉 성스러움과 맞닿아 있다고 해석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추구했던 아름다움 (미)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성스러움을 가장 연약한 존재인 넬리에게 심어놓았다고 본 것이었다. 이어서 나는 알료샤의 고결함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변화시키는 힘은 없다고 보았다. 그를 사랑하기까지 했던 나따샤에게까지 알료샤는 결국 커다란 상처만을 안겨주었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료샤는 나따샤를 품을 수 없었다. 그의 고결함은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가지는 동시에 자기만 아는 아이의 이기적인 본성까지도 그대로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순수함을 가진 어른, 그래서 타자를 헤아리지도 품지도 못하는 어른아이가 바로 알료샤였던 것이다. 

'백치'를 처음 읽을 땐 내가 도스토옙스키 작품에서 유로지비의 원형으로 보는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의 예고르, 그리고 '죄와 벌'의 소냐나 리자베따, 혹은 앞서 언급한 대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넬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미쉬낀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동일선 상에 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미쉬낀으로부터 넬리가 아닌 알료샤의 모습도 보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초독 때와 달리 재독 땐 ‘상처받은 사람들’을 이미 두 번이나 읽은 후였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고결함 측면에서 미쉬낀을 알료샤와 넬리에 비교한다면, 미쉬낀은 알료샤와 넬리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지 않나 싶다. 미쉬낀으로부터는 넬리에게서 느껴지는 성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으며, 대신 알료샤의 천진난만함이 오히려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이다. 성숙한 어른이라 하더라도 가까이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인물, 실제론 백치가 아니라 현명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왠지 거리를 두고 지내고 싶은 사람, 이것이 바로 거품을 뺀 현실 속 미쉬낀의 실체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이런 인물을 평가할 때 지혜롭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쓸 수 없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미쉬낀은 백치도 아니지만 지혜자도 아니라는 게 내 지론이다.

미쉬낀 공작의 고결함이 한 가지 색이 아니라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사실을 착안하고 나니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 속 여러 부분들이 명쾌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 작품의 결말 부분이 납득이 되었다. 미쉬낀은 나스따시야를 살해한 로고진과 함께 시체가 된 나스따시야 옆에서 하룻밤을 잔 뒤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 섬뜩하지 않은가?), 로고진은 살해범으로 시베리아 유형을 가게 되고, 미쉬낀은 이전보다 더 심한 백치가 되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해진 걸로 보아 기억 상실이나 치매 증상까지 겹친 듯하다) 다시 스위스 병원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변주로 상징되는 미쉬낀 공작은 결국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도 얻지도 못한 채 모든 걸 잃고 자신은 더 마이너스가 되는 결과를 보여주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미쉬낀은 로고진에게 나스따시야를 살해한 흉기가 무엇인지 묻는, 일견 엉뚱해 보이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사람들로부터 선한 모습을 찾아낼 줄 알며, 자주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사람의 내면까지도 꿰뚫어 보아 현명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았던 미쉬낀 공작은 살인사건 현장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은 채 살인자 로고진에게 연민까지 느끼며, 정상적인 살인사건의 목격자라면 으레 행해야 했던 신고나 자수 권유 등을 무시하고 살인자의 제안을 그대로 따르는, 다분히 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미쉬낀 공작이 모든 것을 이미 다 파악한 뒤 행한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엔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엔 그저 어쩔 줄 몰라 당황한 아이,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완전히 넋이 나갈 정도의 공포로 인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멘탈이 붕괴된 환자가 서 있을 뿐이었다. 

비슷한 식이다. 결말 부분 말고도 여러 장면에서 미쉬낀 공작은 일견 의아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자주 선보이는데, 그것들을 모두 그가 너무 순수해서, 혹은 너무 고결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내 모습으로부터 나는 이번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를 전적으로 두둔하고 변호하려는 내 모습이 순수하지도 고결하지도 않다는 점과 더불어 그의 모습을 자꾸만 완전성에 비추어 후한 점수를 주려는 내 모습에서 나는 불편함과 부자연스러움과 강박을 느꼈던 것이다. 미쉬낀 공작은 그리스도를 닮았지만, 그 모습은 모든 것이 선하고 좋은 면만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라는 조건이 붙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가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모두 인간에게 있는 선한 모습만으로 상황이 설명 가능할 때에 유효했다는 생각이다. 그에겐 인간의 모순된 본성, 이율배반성을 깊이 이해하고 품고 다루는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는 어두움의 존재 (이는 작품 속에서 로고진, 혹은 어디선가 불안할 때 느껴지는 로고진의 시선으로도 상징된다)는 인지하고 있으나 그것을 두려워하고 그것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며 그것과 접촉하게 되면 얼음이 되고 마는 나약함을 가진 ‘순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지혜로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선하기만 한 자에게 지혜자의 타이틀을 부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거짓과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이라는 배경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로움은 선과 악으로 인해 지난한 변증법적 성장을 버텨내고도 여전히 선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인간에게 숙명적인 본성으로 내재된 이율배반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깊이 이해한 상태로 기꺼이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지 않을까 싶다. 나스따시야와 로고진 덕분에 미쉬낀도 마침내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한 채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부분까지 차단되어 버린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나는 성스러움이 아닌 나약함을 느끼고 애석해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는 그의 말도 다분히 이상으로만 남겨진 것 같다. 적어도 그는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독 감상문을 이렇게 마치려니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독서모임 가족들과 함께 나눈 뒤 더욱 깊고 풍성한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함께 읽기’를 쓸 생각을 하니 큰 위로가 된다. 이 작품 안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들의 관계 또한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도 절대 놓칠 수 없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아직 하지 못한 말들이 많지만, ‘함께 읽기’에서 보충할 작정이다.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9.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1849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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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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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의 인생 책방
홍종락 지음 / 비아토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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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와 함께 한 삶


홍종락 저, ‘루이스의 인생 책방’을 읽고


루이스의 작품을 여러 권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종태, 강유나, 홍종락, 이 세 번역자 이름에 친숙할 것이다. 이 책은 홍종락 번역가의 저서다. 루이스의 저작들을 읽고 연구하고 번역하며 얻은 깊고 풍성한 통찰과 그것들이 저자의 인생을 관통하며 남긴 고유한 흔적들이 편안한 문체로 쓰여 있다. 


루이스와 홍종락, 이 두 이름에 대한 신뢰가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제목이 모호했다. 일견에는 루이스에게 영향을 준 책들을 소개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루이스가 아니라 홍종락에게 영향을 준 여러 루이스 책들을 직간접적으로 소개한 글들의 모음이었다. 참고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개혁신앙'에 이미 연재된 적이 있다. 제목 '루이스의 인생 책방'은 루이스 인생이 아닌 홍종락 인생에 깃든 루이스의 저작들이 꽂힌 책방인 것이다.


1부는 이 책에서 가장 개인적인 글쓰기를 선보인다. 루이스의 여러 저작들이 군데군데 인용되며, 저자와 함께 호흡한 특정한 시공간에서 길어낸 고유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인용된 루이스 저작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별 어려움 없이 일곱 편의 에세이로 읽을 수 있다. 일상과 신앙에서의 저자의 통찰 또한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2부 역시 1부와 마찬가지로 일곱 편의 글을 싣고 있는데, 루이스의 여덟 작품을 다룬다. 서평이나 해설이라기보다는 작품 주제와 저자가 생각하는 방점을 중심으로 작품을 소개하는 글들이다. 여기에서 다뤄지는 작품 중 절반을 읽은 내게는 다시 그 작품들을 회고하는 시간이 되었고,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이번에 제대로 파악하는 기회도 되었다. 특히 '이야기에 관하여'라는 작품을 다루는 두 번째 꼭지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오마주로 쓰였는데, 내겐 가장 인상적이었다. 사탄의 관점을 빌려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상대화하고 객관화하는 신선한 관점 전환은 작품 소개에 탁월하다는 생각이다 (다른 작품들도 이런 형식으로 소개한다면 꽤 매력적일 것 같다).


3부는 루이스 작품을 함께 읽어나가는 독서모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이드를 제공한다. 작품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과 함께 여러 토론 주제와 생각해 볼 만한 질문들이 적혀 있다. 루이스를 읽어 보려고 이제 막 시도 하려는 독자들이 있다면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총 아홉 작품에 대한 가이드가 담겨 있는데, 나는 이미 다 읽은 책들이라 아직 이 아홉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이 부러워진다. 이 책을 가이드 삼아 읽으면 내가 혼자 읽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한 것보다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가 루이스 번역가 혹은 연구자이기보다 루이스를 먼저 읽은 선배 독자로 느껴졌다. 이 책은 루이스 연구서가 아닌 루이스로 인해 변한, 그리고 루이스와 함께 수십 년의 삶을 살아온 저자의 마음과 생각을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루이스의 덕을 꽤 본 독자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언젠가 이 부분에 관해 글을 한 번 써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15.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https://rtmodel.tistory.com/1658

16. 인간 폐지: https://rtmodel.tistory.com/1662

17. 책 읽는 삶: https://rtmodel.tistory.com/1742

18. 경이라는 세계 (by 이종태): https://rtmodel.tistory.com/1772

19. 루이스의 인생 책방 (by 홍종락): https://rtmodel.tistory.com/1845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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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 - 성경을 방어하는 대신 성경을 신뢰하며 읽기
피터 엔스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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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성경 읽기: 참 자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더 크고 깊은 신뢰


피터 엔즈 저,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를 읽고


비록 십 년 전 출간된 책이지만, 피터 엔즈의 저서가 새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반가운 나머지 아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제목부터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라니! 멋지지 않은가? 원제를 찾아보니 ‘The Bible Tells Me So'이다. 직역하면 ‘성경은 내게 그렇게 말한다’ 정도가 될 텐데, 나 같은 아마추어도 이 문장을 그대로 번역서 제목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영어 관용구가 사용된 원제의 어감이 전혀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말 제목을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라고 바꾼 출판사의 의도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리고 이 간단한 제목 안에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의도한 그대로 성경을 읽고 받아들이라'는 것. 이 책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불건전한) 의도 혹은 (사적인) 기대를 품고 성경을 대하는 자세와 그것이 낳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발려내어 원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부제를 살펴보면 더 감을 잡을 수 있다. 한국어 부제는 '성경을 방어하는 대신 성경을 신뢰하며 읽기'이다. 이는 원서의 부제 'Why Defending Scripture Has Made Unable to Read It'에 약간 수정을 가한 것인데, 그 수정은 독자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영어 부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이 성경을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일견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수도 있는, 그러나 너무나도 적확한, 사실을 알려주는 데에 그치는 반면, 한국어 부제는 그 이유를 뛰어넘어 어떻게 성경을 제대로 읽을 것인지에 대한 앞으로의 방향까지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피터 엔즈의 '확신의 죄'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그의 성경 독법과 연구, 글쓰기, 그리고 그의 굴곡 진 드라마 같은 삶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모아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런 면에서 한국어 부제는 피터 엔즈의 사상과 삶의 핵심을 관통하는 단어로 보이는 '신뢰'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읽기를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을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한다는 말일까? 피터 엔즈 역시 '성경은 우리를 위해 쓰였으나 우리에게 쓰이지 않았다'라는, 성경을 읽을 때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쓰인 성경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세기 현재 우리들이 가진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르는 게 아니라 성경의 원청중, 즉 고대 근동 사람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시대, 문화, 지식의 차이를 무시한 성경 읽기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는 성경이 전해주는 초월적인 메시지를 놓치게 만드는 주범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해를 거친 후 해석이라는 단계를 잘 밟아야 하는 이유다. 성경이 가진 역사성과 초월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 본 사람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이다. 성경은 읽을수록 은혜가 되는 책이기도 하지만 불편한 책이기도 하다는 사실. 많은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성경의 고대성을 무시하고 현대적인 시선으로만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편함의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가나안 정복을 든다.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심지어 여자와 아이마저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하셨을까? 


성경을 읽어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마주치는 난제 중 하나인 이 문제를 저자는 관점을 달리하여 풀어낸다. 모두가 난제라고 여기는 이유를 사람들이 성경을 방어하는 자세와 연결시킨다. 사랑의 하나님과 학살자 하나님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들이 모두 실패하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그 해법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고대 근동에서 벌어진 문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읽는 현대의 문제들을 질문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사건과 상황에 백 퍼센트 역사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오류라고 짚으면서 말이다. 과연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과 상황은 실제로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들일까? 성경을 읽으며 난제를 마주치는 근본적인 이유가 혹시 이러한 행위 모두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어야만 하는 암묵적인 강박 때문은 아니었을까? 저자는 간결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시지 않았다고. 사랑과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은 그 학살을 명령하시지 않았다고.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일견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성경의 많은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또 다른 질문에 우린 모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관해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썼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전혀 차원이 다른 질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에서 역사성을 빼는 용기(?)를 낸 이후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도 저자의 제안에 동참한다. 가나안 학살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이 거짓을 행하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게 성경에 그렇게 기록했을까? 그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저자는 용기 내어 경계 밖으로 나와 성경을 해석해 보려고 시도하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안심시킨다. 


”고대 저자들이 고대의 관점에서 썼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신실하지 않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물리적 세계에 관해 썼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이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과학적 관점에서는 그들이 틀렸음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 점이 그들의 신앙이나 그것 배후의 하나님을 덜 참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나아가 저자는 성경의 고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탐구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성경의 몇몇 어두운 경로를 탐험하는 도전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어떻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의 특성에 맞지 않는 기대는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이어지며 그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남기는데, 하나는 실제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일치하도록 우리의 기대를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을 우리의 틀 안으로 욱여넣을 모종의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언급하면서 저자는 기꺼이 첫 번째 선택지를 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주저함 없이 저자와 함께 한다. 두 번째 선택지가 낳는 폐해를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역사책으로 읽고, 과학책으로 읽고, 또 행동지침서로 읽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숱한 반지성적인 모습들로부터 누누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을 읽지도 않겠지만, 읽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택하지 않고 중립 아닌 중립을 지킨다며 먼 산 보듯 구경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가장 지혜로운 자세라는 암묵적인 믿음 하에. 그러나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게 아니라 비겁한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자세는 무슨 일이 생기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두길 원하는 약삭빠른 자의 비겁한 행동이 아니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용기 내어 저자와 함께 끝까지 가 보자.


저자는 구약은 물론 신약까지 아우르며 성경의 저자들이 역사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요한계시록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먼 과거의 일들을 다룬다. 저자는 여기서 강하게 말한다. 성경 저자는 그들의 현재 상황이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과거를 형성했다고. 즉 어느 정도 과거를 창조했다고. 그렇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왕정과 유배기라는 성경이 기록될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그리고 그 후에 기록된 역대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기원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앞 장들 (아담 이야기, 노아 이야기 등)과 출애굽의 서사마저도 모두 이스라엘 왕정의 음울한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고 말이다. 요컨대 성경은 시간 순으로 쓰이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의 현재를 반성하거나 설명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저자들이 자신들의 과거에 적당한 수정을 가하여 쓰인 책이라는 말이다. 어떤가? 불경하다고 느껴지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를 간결하게 정리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태곳적 이스라엘의 이야기들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 과거는 현재에 대해 말하기 위해 형성된다. 태곳적 이스라엘의 이야기 역시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형성된다."


그리고 저자가 충분히 받았을 여러 공격의 흔적이 녹아 있는 말까지 남긴다 (저자는 일련의 일들로 인해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는 성경을 끝까지 역사책으로 읽으려는 완고한 고집 가운데 빠진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겨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좀 더 보수적인 기독교 진영에서 역사책으로서의 성경을 열정적으로 방어하는 것은 의도는 좋지만 참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복종시키려는 처사다.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와 비슷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우상숭배라고 부른다."


아,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듯 시원하게 말해주는 피터 엔즈의 글쓰기가 나는 정말 매력적이라 느낀다. 


저자는 또 다른 여러 예를 들며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성경을 읽다가 문제에 부닥치게 되면, 그건 성경이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의도하지 않는 기대를 품고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문제일 뿐이라고. 그래서 강력하게 제안한다. 성경을 의도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만들고 나서 그것을 잘못된 기대에 부합하게 만드느라 거친 부분들을 부드럽게 만들기를 중단하자고. 어쩌면 성경은 우리에 의해서 보호될 필요가 없는 책일지 모른다. 한 걸음 나아가 그는 "성경을 우리의 끊임없는 기대들에 정렬시키고 그것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경건한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사실은 통제와 확실성의 상실에 대한 숨겨진 두려움이자 내적 동요의 거울이며, 우리가 실제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경고 신호"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런 성경은 신앙의 확실한 토대가 아니라 참된 신앙의 장애물이다. 우리의 기대에 부합하는 성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영적 여정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 여정을 불구로 만든다. 있는 그대로의 성경은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초대장이다."라고 일갈한다. 


또한 기막힌 표현을 동원하는데, 다음과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전하고 얌전한 성경은 이 믿음의 여정을 회피하고 경건의 외양을 제공하는 안전한 길을 제공하며 그러는 과정에서 성경을 경시한다. 우리는 성경을 제시할 만하게 만들기 위해 엉킨 것들을 빗질하기보다는 성경을 있는 모습 그대로 놔두고 그것으로부터 배울 때 성경을 가장 존중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우는 우리 자신의 여정, 곧 평탄하지 않고 때로는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경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밑줄 그을 수밖에 없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 책은 성경에 관해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지기 위한 어느 정도의 공간을 발견하기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관한 책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는 것은 고대의 순례자들과 나란히 걸으면서 그들의 여정의 충돌과 상처, 간극과 틈새, 골짜기와 평원과 씨름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반사되는 것을 보라는 성경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초대를 받아들이기에 관한 책이다."


3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었다. 신학자가 이렇게 글을 잘 써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재미까지 느끼면서 읽었다. 피터 엔즈의 힘일 것이다. 다시금 성경이 어떤 책인지 리마인드해 본다. 성경은 역사책도, 과학책도, 그리스도인의 지침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분의 백성이 수백 년에 걸쳐 변화하는 환경과 상황에서 어떻게 그분에게 연결되었는지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이런 성경은 있는 그대로가 여전히 효과가 있다는 점. 성경을 설명하려거나 방어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 그러나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는 계속 성경을 읽고 성경과 씨름해야 한다는 점.


어떤가? 불편한가? 흔들리고 있는가? 피터 엔즈는 흔들리는 당신을 위로할 것이다. 흔들리고 있는 신앙은 성숙하고 있는 신앙이라고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감이다. 흔들림 이후에는 참 자유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더 크고 깊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나도 그 증인 중 하나다.


* 피터 엔즈 읽기

1. 확신의 죄: https://rtmodel.tistory.com/696

2. 아담의 진화: https://rtmodel.tistory.com/1170 

3.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 https://rtmodel.tistory.com/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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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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