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홍성사 믿음의 글들 176
C.S.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홍성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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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눈을 빌려 통찰해낸 그리스도인의 내면

C. S. 루이스 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고

나의 첫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도 ‘나니아 연대기’도 아니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였다. 감상문을 쓰기 훨씬 이전,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름 없는 무리에 속해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들락거리며 그 안의 문화를 탐방하고 즐기고 있을 시기에 누군가가 권해줘서 읽었던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였다. 누가 권해줬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이 책만은 기억에 남았다. 단지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에게 쓴 편지 형식이 선보이는 신선함 때문만이 아니라, 악마의 시선으로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고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흘렀다. 나는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었다.

인상 깊었던 책을 재독할 때 느낄 수 있는 감동은 그 깊이와 너비가 처음과는 다르기 마련이다. 초독과 재독의 차이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공감할 수 없는 그 무엇에 속한다. 작품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그 작품을 읽는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초독과 재독의 차이는 그러므로 나의 성장, 성숙, 혹은 변화로 수렴된다. 

약 20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나의 신앙은 과연 얼마나 성장, 성숙했을까. 초등학생 (그 당시 언어로는 국민학생) 3학년 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입었던 기독교의 옷을 나는 대학 1학년 때 거의 1년간 벗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해 말, 어떤 예기치 못한 만남이 주어졌고, 마음에 묵직한 이끌림이 있어 나는 다시 교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미국 가기 전까지의 내 신앙은 두 번째 신앙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정의 정점이었던 20대 중후반, 나는 이 책 덕분에 루이스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나의 첫 저서 ‘과학자의 신앙공부’에서도 썼지만, 지금 현재 나의 신앙은 세 번째 여정에 속한다. 아무런 배경도 도움도 없던 미국에서 나는 처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절하게 인생의 낮은 점을 경험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중심으로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까불어대고 있겠지만, 그 낮은 점을 통과하며 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숱한 말들을 꺼내어 놓을 수 있겠으나, 단 한 문장으로 이 시기의 열매를 표현하자면,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 이후 나는 뿌리 깊은 의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수많은 의심이 기반이 된 질문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적인 수준에 머물거나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단면을 하나 더 알아간다는 의미일뿐 ‘그리스도인’을 나는 당당하게 나의 정체성 중 하나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잡하게 주절거린 것 같다. 여하튼 이 작품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초독과 재독 사이의 기간은 숫자로 따지면 약 20년에 해당되지만, 질적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이전과 이후로 표현할 수 있다. 가치관, 세계관의 전환을 경험하거나 마침내 깊은 우물 밖으로 빠져나온 자의 눈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얼마나 다르게 읽어냈을까.

실망스러울지 모르겠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초독 때 느꼈던 낯섦과 놀라움은 약간 줄어든 반면 (재독이므로 당연한 결과이리라), 루이스의 치밀하고 정확한 표현의 탁월함에 감탄하는 정도는 더 커진 것 같다. 아마도 이는 인생과 신앙에서 거대한 변화를 겪어낸 나의 변화 만큼일 것이다. 인생과 신앙 생활에서 나는 사람들의 비열함과 비굴함과 비겁함을 보고 경험했으며, 거짓과 위선과 자기 합리화의 추함도 보고 경험했다. 20대 땐 전혀 몰랐거나, 알아도 표면적인 수준밖엔 알지 못할 것들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한 가지 좋은 점은 인간에 대한 헛된 기대를 접을 수 있다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의 한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스크루테이프가 간파해 낸 인간 내면의 심리와 본성에 대한 묘사를 별 거리낌 없이 맞장구칠 정도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크루테이프의 진단과 통찰 중 밑줄 그은 부분이 많으나 몇 가지만 짚어 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1. 현재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는 바로 교회다.
>>> 초독 때는 깊이 공감할 수 없던 문장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젠 그럴 수 있다. 

2. 내가 맡은 환자 중에는 아내나 아들의 영혼을 이해서는 열렬한 기도를 쏟아 놓다가도, 진짜 아내나 아들에게는 기도하던 그 자리에서 곧바로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무척 길이 잘 든 인간들이 있었다.
>>>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나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부끄럽지만 너무나 진실인 인간의 이중성. 영과 육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작자치고 행함이 깃든 믿음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신앙은 이론적이고 관념적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판사 역할을 자처한다. 정죄와 비난의 눈으로 자기가 아닌 모든 사람을 바라본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자들이 악마가 원하는 이상형 중 하나라는 루이스의 통찰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3.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
>>>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지적으로 가장 뛰어났던 이반 카라마조프의 신앙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인류를 사랑할 마음은 있지만, 주위에 있는 한 이웃을 사랑할 마음은 없는,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사랑. 사랑이란 내가 아닌 남을 향하며 서로를 성장시키고 서로를 살리는 기적 같은 힘일진대, 이러한 사랑은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자기 자신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자기애의 거울상일 것이다. 루이스도 동일한 지점을 통찰해낸 것 같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웃 사랑은 인류라는 거창한 개념이 아닌 한 사람이라는 실천 가능한 대상에게 하는 마음과 행위일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도 이러한 것이었다. 

4.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 세상과 믿음을 목적과 수단 관계로 여기는 교인들이 허다하게 널려 있다는 점은 나도 지난 20년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들에게 만약 그리스도나 기독교보다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들은 큰 갈등 없이 그것을 선택해버릴 것이다. 믿음이 수단으로 존재하는 한 그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다.

5. 원수가 인간 영혼 하나를 제 것으로 확보하기 위해 꼭대기보다 골짜기에 더 의존한다는 걸 알면 아마 좀 놀랄 게다. 원수가 특히 아끼는 인간들은 그 누구보다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다.
>>> 은근히 위로가 되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꼭대기나 골짜기라는 개념 역시 한낱 인간의 눈에서 정의내린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 역시 비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를 모두 통과하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의 믿음을 시험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곳은 꼭대기보다 골짜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나 역시 골짜기를 지나오며 세 번째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여정을 가르는 지점은 꼭대기가 아닌 골짜기였다. 다만 나는 스크루테이프가 원수라고 부르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을 살고 싶다. 

6. 쾌락은 감소시키고 그에 대한 갈망은 증대시키는 게 우리가 쓰는 방식이야.
>>> 쾌락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쾌락주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배후에 악마가 있다고 해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쾌락을 감소시키고 그에 대한 갈망만을 증대시키는 방법은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그것을 얻기 위해 인생을 거는 무모함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끝없는 탐욕에 빠진 인간의 실체를 다시 직시하게 된다.

7. 환자는 이른바 주변의 두 세계를 다 포용하는 완전하고도 균형잡힌 복합적 인간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처럼 최소한 두 집단의 인간들을 끊임없이 배신하면서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내심 자기만족에 취하게 된다 이 말씀이지.
>>> 미국에서도 보았다. 불신자들을 위해 교회 문턱을 낮춘답시고 그리스도 이야기를 빼고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들을 축소시키는 행위들을 말이다. 이러한 맥락과 비슷한 것이 바로 맘몬의 파라오 시스템과 야훼의 시스템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믿는 행태, 나아가 그렇게 겸비하는 것이 마치 균형잡히고 성숙한 신앙인인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을 조장하는 행태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그 두 주인은 바로 하나님과 맘몬이다.

8. 여하튼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두거라.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 행함이 없는 믿음은 반쪽 믿음, 아니 가짜라고 했다. 즉, 진짜 믿음은 행함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바른 생각, 바른 믿음은 행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악마라도 행함을 거세시킨 독실한(?) 믿음을 부추길 것이다. 진짜를 제거하는 방법보다는 가짜를 퍼뜨리는 편이 훨씬 더 사탄의 왕국 건설엔 효율적일 테니까.

9. 우리의 임무는 인간을 영원과 현재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 닮은 우리 인간은 영원에 속해 있는 영적 존재이자 육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숨 쉬고 있는 유한한 존재다. 이 모순된 정체성이 가장 잘 발휘되는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다. 과거에 묶여 현재를 과거의 연장으로 삼아 현재를 망치게 만들거나, 미래를 준비한답시고 현재를 땔감으로 사용하며 현재를 가치 없게 만드는 방법. 우리의 시선을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에 묶어두는 방법. 곧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의 신앙을 관념적으로 만드는 사탄의 고도의 전략일 것이다.

10. 비이기주의자들 사이의 의견 충돌은 제 뜻을 고집하느라 생긴 게 아니라 거꾸로 상대편의 뜻을 고집하느라 생긴 것이거든. 만약 처음부터 각자 자기 뜻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면 이성과 예의라는 테두리를 지킬 수 있었을 테다. 환자의 영혼을 확보하려면 소소한 진짜 이기주의보다는 정교하면서도 자의식이 강한 비이기주의의 초기 징후들이 결국엔 더 값진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 이기주의자보다 더 이기적인 비이기주의자의 행태를 이용해 먹는 방법 역시 사탄의 고도의 전략일 것이다. 이는 거짓말쟁이보다 거짓 겸손을 떠는 자가 더 악질인 논리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놀라운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 중에서도 이런 비이기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장과 위선에 능한, 양의 탈을 쓴 늑대들에겐 저주가.... 아니 그들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임하길.

11. 풍요로운 중년기를 보내는 인간은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사실은 세상이 자기 속에서 자리를 찾은 것인데도 말이야. 갈수록 높아지는 명성, 넓어지는 교제권, 나는 중요인물이라는 의식, 열중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의 가중되는 압력 등은 이 땅이야말로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고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바다. 
>>> 정착과 떠남의 무한반복을 살아가는 나그네 삶이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현주소라고 믿는다. 중년이 되고 경제가 청년 때보다 안정적이 되면서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님, 안정을 빙자한 정착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잊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15.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https://rtmodel.tistory.com/1658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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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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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시스템에서 생명의 시스템으로

월터 브루그만 저, ‘안식일은 저항이다’를 읽고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안식일은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 불안과 강요와 배타주의와 과중한 일에 대한 저항, 아니 이 모든 것들을 생산해 내는, 아니 생산해 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다. 브루그만은 안식일이 저항인 이유를 ‘안식일이 상품 생산과 소비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끝없는 욕망, 끝없는 생산, 끝없는 노동을 요구하는 물질주의, 즉 맘몬의 방식은 이미 우리 삶에 팽배해 있으며,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파라오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쉼으로 들어가는 것이 절박하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브루그만은 계속해서 말한다. 늘 불안에 떨며 더 많은 벽돌을 찍어 내려고 애쓰는 삶을 잠시라도 멈추면, 우리가 지는 짐은 가벼워지고 우리에게 지워진 멍에는 쉬워진다고. 그리고 예전과 같이 지금도 얼마든지 다른 삶을 즐기며 구가할 수 있다고. 요컨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체제로 돌입한 물질만능주의, 상품지상주의에 저항하라는 것이다. 이는 곧 구약의 안식일 정신을 지금, 여기에서 회복하는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브루그만은 우리가 저항해야 할 ‘죽음의 시스템’의 모델을 출애굽 이전의 ‘파라오 시스템’에서 찾는다. 이 시스템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모나 동포를 천대할 수밖에 없고, 다른 이들이 위협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폭력에 가담할 수밖에 없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성관계를 상대를 학대하는 상품으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으면 그것을 강탈할 수밖에 없고, 이익을 얻으려고 왜곡과 말 돌려하기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탐욕에 헌신할 수밖에 없다. 파라오 시스템에는 불안과 강요와 배타주의와 과중한 일이 일상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위협과 경쟁자만이 있을 뿐 이웃이 없었다. 그러나 야훼가 내리신 명령에는 파라오의 명령과 달리 사회에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 가운데 이웃이 들어 있고, 이웃끼리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 유지를 대담하게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이 기이한 요구는 이웃에게 쏟는 사랑으로 불안만을 야기하는 생산성 중심 풍조에 맞서라는 것이었다. 안식일의 핵심은 쉼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쉬셨듯, 우리도 쉴 수 있다. 아니, 쉬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쉴 때에는 우리 주위 이웃들도 쉴 수 있고, 또 쉬어야만 한다. 불안만을 야기하는 파라오 시스템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저항의 시스템은 곧 하나님의 안식일, 즉 쉼의 시스템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의 시스템에 붙잡힐 필요가 없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받고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스스로 그 시스템에 붙잡혀 노예가 되어버렸다.


안식일은 단순한 쉼이나 단순한 멈춤을 넘어선다. 안식일은 강요와 경쟁에서 벗어나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연대성에 비추어 사회의 모든 삶을 재고해 보는 계기가 된다. 즉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혹은 피동적인 멈춤이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멈춤이다. 이스라엘이,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안식일에 멈추고 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시스템에서 해방받고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은 그것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탐욕의 지옥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지나 훨씬 더 후대의 본문인 이사야 56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을 논하며 모세의 옛 율법과 어긋나는 조치를 취하며 모세의 율법을 뒤집어엎기 시작한다. 배타주의를 거부하고 포용주의 원리를 강조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표지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결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사람다움을 지키도록 이웃과 더불어 일을 멈추고 쉬는 것만 언급한다. 일을 멈추라는 이 명령은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다. 동성애자, 여자, 남자, 흑인, 백인, 아메리카 원주민, 히스패닉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안식일을 지킬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모이는 자리에 모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은 구성원이 될 ‘자격이 있다’는 개념을 부숴 버린다. 배타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브루그만은 여기서 덧붙인다. ‘선한 열매’는 안식일이 안겨 주는 평화를 누리는 것에서 생겨난다고 감히 생각한다고. 나 역시 동의한다. 피 묻은 피라미드 시스템에서 선한 것이 나올 리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으려면 안식일이 있어야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예전과 같이 돌아갔다. 모양은 다르지만, 다시 상품지상주의가 주가 되는 죽음의 시스템으로 복귀했다. 이는 이집트에서 건져내 주신 하나님을 잊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는 뜻이고, 더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을 만들어 내리라는 확신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이집트 노예 때와는 달리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표면적으로는 지키면서도 상품을 획득하려는 탐욕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는 불안을 야기하고 강요와 착취를 일삼는 행위가 그치지 않은 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 탐욕스러운 행위에는 불안과 강요과 착취라는 원동력이 있었고, 이것은 안식일 속으로 곧장 침투하여 안식일을 무너뜨려버렸다. 쉼을 누리는 위대한 축제는 말 그대로 쉼을 없애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여기서 우린 알 수 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육 간의 쉼을 누리는 마음과 생각과 실천에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쉼이 없는 안식일은 인간 안에 내재된 탐욕의 패턴을 그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탐욕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것이 그치지 않은 예배는 신실한 예배일 수 없었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정의를 행하도록 이끌지 못하는 예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사는 엉터리 안식일일 뿐이었다. 아모스는 모든 이가 쉼을 누리는 안식일을 거부하는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했다. 이렇게 변질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브루그만은 말한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나눈다는 사람이 내내 시계만 들여다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를 찬송한다는 자가 가난한 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동시다중 작업을 하면서 여기저기에 마음이 팔여 있다는 것은 진정 일을 그치고 쉬지 않는다는 말이요, 성공하려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탐욕에 빠져 무언가를 얻으려고 일하면서 동시에 인간다운 소통을 나누어 보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상품지상주의로 돌아감을 보여주는 진정한 표지다.”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십계명 전체와 연관 지어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아멘을 외치고 말았다. 브루그만은 탐심을 경계하는 열째 계명을 안식일을 지키라는 넷째 계명의 맥락 속에 놓고 탐욕이라는 죽음의 순환 고리를 끊어 버릴 방법을 고려한다.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은 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숭배와 탐심이 동일시되는 이유는 이 둘 모두가 실체를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식일은 상품을 예배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자 상품을 추구하는 행위까지 거부하는 것이다. 강력하고 죽음의 시스템에 전복적인 저항이 아닐 수 없다.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안식일은 탐욕의 힘을 깨뜨릴 실제적 바탕이자 탐욕을 제한하는 데 강조점을 두고자 하는 공중의 의지를 만들어 낼 실제적 바탕이라고. 안식일은 불안을 물리치는 해독제라고. 안식일은 우리가 소유가 아니라 선물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당이요, 우리가 상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신실한 관계에서 만족을 얻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당이라고. 그리고 그는 안식일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는 우리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며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파라오 시스템이 인간의 쉼 없는 탐욕이 바탕이 된 죽음의 시스템이라면 하나님의 안식일 시스템은 그것으로부터의 저항이자 대안이며 생명의 시스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브루그만은 안식일이 우상숭배와 탐심에 초점을 맞추는 거짓 욕구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본다. 우리의 번지르르한 욕구들이 거짓인지 모르는 이유는 쉼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안식일의 정신을 지키며 삶에서 쉼을 가져보는 것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를 실천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안에 어떤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쉬운 방법이라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도 나는 이를 기반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깊은 감사를 하게 된다. 안식일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서도 늘 되새기고 그 정신을 실제 일상에서 살아내자고 다짐하게 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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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법 - 엔도 슈사쿠의 행복론
엔도 슈사쿠 지음, 한유희 옮김 / 시아출판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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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를 넘어서는 인생 에세이

엔도 슈사쿠 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읽고

인생 사는 노하우, 인간관계 잘하는 법 등의 처세술을 적어놓은 자기 계발서 같은 책은 일찌감치 졸업했다. 진부한 원리를 마치 저자 혼자 알아낸 것처럼 호들갑 떨며 비결을 빙자하여 자기 자랑하는 꼴이 보기 싫었고, 거짓 겸손을 나름 우아하게 사용하며 토해낸 열변도 한낱 시공간에 제한된 특수한 상황 논리에 철저하게 좌우되는 단발적인 이벤트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은 책들도 있겠지만, 그런 걸 찾아내는 데에 나의 시간과 노력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읽을 것들은 언제나 넘쳐나 산을 이루고 있는데도 나는 그 높은 정상도 보지 못하는 저 아래 땅바닥에 붙어 있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 읽지 못할 책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자기 계발서는 읽어야 할 목록에서 가장 먼저 제거되었다. 후회는커녕 독서에 막 입문하여 자기 계발서 따위에 시간과 돈을 탕진하고 있는 사람에게 적극 권장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책 역시 그런 종류에 해당된다. 제목을 보라. ‘나를 사랑하는 법’. 그리고 부제도 마찬가지다. ‘엔도 슈사쿠의 행복론’. 책 표지만 보고도 가장 먼저 거르는 책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왜 이 책을, 비록 정독까진 하지 못했지만, 읽게 되었을까? 이유는 딱 하나. 엔도 슈사쿠라는 작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은 총 셋인데, 모두 강렬한 인상과 진한 여운을 남기는 동시에 깊은 감동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침묵’, ‘침묵의 소리’, 그리고 ‘깊은 강’은 재독 리스트에 올라가 있으며, 한국 와서 재구입한 책에 속한다.


고백하자면, 이 책 ‘나를 사랑하는 법’을 구입하게 된 이유는, 중고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구입하다가 무료배송을 위한 금액이 조금 모자라 원래 계획에 없던 책들 중 한 권을 더 사고자 충동적으로 여러 책들을 훑어보다가 단지 엔도 슈사쿠라는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엔도 슈사쿠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그냥 줘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뒤에 번역자가 쓴 ‘옮기고 나서’에 내가 이 책을 읽고 받은 인상이 간결하게 적혀 있다. 다음과 같다. 


‘…인생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시중에 소개되고 있는 이와 비슷한 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엔도 슈사쿠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이 책 속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일본인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작가적 역량을 뒷받침해 주는 그만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단지 처세술이랍시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싸구려 자기 계발서가 아니다. 오히려 굴곡 많고 사연 많은 엔도 슈사쿠의 인생 여정을 절제된 톤으로 볼 수 있는 에세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어낸 사람, 전쟁 후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간 사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머니의 강권으로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 그러나 그것이 몸에 맞지 않은 양복임을 깨닫고 저항했던 사람, 그 저항의 방법이 옷을 벗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행히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본옷으로 재단하여 만들고자 시도했던 사람, 그렇게 하여 ‘침묵’이나 ‘깊은 강’과 같은 대작을 쓰게 되었던 사람, 엔도 슈사쿠.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도 이 책에 쓰인 것과 비슷한 말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나는 엔도 슈사쿠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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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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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문학을 넘어 인간에 이르기까지


신형철 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는 믿음직한 나침반처럼 나는 독서와 독서 사이에 신형철의 글을 조금씩 꺼내 읽는다. 한꺼번에 다 읽기 아깝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랬다가는 나의 소화 능력을 초과하여 오줌만 노랗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것은 아끼고 싶은 법. 몇 꼭지씩 나눠 책과 책 사이에 읽자는 게 신형철의 글을 아끼는 나만의 방법이자 그의 글을 읽는 나만의 독법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완독하는 데에도 세 달 정도 걸렸다. 그 사이에 읽은 책도 족히 열 권은 넘을 것이다. 

소화 불량일 때 찾아 먹는 신뢰할 만한 소화제처럼 나는 쓰기 대비 읽기에 치우칠 때마다 신형철의 글을 찾아 읽는다. 능수능란하고 처세에 능한 수많은 어른들의 다양한 페르소나에 진이 빠질 때 때마침 눈에 들어온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것처럼 나는 읽기에 함몰되어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를 때마다 신형철의 글을 읽는다. 그러면 막혔던 관이 뚫리고 정상적인 흐름을 되찾는 것처럼 나의 읽기의 영점도 재조정되곤 한다. 이것저것 열 권이 넘는 책을 허겁지겁 읽을 땐 몰랐다. 흐트러지고 복잡해진 나의 방향을. 신형철의 글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읽기를 넘어 쓰기에 대한 방향도 선명해진다. 

‘영화평론가가 아닌 문학평론가가 쓴 영화 평론.‘ 그러나 이 책을 설명하기엔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신형철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 다음과 같이 써야 한다. ’영화평론가가 아닌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쓴 영화 평론.‘ 나는 영화 평론을 읽기 위해 이 책을 고른 게 아니다. 영화를 자주 보지도 않을뿐더러 영화에 대한 평론은 여태껏 한 번도 일부러 찾아 읽어본 적이 없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신형철의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영화 평론이 아닌 신형철의 글로써 이 책을 읽어서인지 나에게 이 책은 내가 읽은 신형철의 세 번째 책일 뿐이다. 참 아쉽게도 그의 저서는 몇 권 안 된다. 내가 읽지 않은 그의 두 저서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는 지금도 아주 느리게 아끼면서 읽어나가고 있다.

문학평론가가 쓴 영화 평론 덕분에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과 영화의 닮은 점이 좀 더 명료하게 보이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야기다. 내러티브, 혹은 스토리텔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참고로, 2014년 10월에 초판 1쇄를 찍고 2015년 3월에 7쇄를 찍은 이 책은 2012년 여름부터 2014년 봄까지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신형철의 스토리-텔링’이라는 타이틀로 매달 연재한 글들을 주로 모아 엮은 것이다. 총 네 주제로 구성되어 있고, 각 주제는 다섯 꼭지의 영화 평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에도 나와 있지만, 네 주제는 다음과 같다. 사랑, 욕망, 윤리, 그리고 성장. 이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알 수 있다. 네 주제는 영화의 고유한 주제가 아니라 문학을 포함하는 인간들이 만드는 모든 이야기의 고유한 주제라는 사실을. 인간은 사랑하고, 욕망하고, 윤리를 어기거나 지키거나 혹은 그러려고 혹은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고, 갖은 어려움을 경험하며 내적인 성장을 이뤄낸다. 문학이나 영화는 모두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것으로써 존재한다. 위의 네 가지 키워드는 인간사를 요약한 네 단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것이 이 책, 그러니까 ‘영화평론가가 아닌 문학평론가가 쓴 영화 평론’의 고유한 장점이라 생각한다. 거기에다가 신형철이라는 독보적인 존재가 쓴 글이라는 점은 이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것 같다. 영화를 넘어 문학을 넘어 인간에 이르는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나 ‘인생의 역사’에서도 그랬던 것 같은데, 이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도 첫 번째 꼭지와 두 번째 꼭지 (혹은 세 번째 꼭지까지)에서 나는 숨을 참을 만큼 깊은 울림을 느꼈다. 여기서 그 울림이 어떻다고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울림이라는 것이 신형철을 많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이유이자 신형철만이 해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일 것이다. 여기선 그저 그가 늘 강조하는 ‘정확함’이라는 단어밖엔 표현할 수 없어 감상문을 쓰는 나로선 답답할 뿐이다. 
 
신형철은 한 꼭지를 쓰기 위해 같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봤다고 한다. 글 하나에 담긴 보이지 않는 애씀과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함’의 깊이와 예리함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다시 볼 때마다 새롭게 혹은 다르게 보이는 것들로 인해 그의 글도 그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이 가해졌을 것이다. 한 달에 한 꼭지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신형철은 그렇게나 노력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싶다. 정확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시간과 마음과 행위들. 글을 대할 때 조금 더 진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확한 사랑, 정확한 글을 위해서.

 

* 신형철 읽기

1.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1161

2. 인생의 역사: https://rtmodel.tistory.com/1525

3. 정확한 사랑의 실험: https://rtmodel.tistory.com/1654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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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도 믿음의 글들 24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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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관한 루이스의 생각

C. S. 루이스 저, ‘개인 기도’를 읽고

공동 기도가 아닌 개인 기도에 관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의 입장에서 바라본 여러 의문점들과 그에 대한 루이스의 견해 혹은 믿음이 잘 담겨 있는 책이다. 자칫 가르치려 드는 자의 강압적인 뉘앙스를 피하기 위해 루이스는 말콤이라는 가상 인물을 설정하고 그에게 편지로 답을 하는 방식을 취한 듯하다. ‘루이스가 메리에게’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볼 수 있지만, 말콤은 메리보다는 신학 혹은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이 많은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루이스의 답장은 기독교의 교리나 문화 혹은 세계관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보다는 좀 더 세분화되고 전문적이라 할 수 있는 깊이까지 나아간다. 이 책의 장점은 평신도 입장에서 개인 기도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는 점이지만, 이것은 또한 이 책의 한계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에 적힌 루이스의 대답이나 설명이 기독교의 공통된 입장이라기보다는 신학과 철학과 문학에 능통한 한 평신도의 입장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속한 기독교는 영국 성공회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특히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 천국의 모습이나 기도의 능력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루이스가 편하게 쓴 개인적인 의견 정도로 보는 관점이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이 루이스가 의도적으로 말콤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서간체 형식을 빌려 이 책을 쓴 이유일 것이다. 

루이스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둥, 루이스의 책을 읽으면 혼란이 온다는 둥의 의견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통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평신도가 마음껏 상상하고 의견을 내놓는 모습이 나에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묻지 않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익명성의 비겁한 무리보다는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나는 언제나 그랬듯 루이스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루이스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당대와 후대 기독교인에게 남긴 건 실보다는 득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이 책에선 개인 기도 중에서도 청원 기도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을 이룬다. 전지하신 하나님에게 우리는 왜 청원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성만찬이나 몸의 부활 등의 성경적 지식과 교리에 이르기까지 루이스의 해박하고 일리 있는 친절한 설명을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밑줄 그으며 묵상할 만한 문장들도 많았다. 네 문장만 여기에 옮겨본다.

“균형 잡힌 마음상태는 기도로 구해야 할 축복 중 하나이지 기도할 때 입어야 하는 멋진 의상이 아니라네.”
루이스가 무심히 던진 이 문장을 읽고 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아마도 자주 기도를 미루거나 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는 나의 모습이 드러난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작은 일들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체면 때문일 듯싶네.”
이 문장 역시 읽고 나는 부끄러웠다. 기도를 어떤 어렵고 구별된 의식만으로 배웠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와 기도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수 있었다.

“신비주의를 향한 나의 욕구는 물욕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사도 바울의 판단으로 보자면 ‘영’이 아니라 ‘육체’에 해당하네.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충동적이고 고집스럽고 탐욕스러운 욕구가 있을 수 있는 거야.”
기독교는 신비하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위험하다. 나는 루이스처럼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면이 기독교의 중요한 부분이라 믿는다. 

“청원기도에 대해 너무 많이 쓴 것 같기도 해. 하지만 후회하지 않네. 그것이 올바른 출발점이거든.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도 하고. 나는 청원기도의 문을 지나지 않고서 더 높은 형태의 기도를 하거나 그런 기도를 논하려 드는 사람은 믿을 수 없네. 청원기도를 하지 않거나 경멸하는 것은 탁월한 거룩함의 표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하여 낮은 수준에서 만족한다는 표시일 수 있다고 보네.”
나는 이 문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솔직하게 나를 열고 어린아이처럼 간구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균형은 반드시 이런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모든 신앙인에게 권하고 싶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도 좋아할 것이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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