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하시는 하나님 - 성경 속 7인을 통해 듣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
크리스토퍼 라이트 지음, 전의우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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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읽고

이 책의 부제는 ‘성경 속 7인을 통해 듣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성경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상상력을 통해 눈물과 탄식 가운데 있었던 7명의 성경 인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내러티브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셨던 말씀을, 성경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가운데 쓰인 예레미야애가를 우리에게 주셨던 이유의 연장선에서, 들어보자고 요청한다. 코로나로 흉흉했던 시대를 함께 지내온 크리스토퍼 라이트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으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이 글은 저자가 선택한 7명의 인물과 그에 따른 소주제에 따른 나의 짧은 감상들로 대신한다. 

1. 아브라함, 시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걷기 (창세기 22:1-19)                     
복음의 시작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도전을 주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중에서도 진미는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이 등장하는 장면일 것이다. 수많은 철학자,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문학작가에게 영감을 주고 수많은 해석을 낳았던 이 본문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항상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방식은 물론 이삭의 입장에서 같은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상상하는 방식까지 내가 이 본문을 읽고 묵상하고 여러 해석들을 접할 때마다 이르는 결론은 동일하다. 즉, 믿음과 순종이다. 이는 히브리서 저자나 야고보서 저자가 이른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 이 책의 저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 곧 실천하는 순종이 없는 믿음은 약하거나 미숙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것일 뿐입니다. 전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순종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동일한 이유로 바울은 아주 단호했습니다. 그의 선교 목적은 단지 청중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이야기의 절정이 단지 이삭 대신 어린 양이 죽었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보인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리라는 약속을 실제로 지키시리라는 것이라며 우리도 거기까지 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믿음과 순종에 따른 축복은 그렇게 실행에 옮긴 자에 국한되지 않고 만민을 향한다는 것. 크리스토퍼 라이트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언제나 울림을 주고 나를 다잡게 만든다.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시금 나의 영적인 방향을 재조정하게 만든다.

2. 나오미와 룻, 비번영의 복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룻기 1장)
룻기의 복음을 ‘비번영의 복음’이라고 해석하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시선이 신선하면서도 전적으로 수긍이 간다. 번영 복음은 믿음과 순종이 건강과 부와 성공 같은 가시적인 복을 가져오는 보증수표일 뿐 아니라 질병과 가난과 실패 같은 가시적인 화를 피해 가는 부적인 것처럼 말한다. 이에 반해 룻기의 복음은 믿는데도 불구하고 고난 받는 이야기, 고난 받는데도 불구하고 믿는 이야기라고 저자는 통찰해 낸다. 번영 복음과 정반대의 복음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플롯의 성경 속 내러티브를 여럿 알고 있으며 그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은 물론 순종하는 삶으로 반응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내 삶도 비번영의 복음이 증거하는 하나의 예제라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복음을 통할 때에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살아내며 소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룻과 같은 이방인에게 전적인 헌신과 믿음의 순종을 허락하시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번영 복음의 화려한 가면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3. 엘리야, 우울증과 두려움의 치유 (열왕기상 19장)
갈멜산 대결에서 완승을 거둔 엘리야에게 곧바로 찾아온 건 죽고 싶을 만큼의 절망과 두려움이었다. 이세벨 왕후가 자기 목숨을 노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 빠진 엘리야의 병을 진단한다. 이른바 우울증이다.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셔서 더 큰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위로자이시다. 죽여달라는 엘리야에게 잠과 떡과 물을 주시고 달래시는 장면이나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세미한 가운데 말씀으로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게 하시는 장면은 읽을 때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종종 엘리야에게 나를 대입하기도 하고 엘리야가 받았던 위로와 회복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번에 읽을 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과 엘리사를 남겨 두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엘리야의 심정이, 그 울컥하며 자기 객관화를 이루고 다시금 하나님의 사명을 다잡는 그 뜨거운 마음이 좀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신뢰한다.  

4. 코헬렛, 어처구니없는 세상과 하나님의 주권 (전도서 9-12장)
코헬렛은 우리가 전도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다. 코헬렛은 이스라엘의 지혜문학 전통에 서 있다. 전도서는 코헬렛의 조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조언은 주로 지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과 영적 영역을 아우르는 지혜의 근본적 이중성, 즉 지혜로운지 어리석은지, 의로운지 악한지, 경건한지 불경건한지에 대한 대립을 펼쳐 놓고 선택을 촉구하는 식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마치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 가지 영역은 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해석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을 아우르는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나 역시 아멘으로 화답한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우리 삶이 지혜롭고 의로우며 경건할 수 있고, 어리석고 악하며 불경건한 길을 피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인간의 한계 때문에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존재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을 나는 비록 머리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아멘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저자의 요구대로, 그리고 코헬렛의 요구대로, 우리 삶이 비록 어처구니없을 만큼 악과 혼란이 넘쳐 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도래할지라도, 우리의 창조자요 궁극적 심판자요 우리의 유일한 소망되신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둔 채 기뻐하고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5. 예레미야, 환멸과 원망과 자기연민의 치유 (예레미야 15:10, 15-21)
태어나면서부터 예정된 다툼과 싸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모두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상황. 예레미야는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여기서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성경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모든 말이 그 자체로 직접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부정적이고 환멸에 찬 예레미야의 생각과 말이 정직하게 기록된 것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꾸짖으시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말한다. 환멸과 원망 (적대감)과 자기연민이라는 파괴의 삼단콤보에 신음하던 예레미야가 토해내던 말들보다 그렇게 토해내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가는 과정 자체가 메시지라는 것. 예레미야를 통한 일보다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기회를 제공한다.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객관적 상황 앞에서,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런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시간표를 신뢰하고 기다리며 지금, 여기에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것. 그 과정 중에 우리 안에 있던 불신앙과 반역의 욕망이 발견되고 치유되는 것. 이런 과정을 신앙생활이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의 눈엔 목적이라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은 여기에서도 진실이다. 

6. 바룩, 야망이 좌절되는 아픔 (예레미야 45장)
바룩이라는 낯선 이름을 만난다. 꽤 높은 관료직임에도 불구하고 보장된 자리을 택하지 않고 왕 대신 왕과 성전과 왕궁으로부터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던 예레미야를 택하고 섬겼으며, 예레미야를 도와 두루마리를 작성해 하나님의 말씀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성전에 가서 그 두루마리를 낭독했다고 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건 평안한 가운데 쓰고 낭독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대재앙 중에 죽을 수도 있는 입장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레미야를 섬기고 그의 곁을 지켰다. 비록 성경에는 많은 독자들에게 낯선 이름으로 다가올 정도로 아주 미미한 존재로 그려지지만 바룩이 없었다면 예레미야의 활동은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여기서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바룩이 되어도 괜찮겠느냐?”라고 말이다. 바룩은 시련이 다가와도 묵묵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충직한 많은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듯하다. 바울에게는 아나니아가 있었다. 아니니아가 없었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는 일은 적시에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뭇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역할과 그렇지 않고 그 주인공의 그림자에 묻혀 이름도 빛도 없이 일하고 사라지는 역할. 나는 여전히 전자를 후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진 않을까. 하나님의 눈보다 사람의 눈을 더 많이 의식한 채 하나님 앞에서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진 않을까. 나는 과연 시편 84:10의 고백처럼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 하나님, 제 안의 허영을 거세시켜 주소서.


7. 베드로, 실패와 죄책감의 치유 (마태복음 26:69-75)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장면과 더불어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수 앞에서 맹세까지 할 정도로 큰소리치던 베드로는 실패했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 베드로의 부인 장면이 성경에 실린 이유, 특히 사복음서에 공히 실린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실패자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패는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의 수제자라고 해도 말이다. 또한 그 실패는 예견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실패를 정확하게 예견하셨다. 저자의 해석대로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의 예견대로 예수를 부인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참 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실패가 사실이고 예견될 뿐 아니라 용서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아시고 놀라지도 않으시고 실망하시도 않으시며 그것을 통해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길 기다리신다. 우리들의 자발적인 회개에 언제나 용서하시면서 말이다.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과정에 불과하고 그 아픈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나약한 본모습을 사실대로 직시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믿음은 더 성숙해지고, 우리 안의 불신앙은 치유되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더욱 커져만 가는 것이다. 실패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베드로는 실패자가 아니라 용서받고 치유함을 입은 자가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서유니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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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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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으로 쓰인 300번째 감상문입니다**

위로와 치유: 애도의 객체가 애도의 주체에게 가져다준 선물

시몬 드 보부아르 저,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고

‘제2의 성’의 저자, 페미니즘 투사, 윤리적 실존주의 철학자 등의 굵직굵직한 타이틀보다 장 폴 사르트르의 연인으로 더 알려졌던 시몬 드 보부아르. 그녀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였던 사르트르에 이어 2등으로 프랑스 철학 교수 자격 시험에 합격하면서 사상 최연소 합격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천재 철학자였다. 사르트르라는 거대한 존재에 가려져 본인의 철학적 정체성마저 사람들에게 잊히기 일쑤였던 그녀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과 다른 실존주의 철학을 발전시킨 위대한 사상가였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존재 자체가 모순이라 할 수 있다. 굳이 신학적으로까지 갈 필요 없이, 인간은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타자와 어쨌거나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의식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의식이 지향하는 대상, 곧 객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타자의 존재는 나의 존재와 충돌할 수밖에 없고 이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야기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갈등을 존재론적 숙명으로 규정하는 데 관심을 두었던 반면,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달리 갈등의 존재와 원인에 머물지 않고, 갈등 관계를 넘어서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보부아르의 실존주의는 존재론적 원리에 천착하지 않고 인간의 윤리적 실존을 탐구하는 데까지 나아간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를 ‘실존주의적 윤리’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보부아르는 자연스럽게 평생 ‘참여 지식인’으로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철학을 철학적 글쓰기와 문학적 글쓰기로 형상화했다. ‘제2의 성’은 실존의 윤리를 개념적으로 정립하려고 시도하는 철학적 글쓰기의 결과물에 해당된다. 반면, 이 작품 ‘아주 편안한 죽음’은 문학적 글쓰기의 열매에 해당되며, 인간의 실존이 지닌 ‘애매성’을 생생하게 담아낸 결과물 중 하나다. 보부아르는 실존의 애매성은 극복되거나 제거될 수 없다고 여겼기에 문학적 글쓰기로써 그러한 실존적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재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시적인 사건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보부아르에겐 가부장적 폭력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던 존재였다. 어쩌면 이러한 트라우마가 보부아르를 철학에 매진하게 만든 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철학 교수 자격 시험에 합격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했고 비로소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평생 서먹서먹했던 것 같다. 어머니 역시 보부아르의 여동생보다 지식적으로 엘리트에 속했던 보부아르를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런 관계가 평생 이어졌다. 어머니가 욕실에서 넘어지면서 병원에 입원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약 한 달간 어머니 곁에서 시간을 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보부아르는 죽어가는 어머니와 암묵적인 화해를 하게 된다. 가해자로 여겨왔던 어머니라는 존재와의 화해였기에 더욱 의미 있는 화해였다.

 

그 화해의 이면에 바로 보부아르의 철학 사상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되겠다. 타자와의 갈등을 넘어서는 과정이 곧 이 작품 속에서는 어머니와의 화해로 형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공감과 연대와 소통이 있었다. 보부아르는 죽어 가는 어머니로부터 그동안 가해자의 대명사라는 타이틀을 어머니로부터 해체할 수 있었으며, 어머니 안에서 어머니 역시 가부장제 속에서 타자로 살도록 강요받아 온 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발견하고 그로부터 자기 자신의 모습까지도 보게 되면서 내적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죽어 가는 어머니 곁에서의 한 달은 비록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보부아르에게는 새로운 삶을 부과한 셈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쓰인 이 작품을 통해 위로를 받고 치유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보부아르 자신 아니었을까. 애도의 객체가 애도의 주체에게 가져다준 의외의 선물이 곧 보부아르가 받은 위로 및 치유이자 그녀가 구현하려고 했던 실존주의적 윤리의 한 단면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 덕분에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더 생겼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등의 실존주의 철학자의 사상들을 살펴봐야 할까 보다.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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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폐지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9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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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와 한계를 생각하며


C. S. 루이스 저, ‘인간 폐지’를 읽고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 캐년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앞에 서서 비슷한 인상을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엄하다, 웅장하다, 압도적이다, 등의 표현은 제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실로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자신을 개미와 같이 작은 존재로 인지하게 되는 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현상이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타나 장엄한 자연을 보고 경탄하는 여러분에게 ‘그건 자연이 장엄한 게 아니라 실은 그렇게 느끼는 당신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이 질문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이 책은 루이스의 변증서로써 ‘순전한 기독교’의 1부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인간 본성의 법칙’, 혹은 ‘자연법’이나 ‘도덕률’이라고 부르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이고 선행적이며 범우주적인 법칙에 대해 루이스가 1943년 영국 더럼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옮겨놓은 글입니다.

객관적인 가치라는 게 존재할까요? 아니면 모든 가치는 주관적인 해석의 영역에 속하는 걸까요?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게 존재할까요? 아니면 모든 법칙은 상대적이어서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정해지기 나름일까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법칙이라는 게 혹시 존재하진 않을까요? 모두 너무나 오래된 질문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정답이 존재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저는 이 부분에서는 루이스의 생각에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저 역시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이고 선행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학습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어쨌거나, 누구나 알고 있는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우리 인간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한계랄까요?)까지도 저는 믿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 캐년은 저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과 무관하게 인간이란 존재에게 있어서만큼은 압도적일 정도로 장엄하고 웅장하다고 생각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건 그것들이 가진 가치를 제가 알아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해석의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경외심이 들 만큼의 경탄이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의 솔직한 느낌은 존재론적인 사유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인 순간의 저의 반응인 것이지요. 이성을 훌쩍 넘어서는 영역의 일인 것입니다. 

이성을 훌쩍 넘어서는 영역의 일. 루이스는 이 일을 담당하는 기관은 뇌도 아니고 장도 아닌 가슴이라고 말합니다. 뇌는 지성을, 장은 본능을 가슴은 정서를 의미합니다. 이어서 루이스는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뇌나 장이 아닌 가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정서라는 것의 의미를 한낱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상 정도로 치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게 사람을 사람다울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과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로 루이스는 상대주의에 천착한 교육 시스템은 가슴 없는 인간을 양산해 낸다고 주장합니다. 가슴이 없으면 뇌와 장만 남게 됩니다. 뇌를 가졌기 때문에 생각은 생각대로 하고, 장을 가졌기 때문에 행동은 본능에 따라 하게 되는 기형적인 인간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생각과 행동이 연결되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서란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보다 지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역할도 하며, 본능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자들을 마치 스스로 인간이라는 존재 밖에 있는 인간이라고 여기는,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가슴 없는 인간으로서 모든 가치의 절대성을 부수고 상대화시킴으로써 절대적 가치에 순종하지 않고 그것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도 (위에서 언급한 도덕률 같은 절대적 법칙을 말합니다) 바깥으로 나가서 도를 믿고 그것을 순종하는 사람들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루이스는 이런 시도를 하는 작자들의 최종 정복은 결국 인간 폐지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으로서의 특권을 버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계속 가지고 싶어 하는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행동이며, 이는 성취되지 못할 불가능한 바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한계도 모르고 이성이 모든 것인 것처럼 지껄이다가 행동으로 옮길 땐 자기 본능에 따라 저질러버리는 가소로운 인간들의 모습인 것이지요.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자명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어떤 것도 증명될 수 없다고. 도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그리고 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가치가 실은 그 자체도 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도를 거부한다면 모든 가치를 거부하는 꼴이 된다고. 도를 수정할 수 있는 권위는 오로지 도 내부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고. 도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도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도를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만일 우리가 가치라는 것을 갖고자 한다면, 실천이성의 궁극적인 평범한 진리들을 절대적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도가 모든 가치 판단의 근원이자 유일한 원천이라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 폐지를 향할 뿐이라고. 

저 역시 이 견해들이 굉장히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죄의식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을 포함한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루이스는 이 책에서 기독교 색채를 빼고 이야기를 진행했지만, 저는 루이스가 아마도 결국엔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관계, 즉 신론과 인간론으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 캐년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을 떠올리면 아마도 제가 머릿속에 그린 장면을 공감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도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에게 남기신 일종의 흔적, 혹은 하나님의 형상 닮은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있는 그 무엇에서 찾고자 하는 제 모습을 떠올리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15.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https://rtmodel.tistory.com/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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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후기 - 결국 책을 사랑하는 일
오경철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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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사랑하는 책으로


오경철 저, ‘편집 후기’를 읽고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편집자의 일이 궁금했기 때문은 아니다. 물론 애정하고 신뢰하는 신형철의 추천사도 한몫을 했겠지만, 무엇보다 부제, ‘결국 책을 사랑하는 일’이 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알았다. 약간의 판단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그 착오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이 부제의 강세는 ‘책을 사랑하는 일’에 있지 않고 ‘결국’에 있다는 것. 둘째, ‘책을 사랑하는 일’은 ‘책 읽기를 사랑하는 일’과 다르다는 것. ‘책’은 ‘책 읽기’를 넘어서는 개념이었다. ‘책 읽기’는 ‘책’이라는 물건을 사랑하는 마지막 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책은 읽히기 전에 기획되어야 하고, 저자에 의해 쓰인 원고를 편집하는 일련의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얻어지는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책은 읽히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팔려야 하는 목적도 가진다. 책은 내용적인 가치를 지니는 동시에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책 읽는 낭만적인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책을 만드는 지극히 현실적인 행위에 대한 이야기. 즉, 독자가 아닌 편집자의 생계를 포함한 실제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 수차례 길을 벗어나 보기도 하고, 곁길로 걸어보기도 하는 등 깊은 회의와 잦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책 만드는 일로 돌아오게 되는 이야기 (사랑의 힘이 아니면 무엇이랴!). ‘결국 책을 사랑하는 일’로 회귀하는 이야기. 그 가감 없는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는 편집자다. 숱한 초보 편집자들에겐 기라성 같은 존재일 것이다. 노장이라고도 쓸 수도 있겠으나 베테랑이라고 읽는 게 적합한 편집자인 것 같다. 여러 출판사를 옮겨본 경험, 출판사를 그만두고 외주로 생계를 이어간 경험, 일인출판사를 차려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다가 다시 따박 따박 월급이 나오는 출판사로 복귀한 경험. 유명 작가들의 책들을 편집했던 경험. 과연 책이 될까 싶은 책들도 책으로 만들어봤던 경험. 수십 년간 이렇게 글로 다 써내지 못한 숱한 경험들을 거치며 탄탄한 내공의 소유자가 된 저자는 이 책에서 책 만드는 일에 대해 책 만들어본 자만이 말할 수 있는 말들을 길게 써내려 간다. 언제나 어느 분야나 한 분야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의 말은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분야를 지원하는 자들, 그 분야에 막 진입한 자들, 혹은 그 분야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자들이 자칫 가질 수 있는 오해, 편견, 환상 같은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그 분야를 제대로 알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편집자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초보 편집자로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분들이 있다면, 혹은 편집자로 일하다가 회의에 빠져있는 분들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책이라는 물건이 가지는 다층적인 의미와 그것을 만드는 일에 대한 담백한 현실적 삶을 직시하고 혹시라도 거칠지도 모르는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작은 판단 착오로 읽게 되었지만,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나도 어쩌다 보니 곧 출간될 책을 포함하면 세 권의 저서를 가지게 되는 작가인데, 이 책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편집자의 역할과 의미를 조금 더 사실적으로, 그리고 무게감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을 저자로 만들어준 출판사 대표에게 숙연해진 마음으로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참 고맙습니다!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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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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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순정적인,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야’를 읽고

지금까지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중 가장 순정적이고, 가장 신파조에 가까울 정도로 통속적이며, 가장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답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평이한 소설이 아닌가 한다. 왜 그런고 해서 찾아보니,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1845년, 도스토옙스키가 24세가 되던 해에 대대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자신의 이름을 러시아 전역에 알리게 되는 작품 ‘가난한 사람들’이 발표되었고, 이 작품 ‘백야’는 1848년에 발표되었으니, 첫 소설 이후 3년 만에 쓰인 소설인 셈이다. 또한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 시절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으니, 우리에게 알려진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으로 진화하기 전의 작품인 것이다. 약 10년간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견뎌내야 했던 시베리아 유형과 의무 군복무 기간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얼마나 커다란 의미였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사례라 생각된다. 그가 길고도 깊은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과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비롯한, 소위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이라 일컬어지며 ‘인류의 자산’이라고까지 평가되는 대작이 탄생될 수 있었을까. 때론 원하지 않는 거대한 환란이, 비록 그것이 몸과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해도, 그것 아니면 결코 얻을 수 없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열매를 맺곤 하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환란에 마음 깊이 안타깝게 여기고, 또 이렇게 말하는 게 경솔하고 무례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넘어 그를 사랑하는 독자로서는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간질병을 얻고 평생 그것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지만, 그의 환란에 이런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게 된 독자는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리라. 그리고 이것은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때마다 겸허해지고 숙연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이 단편소설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가시적인 공통점은 가난과 사랑과 문학이고, 비가시적 공통점은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장광설 속에 숨어 있는 인간 본성과 심리에 대한 통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나’라고 소개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가난한 사람들’의 남자 주인공 마까르 제부쉬낀의 캐릭터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나이 어린 한 여자를 순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이 그렇고, 그 사랑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닮았다. 나아가, 그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주인공이 비뚤어지지도 않고 끝까지 순정을 간직한다는 점도 닮았다. 이 정도면 한 가난한 남자의 순애보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 가난한 남자와 한 가난한 여자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그린 이야기라면 3류 소설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류와 질적으로 다르다. 단순히 감성 팔이나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둔 하룻밤의 불꽃놀이 같은 이야기와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순애보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 이면에 흐르는, 적나라함과 통속이라는 탈을 쓴 인간의 본성 및 심리의 탁월한 묘사와 통찰에 맞춰져야 한다. 비록 가난하지만 무식하지도 무지하지도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도 가지고 있으며, 퇴폐적인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정도로 자기만의 우물 안에 갇히지도 않아 자신의 현재 좌표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주인공을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몽상가라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석영중 교수가 ‘작품 해설’에서 지적하듯이 그는 몽상가가 아니다.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약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몽상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결코 몽상가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소설 ‘분신’이나 1864년에 발표된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등장하는 주인공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작품 속 주인공은 정신병자이거나 정신병자에 가까운 인물로서 자기라는 좁은 우물 안에 갇혀 사회와 단절된 채, 마치 지하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캐릭터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과 ‘백야’의 주인공이 긍정적인 캐릭터의 소유자라면, ‘분신’과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은 부정적이고 퇴폐적인 캐릭터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네 작품의 주인공의 장광설 속에 묻어나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심리는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도스토옙스키 시선의 고유한 매력을 느낀다. 모든 인간은 이율배반적이라는 것. 그러나 아주 미세한 차이로 인해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네 인물 모두 가난을 공통점으로 가지기에 가난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은 인간 본성의 발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선행자도 될 수 있지만 범죄자도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정적인 캐릭터의 소유자의 생각과 행동에도 가볍지 않은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왜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야만 하는지를 말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짧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작품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봐야 하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면 명백한 오류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무래도 도스토옙스키의 정수는 5대 장편을 모두 아우르는 후기 작품들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여전히 도스토옙스키의 고유한 문체와 매력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그 맛을 보고 싶은 사람은 한두 시간 정도 시간을 내어 이 작품을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일부러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아껴두고 있다. 주로 단편과 중편들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이것들을 하나씩 읽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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