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남편 열린책들 세계문학 1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정명자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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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를 읽고


1876년 '작가 일기'에 실린 이 짧은 소설은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을 담고 있다. '뭐라고?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이라고?!', 하며 놀랄지도 모르겠다. 늘 광인의 변주곡 연주하길 즐기며, 지극히 통속적인 상황에서 지극히 심오한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내는 그에게서 외과의사의 메스 같은 날카로움이나 냉철함이 아닌 햇살 같은 따스함이라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건 도스토옙스키를 절반도 모르기 때문에 넘겨 짚은 성급하고 경솔한 추측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도스토옙스키가 외과의사의 메스이기만 했다면, 그가 아무리 러시아 대문호라 하더라도 결코 2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알려지진 않았을 거라고. 그렇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어두운 민낯을 해부하기만 한 게 아니다. 구원도 이야기한다. 진창과도 같은 참혹한 현실에 따스한 햇살 같은 구원의 빛을 비춘다. 이러한 면모는 후기작으로 갈수록 도드라지는데, 그가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온 이후라는 점,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어려움을 극복해내며 꿋꿋이 작가이길 고집해왔다는 점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말했다시피, 이 작품은 그가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을 남기고 있던, 그가 타계하기 5년 전에 발표된, 그의 철학과 신학이 무르익은 시기에 탄생한 소설이다.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아무래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지 않을까 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둘째 아들 이반은 무신론을 대변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가 무신론의 근거로 들고 있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인데, 어른들의 죄로 인해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고통받고 죽임을 당하는 현실 앞에서 기독교는 철저히 무능할 뿐이라는 논리였다. 이런 끔찍한 현실을 무방비 상태로 놓아두면서 기독교가 구원을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과 죽음을 묵인한 천국 따윈 거부하겠다는 게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장이었다. 아마도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이 대목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한다. 기독교인인 나 역시 하나님의 섭리라든지, 우린 하나님의 일부만 알뿐 다 알지 못한다는 인간의 한계를 내세워 설명하는 궁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부로 와닿는 현실적인 부조리에 대해 기독교는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있을지언정 '즉각적인' 답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탄이 사십 일 금식한 예수를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한 요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반이 지어낸 대서사시 '대심문관'을 빛나게 만드는 대심문관의 치명적인 논리와도 결을 같이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반의 논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순수함을 고결한 가치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스토옙스키가 급작사를 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2부에서 알료샤와 함께 본격적인 등장인물이 될, 일류샤의 죽음이 남긴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열두 명의 소년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을 관찰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어린아이는 미래이자 희망이자 순수함이었고, 이는 예수가 어린아이를 대하는 자세와도 동일했던 듯하다. 


이러한 시선이 이 짧은 작품 속에서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작품 속 어린아이는 가난하고 헐벗은 홈리스다. 술과 폭력과 음란에 사로잡힌 더러운 어른들의 손아귀에 붙잡혀 강제로 추운 겨울날에도 여름옷처럼 얇은 옷만을 걸친 채 밖에서 구걸이나 좀도둑질을 하도록 희생당하고 있는 불쌍한 생명이다. 이 아이를 묘사하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마음과 생각을 짐작해보면,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태어난 게 죄라도 된단 말인가, 가장 고결하고 순수한 생명이 저토록 유린당하는 현실에 과연 희망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하는 등등의 의문을 저절로 품게 된다. 


결국 이 아이는 동사하고 만다. 죽어서 천사가 되어 꿈을 꾸게 되는 장면이 제목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가 뜻하는 바다.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들은 모두 주인공처럼 그 어디에도 초대받지 못한 채 떠돌다가 객사하거나 동사한 생명들이었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크리스마스에도 선물이 주렁주렁 달린 트리가 놓인 따뜻한 집안이 아닌 지독히 추운 바깥에서 그 집안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하고 부러워하고 슬퍼하다가 육체적 한계에 다다라 생을 마감하게 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이 끔찍한 현실을 묘사한 부분은 아래에 옮겨본다.


"어떤 아이들은 뻬쩨르부르그의 관리들이 현관 계단에 내버린 광주리 속에서 얼어 죽었고, 어떤 아이들은 형편없는 영아원에서 굶어 죽었으며, 어떤 아이들은 사마라의 기근 때에 자기 엄마의 말라붙은 젖에 매달려 죽었고, 또 어떤 아이들은 3등 열차 칸의 악취에 질식해서 죽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참혹한 현실을 르포르타주처럼 보고하고 끝내지 않는다. 나는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 작품의 메시지를 찾는다. 


"이들 모두는 지금 여기에서 천사들로서 예수님 곁에 있으며, 아이 또한 이들 가운데 하나로 있으면서 이들과 이들의 죄 많은 엄마들을 축복하며 팔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이 아이들의 엄마들 또한 한쪽에 비켜서서 울고 있다. 모든 엄마들이 자신의 아들 딸들을 알아보고 이들에게로 날아와서 입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여기는 좋은 곳이니 이제 울지 말라고 달래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참혹한 현실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천국의 단면을 살짝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기독교가 할 수 있는 담백한 대답이라 생각한다. 이반 카라마조프처럼 '즉각적인' 해결책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이 대답이 가소롭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여기서 이반 카마라조프의 말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악마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붕괴되고 마는 그의 말로를 말이다. 또한 이반 역시 스스로가 기독교에게 원했던 ‘즉각적인’ 답을 갖지 못했다는 점 역시 기억해야 한다. 참혹한 현실은 가시적인 육신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그 이면의 근원적인 문제를 인간의 타락에서 찾는다.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는 바로 이 문제로부터 인간을 포함한 창조세계를 구속하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인 해답이다.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이 동반되는 참혹한 현실의 문제는 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육신의 빵은 곧 배고픈 상태를 유도하기 마련이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빵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처럼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빵, 곧 그리스도 예수다. 인간에겐 ‘즉각적인’ 답이 아닌 ‘궁극적인’ 답이 필요한 것이다. 전자는 일시적인 반면 후자는 영원하다. 물론 후자는 전자를 무시하지 않는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을 입고 있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의 근원을 가시적인 육신의 문제에 두고 그것만을 해결하려고 하는 인간의 한계를 그 누구보다도 명징하게 간파했을 뿐이다. 인간의 본성은 결국 신의 존재와 연결되기 마련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그 어느 작가보다도 인간을 잘 이해한 결정적인 증거라 생각한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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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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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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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파괴하는 구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온순한 여자‘를 읽고


도스토옙스키의 기발함이랄까 기괴함이랄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걸까. 이번엔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 아내를 테이블에 올려둔 채 상념에 잠긴 한 남자의 이야기다. 섬뜩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언제나 그렇듯, 이 작품도 결코 호러물로 전개되지 않는다. 상황보다 사람, 그리고 사람의 외면보다 내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다행스러운 건, 적어도 이 작품 속 주인공은 '분신‘이나 ’약한 마음‘의 주인공처럼 정신병원으로 끌려가진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증의 정도는 약한 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이 남자 역시 ‘분신’의 주인공이자 모든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 광인의 원형인 골랴드낀의 연장선에 있다. 한 가지 큰 차이라고 한다면, 주인공이 가진 파괴적인 자폐 기질의 총구가 자신이 아닌 아내를 향한다는 점이다. 이 독특한 부분에 대해선 조금 더 풀어볼까 한다.


먼저 주인공의 자폐 기질에 대해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자폐'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자폐증 환자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차라리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병적일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머릿속에 그리면 얼추 비슷하게 우리 주인공의 캐릭터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우리가 숨 쉬고 있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물, 아니 어쩌면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자기 안에 갇히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언제나 그렇듯,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을 때 우린 프로이트가 될 필요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들러가 될 필요도 없다. 그저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작품 속 인물의 개별적인 내면으로 들어가 두 눈을 뜨고 조용히 그 까발려진 민낯을 관찰한 후 나를 포함한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고찰하는 데까지 천천히 나아가면 된다. 


작품 속에서 드러난 자폐의 이유는 그가 장교였을 때 벌어진 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는 그 사건 때문에 은퇴하게 되는데, 요컨대 체면 혹은 자존심을 지키려다가 내면의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19세기 러시아 제국 시대 남자들에겐 명예가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다. 푸시킨이나 톨스토이 작품에서도 명예라는 단어는 심심찮게 다뤄진다. 20세기말에 한국에서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내 눈에는 조금 유치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러시아 남자들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상황을 극도로 거리꼈고,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면 당당히 목숨을 걸고 결투를 신청하는 게 남자다운 행동으로 여겨진 듯하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의 과거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결투를 신청하지 않았고, 이는 은퇴 이후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회자되었다. 그는 결투를 신청하지 않았던 결정에 대한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건 이후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킨다. 


은퇴 이후 그는 전당포 주인이 되었다. 그는 이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는 소신 있는 인물인 듯하다. 과거에 결투 신청을 하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를 입었을 때에도 스스로를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점이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골랴드낀의 여러 분신들과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남의 시선에 맞춰 살아가며 자아의 분열과 상실을 겪는 인물들과는 달라 보인다. 물론 이래도 저래도 결국 자기 안에 갇히는, 즉 병적인 자폐의 기질을 보이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이 작품 속에선 주인공의 이러한 소신이 아내의 자살을 유도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장이 열등감의 표출이듯, 자존감이 바닥인 사람들은 소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자존심을 부리는 과도한 몸부림의 일환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다. 그 소신이란 게 객관성과 합리성을 보유하고 있는지, 얼마나 건강한지가 관건이다. 


어느 날 전당포에 한 여자가 찾아온다. 제목에서 가리키는 '온순한 여자'이자 머지않아 그의 아내가 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될 인물이다. 가난한 이유로 가치 없는 물건까지 들고 와 돈으로 바꾸려는 그 여자에게 주인공은 마음을 두게 된다. 뒷조사를 하여 그녀의 생활 사정을 알게 된다. 이미 두 아내를 저승으로 보내고 세 번째 아내로 그녀를 점찍고 접근하는, 나이 쉰 살의 한 뚱뚱한 상인이 그녀에게 사탕 한 근을 사가지고 찾아가던 날 저녁, 우리의 주인공은 호기롭게도 그녀의 하녀를 불러 그녀를 그 자리로부터 빼낸다. 그리고 청혼을 한다. 스스로의 말을 비굴할 정도로 과도하게 반추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의외로 (주인공 생각에는 그녀가 고민할 가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상인과 자기를 감히 비교하다니,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승낙해 버린다. 우리의 주인공은 이 가난한 여자에게 나름대로의 구원을 베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구원이 과연 누구를 위한 구원이었던가?, 아니 누구를 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라고 묻는 듯하다. 차라리 그녀가 그 상인과 결혼했더라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인이 그녀를 찾아갔던 날, 그가 그녀를 빼낸 행동은 결국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파멸로 가는 샛길을 터준 셈이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면, 작품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방금 전에 자살한 아내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생각에 빠져있는 장면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방금 겪은 아내의 자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는 알지 못했다. 아마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결혼 후 그는 아내가 된 그녀에게 냉담하게 대한다. 그녀를 대할 때 그는 주로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하고, 스스로가 다른 류의 사람이자 수수께끼 같은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 어리석은 수작도 부리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렇게 하는 행동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듯하다. 마치 그녀를 앞에 두고 원맨쇼를 하고 있는 듯해 보일 정도다. 자존감이 극도로 낮은 자에게서 곧잘 나타나곤 하는 행동양식, 즉 허세일 것이다. 이 허세의 일부는 아마도 그가 그녀에게 구원자였다는 전적이 스스로에게 훈장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그녀는 거의 노예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느닷없이 전당포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기도 하고 외출을 오래 하기도 한다. 대화가 차단된 마당에 그녀가 조용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 역시 그에 대한 뒷조사를 해서 그의 과거를 알게 된다. 비겁자로 회자되기 시작했던 그의 이력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가 자는 동안 권총으로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도 한다. 둘 중 누군가가 죽어야만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아마도 그녀는 갈 데까지 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그녀는 결국 자신을 죽이게 되지만 말이다. 그녀는 점점 창백해져 갔고 또 쇠약해져 갔다.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우리의 주인공은 자기 눈앞에의 장막이 걷혔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혼자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직후였다. 그는 그녀에게 곧장 다가가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녀 옆에 앉아 드디어 대화를 건넨다. "우리……저……뭐든 이야기를 합시다!" 그리고 그녀의 발 밑에 허물어져 발에 입을 맞추는 등 환희에 찬 상태로 말한다. "……이렇게 일생 동안 당신을 숭배하게 해주오……" 그는 히스테리 같은, 혹은 열병에 걸린 것처럼, 혹은 광기에 찬 상태로 그녀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무심결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날 내버려 두리라고 생각했어요." 그 말은 마치 단검으로 그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동안 괴로웠다는 것, 지금도 괴롭다는 얘기를 했다. 다음과 같은 말도 한다. "나는 당신의 충실한 아내가 되겠어요…… 나는 당신을 존경할 거예요……" 그는 미친놈처럼 그녀를 포옹한다. 그리고 그가 잠시 볼 일을 보러 잠시 집을 비우게 되는데, 그가 집에 돌아오기 10분 전쯤에 그녀는 손에 성상을 쥐고서 돌연 창밖으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회심 (?)은 너무 늦었던 것이다.  


자살한 아내를 테이블 위에 두고 있는 주인공.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를 눈먼 여인이라고 부르면서 그가 그녀에게 어떤 천국을 가져다주려 했는지 아냐고 묻는다. 그는 스스로 죄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어리석었다는 말을 퍼붓고, 자신의 진심을 왜 이해하지 못했냐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누가 진정 어리석었는지, 누가 진정 눈이 멀었던 것인지 말이다. 또한 아내가 자살한 상황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나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아닌 아내를 향한 원망으로만 가득 찰 수 있는지 나는 그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가 아내의 발아래에 엎드려 키스를 하며 사랑을 맹세하는 행동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나는 의심스럽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라는 사람을 품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안에 갇혀 있을 뿐이지 않았을까 싶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이 고백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인공이 그녀와 결혼한 사건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그녀가 유일하게 잘못한 게 있다면 온순했다는 점일 텐데, 온순하다는 게 잘못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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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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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남편 열린책들 세계문학 1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정명자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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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낙원, 그리고 그것의 한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우스운 사람의 꿈’를 읽고


1877년 '작가 일기'에 수록된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우스운 사람이다. 사람들은 요즈음 나를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에 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 작품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최근에 다시 읽은 '분신'의 골랴드낀이나, 독서모임에서 같이 읽은 '약한 마음'의 바샤, 그리고 '뽈준꼬프'의 뽈준꼬프까지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다시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소외되고 단절되고 자기 안에 갇혔다는 점에서 이 모든 인물들은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광인의 변주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 화자는 스스로를 '우스운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우스운'이라는 의미는 '웃기는'이 아니다. '비웃음을 당하는'에 가깝다. 그는 코미디언이나 개그맨이 아니라 정신이 아픈 자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우스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그는 자신을 비웃는 타인에게 화내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을 다정스럽게 바라볼 정도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병적인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그는 작년에 자살을 결심한 적이 있었다. 자살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자살하기로 결심한 지 두 달째가 되던 11월 3일, 어떤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캄캄했던 밤, 그의 눈에 띈 조그만 별 하나가 어떤 상념을 불러일으켰던 밤, 당장 집에 가서 두 달 전부터 계획했던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던 그날 밤, 그는 하늘을 쳐다보던 중 어떤 여자아이를 만나게 된다. 그 여자아이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 절박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화를 내고 집으로 가버린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다시 망설인다. 그러다가 선잠이 든다.


작품의 본론은 그가 잠든 후 꾼 꿈의 내용이다. 꿈 속에서 그는 심장에 총을 겨누고 자살을 실행한다.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는 무덤으로 옮겨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관 속으로 스며든 물방울이 그의 눈 위로 똑똑 떨어졌고, 그는 참지 못한 채 신에게 처음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빈다. 소원이 이루어진 것일까. 돌연 사람의 형상을 한 어떤 존재가 다가와 그를 데리고 날아가기 시작한다. 지구와 비슷한 별에 다다르는데, 그를 데려간 존재는 그 별이 지구가 아니라 여자아이가 도움을 요청할 때 그가 바라보고 있던 별이라고 알려준다. 


어느새 그 존재는 사라지고 그 별에 도착한 그는 그 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생활하게 되는데, 이후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그 별 사람들에 대한 주인공의 관찰 보고서가 펼쳐진다. 그가 본 그곳은 마치 죄와 악이 들어오기 전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자세한 묘사는 여기서 생략하겠지만, 도스토옙스키가 가진 기독교 세계관이 잘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정확한 기작은 언급되지 않지만, 그의 존재 때문에 그곳이 타락하게 된다. 거짓과 위선과 혐오와 차별과 배제 등이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금세 그 낙원을 물들여버린다. 그가 자기 맘대로 스스로의 생명을 빼앗았던 바로 그 지구와 다를 바 없는 곳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을 꼽으라고 하면 작품 속 주인공이 11월 3일 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작은 별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여자아이가 그의 팔을 잡아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을 선택할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작품 전체를 함축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생각한다. 내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가 고개를 들어 어딘지도 모르는 별 하나를 바라보는 장면의 의미는 천국을 향한 인간의 막연한 바람 같은 것이다. 반면, 그렇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여자아이가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천국은 저 하늘 위 어딘가가 아니라 우리 바로 옆에 존재한다는 것, 곧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장망성 (장차 망할 성)으로 버려지는 공간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장소라는 것이다. 주인공이 꿈에서 깬 이후, 자살 계획을 말끔히 취소하고 가장 먼저 그 여자아이를 찾으러 간 행동은 나의 이 해석을 잘 지지해준다. 그 여자아이는 그에게 있어 구원의 단초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 순간 덕분에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생을 마감하고 싶을 때,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만나 완전한 무기력함을 느낄 때, 우리의 눈은 텅 빈 눈이 되어 허공을 응시하게 된다. 바로 그때 내 옆에 있는 약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눈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이 시작되는 순간일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상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내가 함부로 내 생명을 앗아가지 말아야 할 이유일 수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통해 말했던 하나의 실천적인 사랑과도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그가 이십 대일 때 심취했던 공상적 사회주의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진정한 낙원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와도 연결된다. 또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 스스로의 계획과 노력만으로 진정한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까지도 함축하지 않을까 한다. 구원은 철저히 외부에서 오는 것이며 전적인 은혜이기에 수직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천국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바로 이곳에 임하는 것이기에 수평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을 가기 전에 썼던 작품과 그의 나이 오십이 넘어 쓴, 이 작품을 포함한 후기 작품들은 그 끝이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초기작들은 도스토옙스키스러운 인간이 가진 극한의 민낯을 까발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후기작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구원의 서광이 비춰지는 듯하다. 그는 실로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바닥까지 파헤친 작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한 이유는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닌 듯하다. 인간의 한계를 통찰한 뒤 인간에서 신으로 시선을 돌려 구원을 소망하는 글쓰기로 나아갔다는 사실이 그를 대문호라는 타이틀에 부합하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감상문을 마치며 나는 다시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이 된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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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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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주제도 빈약한 두서없는 이야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백 살의 노파’를 읽고


이 단편 역시 1876년 '작가 일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실망스러울 정도로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모호할뿐더러, 단편소설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임팩트도 없고, 도스토옙스키스러운 면도 보이지 않으며, 작품 속 화자 (도스토옙스키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스스로도 마지막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시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벼운 데다가 주제도 빈약한 이야기이다. 사실, 한 달 동안 들은 사건들 가운데서 무언가 놀랄 만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계획해 보지만, 막상 일에 착수하면 쓰기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적절하지 않은 내용이 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네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하지 말라'는 격언도 문제다. 그래서 결국에는 두서없는 이야기만 남게 되고 마는 것이다……."


작품은 한 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와 그 이후를 화자가 상상한 이야기로 구성된다. 앞의 이야기는 부인과 노파의 동선이 자꾸 겹치는 우연이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화자의 상상은 내겐 그저 백네 살 (그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굉장히 장수한 경우)의 노파가 손주들을 보러 왔다가 평화로이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두 이야기 사이의 매듭은 긴밀하지 않았고, 부인과 노파의 동선이 겹치는 우연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았으며, 그 부인이 노파에게 준 5 코페이카 역시 별다른 의미 없이 노파가 마지막 순간 한 손에 쥐고 있었을 뿐이다. 이야기 자체도 아무런 매력이 없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부분도, 행여나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법한 부분도 없는 듯했다. 작품을 마무리하며 화자는 늙은 노파의 죽음은 다른 죽음과는 달리 뭔가 무게가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 그런지 진부하게 느껴졌으며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마감에 쫓겨 즉흥적으로 써버린 짧은 토막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작품의 마지막 단락도 도스토옙스키 스스로가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옙스키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 대문호도 이런 습작 같은 글을 썼구나 싶어서 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그의 전 작품을 읽어나가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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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힘, 시선에 변화를 가져오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농부 마레이’을 읽고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후기작인 5대 장편 중 네 번째 작품 '미성년'을 완성한 후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 남기고 있던 1876년 2월 그가 독자적으로 발간했던 '작가 일기'라는 월간지에 실린 회고록 같은 단편소설이다. 같은 단편이지만, 얼마 전 읽었던 백야 외 여섯 작품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 그러니까 시베리아 유형 전에 쓰인 작품에 해당된다는 점은 이 작품과의 큰 차이점이다.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죽음의 코 앞에서 구원 받은 자의 글은 아무래도 그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의 기억은 29세 시절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억은 다시 9세 때의 과거로 우리를 데려간다. 말하자면 두 번의 액자식 구성이 사용된 작품이다. 1876년 현재의 화자는 ‘죽음의 집의 기록’을 15년 전에 쓴 작가다. 29세의 화자는 바로 그 ’죽음의 집’ 소속 유형수다. 그리고 9세의 화자는 귀족 집 자제로서 아직 어린 소년이다.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농부 마레이는 이 어린 소년의 집 소유의 농노다. 참고로, 농도제 폐지는 1861년,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가 마흔이었을 때에 실행된다.


현재의 화자는 자신이 29세 유형수 시절의 어느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부활절 축제 둘째 날이었다. 그 주간은 간수들도 유형수들도 모두 술을 마시며 자유를 누리는 게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화자는 한 따따르 인이 여러 명의 농부들에 둘러싸여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곳으로부터 줄행랑을 친 직후였다. 한 폴란드 인이 지나가며 저런 강도 같은 자들이 싫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화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용수철처럼 다시 그 현장으로 돌아간다. 폭행 당한 그 따따르 인은 시체처럼 누워 있었고 그 위엔 털옷이 덮여 있었다. 현장을 떠난 화자는 쇠창살이 쳐진 창문 맞은편에 있는 자기 자리로 숨어 들어 누워서 회상에 잠긴다. 유년기의 소중한 추억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9세 때 혼자 산에서 놀다가 늑대가 온다는 환청을 듣고 공포에 질려 뛰쳐나오던 그를 따뜻하게 안고 달래주었던 농부 마레이를 만났던 그 짧은 순간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 9세 소년의 기억은 20년의 시간을 초월하여 29세 유형수의 생각과 마음 속으로 침투했다. 그리고 따따르 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농부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무식하게 폭행을 가하던 농부들에 대한 모든 적의와 분노가 기적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들 역시 마레이와 똑같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정신을 지배해 버린 것이었다. 이어서 그들을 혐오했던 폴란드 인조차 불행한 사람으로 보게 되었다. 


동일한 사건이나 사람을 해석하는 시선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내 안에서도 다를 수 있다. 해석은 주관적인 성향을 띠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부 마레이에 대한 기억 전후의 화자의 시선을 비교하면서 나는 조금 다른 생각도 해 보게 된다. 객관적이기만 한 해석은 존재할 수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덜 주관적인, 그러니까 조금은 더 객관적인 해석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냐고. 습관대로, 살아온 대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사건과 사람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선은 악의가 없다 하더라도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에게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속한 좁은 우물 속 세상 안에서만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다양성과 다름이 배제된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언제나 폭력성을 띠는 법이다. 나아가, 이런 수평적인 다름만이 아니라, 동일한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을 축으로 하는 수직적인 다름도 해석의 객관성을 증대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농부 마레이에 대한 기억이 화자의 시선에 전복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내겐 도스토옙스키의 신앙고백으로 읽혔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의 시선은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농부 마레이를 만나며 시선의 전복을 경험한 화자는 곧 예수를 만나 전복적인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을 장착한 그리스도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적의와 분노의 대상이 긍휼과 연민의 대상으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 거기엔 비록 폭력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일지라도 어떤 면에서는 그들도 농부 마레이처럼 어린 아이의 기억에 따뜻한 각인을 심어줄 만큼 인간적인 심성을 지닌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들을 비난하고 비방하는 나 역시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그리고 인간의 근본적인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깊이 통찰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이 녹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나는 시선의 변화를 경험했는가? 경험했다면, 그 시선을 간직하고 일상에서 적용하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인간에 대한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아, 열 페이지도 안 되는 이 짧은 소설이 한 권의 두꺼운 신학책이 하지 못하는 성찰을 하게 만들다니.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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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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