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반딧불 강
미야모토 테루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건조하지만 따뜻한 서정성, 그리고 환상 이미지의 효과적 활용
미야모토 테루 저, '반딧불 강'을 읽고
'그냥 믿어주는 일'에서 저자가 썼듯이,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1977년, 세상에 먼저 선보여 다자이 오사무 상까지 받은 작품은 '흙탕물 강'이었다. 하지만 먼저 쓰기 시작했던 작품은 '반딧불 강'이었다. 1년 늦게 출간된 '반딧불 강'은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 두 작품은 미야모토 테루의 데뷔작인 동시에 이르게 찾아온 사회적 성공이었다.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그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만든 '환상의 빛' 역시 1979년 출간이었다. 일반적으로 후기작으로 갈수록 원숙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 많은 데 비해 미야모토 테루는 작가로서의 모든 것이 초기작에 집중된 듯하다. 작가로서 타고난 재능이 작품을 거듭할수록 점점 퇴색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독특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출간이 늦어졌을 뿐 '반딧불 강'이 저자가 소설가로서 쓰기 시작한 첫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소설의 완성도는 정말이지 탁월했다. 약 백 페이지 정도 되는 중편소설이지만 초반부터 툭툭치고 가는 거리낌 없는 문장들로부터 나는 대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선을 넘지 않는 건조한 단문들의 조합과 그것들이 그려내는 서정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 가운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서사까지 도저히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두 시간 채 되지 않아 완독 할 수 있었다.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분명 미야모토 테루가 가진 힘은 내겐 충분히 매력적이다.
'반딧불 강'에는 '흙탕물 강'과 비슷한 분위기가 흐른다. 하지만 나는 '반딧불 강'을 더 우위에 두고 싶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미야모토 테루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건조하지만 따뜻한 서정성'이 더 돋보인다는 것. 둘째, 미야모토 테루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을 '환상 이미지'가 영리하게 활용되었다는 것. 이 글은 이 두 가지를 풀는 식으로 정리해 볼까 한다.
먼저 '건조하지만 따뜻한 서정성'이라고 쓴 표현은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소설의 지향점 같은 것이다. 드러내놓고 따뜻한 이미지는 부담스럽고,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기만 한 이미지는 매력이 없다고 보는 나는 이 둘의 적절한 조합이 서정성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한 소설은 사람이 아니라 텍스트이기에, 건조함은 단문으로, 따뜻함은 등장인물의 간접적인 감정 표현으로 넌지시 보여주는 방식이 나는 조금 더 서정적인 소설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미야모토 테루는 이러한 기술을 탁월한 구사하는 소설가인 것이다.
'흙탕물 강'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뭐랄까, '반딧불 강'에서 나는 조금 더 진한 우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우수는 두 소설이 다루는 서로 다른 내용에 있기보다는 저자가 그 내용을 풀어나가는 형식에서 비롯된다고 느꼈다. 특히 자연에 대한 묘사가 더 풍성했는데, 그 묘사들과 조화롭게 흘러가는 인물들의 서사와 감정의 전개가 예사롭지 않았다. 작품 속 세 개의 소제목 중 두 개도 모두 계절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하나는 '눈', 다른 하나는 '벚꽃'. 마치 소설 속 이야기가 하나의 그림으로 각 소제목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은 '흙탕물 강'에서도 느꼈던 것처럼 두꺼운 유화가 아닌 여백이 풍성한 수채화였다. 후 불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려한 기억처럼 그렇게 이 작품은 내게 다가왔다.
두 번째 이유는 '환상 이미지'의 활용인데, '흙탕물 강'에서도 이 이미지는 '귀신잉어'라고 표현되는 거대한 잉어로 나타났다. 이것은 두 주인공 남자아이, 노부오와 기이치가 처음 만났던 날 둘을 엮어주는 다리가 되어주었고, 작품이 끝나는 장면에서도 나타나 둘의 원하지 않던 이별을 기념하는 기표가 되어주는 듯했다. 하지만 귀신잉어의 이미지는 작품에서 하나의 신기한 관찰 정도의 의미만 가질 뿐 그 이상의 무게를 가지진 않았다.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반면, '반딧불 강'에서 활용된 환상 이미지인 '반딧불'은 이 작품 속에서 어떤 기적 혹은 신적 이미지까지 연상시키는 신비로 그려지는데, 등장인물들의 내적 고민, 갈등, 슬픔들을 해소시켜 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어찌 보면 범신론을 믿는 지극히 일본적인 문화가 깃들어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 반딧불의 이미지 활용법은 아주 영리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일종의 해방과 탈출구의 이미지 혹은 위로와 치유의 이미지로 부각되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그것의 정점을 찍는 효과를 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문체의 소유자 미야모토 테루의 작품을 다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책장엔 '환상의 빛'에 이은 서간체 소설 '금수'가 놓여 있다. 시간을 두고 아끼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바로 읽고 싶지만 이것까지 읽으면 금세 바닥이 날 테니까.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미야모토 테루 읽기
1. 환상의 빛: https://rtmodel.tistory.com/1169
2. 생의 실루엣: https://rtmodel.tistory.com/1241
3. 그냥 믿어주는 일: https://rtmodel.tistory.com/2176
4. 흙탕물 강: https://rtmodel.tistory.com/2185
5. 반딧불 강: https://rtmodel.tistory.com/2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