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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강
미야모토 테루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한 편의 수채화
미야모토 테루 저, '흙탕물 강'을 읽고
문체에 이끌려 계속 읽게 되는 작가의 작품을 읽다 보면 독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순수한 유희를 맛볼 수 있다. 어떤 작가의 사상이나 주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내가 원하는 특정 부분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내 의지의 관철, 혹은 기대의 충족에 머물고 만다. 반복되면 자칫 확증 편향의 일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내용(사상이나 주제)이 아닌 형식(문체)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적어도 이런 독서의 부작용은 피할 수 있으며, 그 덕분에 새로운 작품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처음 읽는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처럼 순수한 기대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따라오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
'흙탕물 강'은 한 편의 수채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남긴 여운과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지만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특수성을 가지지만 보편성을 결코 잃지 않은 이야기. 그래서 독자들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나를 대입시켜 읽게 되는 이야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 유화처럼 강렬하고 두꺼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가 아닌, 수채화처럼 맑고 순수하여 물에 지워질까 조바심이 나는 이야기, 그래서 더욱더 아련하고 아끼고 싶어지는 이야기 말이다.
이 작품은 비가 오면 금방 흙탕물이 되고 마는 강 주위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 전쟁이 끝난 지 십 년이 지난 현재, 여전히 작품 속 아버지 세대는 전쟁의 후유증이 몸의 상흔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생존자들이다. 전쟁 때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녀도 낳고 생계도 겨우 유지하며 살아가는 서민들이다. 저자의 눈은 특별히 이들의 자녀에게로 향한다. 전쟁을 겪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을 보며 전쟁이 무엇인지 그것이 남긴 상처가 무엇인지 알아간다. 배우는 노래조차 전쟁 중 어른들이 부르던 노래일 정도로.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선명하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우동 집 아들 노부오와 최근에 강 건너편으로 이사 온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 기이치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짧은 기간,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이 줄거리를 이룬다. 노부오는 몸이 약한 탓에 늘 집 안에서 창문으로 강을 내려다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기이치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어머니는 몸을 파는 일을 한다. 기이치에게는 긴꼬라는 이름의 두세 살 위의 누나도 있다. 둘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집도 땅 위에 지은 집이 아닌 물 위를 떠다니는 조그마한 배다. 전쟁의 상처는 서민들 일상의 바닥까지 침투하여 여전히 삶의 근간을 쥐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달리 설명하진 않지만, 기이치와 긴꼬, 그리고 매춘부로 살아가는 그들의 어머니는 전쟁 후 살아남은 서민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노부오의 눈에 어느 날 기이치가 눈에 들어온다. 여덟 살 정도 나이의 사내아이들이 그렇듯 둘은 금세 친해진다. 긴꼬도 알게 되고 그들의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노부오의 부모도 주위의 이웃들로부터 주워들은 모양인지 알고 있는 눈치다. 모두 쉬쉬 하는 분위기,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면 기이치와 긴꼬는 수치와 분노를 느끼는 듯한 장면들을 저자 미야모토 테루는 결코 직설적이지 않게 보여준다. 독자가 개입하여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그려주는 것이다.
이야기는 기이치의 집인 조그만 배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불법 체류 같은 이유였다. 얼마 전 노부오는 기이치의 어머니가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어렴풋이 보게 되고 감정과 사상의 혼란을 겪으면서 기이치와 긴꼬와의 관계도 소원해진 상태였다. 마침내 그들이 떠나는 날, 천천히 강을 따라 움직이는 기이치의 배집을 따라서 뛰어가며 노부오는 기이치를 부르고 기이치를 만나던 날 처음 함께 보았던 귀신잉어가 배를 따라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 한다. 그러나 배집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한 채 점점 더 멀리 사라져 갈 뿐이었다. 그리고 작품은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독자로서 읽어도 아름다운 소설이었지만, 작가로서 읽었을 때 더욱 내겐 배울 게 많은 작품이었다. 서정성과 묘사하는 기법들, 인물들 관계 설정과 그 사이에 흐르는 갈등 및 아픔을 과장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은 채 다루는 방식들을 하나씩 배울 수 있었다. 언젠가 완성할 '동수'에서도 꼭 활용해야 할 방법들일 것이다.
1977년 다자이 오사무 상을 받았던 이 작품에 이어 같은 책에 실린 1978년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던 '반딧불 강'도 마저 읽어야겠다. 이런 감성이 좋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미야모토 테루 읽기
1. 환상의 빛: https://rtmodel.tistory.com/1169
2. 생의 실루엣: https://rtmodel.tistory.com/1241
3. 그냥 믿어주는 일: https://rtmodel.tistory.com/2176
4. 흙탕물 강: https://rtmodel.tistory.com/2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