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난 이유, 내가 남은 이유
토니 캠폴로.바트 캠폴로 지음, 노종문 옮김 / 비아토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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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선?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 나라?


바트 캠폴로, 토니 캠폴로 공저, '내가 떠난 이유, 내가 남은 이유'를 읽고


신앙생활을 함께 하다 보면 떠나는 사람도 있고 남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기를 택한 사람은 떠나는 이에게 왜 떠나는지 묻고, 떠나기를 택한 사람은 남은 이에게 왜 남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런 일화를 한두 차례 이상 듣게 되면 자문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떠난 이는 자신이 왜 떠났는지를 묻게 되고, 남은 이는 자신이 왜 남았는지를 묻게 되지요. 문제는 이 질문이 양쪽 모두에게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계속 묻고 싶지요.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어느 선택이 선이고 악인지 말입니다. 글쎄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여전히 상대방을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것을 예수의 가르침 중 하나라고 인정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결론을 내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한 편으로는 진부한 논리 전개로도 읽힐 수 있지만,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이 책 속의 대화는 지금, 여기에서도,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또 충분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을 비방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책 속의 대화 자체가 소중하다는 다소 맥 빠지는 평가를 내리는 데에 그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분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뭔가가 아쉬웠습니다. 


아쉬운 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남은 자'로 나오는 아버지 토니 캠폴로의 입장은 그동안 익숙히 봐 왔던 기독교 변증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근본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답니다. 저는 토니의 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가 예수의 신성(하나님다움)과 인성(인간다움)을 설명하며 둘은 다른 게 아니라 동일한 것이며 하나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인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라는 것을 풀어내는 부분, 그리고 성령의 열매가 사실은 인간다움의 자질들을 나타낸다고 하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감동까지 느꼈답니다. 그러나 나머지 변증들은 제가 바트였다고 가정해도 설득력이 크지 않아 보였습니다. 아마도 저 역시 복음주의 신학책들의 언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들의 연속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토니의 입장을 이해할 뿐 아니라 거부할 마음도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때 잠시 '떠난 자'였지만, 이제 다시 '남은 자'가 된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들 바트 캠폴로의 입장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으로는 다 이해가 가진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남은 자' 측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신념이 작동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트가 복음주의자였다가 세속주의자, 영적인 자연주의자(표현도 근사하지 않나요?), 세속적 인본주의자로 입지를 바꾼 계기는 이 책에 따르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자전거 사고였습니다. 사고 후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되면서 그는 세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첫째,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결국 뇌 안에 있다는 것. 둘째,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일찍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셋째, 지금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라는 것, 즉 이번 생이 유일하다는 것, 다시 말해 내세는 없다는 것. 굉장히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이 매력적이긴 했지만, 왠지 저에게는 일종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아는 여러 지인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여 바트와 정반대의 길로 더욱 매진하고 있기도 하거든요. 바트는 또한 이런 변화가 자신의 의지적인 선택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땐 바트는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계기로 그동안 쌓아왔던 의심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의 뭉터기들이 한데 모여 세속적 인본주의의 길로 걷기를 선택한 것 같았습니다. 선택한 이후에 논리로 후속작업을 하며 빈틈을 채웠던 걸로 보였습니다. 또한 그가 거의 성경처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19세기 후반의 작가 로버트 잉거솔이라는 점 역시 그의 변증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바트의 선택이었겠지요.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의 글을 읽고 신봉하는 것처럼 돌변하는 것, 자기에게 일어난 상황들이 로버트 잉거솔의 책에 있는 논리로 다 설명이 되는 것 같이 느꼈던 것, 이런 걸 확증편향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 바트가 조금만 나중에 태어났다면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서 로버트 잉거솔 말고도 더 많은 지지자들을 만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렇게 되어도 그는 그걸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바트의 말들은 유려하게 보였지만 설득력은 모자란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는 말이지요.


두 사람의 차이를 비교 대조 하면서 토론 거리를 찾아내고 곱씹어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보다 저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신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가?"입니다. 두 질문은 겹치는 부분도 있겠네요. 책에서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사실 이 질문들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수만 번 생각해 봤던 질문이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성적으로 조금 따지면서 대답을 해 보자면, 저 두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네요. 먼저 '선함'의 정의를 짚어야 하고, 다음으론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짚어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하위 질문에 대답이 갖춰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 하나하나가 모두 커다란 신학적인 주제들이라 저의 미천한 지식으로는 당연히 뭐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지만 저의 일반론적인 입장은 신 없이도 인간이 보는 관점에서는 선하게 살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보는 관점에서는 선하게 살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할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이 모두 다 이해되지는 않잖아요. 선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고백하면서도 우리 눈에는 때때로 하나님이 선하게 느껴지지 않기도 하니까요. 이런 면에서 바트는 어쩌면 영리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마련해 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시켜 버리면 선하다는 것의 정의를 그저 인간들의 눈에 맞추면 되는 문제이니까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저의 입장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잖아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인데, 그 통치자를 믿지도 않고 없다고 하는 사람이 그곳에 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트의 경우는 사랑을 실천하면 마치 신 없이도 선을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제가 연재하는 글에 썼던 부분을 발췌해서 아래에 옮겨 봅니다.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율법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다.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자기를 쪼개어 산 제물로 드리지 않는, 내용이 없고 형식만 남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가증한 제사와 같다. 이는 종교생활에 다름 아니다. 반면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조건적일뿐더러 궁극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에 지속할 수 없고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고 유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발현되어야만 한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다르지 않은 마음가짐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어떤 존재일까. 이웃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신앙과 일상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


그렇습니다. 바트가 믿는 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선 인간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바트는 인간의 악함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악함의 희생자들로부터 어찌 하나님이 존재하면 이럴 수 있냐고 따지기는 하지만, 인간이 힘을 합치면 마치 선을 행할 수 있고 사랑도 실천할 수 있는 것처럼 철저하게 인간의 힘을 믿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극명히 보았답니다. 구원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 구원은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것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답니다. 


특히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문장은 도스토옙스키 후기 작품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다뤄져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랬고, '악령'의 스따브로긴과 표뜨르를 위시한 5인조가 그랬으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과 스메르쟈꼬프가 그랬지요.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신의 부재 속에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곧 혼돈과 파국으로 치닫는 것과 같다고요. 누군가는 혼돈을 자유로 착각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어떤 제한 속에서도 자유를 만끽하기도 하죠. 저는 인간은 후자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만드신 건 하나님이라고 믿고요.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으면서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이런 면에서 바트는 인간을 너무 맹신하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니까요. 바트가 사역하는 세속주의 인본주의 채플에서 행해지는 이웃 사랑이 과연 얼마나 지속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변죽만 울리지는 않을지 염려도 됩니다.


토니와 바트의 합의점은 사랑입니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렇게 정리되고 있어요. 그러나 방법론에서 합의를 본다고 해서 합의가 될까요? 저는 의문이랍니다. 다행스럽게도 바트는 어떤 기적적인 일이 생겨 다시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주저하지 않겠다고 말해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이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토니 캠폴로의 마음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트를 무신론자가 아니라 여전히 유신론자 경계에 있는 불가지론자로 보게 됩니다. 그의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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