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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평점 :
어쩌다 매일 읽고 쓰고 달리게 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매일 하는 일이 있다. 읽고 쓰고 운동하기. 약 십 년 전부터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내겐 일종의 구원의 통로였다. 인생에서 아주 잠깐 잘 나가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일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다. 실패를 몰랐다. 책을 읽느니 차라리 논문을 읽었다. 글을 쓰느니 논문의 초고를 쓰거나 발표 자료를 준비했다. 집중력이나 지속력이 아닌 오직 재미를 위해 운동을 했다. 당연히 삶의 균형은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일에 치우친 삶을 성공자의 그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목표는 피라미드 상층부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철저한 성공지향적인 가치관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런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내 인생의 최고로 낮은 점에 이르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읽고 쓰고 운동하기, 이 세 가지를 내 삶에 아무런 면역 거부 반응 없이 자연스레 장착시키게 된 건 오로지 내가 그 당시 깊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고 구원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절박했다. 에고가 붕괴된 내면은 취약한 상태다. 무언가가 깃들기 쉽다. 그 시기에 누구를 만나게 되는지, 무엇을 하게 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현저하게 달라지곤 한다. 다행히 나에겐 은인과의 만남이 있었다. 생애 첫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난 바로 그날이었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다. 언제나 진정한 구원은 외부에서 오는 법이다. 그 만남을 시작으로 나는 다시 책을 읽게 되었다.
중학생 이후 독서다운 독서는 처음이었다. 읽고만 있을 수 없었다. 쏟아내야 할 곳이 필요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던 신앙도 그 시기를 겪으며 안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고, 어린 아들과 둘이 미국에서 외나무다리 같은 삶을 살아내야 했던 시기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글쓰기밖에 없었다. 원래 운동을 좋아했던 나도, 커리어가 정점을 향해 가는 시기에 처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당시엔 운동하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몸은 망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것도 모른 채 나를 더 혹사시켰다. 그러다가 경미한 뇌경색 증상으로 한 번 쓰러지기도 했고, 두통과 편두통 때문에 매일 진통제를 달고 살았으며, 높은 혈압을 잡기 위해 혈압약을 먹기 시작했다. 키 180인 나는 몸무게 93킬로그램까지 찍었다.
읽고 쓰기 시작하면서 잃었던 신앙도 다시 방향을 찾아갔다. 다시 운동도 하기 시작했다. 두통도 편두통도 가끔 불청객처럼 찾아오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 4년째인 2026년 4월 현재, 나는 몸무게 85킬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세 달째 달리기를 지속하고 있다. 읽고 쓰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나는 매일 읽고 쓰고 달린다. 누군가가 나에게 "Who are you?"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매일 읽고 쓰고 달리는 사람이라고. 부디 이 대답을 오래도록 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지인이 이 책을 선물해 주었다. 하루키 책은 우선순위에서 미뤄두었기에 그리 반갑진 않았지만 '달리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하루키처럼 나도 쓸 수 있다면 영광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물 받자마자 이틀 만에 읽어버렸다. 이 책은 에세이를 빙자한 회고록이다. 단 인생이라는 두루뭉술한 주제가 아닌, 달리기라는 비교적 구체적이고 명확한 주제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정리한 산문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소설가로 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매일 10킬로미터를 수십 년간 달리고 있다. 이른 아침에 달리기를 마치고 점심 먹기 전까지 글을 쓴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해 오전 중에 일을 모두 마친다. 오후에는 휴식을 취한다. 독서도 하고 산책도 하고 소소한 인간관계도 한다. 그는 이 단순한 삶을 매일 반복한다. 1949년생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현재 77세다. 그는 지금도 매일 달린다. 그리고 매일 쓴다. 이 두 가지 동사가 그의 정체성을 이룬다. 그는 러너이자 작가이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회고록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정체성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밝힌 책이라 하겠다.
매년 마라톤 풀코스를 뛰고 철인삼종경기에 출전하는 하루키 할아버지를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동시에 다작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책을 출간하며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하루키 할아버지도 떠올려 본다.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만으로 나는 괜스레 흥분이 되고 묘한 기쁨을 느낀다. 아마도 무언가를 묵묵히 꾸준하게 하는 고집스러운 사람의 조용한 승리가 내겐 전율을 가져다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를 보며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가 작가이기만 해서는 실망하는 면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러너였다. 지금도 러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실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나로부터 영원한 실망 거부권을 획득해 버린 것이다.
책에는 달리기 이야기만 나오진 않는다. 소설가에게 필요한 자질을 세 가지로 요약하는 부분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재능, 집중력, 그리고 지속력이 바로 그것이다. 재능은 선천적인 것이지만, 집중력과 지속력은 후천적이어서 본인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다. 재능까지 타고난 하루키는 집중력과 지속력도 타고난 사람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달린다. 나는 이 점이 인상 깊었다. 매일 달리면서 집중력과 지속력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것이다. 후천적인 이 두 능력은 게으름이 잦아들면 금세 퇴화해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지독한 성실함. 그 고집.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자에게 바칠 것은 존경 밖에 없으리라.
이제 세 달째 달리는 초보 러너인 나는 수십 년간 매일 달려온 하루키의 코딱지만큼도 못하겠지만, 나는 감히 그를 나의 선배라고 스승이라고 여길 생각이다. 읽고 쓰고 달리는 자로서 말이다.
#문학사상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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