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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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소설, 한 편의 수업


문지혁 저, '중급 한국어'를 읽고


'초급 한국어'와는 달리 '중급 한국어'의 공간적 배경은 미국이 아닌 한국이다. 주된 시간적 배경은 저자의 분신이자 동명의 작품 속 화자인 문지혁 작가가 귀국하고 8년이 지난 후, 여전히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19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2021년 3월부터 강원도에 위치한 어느 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던 한 학기 동안이다. 이번에도 한 학기 밖에 가르치지 못한 신세가 된 화자의 등단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작가로서의 자조적인 뉘앙스는 ‘초급 한국어’에 이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뉴욕에서와는 달리 이젠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는 화자는 삶의 다른 부분에서의 의미와 행복을 찾은 듯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초급 한국어’에서보다 ‘중급 한국어’에서 나는 화자로부터 조금 더 인간다운 면모를 읽어낼 수 있었고, 작가를 넘어 남편이자 아빠로서도 공감할 수 있었다. 비록 내가 저자의 작품에 본능적으로 끌렸던 이방인으로서의 이질감은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초급 한국어'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설정 때문에 '중급 한국어'는 과연 누구를 대상으로 수업을 할지 궁금했다. 예전과는 달리 한국에 많이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대상일 거라는 나의 일차적인 예상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이번에도 한국어 수업일 거라고 예상했던 것도 내가 '중급'이라는 단어를 과소평가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제목을 다시 보니 '한국어 수업'이 아닌 '한국어'이지 않은가. 아차 싶었다. '초급 한국어'가 미국에서 외국인에게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업이었다면, '중급 한국어'는 한국에서 한국인에게 한국어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그리고 한국어의 모음이나 자음, 기초적인 문법과 어법, 상황별 예시 문장 연습 등을 가르치는 것이 초급에서 다뤄졌다면, 이미 그런 것들을 모국어로써 당연히 할 줄 아는 이들에게 입으로 내뱉는 한국어가 아닌 글로 쓰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게 중급에서 다뤄지고 있었다. 내 생각은 확장되어, 그렇다면 '고급 한국어'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만약 있다면 아마도 그건 말해지지 않은 말들과 써지지 않은 글들을 말하고 쓸 줄 알고, 또 듣고 읽어낼 줄 아는 법을 배우는 수업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영어와는 달리 한국어는, 아니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나라가 아닌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발화되지 않고 쓰이지 않은 언어들이 더 중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 


강원도에서 한 학기 동안 글쓰기 수업을 하는 한 학기 동안 화자는 일주일에 한 번 서울에서 강원도로 차를 몰고 내리 두 강의를 하고 당일치기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을 소화한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말만 들으면 여유롭다고 할 수 있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나머지 6일에 수업이 없는 일정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날 예기치 못한 사건이라도 터진다면 머피의 법칙을 거뜬히 초월하여 모든 것이 엉망으로 무너지고 마는 날이 되기 십상이다. 소설은 이런 극적인 상황을 자연스럽게 연출해 내고 그로부터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며 독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게 되는데, 이런 패턴은 ‘중급 한국어’에서도 적절하게 다뤄진다. 아이가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아내가 코로나에 걸리기도 하는 등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건들이 화자에게도 발생한다. 어디 이것뿐인가. 미국 유학까지 했고 귀국 후 8년간 (아니 그 이상) 끊임없이 등단을 위해 애를 썼지만 매번 실패로 끝나고 마는 삶을 살아온 화자에게는 단 한 번의 작은 사건이 갖는 무게는 상대적으로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우울하고 한 편으론 무겁기도 한 공감대만이 아니라 가슴 따스해지는 에피소드와 소소한 일상 가운데 아주 가끔 드러나는 에피파니의 순간들, 그리고 삶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는 일화들도 적절히 배치하여 가독성을 끌어올린다. 무엇보다 문지혁 작가의 문체가 정갈하여 쓰이지 않은 여백까지도 무언가로 채우는 듯한 기분으로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이 장편소설을 완독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작가이자 글쓰기 선생답게 저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일상들을 씨줄과 날줄로 자연스럽게 잇기도 하고 시제와 인칭 등을 다채롭게 사용하며 작품성 높은 소설이 어떤 것인지 말없이 보여준다. 내겐 이 책 자체가 하나의 수업으로 읽혔다.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 디테일한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한 수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모든 이에게 이 책은 읽어볼 만한 소설이겠지만, 특히 소설 지망생 혹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적어도 세 작품 이상을 정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문지혁 작가의 책은 벌써 다섯 권째다. 그의 문체에 익숙해졌고 더 좋아졌다. 행간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이제 몇 주 전에 사놓은 ‘나이트 트레인’이 남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야간열차가 영어로 나이트 트레인 아니던가. 어떤 작품일지 기대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문지혁 읽기

1.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

2. 고잉 홈: https://rtmodel.tistory.com/2046

3. 당신이 준 것: https://rtmodel.tistory.com/2112

4. 초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4

5. 중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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