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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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상실, 기억을 덮는 사랑

폴 오스터 저, ‘바움가트너’를 읽고

죽음, 상실, 그리고 기억. 이 책이 내게 남긴 세 단어다. 커다란 상실을 겪은 후 암 투병으로 홀로 죽음을 앞두고 있던 폴 오스터가 남긴 마지막 단어들, 혹은 인간이라는 필멸의 존재자에게 던져진 보편적인 단어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누구나 이 세 단어를 떠올릴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인생을 절반 이상 살아버린 사람들은 이성을 뛰어넘어 가슴으로 곧바로 전해지는 묵직한 그 무엇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은 바움가트너가, 환지통을 겪을 만큼 큰 상실을 겪은 바움가트너가, 폴 오스터의 분신이기도 한 바움가트너가 조용히 읊조리고 가만히 되뇌는 인생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근사해 보인 적이 있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러다 마흔을 넘긴 어느 날, 절반의 물이 컵 꼭대기보다 바닥에 가까워 보였다. 나이 들어간다는 말보다 늙어간다는 말이, 오래 살았다는 말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내가 상관하지 않을 수 없는 말로, 때로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들리기 시작했다. 두려웠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모든 필멸의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론적 불안의 근원, 죽음이 성큼 나의 조그만 레이더망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날이 늘어나면서 죽음이 늘 내 주위에 맴돈다는 사실에 나는 익숙해져야 했다. 나이 든다는 건 죽음에 익숙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과거의 흩어진 기억들이 지금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불쑥불쑥 나를 급습하곤 한다. 죽음에 가까울수록, 상실이 깊어질수록 기억하는 시간도 많아지는 듯하다. 집착일까, 애착일까. 둘을 구분할 수는 있는 걸까. 죽음과 상실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혹은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의 것이어도, 아니 오히려 그런 죽음과 상실일수록 더욱더 그 효과는 증폭되는 것 같았다. 그럴 때의 기억은 나의 기억만이 아닌 우리의 기억으로 확장되기 때문이었다. 바움가트너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인생은 아내의 죽음 전후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아내를 잃은 이후 그는 반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반은 죽어있는 채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기억은 아내와의 기억이었다. 

기억은 이상하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통째로 기억에서 자주 사라지는 반면, 시시콜콜하고 별거 아닌 것들은 공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어떤 것은 초단위로도 기억된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체도, 기억하는 주체도 모두 나인데, 왜 이 두 주체는 내 안에서도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바움가트너를 관통하는 기억은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아내가 죽고 그는 아내가 자신의 일부였음을 체감하게 된다. 팔다리를 잃은 사람이 여전히 잃어버린 그 부위의 고통을 느끼듯 바움가트너는 아내의 상실로 인해 환지통을 겪는다. 환지통!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피부에 와닿도록 절절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나는 그런 바움가트너를 보고 그가 아내를 진정으로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려자와의 이별은 피할 수 없다. 누가 세상을 먼저 떠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죽음보다 이별이야말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고통이지 않을까. 아내가 죽은 지 십 년이 지난 작품 속 현재, 바움가트너의 일상은 평범한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잘한 많은 것들에도 요동한다. 무엇 하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마치 원래 붙어있던 팔다리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그는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고, 세상에서 가장 큰 상실을 겪은 자로서 과거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피할 수 없고 제거할 수 없는, 뼈에 새겨진 각인이다. 

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숙고할 수 있었다. 바움가트너의 아내 애나는 많은 글을 남겼다. 그 글의 세상 속에서 바움가트너는 아내를 이미지 없는 이미지로 기억한다. 그리고 함께한다. 그녀의 옷가지들을 끝내 다 치워버려도 글만은 그러지 못한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글은 그녀가 남긴 그 무엇이 아니라 그녀의 한 부분이었을 테니까.

이제 이 책이 남긴 세 단어는 내 안에서 한 단어로 압축된다.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작품 내내 죽음과 상실과 기억이 혼재되어 숭고함이 느껴질 정도로 차분한 마음이 되었지만,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이 되니 모든 게 사랑이라는 단어로 채색되는 것 같다. 그렇다. 폴 오스터는 그의 유작이 되어버린 ‘바움가트너’라는 글로 우리들에게 죽음도 상실도 기억도 아닌 사랑을 남긴 것이다.

언젠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나는 글을 쓰고 있길 바랐다. 그러나 그 글이 무엇을 말하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내 글도 나지막이 사랑을 노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죽음, 상실, 기억을 덮고도 남는 사랑을.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폴 오스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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