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꽃의 이면


프랑수아즈 사강 저, '패배의 신호'를 읽고


양은냄비처럼 쉬이 뜨거워지는 사랑, 한동안 꺼질 줄 모르는 굶주린 호기심,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환상과도 같은 착각. 풋풋하고 솔직한 젊음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제목은 '패배의 신호'다. 승리처럼 보이는 젊음에 대한 찬사만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 안 된다는 저자의 암묵적인 메시지일까. 내게 이 제목은 불꽃같은 젊은 사랑의 이면을 함축하는 표현으로 읽혔다. 이상보다 현실을 보는 저자의 시선도 느껴졌다. 그렇다면 패배란 어떤 패배였을까. 한 계절에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사그라드는 사랑의 종국을 말하는 건 아니었을까. 루실의 처음과 마지막 위치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루실과 앙투안의 첫 만남부터 불꽃이 튀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봄에 시작해서 여름에 절정을 이루고 가을에 소멸했다. 샤를 곁에 잡히지 않는 공기처럼 있던 루실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어떤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결혼을 하면 아내와 남편의 역할이 있고, 아이를 낳으면 엄마와 아빠의 역할이 있다. 서로의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역할도 부여된다. 사랑은 공중에 붕 떠서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체이고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루실을 바라보면, 루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에 소유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어찌 보면 자유로운 영혼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또 어찌 보면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게 기생하는 인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가 가슴에 가지고 있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열정이었을까? 아니면, 공허함 혹은 허무함이었을까? 루실과 결국 결혼하게 되는 샤를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루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루실을 향한 배려와 존중과 사랑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모두 현실세계에서의 어떤 역할을 모두 배제시켜야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것들은 모두 돈이 없으면 유지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루실이라는 인물이 과연 실재하는 인물이었나 하는 의심마저 들기도 할 정도다. 사회부적응자 같은 이미지도 겹쳐지면서 말이다. 어쩌면 저자 사강은 의도적으로 현실에서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사랑을 그려내보이면서 인간의 어떤 감정과 심리를 파헤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물론 문화적으로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경솔하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 소설은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미세한 감정의 탄생과 발전과 소멸을 섬세한 문장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톡톡 튀는 천재 작가 이미지의 문체 때문인지 남성이 아닌 여성의 시선으로 감정을 포착했기 때문인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느꼈지만, 사람 심리를 그려내는 기술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화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도스토옙스키보다도 사람의 본성을 깊숙이 통찰한 것 같기도 했고, 인간의 다채롭고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보기 드문 기술을 구사하는 작가로 보였다.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 녹색광선 읽기

1. 감정의 혼란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결혼, 여름 (by 알베르 카뮈): https://rtmodel.tistory.com/1646

3. 미지의 걸작 (by 오노레 드 발자크): https://rtmodel.tistory.com/1650

4. 눈보라 (by 알렉산드르 푸시킨): https://rtmodel.tistory.com/1682

5. 보통 이하의 것들 (by 조르주 페렉): https://rtmodel.tistory.com/1735

6. 낯선 여인의 키스 (by 안톤 체호프): https://rtmodel.tistory.com/2034

7. 패배의 신호 (by 프랑수아즈 사강): https://rtmodel.tistory.com/20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