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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ㅣ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평점 :
디스토피아적 허구가 담고 있는 진실
마거릿 애트우드 저, ‘시녀 이야기’를 읽고
페미니즘과 디스토피아가 절묘하게 만난 수작, ‘시녀 이야기’.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를 처음으로 만난다. 거장의 필체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간결한 문장은 기본인 데다 풍성한 상상력, 깊은 통찰에서 우러나와 이성과 감성을 모두 깨우는 묵직한 음성, 그리고 티 나지 않고 날카로운 뼈를 감춘 채 정확히 급소를 찌르는 절제미까지. 압도적인 서사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그리 특별하지 않는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서 고수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단 한 권만 읽었을 뿐인데, 저자 이름이 가려진 숱한 글 속에서 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실로 놀라운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성과 별개로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한두 차례 그만둘까 생각도 했었다. 저자 특유의 절제된 문장으로 표현되는 여성들의 비참함 때문에 그랬고, 비록 허구이지만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 그리고 전체주의 사회의 뿌리 깊은 폭력과 거짓 영성 때문에도 그랬다. 남성이자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이 작품을 읽고 나처럼 불편해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싶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된 이 작품은 ‘길리어드’라는, 쿠데타로 세워진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시녀’로 살아가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한 여성의 기록으로 읽히게 되어 있다 (시녀는 씨받이로 생각하면 된다). 작가의 탁월한 설계다. 작품 끝에 놓인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에 의하면 작품의 현재는 21세기 말이다. 본문에 해당하는 한 여성의 기록은 한낱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실제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는 과거 문헌인 셈이다. 물론 이 ‘역사적 주해’ 역시 소설의 일부이기에 모든 게 허구이지만, 저자는 일부러 이런 액자식 구성을 십분 활용하여 본문에 허구적 역사성을 부여하는 등 작품의 비중을 한층 높이는 효과를 톡톡히 해내고 있다. ‘시녀 이야기’ 본문만 읽고 작품을 다 읽었다고 생각한 독자들은 아마도 책 뒤에 부록처럼 붙은 ‘역사적 주해’를 접하고는 ‘의외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이 작품은 그저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 정도에 머물지 않고, ‘안네의 일기’처럼 한 역사적 인물의 실제 수기인 것 같다는 인상까지 받게 될 것이다. 허구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부록 같은 내용이 500 페이지의 긴 본문이 가진 뉘앙스와 가치를 배가시키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마거릿 애트우드라는 거장의 재간이랄까 솜씨를 충분히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기 중반 무렵, 시대는 잦은 전쟁과 극에 다른 환경파괴 등으로 종말에 이른다. 이런 혼돈으로 생겨난 균열을 이용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체주의 국가가 바로 ‘길리어드’이다. 길리어드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묘사된다. 하나는 가부장제, 다른 하나는 근본주의 기독교. 조금 더 작품 속 상황을 잘 표현하려면 두 단어 앞에 ‘극단적인’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한다.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두 단어만으로도 길리어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길리어드는 여성에게서 거의 모든 권리를 빼앗았다. 여성은 소나 말, 혹은 노예, 혹은 쓰다 가차 없이 버릴 소모품처럼 남성들이 세운 체제에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살아가거나, 사람에게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이성과 감성을 거세한 채 한낱 아이나 낳는 기계 따위로 취급된다. 저항하거나 거역하면 곧바로 처벌이나 처형이 가해지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면 체제에 순응해야만 한다. 사람답게 사는 것과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것의,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차이를 철학, 신학적으로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하는 체제를 만든 구조적인 악의 존재와 그 타개를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겠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의 극을 실현한 국가답게 길리어드는 다른 종교는 물론 다른 교단이나 교파까지 모두 교화해야 할 대상이나 적으로 간주하고 관리한다. 폭력과 압제로 기독교 정신을 지킨다니, 허구가 지나쳐도 너무 치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단순히 이런 생각을 내칠 수만도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처한 기독교의 현실이 길리어드의 그것과 비교해서 정도만 다를 뿐 본질은 비슷하다는 슬픈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폭력을 가장 잘 길들이는 방법 중 하나가 종교다. 이때 종교는 곧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되고 만다. 궁극적으로 개인이나 어떤 특정한 집단의 사익을 위해 이용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종교라는 옷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폭력이 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안녕과 평안만을 고려할 게 아니라 그 개인과 집단이 속한 더 큰 사회구조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소외된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와 같은 사회 약자층에 언제나 눈을 돌려야 한다. 내가 사탄이라도 개인을 일일이 건드리기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물인 국가나 사회를, 그리고 그 국가나 사회를 잡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그들에게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어떤 정신 (이를테면 자본주의 정신)을 건드릴 것이고, 여성으로 대표되는 약자층은 언제나 짓밟아도 되는 것처럼 사회 분위기를 조장할 것이다. 그게 모든 자를 타락시키고 망하게 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비록 시녀로 살다가 탈출한 한 여성의 수기로 읽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독자들은 비단 여성의 인권 정도에 머물지 말고 사회 모든 약자층까지 확장하여 이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군데군데 드러나는 간접적인 증거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길리어드는 미국을 지칭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작품이 쓰인 해가 1985년이니 당시 미국은 공화당 소속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임을 시작했던 시기다. 예상컨대 마거릿 애트우드는 레이건 대통령의 초임 정권 하에서 길리어드를 본 것 같다.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가 판을 치며 파국을 맞이할 미국의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예언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설이기 때문에 그녀의 예상의 정확도를 따질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이지만, 미국의 지성인 중 하나였던 마거릿 애트우드의 눈에는 미국이 길리어드로 발전할 조짐이 분명히 있었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 그런 일이 아직까진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았지만, 트럼프 정권의 끔찍했던 지난 5년을 떠올려볼 때 여전히 미국은 그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인문학자들이나 철학자들, 혹은 신학자들이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고찰하는 서적들이 출판계에서는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이 분석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안하는 책들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의 단점은 주로 난해하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인내력이나 집중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혹은 그런 분야를 읽어온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라면 책 한 권조차 끝까지 읽어내기 어렵다. 이에 반하여 ‘시녀 이야기’와 같은 소설은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 어렵지 않게 읽힐 수 있으며 자연스레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철학자와 신학자의 자아를 깨우는 역할을 해낸다. 문학이 가진 고유의 힘인 것이다.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의 조합이 어떤 일을 해내는지 궁금하다면 나는 이 작품을 망설임 없이 권한다.
참고로,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인 ‘증언들’이라는 작품이 2019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34년이란 긴 시간이 두 작품 사이에 끼어 있으니 후속작이 나온 시기 치고는 조금 생뚱맞은 감도 없진 않다. 그러나 2019년이 공화당 소속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시절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증언들’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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