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유령들'을 읽고


난해하다거나 심오하다고 말하기에는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대중성을 폄훼하는 듯한 뉘앙스라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르이고, 그게 소설의 최대 장점인 줄 안다. 그러나 그 상상력이 한낱 꿈의 조각처럼 파편적이거나, 두서없는 망상으로 표현된다면, 적어도 나는 읽어야 할 것들이 언제나 밀려 있는 평소의 상황에서 그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기발함이나 재치 위주의 말초적인 자극이나 충격을 주려는 목적으로 써진 현대 소설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써내려가면서, 아무나 알 수 있지만 누구나 깨닫지 못하는 일상 속에 빛바랜 진리를 재발견하고 재해석해 주는 소설 (주로 고전문학)을 나는 사랑한다.  


소설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시공간을 창출해 내기도 하는데, 이게 가능해지는 이유는 개연성 때문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엔 이해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사실 (팩트)이라고 부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인생은 이해할 수 없어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은 다르다. 이상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이 현실적이 되려면 진짜 현실과 같아선 안 된다.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은 개연성을 갖춰야만 한다. 추리소설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흩어졌던 파편들이 마치 퍼즐처럼 맞춰져 앞뒤가 마침내 맞아떨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로 변모하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추리소설 독자들은 기대하고 고대한다. 누군가가 죽었는데, 단지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미해결 사건을 조사하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조명하는 소설이라면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조차도 등장인물들 사이의 연관성, 그들의 과거, 현재 경험과의 연결성이 미흡하면 완성도 측면에서 그 소설은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사건에 주목하든, 인물에 주목하든, 개연성은 소설의 완성도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뉴욕 3부작’ 중 두 번째 단편소설 ‘유령들’을 읽고 쓰는 이 감상문 제목을 ‘다시,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이라고 정한 이유는 첫 번째 작품 ‘유리의 도시’와 비슷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우선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주요 인물이 탐정 역할을 한다는 점이 닮았다 (‘유리의 도시’에서는 오스터가 된 퀸, ‘유령들’에서는 블루). 그는 의뢰인으로부터 부탁받은 어떤 한 사람을 미행하게 되는데 (‘유리의 도시’에서는 스틸먼, ‘유령들’에서는 블랙), 두 작품 모두 미행당하는 사람이 딱히 위험하거나 특별한 일을 벌이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혹은 블루가 도저히 이렇게 사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할 만큼, 소소한 일상을 영위한다는 점도 두 작품 모두 비슷하다. 


여기엔 작가 폴 오스터의 의도가 있다는 생각이다. 미행하는 사람은 의뢰인의 말만 믿고 삶 전체를 의뢰받은 일에 올인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그래서 자기 내면으로 계속해서 침잠하게 될 정도로, 내면의 혼란을 겪으면서 의뢰받은 일의 의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까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다 (그런 과정 중에 독자들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두 주인공은 의뢰받은 일의 지극히 단순함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혼선을 빚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작품 모두 탐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여느 추리소설과는 달리 사건의 해결이나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은 그저 주인공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는 점,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철학적이라 할 만한, 인간 보편적인 질문들에 독자를 초대한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하겠다. 


작품 끝에서 탐정 블루는 사건을 의뢰했던 화이트라는 남자가 자신이 미행했던 블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의 최대 반전일지도 모른다). 화이트와 블랙은 동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즉, 화이트는 블루가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미행하길 원했던 것이다. 게다가 블루는 불시에 블랙의 집으로 찾아가 블랙이 써놓은 종이들을 집으로 가지고 와 다 읽어보는데, 그것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미행하는 내용이었다. 화이트이기도 한 블랙은 블루에게 자기 자신을 감시하길 의뢰해 놓고 그 자신도 블루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 기묘한 상황이란! 


여기서 독자들은 궁금해진다. 왜 화이트는 그런 일을 요구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저자는 시원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것을 생각하는 건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충격과 함께 저자가 선물하는 열린 결말이라 할 수 있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개연성이 부족하여 독자들을 미궁에 빠뜨린 채 유유히 도망가는 저자의 무책임한 결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묘하게 철학적이고 인간 보편적인 무엇인가를 건드려 섣불리 무책임하다고 불평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소설을 조금 써보기도 하고 많이 읽어본 눈으로 볼 때, 과연 이 모든 게 작가인 폴 오스터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닐 것이다’라는 쪽에 나는 한 표를 던져본다. 글을 (여기선 소설을) 쓰다 보면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난감해질 때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무언의 압박 속에서 재치를 발휘하여 이런 결말을 선택한 게 아닌가 싶다. 즉 초기 계획에 없는, 나중에 글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니 선택하게 된 하나의 길, 어쩌면 최선의 길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거나 이 결말은 독자들을 생각에 깊이 잠기게 만든다. 소설을 읽어 보면 이 작품이 환상 소설인가 싶은 구석도 보이는데, 특히 감시 및 미행하는 블루와 그것을 의뢰했던 화이트, 그리고 결국 화이트 자신이었던, 블루에게 감시 및 미행의 대상이었던 블랙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묘한 기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감시하는 사람이 감시를 당하고, 감시를 당하는 사람이 감시를 요구했던 사람이며, 감시를 요구했던 사람도 감시를 실행했던 사람을 감시하게 되는 이 상황. 작품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아마도 나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은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 것인지, 자신이 타자를 감시하는 것인지, 혹시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감시하고 있던 건 아닌지, 혹은 이 작품의 제목처럼 모두가 유령들이었던 건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철학적으로도 내가 존재하기 위해선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나로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와 타자가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만한 주제이긴 하다고 본다. 


이제 ‘뉴욕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잠겨 있는 방’이 남았다. 폴 오스터를 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제 조금 감을 잡을 수 있는 것 같다. 조만간 읽고 다시 감상문을 남겨 보도록 하겠다.


*폴 오스터 읽기

1.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 https://rtmodel.tistory.com/1788

2.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https://rtmodel.tistory.com/1791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