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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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창백한 마음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 저, ‘창백한 말’을 읽고

첫 페이지만을 읽고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어느 정도 읽어본 시람에게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나는 이를 감히 축복이라 부른다. 운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오래토록 옆에 두고 자주 펼쳐보며 참조해야 할 작품이라고 믿게 된다. 독자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말이다. 너무 많이 봐서 닳게 될 경우를 대비해, 혹시라도 절판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미리 여러 권을 소장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추천사를 쓴 정지돈 작가가 인생 소설이라 하고 필사했을 정도로 이 작품을 아끼는 이유를 알 듯하다. 

처음 만난 사빈코프의 글은 혁명과 테러의 중심에 선 주인공의 일기 형식을 따르기 때문인지 무거웠다. 그의 글은 고독하고 외롭기도 했다. 이는 주인공이 이끄는 테러의 성격을 대변한다는 생각이다. 리더 위치에 서 있는 주인공 조지를 포함하여 총 다섯 명의 동료들만이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목숨을 걸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은 고독하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비장하기까지 하다. 소설이 끝날 즈음에는 다섯 중 셋은 목숨을 잃는다. 글이 고독하고 외롭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의 성격 탓일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일기이기 때문에 객관적 서술보다는 주관적 서술과 내면의 독백이 주를 이루는데, 모든 페이지에 나타나는 화자의 내면은 한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고통스러울 때 소리 하나 지르지 않을 정도로 화자는 일반적인 감정 수준을 이미 초월한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살인을 왜 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하는 여러 복잡한 내면의 갈등마저도 그는 이미 초탈한 듯했다. 이미 그에게 테러는 어쨌거나 실행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를 따르는 동료 넷의 목숨을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호함도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을 죽인 후 달라진다.

총독을 암살하는 계획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조지는 기쁘지 않다. 그의 삶은 한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다른 타겟을 위해 암살을 계획하고 대의로 포장한 채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삶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했던 것일까. 목표 달성 후에 느껴지는 한없는 공허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총독 암살은 대의로 포장할 수 있다. 테러라는 말조차 반대편에서는 혁명의 씨앗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고자, 즉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살인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총독 암살이 성공리에 끝나고 작품 속 화자 조지는 연모하는 옐레나의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이고 만다. 이유는 간단했다. 옐레나를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살인 후 조지는 괴리감에 괴로워한다. 총독 암살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괴로워하진 않았다. 그는 사랑을 얻기 위해 살인을 했지만, 그 사람만을 죽인 게 아니라 사랑도 죽였던 것이다. 

책의 말미에 가서 그는 고백한다. 더 이상의 테러를 원하지 않는다고. 사랑도 필요 없고 나는 혼자라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마지막 일기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별이 빛나기 시작하고 가을밤이 오면 나는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다. 나의 권총은 나와 함께 있다.”

대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적인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똑같이 살인을 행한 조지. 그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나아가,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작품 마지막 문장으로 미루어 보아 조지는 아마도 가을밤에 홀연히 권총으로 자살을 실행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의든 소의든 살인을 행하고 난 뒤 그는 결국 모든 걸 잃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명마저 스스로 끊어야 할 만큼. 비록 살인자이지만 나는 조지에게 연민을 느낀다.

한 편의 소설이 남기는 흔적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가을밤마다 혹시 그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행여나 내게 깃들지 않길 나는 바라게 된다. 하늘도 창백하고 내 마음도 창백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빛소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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