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과 망각의 힘 그리고 신비


가즈오 이시구로 저, ‘파묻힌 거인’을 읽고

기억을 잃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특히 노화, 질병, 사고로 인한 망각은 인생의 무거운 추가 되어 당사자뿐 아니라 그 가족, 친지들을 말 없는 무게로 짓누른다. 개인의 망각은 비단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작게는 가족 문제로, 크게는 사회적인 문제로 확장될 여지를 가진다. 한 사람의 망각은 여러 사람의 슬픔을 동반하는 것이다.

망각이 언제나 부정적인 건 아니다. 사실 우린 망각을 일상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경험하기에 그나마 지금과 같은 Norm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뇌는 사고의 중추를 담당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몸을 보호하는 일이다. 그 필요 (혹은 생존 본능)에 따라 우리 뇌는 기억을 조작하기도 삭제하기도 한다. 이런 작용들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우리 몸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우린 미처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우린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 중 도대체 얼마만큼을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상상해보라. 모든 걸 다 기억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린 알고 보면 무의식적 망각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우린 모두가 기억하고 또 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망각의 힘을 어떤 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악이용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 집단이나 국가가 강제적으로 삭제, 왜곡한 역사는 이러한 사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목적은 단 하나다. 세탁. 역사는 사실의 나열이 아닌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악과 불의를 동원하여 승리를 거머쥔 자들의 영웅담이 역사로 둔갑하는 순간, 무고한 후대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유린당하게 된다. 그 악한 승자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애써 진실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달해야 할 이유다. 이때 기억은 약자들의 강력한 저항이 된다. 

가즈오 이시구로 전작 읽기는 이제 끝이 보인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헤세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다작을 한 작가가 아니라서 전작 읽기를 가장 늦게 시작했으나 가장 빨리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2015년에 출간된 이 작품 ‘파묻힌 거인’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나를 보내지 마’ 이후 10년 만에 낸 장편소설이다. 황혼을 노래하는 그의 3부작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은 나를 강렬하게 매혹시켰고, 나는 그의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는 이 3부작 이외에 총 5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했고, 내가 아끼느라 아직 읽지 않고 있는 ‘녹턴’이라는 제목의 단편집 하나도 출간했다. 첫 작품이 1982년에 출간되었으니 올해로 정확히 40년이 지난 셈인데, 전작이 9권밖에 없는 조촐한 작가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고, 그만큼 한 작품의 밀도가 높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 작품 ‘파묻힌 거인’은 내가 읽은 그의 마지막 장편이 되었다.

‘파묻힌 거인’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기억과 망각의 이야기다. 하지만 치매나 사고로 인한 기억상실증 같은 애처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벌이는 의도적인 망각, 그리고 그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행위에 목숨 걸고 저항하여 다시 찾아내려는 기억, 이 둘 간의 대립이 자아내는 이야기다. 여기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소설가답게 이처럼 사회적인 논쟁거리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주제에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의 옷을 입힌다. 용이 나오고, 도깨비가 등장하며, 기사 (무려 아서 왕의 조카!)가 여전히 살아있는 데다, 이동 수단은 걷고 말 타는 정도밖에 없고 총이 아닌 칼로 싸우는 시대가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단편집 하나 빼고 다 읽은 독자로서 이 작품은 나에게 독특한 느낌을 선사해주었다. 여전히 내가 반했던 그의 문체는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너무나도 색다른 스타일의 글쓰기 앞에서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심리 상태와 진행을 기가 막히게 잘 묘사하고 그것을 서사로 사용하는 그의 기술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판타지 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에겐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브리튼 족과 색슨 족의 대립이 발생했던 과거, 브리튼 족 출신이자 위대한 왕이었던 아서 왕은 색슨 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그는 색슨 족이 미래에 저지를 수도 있는 복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멀린에게 주술을 이용하여 모든 사람의 기억을 제거한다. 주술의 매개체는 용이었다. 용이 살아있는 한 그 주술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아서 왕의 후손들은 용의 수호자가 되어 멀린의 주술을 계속 유지하도록 힘쓴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인 가웨인 경 (아서 왕의 조카이자 기사) 역시 사람들을 속인 채 용을 보호하는 비밀 임무를 노쇠할 때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과거에 떠났던 아들을 만나려고 마을을 떠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의아해했다. 여러 경로로 그들은 용이 뿜는 안개가 바로 그 원인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아들을 만나러 가는 목적과 더불어 다시 기억을 되찾고 싶은 목적도 가지게 된다. 그러려면 용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노부부는 가는 길에 만난 전사 위스턴과 용에게 물린 자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며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한 소년 에드윈과 동행하게 된다. 주요 인물은 그러므로 노부부, 기사, 전사, 소년, 이렇게 총 다섯 명인 셈이다. 그들은 중간중간 헤어졌다 만났다 하면서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용의 은신처 앞에서 만나게 되는데, 비밀리에 용을 보호하고 있던 가웨인 경 (브리튼 족)과 용을 죽이라는 왕의 임무를 부여받고 온 전사 (색슨 족) 사이에 결투가 벌어진다. 결국 가웨인 경과 용은 위스턴에게 죽게 되고 안개가 사라지며 사람들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파묻힌 거인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는 색슨 족의 복수가 시작되는 비극적인 시작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는 무거운 의미를 지니긴 하지만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고 눈여겨봐야 할 부분, 혹은 잠시 멈추게 되고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부분은 이러한 이야기에 있지 않다. 적어도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노부부의 우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시 기억을 되찾게 되면, 그때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될까, 하는 질문 앞에서 나는 뒤통수를 한 방 먹은 것처럼 먹먹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다. 용이 내뿜은 안개로 인한 망각은 좋은 기억만 제거한 게 아니라 기억하지 말아야 할 기억도 제거했다. 그 망각은 선택적 망각이 아닌 무작위적 망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액슬이 비어트리스에게 부탁하던 말이 내겐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다음과 같다.

“케리그 (용의 이름)가 죽고 이 안개가 사라지게 되면 말이오. 그래서 기억들이 돌아오고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던 기억들도 생각나면 말이오. 혹은 한때 내가 저질렀던 어두운 소행들이 기억나서, 당신이 날 다시 보게 되고,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오. 이것만은 약속해줘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요." (383페이지에서 부분 발췌)

뿐만 아니다. 노부부가 고향을 떠나기 전 비어트리스가 만났던 한 여자가 해준 말도 기억에 남는다. 다음과 같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조금밖에 무섭지 않았어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여자는 이 땅에 망각의 안개가 덮여 저주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그건 우리 두 사람도 종종 말하던 거잖아요. 그때 그 여자가 내게 물었어요.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그 후로 나는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을 할 때면 너무 겁이 날 때가 있어요.” (71페이지에서 부분 발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과연 이런 관계들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말과 행동이 맺은 열매인 걸까? 혹시 어떤 중요한 망각으로 인한 열매는 아닐까? 파묻힌 거인이 깨어나듯 잊혔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면 과연 우린 이런 관계들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기억뿐만이 아닌 자연스러운 망각에서 나는 신비를 발견한다. 다만, 잊어야 할 것은 잊고,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길 바랄 뿐이다.

#시공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33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7.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8074846530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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