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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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이 아닌 밝은 밤

최은영 저, ‘밝은 밤’을 읽고

서양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며, 한국어로 소설 쓰길 갈망하고 또 실제로 준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 현대 소설의 지형과 흐름을 대략적이라도 파악하는 일은 꼭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 작업을 2년째 틈나는 대로 해오고 있다. 그래 봤자 지금처럼 여러 가지가 제한된 환경에서는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 몇 개씩 읽어나가는 일에 불과하지만, 그런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낼 때마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주제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항상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남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고전을 좋아하고 그 깊은 맛을 사랑하는 내 취향 때문이리라, 하고 추측할 뿐이다.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 나의 또 다른 취향 역시 그 시작이 무엇인지 언제부터인지 묘연하다. 아마도 번뜩이는 기발함과 빠른 속도보다는 뻔함 속에서 느리게 심오함을 이끌어내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알아채지 못하는 진리를 상기시키며,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특정한 서사를 통해 드러내어 넌지시 깊은 곳을 짚어내는 건 오로지 장편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최은영의 최신작 ‘밝은 밤’을 고른 이유 역시 이런 나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전의 반열에 올릴 정도의 무게는 아쉽게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처음 만난 최은영 작가의 스토리텔링과 필체는 다시 읽고 싶어질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일상에 녹아든 잔잔한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편안한 톤으로 3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작년에 이 작품이 큰 상을 받았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배경으로 묵직한 주제까지도 건드리고 있었고, 시대를 뛰어넘어 21세기 현재 우리들의 공감까지 이끌어낸다. 이를테면,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제강점기에서 6.25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을 다루는 동시에, 무려 4대 (증조할머니까지)를 넘나드는 두 가족 여성들의 상실과 아픔을 과하지도 않고 얄팍하지도 않게 세련된 필체로 조곤조곤 이야기해준다. 중간중간 멋진 문장들이 알알이 박혀있음도 이 작품을 챙겨봐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는 소수자의 무력함, 함부로 표출할 수 없이 속으로 묵혀야만 했던 그들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참고 견디며 살아낸 눈물 젖은 수많은 나날들이 여성의 시선에 무게중심을 두고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성 독자임에도 나는 그 시선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며, 시대적 한과 고질적인 인식론적 제도적 폭력의 힘을 재고해볼 수 있었다.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화자 지연 역시 여성이자 이혼녀이자 우울증 환자로서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일종의 미안함도 느꼈다. 그리고 전체 내용이 정적이고 우울한 편에 속하지만 그 분위기에 억눌리지 않고 삶을 개척해나가고 극복해나가는 등장인물들을 가슴 깊이 응원했다. 슬프지만 감싸지는 슬픔, 상처이지만 치유되는 상처, 밤이지만 어두운 밤이 아닌 밝은 밤. 제목의 의미를 알 듯하다. 상실을 바라보는 최은영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남성보다는 여성 독자들에게, 그리고 한국 역사를 잘 아는 한국인들에게 훨씬 더 큰 공감을 자아낼 작품이지만, 나는 남성 독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독을 권한다. 최은영 작가의 다음 작품이 장편이라면 꼭 챙겨볼 작정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0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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