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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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평범성, 그리고 진정한 겸손함

카렐 차페크 저, ‘평범한 인생’을 읽고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평범하다’는 것은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는 뜻이다. 뛰어나거나 색다르다는 것은 비상하거나 특별하다는 의미로써, 그렇게 판단하기 위해선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평범하다는 의미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이를테면, 휴대폰 사용자가 평범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건 아주 최근의 일이고 (시대 영향), 한국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건 평범하지 않아도 미국에서 사용하는 건 당연할 정도로 평범한 일이다 (문화 영향). 평범하다는 건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평범함은 이렇듯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정의하기 나름일까? 모든 평범함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일까?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평범함은 존재하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인생에 대해서는 이런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의미 부여가 가능한 것 같다. 평범한 인생. 그러니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평범함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인생이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른바 절대적 평범성. 묘하게도 이것이 내가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처음 만나는 작가. 카렐 차페크. 세계적으로 수많은 비범한 작가를 탄생시켰던 19세기 말에 태어나 1차 세계대전을 겪고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한 체코 출신 작가다.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낸 장본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에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중 하나다. 그는 노벨상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반파시즘 투사로 활동했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수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짧았으나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에 읽었던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탓일까.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완벽하고 신비한 세상이 아닌 우리의 사사롭고 부서지고 보잘것없는 일상, 즉 평범한 인생 가운데 거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밀하게 관찰하여 자기만의 색을 입히는 성찰을 통해 자신을 넘어서고 타자와 세상으로 나아가 모두를 관통할 수 있는 깊은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예술과 문학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 우연찮게도 나는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내겐 적시에 만난 보석 같은 작품이었다.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앞뒤 서너 페이지를 제외하면, 평범한 인생을 살다 간 한 철도 공무원의 자서전으로 읽히도록 의도된 단편소설이다. 정년퇴직한 주인공은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그는 어느 날 자서전을 쓰기로 작정한다. 평소에 주위를 잘 정돈하는 습관을 따라 모든 것을 정리하고도 더 정리할 게 없을까 하다가 자기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기에 이른다. 

“아주 평범한 삶에 대한 전기를 쓰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 항변을 한다. 평범한 삶에 대한 재고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재해석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삶은 여백, 즉 삶에서 영화를 뺀 나머지라는 생각과 맞닿아 있어 나는 꽤 흡족한 마음으로 공감하며 읽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지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그리고 그는 죽기 직전까지 펜을 들고 자기가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전체 인생을 톺아보기 시작한다. 아, 인생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정리가 또 있을까!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린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보냈던 학창 시절, 철학 전공으로 대학을 지원했으나 갑자기 그만두고 시를 쓰다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철도 공무원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던 이십 대 시절, 성실함과 총명함으로 성공적인 철도 공무원으로 거듭나고 중간에 결혼까지 성공했던 중년 시절까지, 그는 그야말로 무난히 그의 평범한 인생을 빈 종이에 적어나간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써놓은 것들이 온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내면에 있던 여러 자아들이 내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평범한 인간, 억척이, 우울증 환자, 시인, 영웅, 낭만주의자, 거지, 은밀한 사람 등의 정체성을 가진, 그와 모든 인생을 함께 해온 여러 자아들의 익숙한 존재를 재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연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었던가, 한 자아가 일목요연하게 기술하는 인생이 과연 내 인생 전부를 말하는 것일까, 하고 그는 생각하게 된다.

여러 자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은 다중인격도 정신분열도 환각도 아니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인생 전체에서 겪는 가장 평범한 일이었다.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의 자아가 공존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많은 자아들을 조상들의 흔적과 연결시키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어떤 자아는 아버지의 모습인데 반하여 또 어떤 자아는 어머니의 모습, 또 다른 어떤 자아는 할아버지의 모습, 등등. 즉 ‘나’라는 한 사람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조상들의 일부의 총합 혹은 그것들이 여러 조합으로 모인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나’에서 끝나지 않고 ‘너’로 또 ‘우리’로,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는 ‘너’와 ‘그들’로 이루어져 있고, ‘너’ 역시 ‘나’의 일부가 들어가 있으며,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의 일부를 부분적인 공유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 혼자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으며 모두가 ‘우리’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평범한 인생이고 우리 모두의 인생이자 절대적 평범성으로의 수렴인 것이다.

이율배반성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모순되고 말이 안 되는 모습들,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모습들, 일관성도 없고 즉흥적으로 마구 움직일 때가 많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습들,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은 어떤 한 사람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의 내면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일 것이다. 반면, 이렇게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자아들이 모두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 역시 간과하면 안 되겠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면 죽이지 않고 살릴 것이며 배제하지 않고 보듬으며 함께 가려고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타자를 차별, 배제, 혐오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개별자가 아니라 서로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생각을 흥미롭게 읽으며 나는 다시 나와 타자와 세상을 생각해본다. 그 관계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더욱 겸손해지려고 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평범한 인생은 겸손한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평범성은 닮은 듯 다른 우리를 인지하고 인간다움을 되찾아 나보다 남을 향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진정한 겸손함 일지도 모르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열린책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0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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